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증권사 생활-156화 (156/650)

156화 단순한 편지가 아니다

목이 타 보이는 최준호를 향해 한진영이 직접 음료수를 가지고 와 건넸다.

최준호는 오렌지주스의 뚜껑을 따자마자 단숨에 들이키고는 말했다.

“언제까지 내가 버틸 수 있을는지 모르겠어.”

“사장님 때문에요?”

“그것도 그거지만 고객들도 알게 모르게 압박하는 중이야.”

“고객들이요?”

“그래. 돈맛을 보다가 갑자기 멈춰 섰으니 고객들도 불만이 나올만하지. 그러니 왜 볼멘소리를 하지 않겠어? 그게 다른 것보다 제일 문제야.”

최준호는 방법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사장님이야 내가 죄인입니다 하고 납작 엎드리면 된다지만 고객들은 그게 안 되잖아. 오히려 목을 걸어야 하는 쪽은 고객들인 것 같아.”

직원들이 술렁였듯이 고객들도 술렁였던 것으로 보였다.

거칠 것이 없이 나아가던 것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멈췄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가만히 최준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잠시 생각을 정리한 한진영은 최준호에게 지금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이야기했다.

“편지를 보내도록 하죠.”

“편지?”

“네. 지금 상황에 대한 내용을 적은 편지요.”

“그게 무슨 소리야?”

최준호는 생뚱맞게 느껴지는 한진영의 말에 영문을 몰라 했다.

한진영은 그런 최준호에게 자기의 생각을 설명했다.

“고객들에게는 무턱대고 기다려달라는 말을 할 수는 없죠. 그리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되고요. 돈을 가지고 와서 움직인다면 어떻게, 어디에 투자하는지 투명하게 공개할 필요가 있어요.”

“그거야 분기마다 보고서를 보내주고 있잖아.”

“그건 그야말로 눈가림밖에 되지 못하고요. 우리끼리 이야기지만 보고서와 실제 보유 종목 간에는 차이가 심하잖아요. 이미 다 가져다 버린 종목들이 떡 하니 보고서에 적혀 있는 거 볼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려요.”

한진영의 말에 이해한다는 듯이 최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애꿎은 주스의 병마개를 만지작거리며 변명과도 같은 말을 꺼냈다.

“그거야 그렇지. 그래도 어쩌겠어. 규정에 따라 일을 하다 보니 그런 건데.”

“저는 그걸 좀 다르게 해볼 생각이에요.”

“다르게? 뭘 다르게 할 생각인데?”

최준호가 고개를 들어 한진영을 똑바로 바라봤다.

한진영은 결심한 듯한 표정을 짓고는 말했다.

“버크셔 해서웨이의 워렌 버핏처럼 고객들에게 편지를 보낼 생각이에요.”

“매년 편지를 보내겠다고?”

“매년이 아니에요. 저는 분기마다 보내려 해요. 또한 이번처럼 특이사항이 일어났을 때도 편지를 보내고요. 고객들과 자주 소통하며 우리의 생각을 고객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왜? 왜 그렇게 하려고? 워렌 버핏이야 주주니까 그렇게 하는데…… 우리는…….”

최준호 입에서 고객들이야 언제 떠날지 모르는 사람들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려다 말았다.

지금이야 큰 고객들로만 펀드를 구성하여 운용한다지만, 일반적으로 이렇게 투자금을 운용하는 곳은 없었다.

대부분 얼굴도 모르는 고객들을 유치하여 펀드를 구성하고는 했다.

그래서 들어오기도 쉬웠지만 나가는 것도 별다른 제약이 없었다.

열린 문처럼 누구나 쉽게 들어왔다 나갔다 했기에 소속감이나 책임감 같은 것을 구성원들에게 기대할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펀드 운용사들도 고객들에게 별다른 애착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규정으로 정한 분기 보고서를 보내주는 것으로 모든 할 일을 마쳤다고 생각하는 게 지금 운용사들의 생각이었다.

즉, 지금 시대는 얼굴도 모르는 고객을 향해 고개 숙이는 일을 하지 않는 시대였다.

그리고 나가더라도 다른 고객을 유치하면 된다는 단순한 생각에 빠져 있어 누구도 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런 일을 한진영이 먼저 하려 하는 것이었다.

고객에게 애정을 보여주고 돈을 운용하는 사람으로서 생각을 알려주어 충성도를 높이려 했다.

그랬을 때 돌아올 긍정적인 것들을 생각한다면 지금이 오히려 기회가 될지도 몰랐다.

아무도 하지 않을 때 먼저 하는 것.

한진영은 시대를 앞서 나가려 했다.

그리고 마침 딱 어울리는 상황이 펼쳐지기도 했다.

“한 명 한 명에게 모두 손글씨를 쓸 수 없지만 직접 제가 손글씨를 쓴 편지를 복사하여 보낼 생각이에요.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진행할 방향도 상세하게 서술할 생각이고요.”

“그렇게까지 해야 해?”

“부문장님. 그렇게 했을 때의 효과를 직접 보세요. 아마 이번 일로 다시는 부문장님을 괴롭히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그럴까?”

