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위험을 진짜로 생각한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노 전무의 말에 얼굴이 굳어졌다.
다른 계좌로 돈을 옮길 때도 금액이 커지면 여러 가지 제약이 걸리기 마련이었다.
한 번에 옮기는 돈의 금액이 제한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며, 이체하는 곳의 계좌번호가 맞는지 몇 차례나 다시 물어보며 한 번에 큰 금액의 돈을 옮기는 것을 막고는 했다.
하물며 돈을 이체할 때도 이런 데 포지션을 바꾼다는 게 말처럼 쉬울 리가 없었다.
게다가 현재 신성그룹은 손해를 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포지션을 바꿔야 한다고 하여 쉽게 바꿀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우리가 지금 얼마나 손해를 보고 있는 겁니까?”
신성그룹의 부회장 직책을 맡은 추 부회장이 노 전무를 향해 물었다.
한진영은 지금의 모습을 보고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번 일의 책임자가 노 전무인가 보구나.’
자리에 신성증권의 사장인 남원석이 있었으며 실제로 돈을 움직이는 FICC 본부의 김정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보고를 하는 것과 질문을 받는 것 모두 노 전무가 하는 것이 이번 일의 책임자가 노 전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만들었다.
노 전무는 추 부회장의 질문을 받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약 500억가량의 손해를 본 상황입니다.”
“500억.”
“500억이라니…….”
그룹의 고위 임원들 입에서는 짧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지금 상황에서 500억의 손실을 보았다는 사실에 당황한 듯한 모습이었다.
노 전무는 이런 모습을 보고도 걱정하는 기색 없이 이야기했다.
“우리에겐 지금이 오히려 기회입니다.”
“기회요?”
“네. 채권은 변동성이 극히 작은 종목입니다. 그만큼 안정적이라는 뜻이지요. 그러나 그로 인해 큰 금액을 벌기는 어려운 곳이 바로 채권시장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레버리지를 사용한 것 아닙니까? 우리가 집어넣은 금액만으로는 원하는 수익을 얻지 못한다고 해서 말입니다.”
“맞습니다.”
노 전무는 자기 이야기를 받아 반문한 쪽을 바라보고 이야기했다.
“그런 곳이 변동성이 생겨 큰 움직임을 보이니 어찌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노 전무님의 말씀은 컨설팅 업체가 제안한 대로 채권 가격 하락으로 포지션을 바꾸자 이 말입니까?”
“바로 그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입은 손해를 복구하고도 예상했던 금액보다 더 큰 금액을 손에 쥘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더 큰 금액?”
추 부회장이 흥미가 생기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노 전무가 이수암 회장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다.
“컨설팅 업체에서는 약 3,000억의 수익이 예상된다는 보고서를 보내왔습니다.”
“3,000억?”
“그게 정말입니까?”
노 전무는 술렁이는 회의실 분위기를 보며 만족스러운 듯이 미소 지었다.
그리고 곁에 앉아 있는 남원석의 어깨를 손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남원석은 노 전무의 말과 회의실에서 보이는 반응에 그제야 안심한듯한 표정을 지었다.
자리에 앉았을 때부터 긴장하는 모습을 보였던 남원석이었다.
그가 결정하고 그가 선택한 일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룹의 피 같은 돈을 맡아 운용하는 도중에 손해를 봤다는 사실이 그를 짓눌렀었다.
그러나 노 전무의 말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3,000억이라는 돈은 어려운 일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충분한 이유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남원석은 술렁이는 분위기에 안도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노 전무. 3,000억이라니 그게 가능한 이야기라는 말입니까?”
이수암 회장도 노 전무의 말에 솔깃한 듯 보였다.
지금까지 조용히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것을 멈추고 직접 입을 열어 노 전무에게 질문을 던졌다.
노 전무는 이수암 회장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지고 온 서류를 내놓았다.
그리고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비서를 통해 이수암 회장에게 서류를 건네도록 한 후 서류 안에 있는 내용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곳에 오기 전에 컨설팅 업체가 제게 보내온 긴급 보고서입니다.”
이수암 회장은 비서가 가지고 온 보고서를 받아 읽었다.
짧은 2장짜리 보고서로 안에 들어가 있는 내용은 조금 전 노 전무가 이야기했던 내용이 담겨있었다.
이수암 회장은 보고서를 확인한 뒤 곁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건네 보고서를 볼 수 있도록 했다.
보고서는 돌고 돌아 마지막 자리에 앉아 있는 한진영에게까지 전달됐다.
한진영은 보고서를 읽고 가볍게 책상 위에 보고서를 놓았다.
노 전무는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보고서를 본 것을 확인하자 입을 열었다.
