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협상자리 한 번으로 끝내자
이성우는 호텔로 향하는 차 안에서 긴장한 표정으로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평소와 달리 한진영에게 농담도 건네지 않는 것이 지금 자리에 대한 압박을 생각 이상으로 받는 듯한 모습이었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간단하게 말을 걸었다.
먼저 한진영이 농담도 건네고 일 이야기가 아닌 다른 이야기로 분위기를 전환하기도 했다.
그 덕분인지 이성우는 차 안에서 굳었던 어깨가 많이 풀렸다.
그러나 그것도 거기까지였다.
이정훈 회장이 자리하고 있는 호텔에 도착하자 다시 이성우의 어깨는 굳어버리고 말았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의 등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짝!
난데없이 얻어맞은 이성우는 호텔 로비가 울릴 정도의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아야! 뭐야?”
한진영은 얼얼해진 자기 손바닥을 주무르며 웃었다.
“이제 좀 긴장이 풀리냐?”
“긴장이 풀리기는 뭐가 풀려? 등짝 아파 죽겠구먼. 왜 갑자기 내 등을 때리고 그래?”
“너 긴장하고 있어서 내가 긴장 풀어주려고 그런 거지.”
“야 인마. 한 번만 더 긴장 풀어줬다가는 등짝 떨어져 나가겠다. 아파 죽겠네.”
아프다며 인상을 찌푸린 이성우는 손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한진영에게 맞은 자리가 괜찮은지 손으로 만져보려 했지만 닿지 않아 답답해하는 이성우였다.
그런 이성우의 모습을 보고 크게 웃은 한진영은 멀리서 다가오는 기풍철강 비서실 직원을 확인했다.
그리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이성우의 손을 잡아 똑바로 서게 해준 후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로 네 위치가 달라진다. 그러니까 나만 믿고 긴장 풀어. 그리고 너는 오늘 자리에서 얼굴을 비추는 것으로 할 일을 다하는 거니까 나한테 다 맡겨. 약속대로 너를 높은 곳에 앉혀줄 테니까.”
한진영의 말에 그제야 긴장이 풀린 이성우였다.
호텔에 들어왔을 때 굳어있던 어깨가 풀린 것이 눈으로 확인될 정도였다.
그렇게 긴장이 풀린 이성우는 다가온 기풍철강 회장 비서실 직원을 향해 먼저 아는 척을 했다.
“회장님께서 도착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저희가 먼저 도착해서 호텔 측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습니다.”
“다행이군요. 회장님보다 늦게 왔을까 봐 걱정했는데 말입니다. 그럼 안내해 주시겠습니까?”
이성우는 태연한 표정으로 비서실 직원을 향해 말을 하고는 한진영에게 가자는 손짓을 건넸다.
한진영은 이런 이성우의 모습에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가만히 이성우가 하려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한진영이 말을 안 하는 것만으로 비서실 직원 앞에서 이성우의 기를 살려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성우와 한진영을 안내하는 회장 비서실 직원은 SL호텔의 레스토랑이 아닌 비즈니스 룸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식사 약속이라고 했는데 바로 비즈니스 룸으로 가는 겁니까?”
이성우의 질문에 직원이 살짝 고개를 숙인 후 대답했다.
“SL호텔에는 이야기해놓은 상태입니다. 음식을 바로 준비해서 비즈니스 룸으로 보내주기로 말입니다.”
“그러니까 일 이야기를 하면서 밥을 먹자는 이야기인가 보군요. 이거 참 불편한 자리가 될 것 같은 예상이 든다. 안 그래?”
이성우는 슬쩍 한진영을 바라봤다.
사적으로는 아버지인 이정훈 회장이 너무 일방적으로 자리를 마련한 게 아니냐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한진영은 이정훈 회장의 처사에 아무런 불만이 없는 듯 보였다.
그러냐는 듯한 표정으로 비서실 직원을 따라 비즈니스 룸으로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SL호텔이 자랑하는 비즈니스 룸은 기업 간의 협상 등을 할 때 자주 애용하는 곳이었다.
조용한 것이 다른 곳과 분리되어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여기보다 더 나은 곳이 없다는 평가가 나오는 곳이었다.
그런 곳에 음식까지 가지고 오게 하였으니 이정훈이 지금 자리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지 한진영은 이것만으로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한진영은 오히려 이런 이정훈의 준비가 그의 마음가짐을 알 수 있어서 마음에 들었다.
‘결론을 낼 수 있겠어.’
괜히 시간을 끌고 이리저리 재며 몇 번의 만남 없이 바로 이 자리에서 모든 것을 끝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한진영이었다.
한진영은 열린 문을 통해 아무도 없는 비즈니스 룸에 들어가 준비된 자리에 먼저 착석했다.
그리고 뒤를 이어 이성우까지 자리에 앉은 뒤 10여 분이 흘렀을 때쯤 이정훈이 몇몇 사람들과 비즈니스 룸으로 들어왔다.
“젊은 사람들이 부지런도 하구먼. 일찍 왔어. 오래 기다렸나?”
