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기대는 지시와 마찬가지다
기풍철강의 신성증권 인수가 완료되는 날 신임 사장 발표도 함께 언론을 통해 공개됐다.
[증권사를 품은 기풍철강이 기풍증권의 신임 사장을 발표했다. 기풍증권으로 사명을 바꾼 뒤 앉게 된 초대 사장에는 이정훈 회장의 아들인 이성우 씨가 선임됐다. 이성우 씨는 기풍증권의 전신인 신성증권 시절부터 증권사에서…….
기풍철강의 발표에 주식시장은 물론이고 재계까지 떠들썩한 반응을 보였다.
혜성처럼 등장한 이성우의 존재에 사람들은 많은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차근차근 경영수업을 받으며 계단 오르듯이 올라온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뚝 떨어지다시피 떨어진 것에 언론은 이성우를 주목한 것이었다.
기풍철강이 이성우를 단번에 사장 자리에 앉힌 것에 사람들은 기풍철강이 후계구도를 확립하기 위한 초석으로 삼으려는 것이 아니냐는 말도 나왔다.
슬슬 후계구도를 세워야 하는 기풍철강에서 이성우가 사장 자리에 오른 것에 사람들은 많은 관심을 보인 것이었다.
그러나 관심이 꼭 좋은 쪽으로만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매각과 인수 과정에 큰 이슈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초대 사장 자리에 오너 일가, 그중에서도 핵심으로 분류할 수 있는 회장 아들을 앉힌 것에 탐탁지 않은 반응을 보인 이들도 나왔다.
나이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세상의 눈에는 이성우가 모자라게 보였기 때문이다.
이런 우려는 기풍증권의 고객 유출 사태로 이어졌다.
신성증권의 오래된 충성고객들을 중심으로 이성우의 경영능력에 의심이 든 고객들이 계좌를 다른 증권사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움직임은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져 결국 이성우가 임원들을 소집하기에 이르렀다.
“장근수 본부장님. 그래서 WM본부에서는 어떤 방안을 가지고 있습니까?”
이성우가 사장으로 취임하자마자 가장 첫 번째로 진행한 회의에서 큰소리가 울려 퍼졌다.
축하파티는 고사하고 신임 사장과 임원진들 간의 인사 자리가 긴급회의 자리가 되어 버린 것에 기풍증권 임원들은 당황한 모습으로 이성우를 바라봤다.
“왜 말씀이 없으십니까? 제가 회의에 들어오기 전에 받은 보고가 어제만 계좌 300여 개가 사라져 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에 대한 방안을 세우고 이곳에 오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성우의 서슬 퍼런 목소리에 장근수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이성우는 그런 장근수에게서 시선을 떼 다른 임원들을 살피고는 마이크에 입을 가져다 댔다.
“왜들 그러시죠? 다들 처음 들어본 이야기인 듯이 반응하십니다. 처음 들으셨습니까?”
이성우의 말에 임원들은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이성우는 침묵에 잠긴 회의실에서 홀로 다시 소리쳤다.
“이유는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저를 믿지 못해서 우리에게 자금을 맡길 수 없다는 것 아닙니까?”
임원들은 사람들 앞에서 노골적으로 이유를 이야기하는 이성우의 모습에 모두 놀랐다.
이런 모습은 그들이 알고 있던 이성우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놀기 좋아하고 일에 열정이 없으며 있는 듯 없는 듯 무색무취의 존재.
이성우에 대한 임원들의 평가였다.
그들이 함께 듣고 느꼈던 이성우는 존재 자체가 희미하게만 느껴지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색과 향기가 또렷이 느껴졌다.
빨가면서도 매콤한 냄새.
이성우에게서 강렬하게 느껴지는 인상에 자리에 있던 임원들은 당황스러워했다.
이성우는 자기를 향해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임원들을 향해 계속 강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다들 너무나 한가롭습니다. 한가로워요.”
