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포지션을 바꾸면 안 된다
남원석은 노 전무가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을 확인하고 한진영에게 고개를 돌렸다.
“한 부부문장이 이해해요. 노 전무가 조금 다혈질이에요.”
“이해합니다.”
한진영은 노 전무의 행동에 전혀 화가 나거나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노 전무의 행동으로 그들이 지금 얼마나 급한 상황인지 확인할 수 있어 좋았다.
그러나 이런 것을 알 수 없는 남원석은 한진영이 노 전무의 행동에 기분 나빠하지 않은 것을 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한진영에게 확인할 중요한 사항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남원석은 다시 한진영을 향해 웃는 얼굴로 말했다.
“한 부부문장.”
“말씀하세요.”
마치 연인을 부르는 듯이 따뜻하게 한진영을 부른 남원석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회사가 어려우니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회사가 어려우면 돕는 거야 월급을 받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일이지요.”
“그래요. 한 부부문장이 그렇게 생각할 줄 알았어요.”
다행이라는 듯이 큰 소리로 이야기한 남원석은 한진영 쪽으로 자리를 바짝 당겨 앉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 부부문장의 투자전략사업부도 최근 시원치 않다는 것 알고 있어요. 그래서 그룹을 측면 지원하라고 하지 않을 테니 안심해요.”
“다행입니다. 최 부문장님이 안 그래도 그 요구를 들어주지 못해 가슴 아파하셨거든요.”
“흥.”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노 전무는 코웃음을 쳤다.
어르고 달래도 꿈쩍 않던 최준호가 가슴 아파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남원석은 혹시라도 노 전무가 초를 칠지 모른다는 생각에 급히 노 전무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가만히 있으라는 듯이 눈을 한번 부라리고는 한진영을 향해 웃었다.
“알아요. 그랬을 거예요. 왜 안 그렇겠어요.”
한진영은 이해한다는 듯한 남원석을 가만히 바라봤다.
계속 말을 돌리는 게 이제는 답답하게 느껴진 한진영이었다.
어차피 어떤 말을 할지 아는 상황에서 한진영은 빙빙 돌아가는 이야기를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한진영이 직접 남원석을 향해 이야기했다.
“사장님. 제가 도울 게 뭐가 있나요? 도울 수 있는 게 있다면 돕도록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역시 한 부부문장이라면 그렇게 이야기할 줄 알았어요. 그럼 바로 본론을 이야기하도록 할게요.”
남원석은 FICC 본부의 김정대를 슬쩍 살피고는 입을 열었다.
“회사에서 국채에 투자할 생각이에요.”
“투자요?”
한진영이 알고 있던 대로였다.
신성그룹이 위기를 타개할 방책으로 회사 자금을 가지고 도박을 할 작정이었다.
그래도 최대한 안전하게 하기 위해 채권에 투자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한진영은 이게 더 큰 비극을 초래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남원석은 한진영을 향해 자세히 설명했다.
“회사에서는 석 달만 자금을 돌려 돈을 벌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지 고민했어요.”
“그래서 석 달 동안 채권에 투자하여 돈을 벌 생각을 하신 건가요?”
“그래요. 그렇게 선택…… 했네요.”
남원석이 선택을 한 것이 아닐 게 분명했다.
투자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남원석이 그룹의 자금 집행에 왈가왈부했을 리가 없을 테니 말이다.
다만, 신성증권의 사장으로서 이번 결정에 대해 조언을 해줄 수는 있는 자리에 있기는 했다.
그리고 그 조언을 듣기 위해 한진영을 부른 것이었다.
“한 부부문장. 어떻게 생각합니까?”
“너무 무모한 선택이 아닐까요? 투자 기간이라는 석 달도 너무 짧고…… 여유자금을 투자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 당장 급한 불을 끄기 위해 투자를 하는 건 도박밖에 되지 않습니다.”
“흥!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된 건지도 모르고 잘도 말하는구나.”
노 전무는 한진영의 말에 코웃음을 치며 비아냥거렸다.
한진영은 노 전무의 태도를 보고 알게 됐다.
‘이번 선택에는 노 전무의 입김이 작용했나 보구나.’
그렇지 않다면 지금 이 자리에 노 전무가 앉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노 전무는 경영지원본부의 본부장이었다.
그런 그가 투자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자리에 함께 있다는 것부터가 깊든지 얕든지 간에 노 전무가 이번 일과 연관성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노 전무와 함께 있는 김정대.
김정대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은 지금 이야기에 김정대도 연관이 있다는 뜻이었다.
‘FICC 본부를 통한 투자?’
