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떠나려 한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한진영은 목을 쭉 빼고 있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리고 그들에게 유일한 기회를 설명했다.
“신성증권을 매각하는 겁니다.”
“뭘 한다고? 신성증권을 매각하라고?”
이수암 회장과 추 부회장 모두 한진영의 말에 몸을 뒤로 물렸다.
그리고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안 돼. 그럴 순 없어.”
“그럼요. 그럴 순 없지요. 신성증권은 우리 신성그룹의 주력 계열사예요.”
지금까지 변변한 의견이라고 할만한 것을 제대로 하나도 내놓지 않던 이수암 회장도 이번만큼은 적극적으로 나왔다.
“우리가 아무리 어렵다고 하더라도 신성증권은 안 돼요. 만약 매각해야 한다면…… 다른 거로 해요. 다른 거…….”
이수암 회장은 잠시 추 부회장과 눈을 마주친 뒤 무언가가 떠올랐던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한진영에게 말했다.
“그래요. 신성정밀. 그거 좋겠네요. 신성정밀을 내놓는 거로 합시다.”
한진영은 이수암 회장의 말에 헛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회장님. 지금 상황 파악이 잘 안 되는 것 같으니 제가 자세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한진영은 추 부회장을 슬쩍 돌아본 뒤 이수암 회장을 향해 천천히 이야기했다.
“지금 신성그룹은 자금난에 빠져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외부에서 자금을 끌어왔습니다. 그것도 5,000억을 두 번이나 말입니다. 그리고 처음 끌어온 5,000억 중에 현재 3,500억을 날리고 1,500억이 남은 상황입니다. 기존에 갚아야 할 돈에 3,500억이 더해졌다는 말입니다. 제 말이 틀립니까? 추 부회장님?”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한 번 더 짚어나가자 추 부회장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지고 말았다.
“틀린 거 없네.”
“네.”
한진영은 이수암 회장을 다시 돌아보고 말했다.
“신성정밀은 이미 회장님이 지분을 담보로 하여 5,000억을 끌어온 곳입니다.”
“그 돈 쓰이지 않았으니 갚으며 되지 않나요? 한 부부문장이 대기하라는 말 덕분에 쓰이지 않았다고 했잖아요. 추 부회장님. 맞지요?”
이수암 회장이 추 부회장을 보고 물었지만, 추 부회장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이수암 회장은 무언가 일이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왜요? 뭐가 잘못됐어요? 돈을 안 썼으니…….”
“회장님. 지금은 갚는다고 해서 갚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어째서요?”
이수암 회장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한진영과 추 부회장을 번갈아 바라봤다.
추 부회장은 잠시 한진영을 바라본 뒤 한숨을 내쉬고는 이수암 회장에게 설명했다.
“주식 담보대출을 받으며 걸은 조건에…… 중도상환 시 수수료를 지급해야 한다는 것이 조건으로 명시되어 있습니다.”
“중도상환 수수료요? 얼마나 걸려있는 겁니까?”
“10%입니다.”
“네? 아니. 무슨…… 중도상환 수수료가 10%나 된다는 말입니까?”
“그런 조건이 걸렸기에 담보대출이 가능했던 겁니다. 풋옵션에 바이백 조항 같은 것도 덕지덕지 붙어 있고요. 회장님. 이게 우리 그룹의 현실입니다.”
신성그룹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는 이미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현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좋은 조건으로 대출을 진행할 수는 없었다.
모욕적으로 느껴질 만한 조항들을 덕지덕지 붙여야 겨우 진행이 가능했던 것이었다.
“10%라면…… 그럼 500억이 더 있어야 한다는 말이에요? 지금 상황에서요?”
추 부회장은 이수암 회장의 반응에 씁쓸하게 웃었다.
돈을 빌릴 때는 눈이 벌게져서 수수료가 10%더라도 아랑곳하지 않고 돈을 빌렸었다.
일이 잘된다면 10%인 500억쯤이야 갚는 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이 잘되기는커녕 생각하지도 못한 최악의 결과를 만들어내고 말았다.
추 부회장은 참담한 심경을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한진영은 추 부회장과 이수암 회장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염두에 둬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수암 회장은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것과 같은 표정으로 한진영에게 물었다.
“뭘 또 염두에 둬야 한다는 말인가요?”
“아직 우리가 손해를 봤다는 사실을 외부에서는 모른다는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떨구고 있던 추 부회장이 고개를 들어 한진영을 바라보고 물었다.
한진영은 그런 추 부회장을 향해 말했다.
“아직은 미국 쪽에서 벌어진 일로 인해 혼란스러워 우리의 손실이 드러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만약 안정을 찾은 뒤 우리가 손실을 본 사실이 외부에 알려진다면…… 그걸 감당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당장 은행권에서 자금 회수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아직 만기가 남았는데 자금 회수라니요?”
이수암 회장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추 부회장을 돌아봤다.
추 부회장은 눈빛이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추 부회장도 걱정하던 것이 그것이었다.
그래서 한진영을 급히 불러 새로운 투자를 통해 돈을 만들 수 있겠냐고 물었던 것이었다.