이성우는 말을 마치고 빈자리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자리들의 주인들이 어디 갔는지 아시지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저와 함께하기 싫으신 분들은 바로 말씀해주세요. 그럼 바로 정리해 드릴 테니 말입니다. 귀찮게 이런저런 이유로 잡을 생각도 없습니다. 그냥 자리에서 일어나 바로 짐 싸서 나가시면 됩니다. 아셨습니까?”
이성우의 말에 임원들은 빈자리를 둘러봤다.
생각보다 비어있는 자리들이 꽤 많았다.
일반 직원들을 정리하지 않은 것에 비해 임원급의 정리는 꽤 강하게 이루어진 모습이었다.
임원들은 다음은 자기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슬며시 목을 어깨 사이로 집어넣었다.
괜히 이성우의 눈에 들어 십자포화를 맞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에서였다.
이성우는 자기의 시선을 피하는 임원들을 살핀 뒤에 다시 장근수를 바라봤다.
임원들은 이성우의 목표가 다시 장근수에게로 향한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장근수에게 안쓰러운 마음도 가졌다.
최근 이성우에게 가장 괴롭힘을 많이 당하는 사람이 바로 장근수였다.
본부에서 사용하는 회식비부터 시작해서 탕비실에 놓여있는 스틱 커피의 수량까지.
심심하면 장근수를 걸고넘어졌던 것을 곁에서 지켜본 임원들이었다.
물론 그것들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괴롭힘이 아니라, 일종의 가벼운 복수로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어디까지나 업무 성과로 인해 질책을 받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하필이면 고객 이탈까지 생겨난 지금의 상황에 장근수를 향해 애도하는 마음을 가졌다.
그리고 장근수가 잘 버텨주어 화살을 다 맞아주기를 바랐다.
자기들에게까지 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정말 아무런 방안이 없는 겁니까?”
“저희가 세운 계획은… 신규고객에게 감사 이벤트를…”
“감사 이벤트요? 감사이벤트로 뭘 하실 생각이십니까?”
장근수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이마를 훔치고는 이성우의 질문에 대답했다.
“기왕이면 고객들에게 현실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현금지급 이벤트를 구상하고 있습니다.”
“하~ 장 본부장님. 장 본부장님. 왜 이러십니까?”
이성우는 회의용 탁자를 손으로 두드리며 장근수를 다시 압박했다.
“현금지급을 뭐 얼마나 하시려고요? 10만 원이요? 아님 100만 원이요? 끽 해봐야 5천 원 아닙니까? 만원도 안 되는 돈을 받기 위해 신규 고객이 우리 증권사에 올 거 같습니까?”
“그래도…… 그것만으로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여…….”
“우리 증권사에서 이탈한 계좌가 얼마입니까? 지난달에만 5,000계좌가 사라졌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50계좌도 아니라 5,000 계좌요. 5,000계좌. 게다가 이번 달은 잘못하다가는 10,000개가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하더군요. 이런 상황에서…… 수수료 할인이나 현금지급 이벤트가 상황을 회복시키는 방법일 것 같습니까?”
이성우는 땀을 뻘뻘 흘리는 장근수를 노려본 뒤 다시 자리에 있는 임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제가 사장 자리에 앉자마자 이런 꼴을 당해야 합니까?”
자리에 있던 임원들은 이제야 신성그룹에서 기풍으로 회사가 옮겨간 것을 실감할 수 있게 됐다.
사장 자리에 기업 총수의 직계 가족. 그것도 다음 총수 자리에 앉을지도 모르는 후계자가 주는 위압감이 상당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동안은 신성그룹의 산하에서 한가롭게 지내던 이들이었다.
최근에는 매각이 실패로 돌아가며 증권과 무관한 사람이 본사에서 내려와 사장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래서 회사가 돌아가는 것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알려줄 생각도 하지 않았던 임원들이었다.