이정훈이 반갑게 들어오자마자 인사를 건넸다.
한진영은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이정훈을 향해 손을 내밀고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잘 지내셨지요?”
“나야 자네 덕분에 잘 지냈지.”
괜히 인사로 건넨 말이 아니었다.
이성우가 8월을 주의하라는 말을 했지만, 그 말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이정훈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정훈은 진심으로 한진영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혹시 뭐 필요한 거 없나? 자네 이사 선물을 안 한 게 기억이 나서 말이야.”
“이사를 한 지 벌써 반년이 지났습니다. 괜찮습니다.”
“벌써 그렇게나 시간이 흘렀나? 하긴 저 녀석하고 비슷한 시기에 이사했지? 어떤가? 사는 곳은 마음에 들어?”
이정훈 회장은 자리에 앉으며 가벼운 이야기를 건넸다.
바로 본론에 들어가는 것보다 이렇게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가벼운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진영도 이런 이정훈 회장의 의도를 파악하고 편안한 태도로 이정훈이 건넨 이야기를 받았다.
“마음에 듭니다. 오히려 너무 좋아 혼자 사는 저에게는 과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도의 집입니다.”
“가구하고 가전은 다 있을 테고…… 그림은 어떤가?”
“마침 걸어놓을 그림이 없어 아쉬웠는데 잘됐네요. 그럼 제가 부탁해도 될까요?”
“부탁이라니. 별말을 다 하는 군. 가벼운 선물이니 자네도 가볍게 받아. 그래야 나도 마음이 편할 테니까.”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시원스러운 한진영의 태도에 이정훈이 마음에 든 듯이 크게 웃고는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비서를 손짓으로 불렀다.
“청풍 미술관에 이야기해서 보관하고 있던 김환기 선생 작품 하나 보내라고 해.”
“김환기 선생님 작품이요?”
이성우가 깜짝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그거…….”
“네 거 주는 것도 아닌데 왜 네가 놀라?”
일부러 들으라는 식으로 이야기했던 이정훈은 정작 놀라야 할 대상이 아닌 이성우가 놀라자 짜증 섞인 투로 이성우를 나무랐다.
그리고 한진영을 살피며 말했다.
“김환기 선생님 아나? 우리나라에서는 손에 꼽히는 작가님이시지. 선생님 작품을 집에 걸어 놓으면 손님들이 좋아할 거야.”
혹시나 김환기 화가에 대해 모를까 싶어 은근슬쩍 말을 건넨 이정훈이었다.
그러나 누구보다 한진영은 김환기 화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지금도 유명하지만 몇 년 뒤면 더 유명해질 화가였다.
바로 국내 경매가 상위 10위 작품들을 모두 그의 작품으로 채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그런 유명한 작가의 작품을 주겠다는 이정훈의 말에도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리고 크게 감흥을 느끼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김환기 선생님 작품을 집에 걸어놓는 것은 사치가 아닌가 싶은데요. 한 작품에 10억이 넘는 것들인데…… 특히 한국의 고갱이라는 평가까지 듣고 계시는 김환기 선생님 작품이라면 더욱 그렇고요. 저는 김환기 선생님의 대표작인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특히 좋아합니다. 조국을 그리워하시는 김환기 선생님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요.”
이정훈은 한진영을 가만히 바라보다 감탄 섞인 말을 건넸다.
“그림도 좋아하나?”
“김환기 선생님 작품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으니까요. 상식 수준에 올라가 계신 분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 그런데…….”
“감사합니다. 잘 받겠습니다.”
이정훈이 어물쩍거리자 먼저 감사 인사를 건네버린 한진영이었다.
이정훈은 한진영의 인사에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어? 어. 그래. 준다고 했으니 줘야지. 그래. 잘 걸어놓고 있게.”
“제일 좋은 곳에 걸어놓을 테니 나중에 성우 집에 놀러 오셨을 때 저희 집에도 한번 찾아와 주십시오. 회장님께서 선물하신 그림이 잘 있는지 확인 차원에서 말입니다.”
“하하하.”
이정훈은 마치 한대 얻어맞았다는 표정으로 즐거워했다.
준다고 했으니 안 주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냥 주려고 했던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기왕이면 이번 자리에서 조금이라도 유리한 위치를 잡으려 꺼낸 미끼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한진영은 미끼를 물다 못해 걸어놓은 낚싯대까지도 단숨에 입안에 집어 넣어버리고 말았다.
그것도 이정훈이 낚싯대를 낚아챌 시간도 주지 않고 말이다.
이정훈은 그런 한진영과 마주하고 앉아 있다는 사실에 즐거워하며 비서에게 진행하라는 손짓을 하고 말했다.
“성우네 갈 때 꼭 들릴 테니 좋은 자리에 걸어놓도록 해.”
“그럼요. 한 점에 10억이 넘어가는 물건인데 허투루 걸어놓지는 않겠습니다. 제일 좋은 자리에 걸어놓도록 하겠습니다.”
“하하하. 그래. 당연히 그래야지.”
이정훈은 크게 즐거워한 뒤에 양옆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소개했다.
