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증권사 생활-162화 (162/650)

162화 노 전무가 노린 것

속보가 뜨자마자 시작된 국내 주식시장의 종합주가지수는 1.5%가 넘는 갭을 보여주며 상승 시작했다.

“283 시작입니다.”

“좋아. 285 타겟이니까 타겟 지점 오면 매도 때리도록 하세요.”

한진영은 곁에 장근수가 있는 것도 잊은 채 큰 목소리로 지시했다.

“유가는 어떻습니까?”

“유가도 폭등 중입니다. 4%가 넘는 상승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가도 잊지 마세요. 98불입니다. 올라오는 대로 때릴 수 있도록 준비하세요.”

한진영은 유가를 비롯하여 상품 시장과 채권까지 모든 시장을 두루 살핀 뒤 사업부 직원들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걸어놓으면 안 됩니다. 무조건 자리가 오면 때리도록 하세요. 한 번에 물량을 쏟아붓는 것도 금합니다. 우리를 제외한 최소한의 인원만이 알 수 있도록 쪼개서 진입하세요. 자리는 분명히 옵니다. 그러니 성급히 움직이지 않아도 됩니다. 차분히 기다려서 자리가 왔을 때 진입합니다. 기회는 오늘뿐입니다. 오늘 모든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도록 하세요. 점심은 장이 끝난 뒤에 하도록 합시다. 자자. 힘냅시다.”

한진영은 손뼉까지 치며 직원들을 독려했다.

장근수는 곁에서 소리치는 한진영을 당황한 얼굴로 바라봤다.

한진영을 비롯하여 사업부 직원들은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알았다는 듯이 당황하는 모습 하나 없이 움직였다.

장근수는 놀란 얼굴로 이야기를 마친 한진영을 향해 물었다.

“진영아. 합의했잖아.”

“네. 합의했습니다.”

“그런데…… 매도를 한다고?”

“저는 이게 폭락의 시초라고 생각하거든요.”

“왜? 이유가 뭔데?”

한진영은 당황한 장근수를 향해 손가락으로 화면을 가리켰다.

화면에는 2조 5,000억 달러 합의라는 글자가 지나가고 있었다.

“저거 때문에요.”

“2조 5,000억 달러 때문에? 저게 왜?”

“본부장님도 이번 일에 대해 자세히 살피지 않으셨나 보군요. 하긴 그럴만합니다. 이야기가 모두 합의가 가능한지 불가능한지로 쏠려 있었으니까요. 합의 내용까지 자세히 파악하여 알려주는 곳이 없었지요.”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럼 합의 내용에 문제가 있었다는 말이야?”

한진영은 장근수의 말에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장이 원하던 것은 4조 달러의 합의였습니다. 그걸 하지 않으면 신용등급 강등을 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던 것이고요.”

“아니야. 며칠 전에 무디스에서는 적자 감축안을 합의하지 못하더라도 당분간 AAA등급을 유지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어.”

“본부장님. 신용평가사는 무디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장근수의 눈이 심하게 떨렸다.

흔히들 세계 3대 신용평가사라고 말하지만 한 곳이 나머지 두 곳보다 영향력이 월등히 컸다.

그리고 그 영향력이 큰 곳이 무디스는 아니었다.

“그럼 설마…… S&P에서…….”

무디스나 피치가 신용등급을 강등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두 곳이 신용등급을 강등하더라도 S&P가 자리를 잡아준다면 그냥 웃으며 넘길만한 문제로 치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두 곳이 유지하더라도 S&P가 강등을 때리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한진영은 떨리는 눈으로 자기를 바라보는 장근수를 향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4조를 이야기한 곳은 S&P예요. 그런데 반 토막에 가까운 합의가 나왔어요. 그럼 S&P 자존심에 가만히 있을까요?”

“아무리 그래도…… 강등을…… 강등을 때리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S&P가 모르고 있지는 않을 텐데?”

