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세 곳에서 돈과 명예를 얻는다
투자전략사업부 직원들은 갑자기 바뀐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했다.
이름만 들었을 뿐 얼굴도 보지 못했던 고위 임원들이 투자전략사업부에 뻔질나게 들락날락했기 때문이다.
오늘도 한 무리의 사람들이 아침부터 투자전략사업부에 찾아와 이성우와 이야기를 하고 돌아갔다.
이성우는 별로 반갑지도 않은 노인네들이 찾아오는 것이 불편했는지 그들이 떠나자마자 투덜거렸다.
“아니. 일도 못 하게 왜들 그렇게 뻔질나게 찾아오는지 모르겠네. 우리 사업부에 뭔 꿀이라도 숨겨놨나.”
“그러게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앞에 말에는 동의하지 못하겠네요.”
책을 한 무더기 들고 찾아온 조수아는 투덜거리는 이성우의 말을 받았다.
이성우는 그런 조수아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뭘 동의하지 못하는데요?”
“일한다는 거요. 대리님은…… 원래 일 안 하시잖아요.”
“왜 이래요? 그래도 우리 사업부 내에서…….”
이성우는 잠시 고개를 들어 사업부를 둘러보고 손가락으로 숫자를 셌다.
그 모습이 마치 자기가 몇 번째가 되는지 알아보겠다는 듯 보였다.
조수아는 그런 이성우를 향해 혀를 차고는 들고 있던 책 한 무더기를 내주었다.
“뒤에서 세면 첫 번째라서 쉬울 텐데 뭘 그렇게 세고 계세요? 그만하시고 이거요.”
“이게 뭔데요?”
“한 부부문장님이 공부하라고 건넨 책이요.”
“공부요?”
“네.”
조수아가 책상 위에 올려놓은 책을 이성우는 살펴봤다.
죄다 경영 관련 책들로 책 제목만 봐도 잠이 올 것만 같은 것들이었다.
“이걸 한 부부문장님이 줬다고요?”
“네. 앞으로 이 대리님은 다른 거 하지 말고 책 하루에 한 권씩 읽는 게 업무라고 하셨어요.”
이성우는 조수아의 말에 얼굴을 찌푸리고 한진영이 있는 쪽을 바라봤다.
마침 한진영도 이성우를 바라보고 있었는지 둘은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이성우는 한진영을 향해 담배를 쥐는 제스처를 취하며 나가서 담배를 피울 것을 제안했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의 모습에 말없이 웃음을 터트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제안을 수락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성우는 한진영이 수락한 것을 확인하고 얼굴을 활짝 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고 고되다. 열심히 일했더니 좀 쉬어야겠다.”
조수아가 건넨 책을 책상 위에 올린 이성우는 일어난 채로 손을 양쪽으로 뻗어 기지개를 켰다.
조수아는 그런 이성우의 모습에 졌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한진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자 이성우도 한진영을 따라 밖으로 나오며 두 사람은 흡연 구역으로 향했다.
그리고 흡연 구역에 도착하자마자 이성우는 한진영을 향해 말을 걸려 했다.
“야야. 언제까지…….”
“아이고 이게 누구십니까? 이성우 대리님 아니십니까?”
이성우는 자기를 향해 반갑게 인사하는 상대를 쳐다봤다.
“저기…… 누구신지…… 절 아세요?”
머리가 반쯤 벗겨진 처음 보는 남자였다.
그러나 그는 마치 이성우를 잘 아는 사람처럼 이성우의 손을 덥석 잡고는 자기를 소개했다.
“아 저를 모르시겠군요. 저는 기업금융 2사업부 부문장입니다.”
“아~ 네.”
기업금융 2사업부가 뭐 하는 곳인지도 모르는 이성우였다.
그런데 그곳의 부문장이 어떻게 자기를 아는 것인지 신기하기만 한 이성우였다.
