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가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는 존재
기풍철강의 이정훈은 이성우가 회장실을 나가자마자 인터폰으로 밖에 대기하고 있던 권수형 미래전략팀 팀장을 불러들였다.
“부르셨습니까?”
“어. 그래. 앉아.”
이정훈은 권수형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후 담배를 집어 들었다.
권수형은 조심스럽게 이정훈 회장의 안색을 살피며 자리에 앉았다.
“혹시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권수형의 말에 이정훈 회장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서류를 권수형 앞으로 밀었다.
“이거 한번 봐봐.”
“이게 뭡니까?”
“성우가 가지고 온 거야. 기풍증권의 미래라고 하더군.”
“기풍증권의 미래요?”
권수형은 이정훈 회장의 말에 놀란 눈을 하고 서류를 내려다봤다.
이정훈 회장은 그런 권수형에게서 시선을 거둔 후 담배 연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후우~”
들이마신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은 이정훈 회장은 서류를 훑어보고 있는 권수형 부사장을 향해 말했다.
“1시간이 채 걸렸나? 허 참.”
“어떤 게 말이십니까?”
“내가 기풍증권의 사장 자리에 성우를 앉힐 이유를 만들어서 오라는 말을 했는데…… 그러고 한 시간 뒤에 이걸 내 앞에 가지고 오더군.”
“한 시간이요? 그럼…… 미리 만들어 놨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래.”
이정훈 회장은 담배를 깊게 들이마시고 다시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먼저 가지고 와서 나에게 이걸 내놨다면…… 내가 좋은 얼굴로 받지 않을 걸 알고 한 행동이야.”
권수형은 이정훈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정훈 회장이 스스로 알고 하는 말인 만큼 굳이 여기에 이야기를 더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정훈 회장은 잠시 쓴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미리 준비해놓았으면서도 모르는 척 내 지시를 다 받고 난 뒤에 내놓은 게 괘씸하면서도 한편으로 대견해 보이기도 해. 내 의중을 파악하고 있다는 뜻일 테니까.”
“이걸 미리 준비하셨다는 게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권수형은 이정훈의 말에 동감하면서 서류를 훑어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간단하게 계획이 쓰여있는 서류 안의 내용은 보이는 것만큼 간단하지가 않았다.
예측과 근거가 명확히 적혀 있었으며, 미국을 비롯한 해외 사례들까지 첨부하여 앞으로 나아갈 방향까지 정확하게 제시하고 있었다.
단순히 하루 이틀 먼저 준비한 게 아니라 어쩌면 기풍철강이 신성증권을 인수하려 하기 전부터 준비해놓은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드는 내용이었다.
권수형은 서류를 살피는 것을 멈추고 이정훈 회장에게 말했다.
“회장님. 이 정도라면 지금이라도 당장 시행해도 될 것 같습니다.”
“마지막까지 봐.”
“마지막까지요?”
이미 중간 부분에서 빈틈을 찾아볼 수 없어 이야기를 꺼냈던 권수형은 이정훈 회장의 말에 뒷장까지 확인했다.
그리고 맨 뒷장에 적혀 있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
“바로크 호텔 인수? 정말입니까?”
“이미 PEF 투자자들까지 섭외를 마친 모양이야.”
“섭외요? 일반 공모가 아니라 섭외를 했다는 말씀이십니까? 이거…… 지금 여기 적혀 있는 금액만 해도 6,000억인데 이걸…… 섭외로 어떻게 한다는 말입니까?”
오랫동안 미래전략팀을 이끌며 여러 가지를 경험했던 권수형이었다.
그리고 직접 경험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다른 기업들의 경우를 살피고 분석하여 대비하는 역할을 수행했던 그였다.
그래서 누구보다 6,000억의 자금을 끌어모으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 적혀있기로는…… 타겟 날짜가 우리가 기풍증권 인수를 완료하는 날짜와 맞춰져 있는데…….”
“맞아. 그날 함께 발표할 계획을 세워서 가지고 왔어. 즉, 한 달 내에 6,000억을 모으는 걸 완료할 수 있다는 이야기야.”
“이걸 어떻게…… 아무리 증권사로 평소에 많은 고객을 확보하고 있다고 하기로서니 이건…… 어려운 일 아닙니까?”
“프라임리츠와 함께 하는 것 같아.”
“프라임리츠요? 정병선 회장이 있는 그 프라임리츠 말씀이십니까?”
기풍철강은 건설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였다.
그래서 건설 쪽은 물론이고 부동산 관련된 시장도 빠삭하게 파악해 놓은 상태였기에 프라임리츠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권수형은 정병선의 프라임리츠가 합류했다는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되면 가능할 것처럼 보입니다.”
“보이는 게 아니라 가능해. 가능하게 만들어서 가지고 왔어.”
딱잘라 말한 이정훈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는 권수형이 내려보던 서류를 집어 들었다.
“이게 전부인 것 같나?”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놈들이 준비한 게 이게 전부인 것 같느냔 말이야.”
“전부가 아니라면…… 뭐가 더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더 있어.”