한진영은 짧은 남원석의 이야기를 듣고도 자연스럽게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바로 모든 걸 지난 시절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런 한진영의 생각을 알지 못하는 남원석은 또다시 비아냥대는 노 전무의 코웃음에 인상을 찌푸리고 김정대에게 눈짓했다.
자기가 노 전무를 마크할 테니 자세한 설명은 김정대에게 하라는 눈짓이었다.
그리고 남원석은 자리를 옮겨 노 전무 곁에 앉았다.
김정대는 남원석의 시선에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키지 않는 표정의 김정대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진영에게 말했다.
“도박이라는 것을 회사에서도 알고 있네. 그래서 최대한 안전한 방법을 찾아 진행하려 하고 있네.”
“그래서 국채에 투자하는 건가요?”
“아무래도 채권이…… 움직임이 덜하니까.”
“목표 수익률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건 얼마를 잡고 들어가는 건가요?”
“15%.”
“석 달에 15%라는 말씀입니까?”
한진영의 되물음에 김정대가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네. 쉽지 않다는 것을 말이야.”
국채 투자로 석 달에 15%를 달성한다는 것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레버리지를 일으킬 생각입니까?”
한진영의 질문에 김정대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어렸다.
만약 가진 돈이 100원밖에 없다면 빚을 내서 500원을 투자하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래서 수익률을 15%를 잡은 것으로 보였다.
그게 아니라면 채권 투자를 통해 석 달 만에 15%에 달하는 수익률을 올릴 방법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투자를 한다면 안전한 투자처를 찾는다느 의미가 퇴색해져 버리는 것이었다.
아무리 안전한 투자처라고 하더라도 빚을 내 투자를 하는 순간 안전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김정대도 이런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진행한다는 것은 그만큼 위에서의 압박이 상당하다는 뜻이었다.
이야기해도 듣지 않는 상황에 처한 것인지, 아니면 사람이 들으려 하지 않는지 몰랐지만 어쨌든 지금 신성그룹은 최악의 수를 반상 위에 놓으려 했다.
김정대는 한진영의 질문에 허탈한 듯이 깊은 한숨을 내쉬고 대답했다.
“맞네. 레버리지를 일으켜 진행할 생각이네.”
“안전한 투자가 아니네요.”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대신 투자처를 안전한 곳을 찾으려 한다네.”
“혹시…… 미국입니까?”
김정대는 이야기가 통하는 사람과 대화를 하게 되어 한결 수월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조금 전까지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 노 전무, 남원석과 이야기를 하느라 속이 터져 죽을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김정대는 조금은 풀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미국 국채 10년 물에 투자할 생각이네.”
남원석은 여기까지 이야기가 나오자 급히 한진영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우리가 투자한다는 미국 국채. 어떤가요? 괜찮을 것 같나요?”
한진영은 남원석의 질문에 고개를 돌렸다.
남원석이 한진영을 부른 진짜 이유를 참지 못하고 말한 것이었다.
한진영은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이 흘러가는 모습이었다.
신성그룹의 미국 국채 10년 물 매수.
이것이 신성그룹이 늪에 빠지기 신호탄이 되었다.
한진영은 남원석을 똑바로 바라보고 물었다.
“혹시 누구의 생각인지 알 수 있을까요?”
“왜 그러십니까? 혹시 안 좋다고 생각합니까?”
한진영의 반응에 남원석은 마른침을 삼키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미 결정까지 다 난 상황에서 안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던 남원석이었다.
게다가 지금까지 잘못된 판단을 내린 적이 없는 한진영이 안 좋다고 이야기하게 된다면 잠을 자지 못할 것만 같았다.
남원석은 한진영의 입에서 다음에 나올 말을 긴장한 얼굴로 바라봤다.
“아니요. 안 좋다고 생각하기보다는…… 그룹에서 그런 결정을 내리기 전에 누군가와 상의를 해야 했는데…… 아무리 봐도 회사의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은 것으로 보여서요.”
한진영은 김정대를 돌아보고 자기 말이 맞지 않냐는 눈빛을 보냈다.
김정대는 그런 한진영의 눈빛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가 아니더라도 최소한 김정대에게는 의견을 구하는 것이 맞는 선택이었다.
그리고 그랬다면 자기 귀에도 신성그룹이 미국 국채에 투자한다는 이야기가 귀에 들렸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들린 이야기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물어본 것이었고 자기 생각이 틀리지 않는다는 대답을 김정대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남원석이 한진영의 질문에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그룹의 판단이 아쉬웠기 때문이다.
신성증권이 아무리 중소형 증권사에 불과하더라도 작년 기록적인 성장을 하며 단연 두각을 보였던 곳이었다.
