154화 가려운 부분을 긁어준다
한진영은 사람들이 의아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어떤 부분에서 아쉬워하는지도 이해했다.
바로 사업부에서 올리는 수익이 줄었을 때의 성과급 하락을 그들은 걱정하는 것이었다.
한진영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다독였다.
지금까지 이어온 믿기지 못할 성장세가 여기서 끝이 나지는 않을 거라는 말로 사람들의 아쉬움을 달래줬다.
단지, 지금은 한발 물러설 때라는 말로 그들을 설득한 것이었다.
두 발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
한진영의 주장에 사람들은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하고 하나둘 한진영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현재 진행하고 있는 모든 펀드에서 퀀트 프로그램을 하나하나 지워가는 작업을 시작하게 됐다.
한진영이 이런 결정을 한 것은 바로 사업부의 실적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사업부의 실적이 줄어든다면 신성증권의 실적 또한 줄어들 게 분명했다.
바로 사업부의 실적이 곧 신성증권의 실정이기 때문이다.
결국 한진영이 원하는 것은 신성증권의 실적을 줄이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래야 신성증권에서 더는 빼 먹을 것이 없다고 생각한 신성그룹이 모험을 할 게 분명했다.
그리고 이 모험의 결과로 신성그룹은 큰 타격을 받게 된다는 것을 한진영은 알고 있었다.
한진영이 바라는 것이 바로 지난 시절 한진영이 경험했던 그 길을 신성그룹이 가는 것이었다.
“진영아.”
회의에 참석했던 모든 사람이 퀀트 프로그램에 관련된 이야기를 나눌 때 한 사람만은 머릿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회의가 끝나고 나가려는 한진영을 잡았다.
“잠깐만.”
이성우의 부름에 한진영은 잡고 있던 회의실 손잡이를 놓고 몸을 돌렸다.
“왜?”
“잠깐만 이리 와서 앉아봐.”
이성우가 한진영의 손을 잡아끌어 빈자리에 앉히고는 그 곁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 잠시 주변을 둘러보며 회의실에 남은 사람이 없는지 확인했다.
한진영은 이성우가 왜 이러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차분한 목소리로 이성우를 진정시켰다.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돼.”
“긴장이 어떻게 안 돼?”
“지난번에도 잘했잖아.”
“그거야 그때는…… 네가 잘 설명해줬으니까.”
“이번에도 내가 잘 설명해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한진영은 편안한 모습으로 자리에 앉아 바짝 긴장한 이성우를 다독였다.
“이번만 잘하면 네 입지가 달라질 거다.”
“내 입지가 달라진다고?”
“그래. 언제까지 남의 밑에서 월급 받으면서 일할 거야? 천하의 기풍그룹의 장남이 말이야.”
“야!”
이성우는 깜짝 놀라 주변을 살폈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연스럽게 나온 반응이었다.
그만큼 지금 한진영의 말은 다른 사람이 들으면 오해하기 충분한 이야기였다.
이성우는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어디 가서 그렇게 이야기하지 마. 사람들이 오해한다.”
“왜? 뭐가 걱정이라서 그러는데? 아직도 남들이 네 정체를 아는 게 걱정돼서 그래?”
“그건 아니야. 그거야 뭐…… 대충 알만한 사람들은 아는 이야기니까 나도 대수롭지 않아.”
“그럼 뭐가 걱정인데?”
“기풍그룹. 아직 우리는 그룹사로의 전환을 노리지 않고 있어.”
“아직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될 일이야. 그리고 흐름이 그쪽으로 갈 수밖에 없어. 언제까지 기풍철강이라는 커다란 간판 아래 다 모여 있을 참이야?”
“그건…… 내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지.”
이성우도 한진영의 말에 동의하기는 했다.
하지만 동의한다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나중에 기풍철강을 물려받았을 때나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지 지금은 꿈에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아버지의 그림자가 컸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말을 하면서도 주눅이 든 이성우를 바라보고 빙그레 웃었다.
“그래. 네가 결정할 문제는 아니지. 네 아버지인 회장님께서 결정하실 문제지. 그런데 생각해본 적이 있어? 왜 회장님이 회장님으로 불리는지 말이야.”
“어? 그게 무슨 소리야?”
“네 말대로 그룹사가 아니라면 회장님이라고 불릴 이유가 없어. 그냥 사장님인 거지. 매출이 1조가 나오던 10조가 나오던 덩그러니 회사 하나만 있다면 그건 그냥 사장님일 뿐이야. 그런데 왜 회장님이라고 불릴까?”
이성우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문제였다.
어린 시절 분명 아버지는 사장님이라고 불렸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회장님이라는 명칭으로 불렸고, 그게 지금은 당연해진 분위기였다.
그저 막연하게 회사가 커져서 그런 게 아니냐고 생각했을 뿐 이 문제를 가지고 깊이 고민해본 적이 없었던 이성우였다.
하지만 한진영은 바로 이 문제가 막연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지난 시절 기풍철강의 행보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진영은 이걸 이용하여 이정훈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려 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걸 할 사람은 이성우로 정했다.