고객들에게서 받는 압박이 사라진다는 말에 최준호도 솔깃해졌다.

게다가 손글씨의 편지를 써서 보내라는 것도 아니라 자기가 하겠다는데 만류할 이유도 없었다.

한진영은 반대하지 않는 최준호를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사실 이렇게 편지를 써서 보내는 것에는 중요한 이유가 한 가지 더 숨어 있었다.

펀드의 브랜드화.

그리고 브랜드 네임이 바로 한진영의 이름이 된다는 것.

어쩌면 이게 가장 중요한 것일지도 몰랐다.

이제부터는 신성증권 투자전략사업부의 펀드가 아니라 한진영의 펀드가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이제 불만이 나올 모든 곳을 메웠다고 생각했다.

이제 차분히 신성그룹의 악수를 기다리면 되는 일이었다.

***

회의실에 투자전략사업부 직원들이 모여 있었다.

이성우는 그런 회의실 앞에 나가 A4용지를 들고 커다란 목소리로 읽어 내렸다.

“안녕하십니까? 사랑하고 존경하는 고객 여러분. 여러분의 소중한 돈을 맡아서 운용하고 있는 한진영입니다.”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한진영의 표정을 살폈다.

사람들의 걱정과 달리 한진영은 불쾌해하거나 기분 나빠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통해 자기가 쓴 글이 읽힌다는 것을 즐기는 것만 같았다.

이성우는 한진영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계속 종이에 적혀 있는 글을 읽어 내렸다.

“제가 이렇게 여러분께 편지를 보내는 이유는 다름이 아닙니다. 현재 시장 상황과 앞으로의 펀드 운용계획을 투자자 여러분께 상세히 공개하고…… 한 부부문장님.”

이성우는 글을 읽다 말고 한진영을 쳐다보고 물었다.

“이런 것까지 알려야 하는 건가…… 요?”

다른 사람들 앞이라 경어를 쓰는 이성우였다.

그러나 편하게 한진영과 이야기하던 버릇이 있어서 그런지 말끝이 꼬였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의 어색한 말투에 웃음을 터트리며 이야기했다.

“이런 것과 저런 것 모두 알리려고 쓴 편지니 이상해할 필요 없습니다. 주시죠. 나머지는 제가 읽을 테니까요.”

한진영은 이성우에게서 용지를 건네받은 후 사람들 앞에서 직접 읽어 내렸다.

“현재 시장 상황은…….”

용지에 써 있는내용을 모두 들은 투자전략사업부의 직원들은 한진영을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이 정도면 설명 수준을 까마득히 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회의 자리에서 나온 계획까지도 모두 쓰여 있었다.

VIP들이 가입한 펀드의 경우에는 매수한 종목과 이유 그리고 매도 시점까지 모든 것이 적혀 있었다.

평소 다른 증권사라면 이 수준의 내용은 기밀 사항으로 처리해도 될 만한 것들까지 모두 쓰여 있는 것이었다.

한진영은 편지를 직접 모두 읽은 후 책상 위에 올려놓은 뒤 입을 열었다.

“고객은 우리와 함께 가는 사람들이니 그들에게 모든 것을 알릴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혹 다른 곳에서 이 편지를 보고…… 우리의 계획을 알아챈다면…….”

한진영은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놓은 고제상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런 고제상의 의견에 동의하는 듯한 직원들을 돌아보고 말했다.

“주식은 제로섬 게임이 아닙니다. 상대가 죽어야 내가 사는 게 아니라는 뜻이죠. 모두가 돈을 벌 수 있는 행복한 게임인데 우리의 전략을 상대가 안다고 해서 그들이 그걸 이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하려는 전략을 역이용한다면…….”

“우리가 오를 것 같다는 종목을 패대기쳐서 주가를 하락시키는 뭐 그런 것 같은 상황이요?”

“네. 바로 그겁니다.”

고제상의 말에 자리에 있던 직원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 같은 이야기였지만 일어나지 말란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진영은 다른 직원들과 달리 걱정이 하나도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어떻게…… 그렇게 자신하시죠?”

“왜냐하면 우리가 들어간 종목을 그렇게 만들 수는 없을 테니까요.”

고제상을 비롯한 직원들은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했다.

만약이란 단어조차 생각하지 않은 단호한 말이었다.

마치 자기가 들어간 종목은 무조건 오를 것이며, 나온 종목은 무조건 떨어질 거라는 생각을 하는 듯한 말이었다.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분명 미쳤다는 말을 들었을 만큼 한진영의 말에는 오만함까지 묻어 있었다.

그러나 한진영은 평범한 사람과는 달랐다.

그라면 정말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직원들 머릿속에 하나하나 떠오르기 시작했다.

직원들은 한진영의 얼굴에 의심이라는 빛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오히려 이런 생각을 한 자신을 부끄러워했다.

한진영은 그런 그들을 향해 다시 한번 단호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저는 시장의 흐름 속에 가장 앞에 서 있는 종목만 들어갈 겁니다. 시장의 흐름은 사람이 인위적으로 틀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가장 앞에 서 있는 종목은 한두 회사의 힘만으로는 어찌해 볼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종목만 탈 겁니다. 그러니 이렇게 제가 자신하는 겁니다.”