여전히 모르겠다는 얼굴의 이성우와 달리 기업금융 2사업부 부문장이라고 자기를 소개했던 사람은 이성우를 잘 아는 듯했다.
그는 이성우의 손을 잡고 마치 오랜만에 만난 어린 시절 친구처럼 이성우를 살갑게 대했다.
한진영은 그런 둘을 보고 말없이 먼저 재떨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한참 동안이나 대화를 나눈 이성우는 잡혔던 손목이 얼얼하게 느껴지는지 손목을 만지며 한진영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한진영에게 라이터를 건네받아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요새 부쩍 모르는 사람들이 나한테 말을 걸어오네.”
“이유를 모르겠어?”
“이유? 이유가 있어서 그런다는 거야?”
불을 붙인 라이터를 건넨 이성우는 여전히 모르겠다는 얼굴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를 라이터를 든 손으로 내리쳤다.
“아야!”
머리를 얻어맞은 이성우는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를 향해 한심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너는 내가 신성그룹 회장님 만나서 협상 내용 보고하고 왔다는 거 알면서도 모르겠다는 말이 나오냐?”
“그게 왜? 아직 인수가 결정된 것도 아닌데…….”
이성우는 억울한 표정으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이성우도 그걸 생각 못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직 인수협약서를 작성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기업의 총수끼리 나눈 이야기가 외부로 새어나올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느 쪽에서도 이야기가 새어 나온다면 그건 심각한 귀책 사유가 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찌푸린 얼굴을 하는 이성우를 끌어당겨 어깨에 손을 올린 뒤 이야기했다.
“신성그룹이 어떤 상황이냐?”
“어떤 상황인데?”
한진영이 잠시 이성우를 바라보고 답답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위태위태한 상황이야. 순간적으로 그 많은 돈을 날렸는데 멀쩡하겠어? 게다가 가뜩이나 돈이 부족해 버거운 상황이었는데 말이야.”
“그런데?”
“그걸 직원들이 모르겠어? 회사 사정을 가장 잘 아는 건 직원들인데 그런 걸 눈치 못 채겠냐고?”
“그거하고 나를 아는 거하고 뭔 상관인데? 설마 이수암 회장님이 신성증권 매각 사실을 흘렸다는 이야기야?”
“아닐 거 같아?”
한진영이 이성우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로 이성우를 바라봤다.
이성우는 그럴 리가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만약 그렇게 됐다가는 계약이 틀어질지도 모르는데?”
“그렇지. 평소라면 그렇겠지. 기업 매각 같은 것은 극비 중의 극비로 다뤄야 하는 사안이니까. 하지만 이번은 달라.”
“뭐가 다른데?”
“우선은 술렁이는 직원들을 잠재울 필요가 있어. 그렇지 않으면 매각이고 뭐고 하기 전에 내부 동요로 더 큰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니까.”
이성우는 한진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의 모습에 옅게 미소 지으며 이야기했다.
“그리고 계약서를 쓰지 않았을 뿐이지, 이미 매각은 진행단계를 넘어섰다고 판단한 거야.”
“진행단계를 넘어섰다고?”
“그래. 지금이라도 당장 이수암 회장님은 사인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야. 6,000억을 기대했는데 7,000억을…… 그것도 현금 일시불로 받는다는 조건에 이수암 회장님은 펜 뚜껑을 열어놓고 사인할 날만 기다리고 있는 입장이니까.”
“아버지는?”
“이정훈 회장님도 마찬가지야. 아마 내부적으로 계약 진행에 돌입하셨을 게 분명해. 그만큼 신성증권은 기풍철강 측에도 중요한 회사가 되어 버렸거든.”
“네 말대로 그룹화를 진행하기 위해서?”
“그래.”
한진영의 말에 이성우는 고개를 여전히 갸웃거렸다.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이 하나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뭐가 맘에 안 드는 듯한 표정이다. 왜? 뭔데 그래?”