“알고는 있을 겁니다. 하지만 알고 있다고 하지 않을 놈들이 아닙니다. S&P 놈들은 말입니다.”

“아니야. 설마? 그럴 리가?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을 거야. 그렇게 할 리가 없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부정하고 싶었던 장근수였다.

그러나 한진영의 웃음에 이렇게 마냥 시간을 보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 장근수였다.

그는 급한 마음에 몸을 돌리며 한진영을 향해 손을 들었다.

“난 지금 가봐야겠다.”

“본부장님.”

“어?”

급히 WM 본부로 달려가려던 장근수는 한진영의 목소리에 몸을 세우고 한진영을 돌아봤다.

한진영은 제자리에 서서 벌써 2% 가까이 오르고 있는 시장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오늘밖에 시간이 없습니다.”

“오늘밖에 시간이 없다고?”

“네. 미국 놈들이 하던 짓을 잊지 마세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어지러워 속이 메스꺼려오는 장근수는 한진영의 말에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한진영은 그런 장근수를 향해 무표정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미국 놈들이 항상 하던 짓거리 말입니다. 아시아 시장이 열렸을 때는 잔뜩 뭔 일이라도 일어나는 것처럼 그랬다가 정작 자기네 시장이 열렸을 때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시치미 뚝 떼는 거요. 이번에도 다르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오늘뿐이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아이 씨.”

장근수는 조금 전 나온 속보로 상방에 힘을 강하게 주고 있는 종합주가지수를 확인하고 화를 냈다.

“그래서 오늘밖에 시간이 없다고 그런 거야? 바로 미국 장이 열리면 뒤집힌다고?”

“네. 오늘 정리하지 못하면 한동안 괴로워질 수 있습니다.”

“알았다. 알았어. 뭐가 뭔지 모르겠는데…… 우선은 알았어.”

장근수는 손을 휘젓고는 급히 사업부를 떠나갔다.

이성우는 장근수가 떠나는 것을 확인하고 아이스크림을 든 채로 한진영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저 양반 왜 저렇게 바쁘게 나가? 아까 올 때는 여기서 시간 좀 죽일 것처럼 오더만.”

“넌 안 바쁘냐?”

“나? 어. 안 바빠.”

한진영은 고개를 젓고는 이성우의 손에서 아이스크림을 뺏어 들었다.

“그래. 너야 정말 중요한 때 한 방씩 해주는 것만으로 너의 존재가 빛을 발휘하니까. 자 봐봐.”

한진영은 이성우에게서 뺏은 아이스크림으로 시세 전광판을 가리켰다.

“어떻게 될 것 같아?”

“뭐? 시장? 당연히 오르겠지. 합의했는데 그럼 안 오르겠어? 오르는 거야 당연한 이야기지. 네가 내린다고 그래서 뭐 가만히 있었는데…… 오를 거야. 시장을 짓누르던 불안요소가 사라졌는데 떨어질 일이 있냐? 그런데 그걸 왜 물어?”

“그래. 이게 네 존재 이유다.”

한진영은 아이스크림의 한입에 삼켜 반을 뚝 잘라 먹고는 나머지를 이성우에게 넘겼다.

이성우는 또 다시 반이나 날아가 버린 아이스크림을 슬픈 눈으로 내려다본 채 한진영의 말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

아시아 시장이 시작하기 전에 전해진 뉴스로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아시아 주식시장은 상승 마감했다.

특히 우리나라는 2%가 넘는 상승을 보이며 전고점 돌파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기도 했다.

극적으로 이루어진 합의는 시장에 큰 환호를 가져다줬지만 반대로 슬퍼하는 곳도 있었다.

신성그룹과 같이 합의되지 않은 채로 질질 시간만 끌 것으로 예상했던 곳에서는 예상치 못한 합의에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노 전무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부터 발에 땀이 나도록 여기저기를 뛰어다녔다.