“이번의 삼선전자 같은 것을 이야기하시는 것이죠?”

“맞습니다. 삼선전자가 흐름을 타고 나아가는데 우리가 탔다고 삼선전자의 방향을 바꾼다? 꿈과 같은 이야기죠. 사람들은 그리고 깨닫게 될 겁니다. 우리가 탔다고 흐름을 바꾸기보다는 우리가 탄 종목에 함께 올라타는 것이 이롭다는 것을요. 그렇게 되면…….”

“오히려 우리가 흐름을 만들어갈 수도 있겠네요.”

“그렇습니다. 방향을 바꿀 수는 없지만, 각도를 슬쩍 트는 정도? 혹은 속력을 높이거나 늦추는 정도? 뭐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웃음이 섞인 한진영의 말에 조수아가 덧붙였다.

“그리고 저라면 이런 편지를 받으면 감동할 것 같아요. 내 돈을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고 있구나 하고요. 게다가 손편지라니…… 요즘 시대에 이렇게까지 진정성을 보이는 곳이 없잖아요.”

한진영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 중에 가장 앞에 서 있는 이야기를 조수아가 꺼냈다.

한진영은 그런 조수아를 향해 살며시 미소로 자기도 같은 생각을 했음을 전했다.

직원들은 여기까지 이야기를 듣고 나자 소름이 돋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단순한 편지가 아니었다.

왜 이런 것까지 알리냐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감정적인 부분까지 염두에 둔 것이 모든 것을 그림 그리듯이 그려나가며 선택한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은 치밀하게 다 계획하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직원들은 더는 의문을 가지지 못했다.

직원들이 회의실을 빠져나갔을 때 최준호가 슬며시 한진영에게 다가왔다.

“진영아.”

“네. 부문장님.”

“사장님께서 보자고 하신다.”

“사장님께서요?”

“그래. 올 게 왔나 봐. 사장님이 너를 타겟으로 잡은 것 같아. 어쩌냐?”

최준호는 남원석 사장이 압박하는 방향을 바꾼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자기가 계속 버티고 있자 한진영을 쪼려고 하는 것처럼 느낀 것이었다.

그러나 한진영은 최준호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부문장님 대신 저를 쪼려고 부르시는 건 아닐 거예요.”

“널 쪼려고 부른 건 아니라고? 그럼?”

“가보면 알겠죠.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다녀올게요.”

한진영은 남원석이 부르는 이유를 어슴푸레 알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런 한진영의 생각이 맞았음은 사장실에 들어가자마자 확인이 됐다.

“어서 와요. 한 부부문장.”

언제나처럼 남원석이 방문한 한진영을 반갑게 맞았다.

남원석이 한진영을 데리고 소파로 갔을 때 소파에는 먼저 와 있던 손님이 있었다.

“어서 오게.”

“본부장님도 와 계셨네요.”

“어. 사장님께서 부르셔서…….”

한진영은 김정대 FICC 본부장에게 인사를 한 후 맞은편에 앉아 있던 노 전무에게도 인사했다.

“전무님도 와 계셨습니까?”

“와서 어서 안게. 자네가 와야 이야기가 시작될 것 같다고 하니까.”

불편한 표정의 노 전무는 한진영이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보였다.

그런 노 전무와 달리 남원석은 한진영을 향해 웃으며 이야기했다.

“사실 한 부부문장과 상관없는 이야기인데 내가 꼭 부르자고 했어요.”

“저를요?”

“네. 한 부부문장의 판단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제 판단이요?”

한진영은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겨우 참고 일부러 더욱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가 알고 있던 신성그룹이 설립된 이래 최악의 수라고 이야기되는 일이 이제 시작되려 했기 때문이다.

남원석은 슬쩍 노 전무가 있는 쪽을 살피고는 한진영을 향해 그를 부른 이유를 설명했다.

“한 부부문장. 실은…… 우리 그룹이 조금 어렵습니다.”

“어느 정도 저도 예상했습니다.”

“그래요. 알았을 거예요. 주식시장의 소문이 제일 빠르니까요.”

남원석은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계속 이야기했다.

“그동안 우리 증권사가 그룹을 많이 도와줬는데 아시다시피 요즘 우리 증권사의 실적도 시원치가 않잖아요.”

한진영은 그 이유가 자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자연스럽게 만들기 위해 한발 물러나 상황을 지켜본 것이었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한 노 전무는 결국 참지 못하고 한진영을 향해 삿대질을 했다.

“이게 다 자네 때문이 아닌가? 진작에 자네가 VIP에게 모은 자금을 그룹의 숨통을 트이는 데 썼다면 이러지 않았을 것 아냐?”

“어허. 노 전무님. 그 이야기를 이제와서 왜 꺼내십니까? 다 지난 일인데 말입니다. 지금은 더욱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하니 지난 이야길랑 다 접어두도록 합시다.”

남원석은 괜히 한진영과 불화를 일으킬까 노 전무를 진정시켰다.

한진영은 이런 상황을 그저 가만히 앉아 지켜보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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