이정훈 회장은 권수형 앞에 놓인 서류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서류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우리에게 준 이 서류보다 더 많은 내용이 담긴 것이 지금 정병선 회장의 손에 들려있어. 이것만으로도 완벽해 보이는데 이것보다 더 완벽하게 정리된 것이 준비되어 있다는 뜻이네.”
“이것보다도 더요? 이것만으로도 완벽해 보이는데…….”
“투자자들에게는 아무리 많은 정보를 줘도 모자란다고 생각한 거지. 대단해.”
“정말 대단하십니다. 도련님이 이 정도일 줄은…….”
“성우가 한 것처럼 보이나?”
권수형은 이정훈 회장의 말에 조금 전 이정훈이 건넸던 말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조금 전에 도련님이 가지고 왔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가지고 온 건 그놈이지. 그놈인데…….”
이정훈 회장은 불편한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권수형은 그런 이정훈의 모습을 보고 의아해했다.
항상 이정훈 회장이 입이 닳도록 했던 이야기가 아들인 이성우가 욕심만큼 성장하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자식이 부모만큼 살지 못할 것을 걱정하는 세상 모든 아버지의 걱정보다 조금 더 깊은 걱정을 이정훈 회장이 보여주고는 했다.
그래서 권수형은 이런 이성우의 성장에 기뻐하지 않는 이정훈 회장이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회장님. 이 정도면 누구도 도련님이 사장 자리에 앉는 것을 뭐라고 하지 못할 겁니다. 오히려 이보다 더 나은 계획을 세우고 올 사람이 없을 정도로 완벽한 계획입니다.”
“그래. 너무 완벽해.”
“그런데 어째서 그러십니까?”
권수형은 이정훈에게 신성증권에서 들었던 이야기들을 건넸다.
조금이라도 이성우가 이정훈 회장의 마음에 들었으면 하는 생각에서였다.
“회사에서의 평판도 나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과 잘 어울린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심지어 회사 직원 대부분이 도련님이 기풍철강의 아들인 줄 몰랐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밖에 나가서는 기풍이라는 이름에 기대 활동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로 저는 판단했습니다.”
“기풍이라는 이름에 기대 움직였다가 나에게 걸렸다면 내가 가만히 놔두지 않았을 테니 그랬겠지.”
이정훈 회장은 권수형의 말에 피식 웃고는 손을 휘저었다.
“알아. 자네가 나한테 무슨 말을 하려는지 말이야. 다만 내가 신경 쓰이는 건…….”
“신경 쓰이시는 게 있으십니까?”
“이놈 곁에 있는 놈이 신경 쓰여.”
이정훈 회장은 서류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이걸 성우가 만들었을 것 같아? 물론 사업부의 여러 사람이 도와줬겠지. 혹은 신성증권의 다른 부서 사람들까지 다 동원해서 했을 거야. 그렇지 않다면 이정도 퀄리티가 나올 수가 없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걸 주도한 사람이 누구냐 이 말이야.”
“주도한 사람이요?”
“그래. 난 그걸 한진영이 했다고 생각해.”
“한진영이라면 투자전략사업부의 부부문장을 맡은 한진영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놈.”
이정훈 회장은 서류를 두드리던 것을 멈추고 다리를 꼬고 팔짱을 꼈다.
그리고 시선을 먼 곳으로 향한 채 천천히 이야기했다.
“난 아무리 봐도 그놈이 자꾸 성우 곁에서 알짱거리면서 성우를 조종하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어.”
권수형은 이정훈이 하는 말이 어떤 말인지 이해했다.
재벌들이 항상 신경 쓰며 걱정하던 것을 이정훈 회장이 이제 하고 있는 것이었다.
빠르면 학생 때부터 시작하여 차차 나이가 차 갈수록 주변을 정리해 나가는 것이 다른 그룹의 오너들이 자식 주변을 정리해오던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정훈은 이성우를 후계자로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기에 정리는 고사하고 주변에 누가 있는지도 파악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이정훈 회장에게 이런 류의 걱정은 생소하기만 한 것이었다.
권수형은 남들이 10년 전에 걱정하던 것을 이제야 하는 이정훈을 향해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회장님.”
“그래. 이야기해.”
“뭐가 됐든 도련님을 도와주는 것 아닙니까? 도련님에게 나쁜 영향이 아직은 없으니 조금 더 두고 보시지요.”
“이놈이 성우를 이용하려 하지 않을까?”
“그때가 되면 간단하게 정리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다?”
권수형은 되묻는 이정훈의 얼굴에서 아쉬움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정리하라는 말에 이정훈이 자기도 모르게 아쉬움을 표정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정리하기에는 아까워.”
“회장님께서 어떤 마음이신지 알 것 같습니다. 내버리기에는 아깝고 가지기에는 위험이 되는 존재로 보이시는 것 아닙니까?”
“그래. 딱 알맞은 표현이야.”
너무 날카로워 다칠 것만 같은 칼이었다.
이런 칼을 내가 아닌 내 자식이 든다고 생각하니 칼날에 자식의 살이 베이지 않을까 걱정이 된 것이었다.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었다.
다른 사람이 주워들었을 때를 생각한다면 아찔한 생각이 들 정도로 날이 잘 서 있었기 때문이다.