그룹 본사에 다녀온 그가 어느새 FICC 본부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으며, 해가 진 뒤에는 전화기를 붙잡고 이제 하루가 시작되려는 미국과 통화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바쁘게 움직여도 얻은 수확은 시원치 않은 듯했다.

합의가 타결됐다는 소식에 금리와 채권이 안정을 찾았기 때문이다.

노 전무의 바람과 달리 움직이는 시장에 그의 얼굴은 검게 타들어만 갔다.

그리고 이런 노 전무의 마음을 더욱 태우는 일이 그날 미국에서 벌어지고 말았다.

한진영이 장근수에게 이야기했던 대로 시장 전망치보다 낮은 합의를 한 것에 미국에서는 환호로 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대했던 금액만큼의 부채한도가 증액되지 못하자 시장에서는 우려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주식시장을 비롯한 위험자산은 빠르게 빠져 내려갔으며 국채와 같은 안전자산으로 사람들의 돈이 계속 몰려들었다.

나스닥은 2%가 넘게 하락했으며 원유선물은 3%가 넘는 폭락을 보여줬다.

아시아 시장에서 2%가 넘게 올랐던 것을 생각한다면 원유선물의 폭락은 미국 투자자들이 이번 합의에 얼마나 실망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지표라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

금과 같은 안전자산은 위험자산의 하락과는 반대되는 모습을 보였다.

금 선물이 2% 가까이 오르며 안전자산으로의 쏠림을 잘 보여주었다.

그리고 문제의 국채는 10년 물을 기준으로 가격이 급등했다.

안전자산으로 몰린 자금이 국채에 쏟아져 들어와 가격을 올려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국채 가격의 급등 때문에 신성그룹은 단숨에 손실이 1,000억대에 진입하고 말았다.

이런 추세는 계속 이어졌다.

주식시장을 비롯한 상품선물 시장은 꾸준히 하락하는 모습을 보였다.

시장의 불만은 수그러들지 않아 합의하느니만 못하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

다행이라면 합의 당일 날 큰 폭으로 올랐던 국채 가격이 웬일인지 잠잠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일 날 쏟아져 들어왔던 금액이 전부여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어서 그런 것인지 시장참여자들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어쨌든 안전자산으로의 자금 쏠림 현상이 보이지 않는 것에 시장의 흔들림이 조만간 멈추지 않겠냐는 기대를 불러일으키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주말을 앞둔 투자전략사업부에 최준호와 한진영이 함께 시세 전광판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눴다.

“죽어라. 죽어라 하는구나.”

최준호는 하락하는 지수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디폴트 이야기도 찝찝하게 끝이 나서 분위기가 좋지 않은데 더블딥은 또 뭐야?”

“서브프라임 이후 반짝 회복했던 경기가 다시 주저앉을까 봐 걱정이 되는 거겠죠. 그렇다고 지난번처럼 마냥 달러를 풀어댈 수도 없으니까요.”

“그렇겠지. 하필이면 재정적자 문제가 깔끔하게 끝맺음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 달러를 푸는 일을 벌일 수는 없으니까. 합의라도 넉넉하게 해서 여유를 좀 챙겨뒀다면 괜찮았을 텐데…… 2조 5,000억이 뭐냐? 2조 5,000억이…….”

한동안 깊은 한숨을 내쉬던 최준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야 하방 포지션 잡고 있어서 좋다지만 그래도 저건…… 좀 너무하잖아.”

최준호는 손가락으로 전날 2%가 넘게 하락한 국내종합주가 지수를 가리켰다.

2,050선마저 깨버린 종합주가지수는 오늘 갭으로 2,000선을 깰 것이 확실해 보였다.

전날 미국이 디폴트에 이은 더블딥 우려로 3%가 넘게 하락했기 때문이다.

최준호는 동시호가를 보며 혀를 찼다.