게다가 회사 내에 채권 투자부문과 리서치 센터를 보유하고 있는 만큼 내부의 의견을 모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룹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
전형적으로 남의 말을 더 잘 듣는 모습을 신성그룹이 보인 것이었다.
남원석이 노 전무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노 전무가 다시 한번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룹에서는 미국의 유명한 컨설팅 회사를 통해 이미 미국 국채의 미래에 대해 분석을 마친 상태니 걱정하지 말게. 우리보다 훨씬 잘하는 곳이니까.”
한진영은 노 전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남원석은 한진영이 불쾌해하지는 않는지 표정을 살폈다.
자존심이 상할만한 이야기를 노 전무가 아무렇지 않게 한진영에게 던졌기 때문이다.
남원석은 한진영이 이런 노 전무의 말투에 기분이 상해 안 좋은 이야기를 하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그러나 한진영은 남원석의 이런 걱정과 달리 그들이 듣고 싶어 하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미국 국채. 매수가 나쁘지 않죠. 저도 매수가 좋아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까?”
남원석은 크게 한진영의 말에 반응했다.
아무리 유명 컨설팅 회사에 고액의 수임료를 주고 분석을 의뢰했다지만 그래도 이수암 회장은 마음이 불안한 걸 지울 수 없었다.
그래서 남원석에게 한진영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라는 지시를 내린 상태였다.
만약 한진영도 매수에 긍정적인 의견을 내놓는다면 바로 일을 진행하기 위해서였다.
한진영은 얼굴이 화사하게 변하는 남원석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쪽도 미국 국채를 매수할지 여부를 논의 중이었습니다.”
“좋습니다. 좋아요.”
한진영의 대답에 남원석은 크게 기뻐한 뒤 기다렸다는 듯이 김정대에게 지시를 내렸다.
“분석 의뢰는 해외의 컨설팅 회사를 통해 진행했지만, 투자는 우리 증권사를 통해 이루어질 겁니다. 그러니 본부장님. 바로 준비를 해주세요. 그룹에서 자금이 들어오는 대로 바로 투자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한진영은 남원석의 지시에 모르는 척 질문을 던졌다.
“혹시 얼마나 진행할 계획입니까?”
“투자금 5,000억에 레버리지 3배로 총 2조를 집어넣을 계획입니다. 그래야 700억 이상을 만들어낼 수 있으니까요.”
“5,000억. 흐음…….”
한진영은 남원석의 말에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이번에도 한진영이 알고 있는 사실 그대로였다.
700억을 벌기 위해 5,000억을 투자했다가 절반을 날리고 겨우 2,500억만 살려서 나온 희대의 실수.
지금 한진영이 알고 있는 사실 그대로 신성그룹이 선택하여 진행하는 중이었다.
이 사실을 알 리 없는 남원석은 기쁜 마음으로 한진영과 잠시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몇 번이나 미국 국채를 매수하는 것이 좋은지에 관해 물었다.
그때마다 한진영은 같은 대답을 했다.
“미국 국채 매수 좋습니다. 대신 절대 흔들리지 말고 매수 포지션을 유지해야 합니다. 절대…….”
몇 번이나 포지션에 변화를 주면 안 된다는 말을 건넨 한진영이었다.
그렇지만 남원석은 그런 한진영의 말을 흘려들었다.
어차피 그가 듣고 싶었던 대답은 ‘좋다’는 대답뿐이었다.
그 뒤에 붙는 다른 이야기에는 남원석은 관심 밖이었다.
그리고 노 전무는 한진영이 해외 컨설팅 회사의 분석을 따라 이야기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한진영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해외 컨설팅 회사의 분석이 좋다는 이야기가 나와서 한진영도 따라 좋다는 이야기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직 김정대만이 한진영의 말에 반응했다.
그는 사장실을 나오자마자 한진영을 붙잡고 물었다.
“절대 포지션을 바꾸지 말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한진영은 바짝 붙어 은밀히 물어보는 김정대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말 그대로입니다. 본부장님도 잘 아시지 않으십니까? 시장에 흔들려 포지션을 이리저리 바꾸다 크게 당하는 것 말입니다.”
“채권 투자는 주식과 달리 포지션 변동이 쉽지 않아. 워낙에 한 방에 들어가는 돈이 크기도 하고 움직임도 더뎌서…… “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는 김정대의 말에 한진영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자기가 할 일은 여기까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왜 말리지 않았냐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한진영이 최소한의 저지를 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하더라도 그룹 고위 부는 마음을 바꾸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한 행동이었다.
그만큼 지금 신성그룹은 눈이 뒤집힌 것과 같은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