“보고서에 적혀 있는 대로입니다. 지금이라도 매도포지션을 잡는다면 적게는 3,000억. 많게는 5,000억까지의 수익을 기대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미국 쪽의 디폴트 문제가 가볍지 않다는 겁니까? 그런 내용은 보고서에 적혀 있지 않아서 알 수가 없군요.”
“보고서를 받은 뒤 제가 컨설팅 회사 쪽과 간단하게 통화를 했습니다. 그들의 말로는 디폴트가 일어날 거로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하물며 신용등급 강등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고요. 세상에 미국이 트리플 A 신용등급을 받지 못하면 어디가 트리플 A를 받을 수 있겠냐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어째서 매도 포지션을 잡아야 한다는 말입니까?”
“디폴트가 일어나지는 않지만 지금 많은 투자자가 불안에 휩싸여 너도나도 국채를 던지고 있다는 것이 현재 미국 시장의 상황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신용평가사들이 계속 미국의 신용등급 하향하겠다며 군불을 지피고도 있고요.”
노 전무는 마치 자기가 보고서를 만들기라도 했다는 듯이 사람들 앞에 아는 체를 하며 계속 이야기했다.
“시장은 가능성이 열린 곳으로 움직이는데 지금 가능성은 국채 가격 하락 쪽으로 완전하게 열린 상태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속도 또한 빠를 것이니 지금 당장 포지션을 잡지 못한다면 떨어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습니다. 결정을 빨리 내려야 할 상황입니다.”
자리에 있던 그룹 고위 임원들은 노 전무 말의 진의를 파악할 수 없었다.
쉽게 풀어 이야기한다고 했지만, 도대체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모를 정도로 그들은 금융 쪽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김정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김정대라면 조금 전 노 전무의 말의 진의를 파악해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해서였다.
그러나 김정대는 쉽게 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노 전무의 말이 타당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속 김정대의 머릿속에 강하게 남겨져 있던 말이 있었다.
[절대 포지션을 바꾸지 말라]
한진영이 지난 자리에서 김정대에게 건넨 말이었다.
김정대는 지금 상황에서도 그 말이 유효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김 본부장. 이야기 좀 해보세요. 어떻게 생각합니까?”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김정대를 향해 결국 추 부회장이 참지 못하고 먼저 질문을 던졌다.
김정대는 추 부회장의 질문에 가만히 고개를 돌려 곁에 앉아 있는 한진영을 돌아봤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보다는 한 부부문장의 의견을 듣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한 부부문장이 저보다는 더 정확하니까요.”
이수암 회장은 김정대의 말에 한진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리에 있는 사람 중에 김정대와 남원석을 제외한다면 이수암 회장이 한진영을 가장 잘 아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강선건설 건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일들을 직간접적으로 옆에서 지켜봤기 때문이다.
“그래요. 한 부부문장의 의견이 궁금하기도 하군요.”
자리에 있던 고위 임원들은 김정대의 말에 그게 무슨 말이냐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이수암 회장이 김정대의 말에 동의하는 모습을 보고는 열었던 입을 다물었다.
회장이 동의하는데 다른 사람이 왈가왈부할 이유가 없어서였다.
이수암 회장은 한진영을 향해 질문했다.
“한진영 부부문장. 어떻게 생각합니까?”
한진영은 이수암 회장의 질문에 슬쩍 앞에 놓인 보고서를 내려다본 뒤 대답했다.
“저는 처음 이 투자에 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탁월한 판단이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탁월한 판단? 무엇이 그렇게 탁월하다고까지 생각하게 만든 겁니까?”
“종목 선택과 베팅 방향 모두 옳았으니까요. 이게 제가 이 투자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오늘 회의 자리에 오기 전까지 가졌던 생각입니다.”
“회의 자리에 오기 전까지 가졌던 생각이라면…… 회의 자리에 오고 나서는 생각이 바뀌었다는 이야기인가요?”
“네.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럼 한 부부문장도 포지션을 바꾸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는 건가요?”
이수암 회장의 말에 노 전무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김정대도 표정이 풀리며 안심하는 얼굴을 보였다.
자꾸 한진영이 했던 말이 신경이 쓰여 불안했는데 생각이 바뀌었다는 말에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그러나 한진영은 그런 그들의 생각을 무참히 깨버리는 말을 하고 말았다.
“아니요. 제가 회의 자리에 와서 생각이 바뀐 이유는 이곳에서 포지션을 바꾸려 하는 시도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저는 포지션을 바꾸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한진영의 말에 노 전무가 발끈했다.
“포지션을 바꾸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그럼 여전히 매수 포지션을 유지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네. 바로 그겁니다. 매도 포지션으로의 변경은 그룹을 나락으로 끌고 가는 행동입니다.”