“일주일 만에 10% 하락이라니? 이럼 디폴트 뜬 거 하고 뭐가 달라?”

이대로 상승장이 끝나 버린 것을 안타까워한 최준호였다.

한진영은 그런 최준호를 보고 빙그레 웃은 뒤 화제를 바꿨다.

“노 전무는 어쩌고 있습니까?”

최준호는 동시호가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 화면에서 시선을 돌려 한진영을 바라보고 대답했다.

“어쩌고 있기는…… 그래도 국채 가격이 크게 움직이지 않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지. 그런데 그럼 뭐해 벌써 깨진 돈이 1,200억이라나? 나 참…… 배짱도 좋아.”

최준호는 잠시 주변을 살펴 다른 직원이 자기 이야기를 듣는지 확인하고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없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지금은 다시 큰소리를 치고 다닌다는 이야기가 들려.”

“큰소리요? 어떤 큰소리요?”

“국채 가격이 하락해서 결국에는 자기 말이 맞을 거라고 말이야. 증시가 이렇게 빠져 내려가는데도 국채 가격이 움직이지 않는 게 다 상승 여력이 없어서 그런 거란다.”

“경영지원본부 사람이 별걸 다 주장하네요.”

“차기 사장 자리를 노리고 그러는 거 아니겠어? 뻔하지.”

최준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이야기하고는 동시호가가 끝이 나고 장이 시작되려는 시세 전광판을 바라봤다.

한진영은 그런 최준호를 바라보고 물었다.

“사장 자리요?”

“몰랐어? 조만간 그룹 사장단이 새롭게 구성될 거라는 소문이 있어.”

“사장단 구성은 연초에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게 말이야. 하반기 구성이라고 하기에는 벌써 8월인데 뭘 한다는 건지 모르겠다. 하여튼 소문이 그래. 소문이…….”

최준호가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 때 동시호가가 끝이 나고 장이 시작됐다.

예상대로 종합주가지수는 2,000을 가볍게 깨고 내려간 것도 모자라 1,950선마저 깨버리고 말았다.

시장은 더블딥에 대한 공포가 극에 다다른 모습이었다.

한진영은 최준호의 이야기를 듣고 노 전무가 그렇게 무리를 한 이유를 알게 됐다.

남원석 사장은 누가 봐도 임시사장이었다.

신성건설 출신으로 투자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매각에 실패한 증권사를 잠시 맡는 역할을 할 뿐 그 이상의 역할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새로운 사장을 앉히려고 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새로운 사장은 증권사 내에서 승진하여 앉힐 것이 분명했다.

전에 투자에 관한 업무를 모르는 사람이 사장을 했다면 이번에는 투자에 관해 아는 것이 있는 사람이 사장이 되는 것이 순서로 봤을 때 당연했기 때문이다.

노 전무가 노린 것이 그것이었다.

실적을 쌓아 차기 사장 자리에 앉는 것.

노 전무는 그것을 염두에 두고 그룹이 하려는 일에 적극 개입하여 일을 진행한 것이었다.

한진영은 이제야 보이는 노 전무의 꿍꿍이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한진영이 한숨 속에서도 종합주가지수의 하락은 계속됐다.

1,950을 깨고 내려간 지수는 1,920까지 두드리며 1,900선 하향이탈에 대한 공포를 시장에 선사했다.

단숨에 2,100 중반대에서 떨어져 내려 1,900대 하향이탈을 보이는 시장에 잠시 공포를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오후 들어 시장은 반등을 보여줬다.

미국이 이쯤에서는 반등을 보여주지 않겠느냐는 기대감에 시장은 어떻게든 1,950대를 지키려는 모습을 보인 것이었다.

기관을 중심으로 개인투자자들까지 지수 반등에 가세했다.

하지만 외국인의 매도에 시장의 상승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장은 1,950을 지키지 못한 채 1,944에서 일주일을 마감했다.

그렇게 문제의 주말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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