그래야 이성우의 입지가 지금까지와 다른 위치로 올라설 테니 말이다.
한진영은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성우를 향해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속에는 회장님도 그룹사로의 전환을 노리고 있다는 뜻이야. 주변 여건이 좋지 않아 계속 품고 있는 거겠지만…… 그런데 지금은 때가 무르익었어. 아마 회장님도 그걸 염두에 두고 계실 거야. 그걸 파고들어.”
“그걸 파고들라고?”
“그래. 그렇게 되면 너의 입지도 함께 올라갈 거야. 월급을 받는 신성증권의 직원이 아니라 사장으로…….”
“어?”
이성우는 한진영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를 향해 슬며시 웃으며 이성우에게 아버지인 이정훈 회장 앞에 가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차분히 설명했다.
***
기풍철강의 이정훈 회장은 볼 때마다 달라져 있는 이성우를 흡족한 얼굴로 바라봤다.
아끼는 자식일수록 밖에 내보내야 한다는 옛 어른의 말씀이 틀린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성우는 달라져 있었다.
당당해져 있었으며 생각하는 것도 명석하게 변했다.
이정훈이 그리는 아들의 모습으로 점점 이성우가 변해가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이런 이정훈의 생각과 달리 이성우는 여전히 이정훈 앞에 서면 가슴이 떨렸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인 이정훈 회장에게 주눅 들어 살아왔던 게 여전히 이성우에게 트라우마로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겉모습만큼은 그런 것들을 모두 털어낸 듯한 모습이었다.
최석영에게 트레이닝 받아 몇 번이나 지금과 같은 자리를 연습했으며, 한진영과 오랜 시간 연습하여 이정훈 앞에서 말할 것을 준비했기 때문이다.
이성우는 이정훈 앞에서만큼은 잘 포장된 아들로 변해 있었다.
“그래. 어떠냐? 집은 좀 살만하냐?”
이정훈은 듬직함이 느껴지는 이성우를 바라보고는 이사한 집에 관해 물었다.
“거기에 한진영이도 들어갔다며?”
“네. 제일 꼭대기 층으로 이사 왔어요.”
“천 회장이 마음에 들었다고 하더구나. 몇 번 만났는데 만날 때마다 그 친구 칭찬을 입에 닳도록 했어. 그러면서 자기네 회사로 데리고 오고 싶다고 하던데…… 어떠냐?”
이정훈은 이성우를 향해 웃으며 슬쩍 이야기를 던졌다.
“너하고 친한 친구 사이니 네가 한진영이를 꼬셔봐라. 그래서 우리 회사로 데리고 와봐. 그럼 우리 회사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이정훈은 농담조로 건넨 말이었다.
어차피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라는 것을 자기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성우에게서 돌아온 답변은 뜻밖의 것이었다.
“마침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왔어요.”
“그 이야기를 한다고? 무슨 이야기?”
“조금 전에 말씀하신 진영이 이야기요.”
이정훈은 이성우의 말에 크게 반응했다.
“한진영이를 영입하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왔다는 거냐?”
뜻밖의 이야기에 이정훈은 들고 있던 찻잔을 급히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이성우는 생각보다 격렬하게 반응하는 이정훈을 가만히 바라본 뒤 입을 열었다.
“진영이를 따로 영입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어요.”
“더 좋은…… 방법이 있다고?”
이성우의 말에 잠시 멈칫하던 이정훈이 몸을 급히 뒤로 물렸다.
잠시 뜻밖의 이야기에 흔들렸던 감정을 급히 추스르는 모습이었다.
이정훈은 아들인 이성우와 이야기를 하면서도 자신이 흐트러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만큼 철저했으며 이런 철저함이 기풍철강을 지금의 자리로 올려놓은 것이었다.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봐라.”
손을 들어 이성우가 말하는 것을 제지한 이정훈은 다시 한번 차분히 마음을 다스리고는 손을 가만히 내렸다.
“그러니까 지금 여기 나를 찾아온 이유가 한진영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냐?”
“으음~ 비슷해요.”
“비슷하다고? 맞으면 맞고 틀리면 틀렸다고 이야기해야지. 비슷한 거는 뭐냐?”
조금 전까지 웃고 있던 이정훈의 얼굴이 험악하게 변하려 했다.
이정훈이 익히 알고 있던 이성우의 우유부단함이 나타나려는 것처럼 보여서였다.
평소의 이성우였다면 이런 이정훈의 서슬 퍼런 모습에 잔뜩 주눅 들어 하고 싶은 말도 못 할 지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한진영, 최석영과 연습을 통해 이런 상황에서도 주눅 드는 모습을 보이지 않을 수 있게 됐다.
이성우는 오히려 눈을 부라리는 이정훈을 향해 먼저 입을 열었다.
“비슷하니 비슷하다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뭐가 비슷하다는 거냐?”
“결국 도착해서 손을 보면 아버지가 하려는 것 또한 손에 들어온 상태일 테니까요.”