“인사하게 회사 대표 고문 변호사와 우리 기획조정실 실장.”
이정훈의 소개에 한진영과 이성우가 인사했다.
그러자 그들도 각자 자기를 소개하며 간단한 인사를 나누었다.
이정훈은 대충 인사가 마무리되는 모습을 보이자 방 앞에 대기하고 있던 직원에게 손짓했다.
“여기 식사 내오라고 해.”
이정훈은 지시한 뒤 한진영을 마주한 채 양손을 맞잡았다.
“자 그럼 우선 식사가 나오기 전에 대충 입을 맞춰보도록 할까?”
“좋습니다.”
이정훈은 시원스레 대답하는 한진영의 모습에 다시 한번 웃어 보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우리 회사 대표 변호사와 기획조정실 실장을 데리고 이 자리에 온 이유를 알고 있겠지?”
“저도 기대하는 바입니다. 한 번의 만남으로 확실하게 마무리 짓는 것을 누구보다 저도 원하는 바니까요.”
“그래. 자네를 처음 봤을 때부터 나하고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 알고 있었네. 그런 의미에서 내가 먼저 시작하지.”
가벼운 이야기로 예열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이정훈 회장이 먼저 시동을 걸었다.
“4,000억.”
다짜고짜 숫자를 외친 이정훈은 가만히 한진영을 바라봤다.
그러나 한진영의 표정에는 흔들리는 모습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한가로운 가을 오후에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나온 소리를 들은 것처럼 아무런 반응이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이정훈은 그런 한진영의 모습에 오히려 즐거워하며 웃었다.
“재미있군그래. 이수암 회장님에게서 연락받았네. 자네와 이야기하고 결정한 것으로 매각 협상을 마무리 짓겠다고 약속하더군.”
“네. 들으신 대로입니다. 저와 결정하는 가격이 신성그룹이 신성증권을 기풍철강에 매각하는 가격이 될 겁니다.”
“이수암 회장님에게서 깊은 신뢰를 받고 있는 것 같아.”
“과분하게도 저에게 큰 신뢰를 보내주고 계셨습니다.”
“혹은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던가. 신성그룹 내에서 믿을 사람이 더는 없을 정도로…….”
이정훈 회장의 말에 한진영은 대답 없이 빙그레 웃기만 했다.
이정훈은 그 표정만으로 대답을 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별다른 말 없이 다시 협상 금액을 불렀다.
“5,000억. 그 이상은 안 되네. 알고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지난번 협상 금액은 4,000억이었네. 그것도 우리 쪽에 매우 유리한 옵션을 여러 가지 설정한 상태로 진행된 가격이었어.”
“그래서 깨졌지요.”
“그래.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통 크게 양보한다는 의미에서 옵션을 걸지 않을 생각이라네. 그리고 자네의 체면을 챙겨주는 의미에서 1,000억을 더할 생각이고…….”
“제 체면 값이 1,000억이나 되는 건가요?”
한진영의 말에 이정훈은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어떤가? 이 정도면 자네는 물론이고 이수암 회장님도 만족할만한 가격일 것 같은데?”
“기풍철강의 제안 잘 들었습니다.”
한진영의 말에 이정훈 회장은 눈썹을 올리고 흥미롭다는 눈으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한진영은 그런 이정훈 회장에게 자기가 가지고 온 제안을 내놓았다.
“저희 측 제안은 7,000억입니다.”
“뭐?”
“뭐?”
이정훈 회장은 물론이고 한진영의 곁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가만히 이야기 듣던 이성우도 같이 놀랐다.
분명 회사 내에서 나온 이야기는 6,000억이라는 소문을 듣고 자리에 나온 이성우였다.
그런데 그보다 1,000억이나 높은 7,000억을 부른 한진영 말에 놀람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진영은 여기서 끝내지 않았다.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매각 조건을 이정훈 회장 앞에서 펼쳐 보였다.
“7,000억을 모두 현금으로 지급해주는 것이 저희의 조건입니다.”
“모두 현금? 그건 안 돼.”
“현금에 일시불. 여기까지가 저희의 매각 조건입니다.”
안 된다는 이야기를 마치 듣지 못한 것처럼 한진영은 일시불이라는 조건까지 이야기했다.
이정훈은 그런 한진영의 말에 웃고 있던 표정을 지우고 안색을 굳혔다.
“자네 협상을 하기 위해 온 것 아닌가?”
“맞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할 수가 있나?”
“전혀 말도 안 되는 주장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풍철강에게 득이 되는 협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성증권을…… 7,000억에 인수하는 게 득이 된다고? 그것도 일시불 현금 박치기로 인수하는 게? 정녕 자네 계산기에서는 그게 타당하다고 답을 내놓고 있는 건가?”
“네. 타당하다 못해 기풍철강에게 매우 득이 된다는 답을 내놓고 있습니다.”
“허.”
이정훈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태연한 표정의 한진영을 바라봤다.
처음 자리했을 때부터 한진영은 한결같은 표정으로 이정훈을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한진영의 표정에는 이정훈이 자기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할 거라는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