자기들이 맡은 부서는 자기들의 손안에서 주무르며 독자적인 형태로 일을 진행해 나갔었다.
그래서 예전이었으면 5,000계좌쯤 날아간 것을 가지고 호들갑을 떨지는 않았을 거라고 임원들은 생각했다.
신성그룹에서는 심각성도 느끼지 못했을 테고, 느낄 생각도 없었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기풍철강의 회장 아들이 사장 자리에 앉아있었다.
직계 가족 정도가 아니라 바로 차기 총수 자리를 논하는 이정훈 회장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 사장 자리에 앉게 된 것이었다.
이건 이정훈 회장도 기풍증권을 유심히 바라보겠다는 뜻을 명백히 표현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런 그들의 생각이 틀리지 않음이 증명되고 있었다.
“권 팀장님. 아버지가 뭐라고 하셨다고요?”
자문역으로 인수가 마무리되었는데도 본사로 돌아가지 않은 권수형 부사장이었다.
그와 미래전략팀의 직원들은 한동안 기풍증권에 자리하고 본사인 기풍철강 그중에서도 이정훈과의 가교역할을 수행 중이었다.
“회장님께서는 사모펀드 진출에 굉장히 큰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권수형의 말에 자리에 있던 임원들은 일제히 한진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한진영이 바로크 호텔 인수를 목표로 한 PEF를 설정하여 자금을 유치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권수형도 임원들과 마찬가지로 한진영을 바라본 채 말했다.
“회장님께서는 이게 바로 기풍증권이 나아갈 방향이 아니냐는 생각을 하고 계십니다. IB 파트의 강화 말입니다. 그래서 바로크 호텔 이후에 진행될 계획에 큰 기대를 한다는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기대요?”
“네. 기대입니다.”
이성우는 권수형에게 질문을 던진 후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아버지를 좀 압니다. 기대는 곧 지시와 마찬가지입니다. IB 파트의 강화를 지시하셨습니다.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쉰 이성우는 천천히 장근수를 바라보고 말했다.
“이건 회장님도 고객 유출을 알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새롭게 고객을 유치하여 활로를 뚫기보다는 아예 기존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라는 뜻 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숙제를 내주신 겁니다.”
이성우는 인상을 찌푸리고는 손을 휘저었다.
“이만 합시다. 다들 나가보세요. 기분 좋아야 할 날에 이게 뭡니까?”
임원들은 이성우의 표정이 심각하다는 것을 느끼고는 조심스럽게 인사하고 하나둘 회의실을 떠나기 시작했다.
괜히 자리에 앉아 있다가는 회장 아들의 심기를 건드릴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잠시만.”
조용히 회의실을 나가던 임원들의 발걸음이 일제히 멈춰졌다.
그들은 제발 자기가 아니기만을 바라는 심정으로 이성우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칫 후계구도에서 밀려나는 일의 원흉으로 지목되고 싶지 않아서였다.
“한 부문장. 잠시만 나가지 말고 기다려요.”
나가려던 한진영을 이성우가 불러 세웠다.
한진영과 함께 회의 자리에 참석한 최석영은 문 앞에서 되돌아 들어갔다.
임원들은 자기가 불린 것이 아님을 안도하며 빠르게 밖으로 빠져나갔다.
혹시라도 늦었다가는 괜히 자기 이름이 불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바쁘게 발을 놀리는 것만 같았다.
이성우는 모두가 빠져나간 것을 확인하고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비서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실에 새로 배속된 이성우의 비서는 인사를 하고는 조용히 회의실 문을 닫았다.
이제 회의실에는 이성우와 한진영 그리고 한진영의 서포터 역할로 회의에 참석했던 최석영 과장만이 남게 됐다.
이성우는 셋만 남자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의자에 널브러졌다.
“후아~ 죽는 줄 알았다.”
숨이 막혔던지 이성우는 넥타이 끈까지 손으로 풀어 숨구멍을 넓힌 다음 최석영 과장을 바라봤다.