한진영의 말에 이성우는 급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야. 마음에 안 들기는…… 내가 뭐 마음에 안 드는 게 있겠어?”
“표정이 마음에 안 든다고 이야기하는데. 괜찮으니까 말해봐. 뭔데?”
한진영의 말에 이성우가 쭈뼛거리며 이야기했다.
“아니. 다른 게 아니라. 흐음~ 아직 하나 남았잖아.”
“하나 뭐?”
“대한정유. 거기하고 이야기 아직 안 되지 않았어? 그런데 이수암 회장님이나 아버지나 너무 섣부르게 나가시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어서…….”
한진영은 이제야 대화가 통하는 듯한 이성우의 모습에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수룩해 보이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생각을 할 수 있는 머리를 가지고 있는 것에 한진영은 만족스러웠다.
이런 이성우라면 자기와 손발을 맞추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친분과 호흡적인 부분을 따진다면 늙은 너구리같이 마음에 들지 않는 늙은이들보다 이성우 쪽이 100배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진영은 어깨에 올린 손으로 이성우의 등을 한 대 때렸다.
짝!
“아야! 왜 그래?”
이성우가 아프다는 듯이 등을 어루만졌다.
“두 분은 나를 믿는데 너는 나를 믿지 못하는 거냐?”
“내가 왜 너를 못 믿겠어.”
“그럼 믿어. 그건 내가 해결할 수 있으니까. 너는 그런 걱정하는 것보다 앞으로 찾아올 사람들 잘 살펴봐.”
“살펴보라고?”
“그래. 너에게 잘 보이려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바로 너하고 앞으로 함께 일할 사람들이야. 그러니 좀 이른 감이 있지만, 옥석 가리기를 지금부터 해야 하지 않겠어?”
이성우는 등을 어루만지는 손을 떼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한진영의 말대로 일이 시작되기 전에 미리 정리하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남은 의문이 있었다.
“그런데…… 내가 기풍철강의 아들이라는 건 어떻게들 알고 있는 거지? 그 사실을 아는 사람 얼마 없는데…… 혹시 네가 알렸냐?”
이성우가 한진영을 향해 손가락질하자 한진영은 웃으며 담뱃불을 껐다.
“소문을 내는데 가장 좋은 게 뭐겠냐? 신성증권을 인수하는 회사인 기풍철강의 아들이 신성증권에 다니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더해지면 듣는 사람들은 어떻겠어? 신뢰도가 급격히 오르지 않겠어?”
“이수암 회장님이 흘렸다고?”
“뭐…… 이수암 회장님이라기보다는…… 그쪽 라인에서 흘렸다고 하는 편이 정확한 표현이겠지. 그러니 지금부터 열심히 사람 만나고 공부도 빼먹지 말고 해. 내가 조수아 씨 통해서 준 책들 봤지?”
“보기는 했는데…… 공부하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조수아가 건네준 경영에 관련된 책들을 떠올리고 이성우는 울상을 지었다.
“아직 네가 후계자로 낙점받은 건 아니야. 네 동생이 벌써 자원개발로 대박을 터트린 걸 떠올리면 너는 갈 길이 멀어.”
“맞아. 그것도 물어보려고 했어. 도대체 하필이면 왜 리튬이야? 그쪽은 유정이 쪽이란 말이야.”
이성우의 동생이자 현재 기풍철강 자원사업부의 수장으로 앉아 있는 사람이 바로 이유정이었다.
이성우와 기풍을 놓고 경쟁을 벌일 상대로 현재까지는 이성우보다 한 걸음이 아니라 열 걸음은 앞서있다고 판단되는 존재였다.
이성우는 그런 동생을 도와주는 것이 못마땅한 듯이 보였다.
알아서 판매처까지 잡아와 준다는 것에 이유정이 가만히 앉아서 실적을 올리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마저 들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유망한 분야니까 너도 마냥 관심 끄고 있지는 마.”