김정대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이렇게 한진영이 많은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노골적으로 이야기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불편해하는 이수암 회장의 표정을 보며 입을 열었다.
“회장님. 그냥 매수한 채로 그대로 포지션을 유지하십시오. 그리고 대출 승인이 떨어지면 그 돈까지 밀어 넣어 매수하십시오. 그럼…….”
“이봐요. 한진영 부부문장. 그게 무슨 소립니까?”
노 전무가 듣다못해 큰 소리로 소리쳤다.
그는 한진영을 향해 삿대질까지 하면서 나무랐다.
“지금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알지도 못하고 그러는 겁니까? 이미 500억을 손실 본 상황이라 이겁니다. 그런데 이 포지션을 유지하는 것도 모자라 더 매수해야 한다고요? 지금 제정신입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설마 투자자들이 미국의 위험을 과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그러는 겁니까?”
“아니요. 반대입니다.”
한진영은 고개를 젓고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쓸어보며 말했다.
“미국이 진짜로 위험에 처해있다고 생각하여 국채를 매수해야 한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추 부회장이 관심을 보이자 한진영이 차분히 설명했다.
“미국이 위험에 처하면 다른 나라들은 어떻겠습니까?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미국에 목을 매고 있는 나라가 한두 나라가 아닙니다. 그런 곳들이 다 어떻게 될까요?”
“흔들리겠지요.”
“바로 그겁니다. 흔들릴 겁니다. 미국보다 더 심하게 말입니다.”
한진영은 자기도 모르게 대답을 해준 추 부회장을 향해 싱긋 웃어 보이고는 이수암 회장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흔들리면 미국 국채는 오히려 가격이 상승하게 될 겁니다. 믿을 건 미국 국채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말입니다.”
“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겁니까?”
이수암 회장을 향해 말을 했건만 노 전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그는 어느새 손에 들려진 보고서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여기 보고서에는 그런 이야기가 적혀 있지 않습니다.”
“당연히 적혀있지 않겠지요. 그렇게 생각했다면 매도 포지션을 잡으라는 이야기를 하지 못할 테니까요.”
“지금 그러니까 한 부부문장이 여기 보고서를 발행한 컨설팅 회사보다 더 시장을 잘 본다는 이야기입니까?”
다른 사람들이 있어 최대한 경어를 쓰려는 모습의 노 전무였다.
그러나 말투부터 표정까지 경어만 사용하다 뿐이지 모든 모습에서 한진영을 무시하는 것이 보였다.
노 전무는 비웃음까지 지어 보이며 한진영을 향해 말했다.
“여기 컨설팅 업체에 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명문 대학을 졸업한 수재들입니다. 하나하나 배움의 수준이 한 부부문장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노 전무님 말씀은 공부를 잘한 사람들이니 시장을 보는 눈도 저보다 더 뛰어날 거라는 말씀입니까?”
“말해 무엇 합니까? 당연한 소리인걸요.”
노 전무의 말에 함께 앉아 있는 김정대의 얼굴이 새빨개지고 말았다.
노 전무가 신성증권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김정대의 생각을 확실하게 하는 말을 노 전무가 내뱉었다.
“내가 비록 신성증권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신성증권 직원들이 뛰어나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하물며 여기 컨설팅 회사 직원들과 비교를 한다? 하이고 이건 뭐…… 입이 아프기만 할 겁니다.”
“노 전무님. 여기 한 부부문장은…….”
김정대가 발끈해서 노 전무의 말을 반박하려 하자 곁에 앉아 있던 한진영이 가만히 책상 아래로 김정대의 무릎을 잡으며 말을 막았다.
김정대는 당장에라도 자리에서 일어날 것처럼 엉덩이를 들썩이다 한진영의 손에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말았다.
그리고 한진영을 돌아봤을 때 한진영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김정대에게 그만할 것을 권했다.
노 전무는 김정대가 뭐라 말을 하려다 한진영의 만류에 멈추는 것을 보고는 김정대에게도 비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냥 김 본부장님은 컨설팅 업체에서 정해준 대로 매매만 하면 됩니다. 괜히 오버해서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 쓸 필요 없습니다. 그냥 손가락만 움직이세요.”
“뭐라고요?”
김정대는 노 전무의 말에 참지 못하고 몸을 반쯤 일으켜 세웠다.
당장에라도 책상 너머에 앉아 있는 노 전무를 향해 몸을 날릴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김 본부장. 잠시 진정하시게.”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추 부회장이 이수암 회장을 대신하여 나섰다.
점점 과열로 치닫는 분위기를 가라앉히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