추 부회장은 착잡한 목소리로 한진영을 향해 물었다.
“언제쯤 알려질까?”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다행히도 저희 사업부가 벌어들인 돈이 있으니 급한 불은 끌 수 있겠지요. 그걸 통해 잠시 연막을 칠 수도 있을 테고요.”
“연막밖에 안 된다는 이야기인가? 700억을 벌었는데도?”
“그 이상을 하기에는 돈이 부족합니다. 자기자본을 통한 투자가 아니라 고객에게 투자받은 돈으로 벌어들인 돈입니다.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금액은 200억이 채 되지 않습니다.”
추 부회장은 다시 한번 눈을 감았다.
투자전략사업부가 벌어들였다는 돈 700억을 그룹에서 온전히 써도 모자랄 판이었다.
하지만 그 돈의 대부분은 고객에게 돌아가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투자전략사업부가 다른 곳과 달리 수익의 일정 부분을 신성증권이 먹는다는 조항을 걸어놓은 덕분에 200억에 가까운 돈을 손에 넣을 수도 있었던 것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아무리 큰돈을 벌었다고 하더라도 수수료 외에는 신성증권이 움직일 수 있는 돈은 푼돈에 불과했을 게 분명했다.
추 부회장은 꼼짝없이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신성증권밖에 없는 건가?”
“추 부회장님.”
이수암 회장이 반대하려 했지만, 이야기를 계속할 수 없었다.
추 부회장이 이수암 회장을 빤히 바라보고 고개를 저었기 때문이다.
추 부회장까지 무너진 것을 확인한 한진영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잠시 지어 보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른 계열사는 돈이 되지 않습니다. 지금 한창 잘나가는 신성증권만이 돈이 됩니다. 그리고 노리는 곳이 있기도 하고요.”
“노리는 곳? 설마 신성증권을 눈독 들이고 있는 곳이 있다는 말인가?”
“있습니다.”
한진영이 고개를 끄덕인 후 대답했다.
“기풍철강이 신성증권을 원하고 있습니다.”
“기풍철강과는 지난 번에 분명 거래가 깨졌는데…… 기풍철강의 이 회장님이 신성증권을 다시 원하고 있다는 말인가?”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으니까요. 두 분께서도 신성증권을 내놓고 싶지 않을 정도로 신성증권은 매력적인 물건입니다. 지금은 말이죠.”
“그래도…… 그때 기풍에서는 4,000억 이상을 주지 않으려 했다네. 거기다 옵션까지 걸어가며 주가가 하락하게 된다면 보상금을 요구하려고까지 했고…… 여러 가지로 복잡하게 계약을 진행하려 했는데 하필이면 기풍이라니? 꼭 거기와 해야만 하나? 4,000억 가지고는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는 것밖에 되지 않아. 그런데 그런 돈을 가지고 기풍에 신성증권을 넘기는 것은…… 탐탁지가 않은 일이야.”
자기들이 한 실수는 생각하지 않는 추 부회장이었다.
그 실수가 없었다면 신성증권을 넘긴 돈만으로도 모든 것을 해결하고도 남았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은 실수하며 입은 손실까지 모두 복구하는 계약을 바라고 있었다.
한진영으로서는 욕심을 내는 그의 모습이 어처구니없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신성 품에서 나가려 한 선택이 틀리지 않았구나.’
한진영은 자기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무능한 것까지는 이해하더라도 욕심까지 많은 모습에 더는 신성그룹에 대한 미련이 남지 않게 된 한진영이었다.
한진영은 아쉬움으로 얼굴을 가득 칠하고 있는 추 부회장에게 웃으며 말했다.
“상황이 바뀌었으니 4,000억으로는 안 되지요.”
“그럼?”
“6,000억을 받아 오겠습니다.”
“6,000억?”
“네. 그렇게 되면 손실을 메우고도 애초에 원했단 2,000억의 자금을 손에 쥘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게다가 이 회장님의 선택에 따라 한동안 관계를 계속 이어가는 것 또한 가능한 것이고요. 증권사를 품에서 내놓기는 했지만, 곁에서 도움을 계속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고 계시지요? 그리고 기풍철강의 백기사 역할까지 기대한다면 나쁜 거래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으음…….”
추 부회장은 짧은 침음성을 내뱉으며 이수암 회장을 돌아봤다.
여전히 뭔 소리인지 잘 알아듣지 못하는 이수암 회장은 눈만 끔벅거릴 뿐이었다.
추 부회장은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처음과는 달리 잔뜩 힘이 빠진 얼굴로 한진영에게 말했다.
“6,000억 가능 하겠나? 그 정도 돈이라면…… 그래. 어떻게든 살아갈 여력을 만들 수는 있을 것 같아. 그런데…… 4,000억으로도 사는 것을 꺼리던 기풍철강이 6,000억에 인수를 하려 할까?”
“도와드리겠습니다.”
불쌍하게까지 보이는 추 부회장의 눈빛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고 있는 한진영은 그가 원하는 대답을 먼저 건넸다.