이성우는 힘이 다 빠진 듯한 목소리로 최석영 과장을 향해 물었다.
“어땠어요?”
“잘했어.”
“이야기한 대로 잘한 거 같아요?”
“어. 그 정도면 나쁘지 않아. 그런데 시선 처리가 좀 아쉬웠어. 상대를 볼 때 네가 더 높은 곳에 있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는 약간 내려보는 듯한 시선 처리가 필요했거든. 그것만 다음에 주의하면 될 거 같아.”
“목소리 톤은요?”
“으음~ 톤도 나쁘지 않았는데 지금은 화를 낼 때하고 그냥 이야기할 때에 톤 차이가 크지 않았어. 그걸 조금은 극적으로 차이를 두는 편이 좋을 것 같아. 그래야 위압감이 더 생기니까.”
“하아~ 어렵네요.”
이성우는 머리를 한차례 쓸었다.
오늘 자리를 위해 이성우는 특별히 최석영 과장에게 지도를 받았다.
사람 앞에서 이야기하는데 최석영 과장보다 나은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미리 원고까지 준비하고 몇 차례나 사전준비를 거치고 만들어진 자리였다.
화를 내는 것도 의도하여 만들어진 연출이었으며, 화를 내는 화제 또한 미리 사전에 한진영과 철저히 논의하여 선택된 것이었다.
이성우에게 지금 자리는 마치 소극당 무대나 마찬가지였다.
이성우는 잠시 돌린 숨 덕분인지 기운을 차리고 의자에 똑바로 앉았다.
그리고 자기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한진영을 향해 신이 나서 이야기했다.
“봤지? 봤지? 임원들 얼굴 파랗게 질리는 거 말이야. 캬~ 역시 잃을 게 많은 사람이 겁도 많아. 김준하처럼 잃을 게 없는 사람들이나 하나도 무서워하지 않지. 어쨌든…… 초장부터 잡아가니까 내 말 잘 들을 거야. 그치?”
“그거 염두에 두고 만든 자리니까 당연히 말 잘 들어야지. 말 안 들으면 이런 자리에서 쇼를 한 의미가 없어지잖아.”
“그래. 말 잘 들을 거야.”
한진영의 말에 자신감이 생긴 이성우는 가슴을 활짝 펴고 말했다.
“사장으로서 위엄을 세우고 제대로 경영해볼 생각이니까 잘 지켜봐. 이전의 이성우가 아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대로 이성우의 자신감은 투자전략사업부와 그전인 시흥지점에 있을 때와는 천지차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최석영에게 지도를 받은 덕분인지 말투 또한 그전과 달리 자신감이 잔뜩 묻어 나왔다.
이성우도 그런 자기의 모습에 만족했는지 한차례 큰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조금 전 상황 중에 마음에 꺼리는 부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진영아.”
“어. 왜?”
미친놈처럼 웃던 이성우가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자기를 바라보자 오히려 한진영이 웃으며 대답했다.
이성우는 그런 한진영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장근수 본부장에게 너무 심하게 한 게 아닐까?”
“왜? 막상 지나고 나니까 걱정돼?”
“어. 걱정되지. 안 그래도 최근에 내가 그 양반 많이 괴롭혔거든. 그때마다 꾹꾹 참고 넘어가는 모습이 재미있어서 계속 놀렸는데…… 오늘까지 이렇게 해버리니까. 걱정돼.”
“뭐가 그렇게 걱정되는데?”
“뭐겠어. 더러워서 못 해먹겠다고 나갈까 봐 걱정되는 거지.”
이성우는 장근수가 나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새롭게 사장 자리에 앉은 만큼 자기 사람이 많이 필요했는데 장근수는 이성우의 사람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런 장근수가 자기가 심하게 군 것에 반발하여 그만두지나 않을까 걱정된 이성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