“자세히 이야기해봐라.”
이정훈의 표정이 풀리기 시작했다.
사실 이정훈은 크게 웃고 싶었다.
평소라면 고개 숙여 우선 죄송하다는 말부터 꺼냈을 이성우였다.
그러나 지금은 자기 앞에서 이렇게 차분하게 주눅 드는 모습 없이 이야기를 이어가는 것이 너무나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이정훈은 표정을 풀기만 했을 뿐 웃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자칫 웃는 모습을 먼저 보였다가는 제대로 된 이야기도 하기 전에 산통이 깨질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아직은 이성우에게 자신감을 심어줄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 이정훈은 애써 표정을 진지하게 유지했다.
이정훈은 어색하게 찌푸린 얼굴로 팔짱을 낀 채 이성우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를 마쳤다.
이성우는 그런 이정훈을 향해 준비했던 이야기들을 펼쳐 보이기 시작했다.
“사실 제가 아버지를 찾아온 것은 큰 기회가 펼쳐질지 모르니 그걸 잡으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여기 온 거예요.”
“기회가 펼쳐진다고?”
“네. 그리고 이 이야기 속에 한진영의 영입도 포함될 수도 있어요.”
“포함된다고? 그게 무슨 소리지? 허튼소리를 하려거든 꺼내지도 말아라.”
“아버지. 제 이야기를 들으신다면 왜 한진영의 영입과 제 이야기가 통하는지 아시게 될 거예요.”
이정훈은 가만히 이성우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도대체 이성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제는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이성우는 입술에 침을 살짝 묻힌 뒤 입을 열었다.
“한진영을 따로 영입하기 위해서는 진영이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눠야 해요. 들어왔을 때 우리가 보장해줄 것과 진영이 쪽에서 요구하는 것 등등 골치 아픈 게 한둘이 아니죠.”
“그래서?”
“그래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그런 것 없이 바로 영입하는 길이 생겼어요.”
“협상 없이 바로 영입할 수 있다고? 어떻게?”
이정훈은 이성우가 다음에 할 말이 무엇인지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성우는 그런 이정훈을 향해 살며시 웃으며 말했다.
“한진영이 있는 신성증권을 인수하면 되는 거예요.”
“신성증권을 인수하라고?”
이정훈은 뜻밖의 이야기에 미간을 찌푸렸다.
이성우는 이정훈이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짓자 거울을 보고 수없이 연습했던 이야기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인수를 진행하다 한번 엎어졌던 사실은 잘 알고 있어요. 신성그룹과 의견이 맞지 않는다는 걸 확인했다는 것도 잘 알고요. 하지만 이번엔 달라요.”
“이번엔 다르다고?”
“네. 이번에는 확실히 다를 거예요.”
“어떻게 다르다는 거냐?”
“이번엔 신성그룹이 많이 안 좋으니까요.”
“많이…… 안 좋아?”
이정훈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눈을 찌푸렸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지?”
“제가 신성증권에 있으니까요. 신성그룹의 돈줄이 바로 신성증권이잖아요. 그리고 신성증권에서 돈을 가장 많이 버는 곳이 바로 제가 있는 사업부이고요. 그런 사업부에 돈을 계속 요구하고 있어요. 그룹의 측면을 지원해달라는 뜻으로요. 이게 뭘 말하겠어요. 게다가 강선건설 건을 비롯해서 아버지도 신성그룹, 특히 신성건설의 상태를 잘 알고 계실 것으로 생각하는데요. 아닌가요?”
이정훈은 이성우의 말에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제법이야. 좋아. 그런데 한진영이 하나를 얻자고 신성증권을 인수한다는 것은 말이 안 돼.”
“진영이를 얻는 것은 딸려온 서비스나 마찬가지예요. 진짜 신성증권을 통해 얻을 건 다른 거죠.”
“그게 뭐지?”
“기풍철강의 그룹화. 아버지께서는 기풍철강을 그룹사로 전환할 수 있게 되실 거예요.”
이성우의 말에 이정훈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그게 무슨 말이냐?”
이성우는 이정훈의 말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기운에 지지 않겠다는 다짐을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고는 입을 열었다.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게 기풍철강의 그룹화 그리고 나아가서 지주사 전환이라는 것 알고 있어요. 언제까지 계속 기풍철강이라는 간판 아래 모든 것을 채워 넣을 수 없으니까요. 그걸 하기 위해서는 한두 사람의 힘으로 하지 못하다는 것 잘 알고 계실 거예요. 많은 사람이 필요하고, 특히 경험이 많은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도 아버지께서 오랜 시간 많이 알아보셔서 잘 알고 계실 거예요. 그걸 신성증권을 통해서 하도록 하세요. 마침 신성증권이 매물로 나올 테니 말이에요.”
이정훈은 무표정한 얼굴로 이성우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어 이성우에게 물었다.
“너 누구냐?”
“네?”
“내 아들 이성우 맞아?”
이성우는 이정훈의 말에 이정훈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