가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는 존재.
지금 이정훈에게 한진영이라는 존재는 그런 식으로 비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권수형은 곤란해하는 이정훈 회장을 바라보고 자기 생각을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회장님. 충성심에 한 부부문장이 도련님의 일을 돕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회장님의 곁에도 유능한 많은 사람이 포진되어 있지 않습니까?”
“자네 같이?”
“네. 저도 포함하여 많은 사람이 회장님을 위해 손과 발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이걸 보고 이용한다고 볼 수는 없지 않습니까?”
권수형의 말에 이정훈이 가만히 생각에 잠기는 모습을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혹시 한 부부문장이 도련님을 이용하려 하는 것을 확인하신 적은 있으십니까?”
“그런 적은 없어.”
“그럼 그럴까 걱정이 되어 그런 것이지요?”
권수형의 말에 이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앞으로가 걱정되어 그런 거야.”
“그럼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떨까요?”
“어떻게?”
“확인해보는 겁니다. 한 부부문장이 도련님을 이용하는 것인지 아닌지 말입니다.”
“확인한다고? 어떻게 확인한다는 말인가?”
이정훈 회장이 권수형 부사장의 말에 관심이 생기는 모습을 보였다.
꼬았던 몸을 풀고 권수형 쪽으로 몸을 당겨 앉은 것이었다.
권수형은 그런 이정훈 회장을 향해 천천히 계획을 설명했다.
“기풍증권에게 조금 무리한 목표를 제시하는 겁니다.”
“무리한 목표라니?”
권수형은 앞에 놓인 서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마침 이 서류를 보고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이 서류?”
이정훈 회장은 권수형 부사장의 손가락을 따라 이성우가 가지고 온 PEF 계획서를 내려다봤다.
“네. 바로 이 PEF 계획서 말입니다. 이게 세워진 이유가 IB 파트를 강화하기 위해서 내딛는 첫걸음 아니겠습니까?”
“그런 것 같더군.”
“직접 도련님이 가지고 와서 이곳에 역량을 강화하기로 하겠다고 말을 한만큼 이곳에서 실적을 보이도록 지시하는 겁니다. 그것도 직접 회장님께서 한 부부문장을 지목한 상태로 말입니다.”
“내가 지목하라고?”
“네. 한 부부문장의 투자전략사업부가 주축이 되어 실질적인 성과를 내놓도록 지시하십시오.”
이정훈 회장은 눈을 가늘 게 뜨고 PEF 계획서를 내려다보고 말했다.
“성과는 이미 나온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이것만으로 성과를 올렸다고 할 수는 없지요. 이건 도련님을 사장 자리에 앉힐 명분일 뿐 구체적인 성과를 보이기 위해서는 이것 외에 다른 중량감이 있는 계약이 필요합니다.”
“중량감…….”
이정훈 회장이 권수형 부사장의 말을 가만히 들었다.
권수형 부사장은 그런 이정훈 회장을 향해 계속 이야기했다.
“그랬을 때 나올 반응을 한번 보도록 하시지요. 만약 한 부부문장이 도련님을 이용하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대번에 못한다는 말부터 나올 게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도련님이 사장 자리에 이미 올라앉았으니까요. 굳이 더 많은 일을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할 겁니다. 회장님 자리를 뺏는 것이 아닌 한 이용하기에 충분한 자리까지 도련님이 올라간 상태니까요.”
“흐음.”
이정훈 회장은 권수형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네 말을 들으니 그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아. 좋은 친구라면 성우를 도와주기 위해 또다시 새로운 무언가를 가지고 오겠지. 그게 아니라 이용만 하려 했다면 이쯤에서는 빠지려 할 테고…… 좋아. 한번 해볼 만한 일인 것 같아.”
이정훈은 권수형의 방법을 마음에 들어 했다.
두 사람은 잠시 앉아 앞으로의 일을 조금 더 이야기했다.
그렇게 약 반 시간의 대화를 마친 뒤 돌아가 보겠다는 인사와 함께 권수형 부사장이 회장실을 나왔다.
***
밖에 나온 권수형 부사장은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 조금 전 한진영이 있던 커피숍으로 향했다.
“오셨습니까?”
“진짜로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까?”
권수형 부사장은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고 한진영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주변을 급히 살폈다.
혹시나 이정훈 회장의 사람들이 있을까 걱정하는 눈치였다.
한진영은 그런 권수형 부사장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회장님이 보낸 사람들은 이미 돌아갔으니까요.”
한진영의 말에 그제야 안심이 된 권수형은 땀을 훔치며 자리에 앉았다.
한진영은 그런 권수형을 향해 웃으며 물었다.
“회장님과 이야기는 잘 나누셨지요? 어떻습니까? 저와 약속대로 이야기하셨습니까?”
권수형은 한진영의 말에 땀을 훔치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대로 회장님께 이야기하기는 했는데…… 도대체 왜 그런 겁니까? 이해가 안 갑니다. 굳이 스스로 테스트를 받고 싶다고 나오는 이유가 뭡니까?”
권수형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흔들며 한진영을 향해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