“유망하다고?”
“그래. 앞으로 많이 유망해질 거다. 그래서 내가 끌어와서 붙이려고 하는 거야.”
“끌어와서 붙이다니?”
“대한정유에 LZ까지 엮으려고.”
“LZ까지?”
이성우는 동생 이야기를 한 것뿐인데 LZ그룹 이야기까지 나오는 것에 놀라는 모습이었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를 향해 천천히 자기가 그리고 있는 그림을 이야기했다.
“너희 기풍에서 생산한 리튬과 LZ신소재에서 개발한 분리막으로 대한정유 계열사인 대한에너지에서 배터리를 생산하는 거야. 어때? 재미있을 것 같지 않냐?”
“배터리? 휴대폰 배터리 말하는 거야?”
“지금은 가장 많이 쓰이는 곳이 휴대폰이기는 하지. 하지만 앞으로는 2차 전지배터리가 무수하게 많이 사용될 거야. 휴대폰만이 아니라 산업을 뒤흔들 정도로 많이…… 그렇게 되면 너희 기풍과 LZ 그리고 대한정유는…… 돈 좀 만지지 않겠냐?”
한진영의 말에 이성우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휴대폰에 들어가는 배터리가 산업을 뒤흔들 정도로 많이 사용된다는 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해서 그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한진영이 말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걸로 뭘 얻는데?”
“뭘 얻기는 돈과 명예를 얻지.”
“돈과 명예?”
이성우는 한진영이 말하는 돈과 명예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듯 보였다.
의혹이 풀리기는커녕 점점 커지기만 하는 것에 이성우는 답답한 마음마저 생겼다.
“명예는 뭐가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으니 그건 뒤로 미뤄두고…… 돈은 어떻게 버는데? 네 말대로라면 돈은 그 세 곳에서 벌 텐데 말이야.”
이성우는 말을 하다 무언가가 떠올랐다는 표정으로 다시 이야기했다.
“아! 세 곳을 이어줬다는 것으로 수수료를 받는 건가?”
한진영은 이성우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수수료를 당연히 받아야지. 공짜로 일해줄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그게 진짜는 아니야.”
“그럼 뭔데?”
이성우가 궁금하다는 얼굴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수수료가 진짜가 아니라면 그보다 더 큰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신성증권은 이제 앞으로 기풍증권으로 이름을 바꿀 테니 모기업을 돕는 일이 아니겠냐? 그리고 이 일을 처리한 신성증권이자 기풍증권은 공신록에 이름 올릴 거야 대표자를 너로 해서 말이지. 그러니 이게 명예가 될 테고…….”
한진영의 말에 이성우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생각해보니 이번 일로 인해 얻게 될 것이 자기도 적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한정유와 지난번에 약속했던 지분매각 주관사로 참여하며 자연스럽게 대한에너지의 사업에 참여할 기회를 잡을 수 있지. 그렇게 얻은 대한에너지 지분은 나중에 큰 도움을 줄 거야. 그리고 세 번째. 이게 제일 중요해.”
“그게 뭔데? 우리와 대한정유 쪽이 나왔으면 이제 LZ 쪽이 나와야 할 타이밍인데…….”
“맞아 LZ 쪽이 나와야지. 그리고 우리는 이곳에서 많은 돈을 벌 수 있어.”
“어떻게?”
“잊지 않았겠지? 우리가 LZ에 돈을 빌려주고 담보로 잡은 게 뭔지?”
이성우는 잠시 기억을 떠올리다 눈을 크게 뜨고 한진영을 바라봤다.
“LZ신소재?”
“그래. 그거야. 우리는 2,000억을 빌려주고 담보로 잡은 LZ신소재 주식. 큰돈은 여기서 나오게 될 거야.”
이성우는 한진영의 말을 듣고 한진영이 LZ와 이야기를 나눌 때부터 이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