“그리고 이번에는 덕지덕지 옵션을 붙이지 않은 채 깔끔하게 6,000억을 만들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거기에 더해 플러스 금액을 붙이도록 노력도 할 테고요.”
“플러스 금액?”
“6,000억이 최소 하단 금액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10억이라도 거기에 더 붙여서 가지고 오도록 할 테니 기다려 주십시오.”
어둡기만 했던 추 부회장의 얼굴이 점점 환하게 변해갔다.
한진영이 건넨 말에 희망을 봤기 때문이다.
구덩이에 빠져 빛조차 보이지 않는 그들 앞에 나타난 한진영의 손.
그 손에 희망을 찾은 듯한 느낌을 받은 추 부회장은 한진영이 내민 손을 꼭 잡은 채 놓지 않으려 했다.
“그래 준다니 고맙네. 꼭 부탁하네. 꼭 좀 부탁해.”
“저를 믿으시면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협상도 자네가 직접 나서서 해주는 거지?”
“그럼요. 제가 기풍철강의 이 회장님과 담판을 지어서 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저를 믿고 기다려주시면 됩니다.”
“그래. 지난번에도 자네를 믿었어야 했는데…… 어쨌든 이번에도 같은 실수를 할 수는 없지. 한 부부문장.”
추 부회장은 한진영의 손을 덥석 잡고 애원했다.
“이번 일만 잘 처리해주면 자네에게 섭섭하지 않게 보상하겠네. 내가 약속하고 회장님이 보증하네. 그러니 꼭…… 꼭 좀 부탁함세.”
“그래요. 보상. 보상해야지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보상하도록 할게요.”
지금까지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이수암 회장도 보상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한진영은 드디어 기다리던 보상 이야기를 상대의 입을 통해서 먼저 듣게 되지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한진영은 그런 미소를 감추지 않고 그들을 향해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런 한진영의 모습을 보고 이수암 회장과 추 부회장은 한진영을 믿는 마음이 더욱 강해졌다.
한진영의 미소 속에서 자신감을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
미국의 신용등급 강등 충격에서 시장은 쉽사리 헤어나오지 못했다.
급하게 S&P가 상징적인 의미의 강등이라며 자기들의 행동을 무마하려 했지만, 이미 지나간 버스나 마찬가지로 시장은 받아들였다.
미국의 신용등급 여파의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당사자인 미국이 아니라 신흥국이었다.
이번 일로 미국의 소비가 침체 국면에 빠져든다면 신흥국이 가장 큰 타격을 받는다는 해석에서였다.
그리고 이런 신흥국의 타격에 한국도 무사할 수는 없었다.
단숨에 1,700대를 깨버린 종합주가지수가 회복하기는 했지만, 충격의 여파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1,900대를 눈앞에 두고 다시 1,700대 초반까지 미끄러져 내려오는 것이 아무래도 오랜 시간이 걸릴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유가도 마찬가지였다.
100불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70불 대까지 굴러떨어진 유가는 70불 대에서 계속 머물며 오히려 하방압력이 머리에 쌓여만 가는 것처럼 보였다.
시장은 회복국면이 아닌 침체국면으로 들어갈 것을 준비하는 모양새였다.
이렇게 시장이 좋지 않음에도 투자전략사업부만큼은 축제를 즐기는 모습이었다.
포지션을 잡았던 모든 자리를 일주일도 되지 않아 청산했으며 퀀트 프로그램만이 박스권 장세에서 타박타박 수익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차례 폭풍이 스치고 지난 상황에서도 한진영은 바쁜 시간을 보냈다.
수익이 난 펀드 자금을 어떻게 관리할지 운용 측 직원들과 논의했다.
그리고 그 논의가 끝이 나면 매일 같은 시각에 퀀트 프로그램의 수익과 운용 방식에 대한 리뷰를 김준하와 박도하 등과 함께 확인하는 자리를 가졌다.
최준호 부문장과 함께 사업부의 진행 방향을 이야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또한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찾아오는 김정대와 장근수를 맞이하느라 하루가 48시간이라도 모자란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신성그룹의 이수암 회장과 추 부회장이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일을 진행하는 날이었다.
아침부터 한진영의 곁을 맴도는 이성우에게 한진영이 드디어 말을 건넸다.
“몇 시라고?”
“12시. 12시에 식사하면서 이야기하기로 했다고 말했잖아.”
“지금 몇 시지?”
“지금 11시. 진영아. 한 부부문장님. 가자. 응? 10분이라도 먼저 가서 기다리도록 하자? 어?”
한진영은 발까지 동동 구르는 이성우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지막 보던 것을 김준하에게 넘겼다.
그리고 돌아와서 다시 이야기할 것을 약속하고 이성우의 등을 손바닥으로 때리며 말했다.
“가자.”
이성우는 듣고 싶었던 말을 들어서 그런 것인지 조금 전과는 달리 밝아진 얼굴로 한진영보다 앞서 사업부를 나갔다.
그리고 기풍철강의 회장이자 아버지인 이정훈 회장과 약속되어 있는 SL호텔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