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임시 강연회
사우나에서 땀을 뺀 뒤 샤워를 하고 나온 두 사람의 얼굴은 여전히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아직도 뜨거운 기운이 몸에서 빠져나가지 않은 모습으로 휴식 공간에 나온 한진영은 빈자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 비어 있네요. 저기 앉죠.”
한진영은 최석영 과장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비어 있는 자리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커다란 통유리창을 통해 바깥 풍경이 보이는 자리는 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한 느낌을 전해줬다.
한진영은 자리에 앉아 잠시 바깥 풍경을 감상한 뒤 손을 들어 올렸다.
“여기요.”
한진영이 부르자 직원이 한진영이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한진영은 직원이 다가오는 것을 확인하고 최석영에게 물었다.
“식혜 괜찮으시죠? 여기 오면 식혜를 먹어야 하거든요. 땀 쏙 뺀 뒤에 먹는 식혜. 그게 일품이에요.”
“아니. 뭔 식혜를…….”
사람을 찾으러 와서 사람이 아니라 식혜를 찾는 한진영의 모습에 최석영이 당황했다.
하지만 한진영은 익숙한 모습으로 식혜를 시킨 뒤 웃기만 할 뿐이었다.
최석영은 한진영에게서 시선을 돌려 주변을 살폈다.
처음 들어왔을 때와 다름없는 모습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처음과는 한 가지가 달라져 있었다.
최석영은 주변을 둘러보던 것을 멈추고 한진영을 향해 고개를 숙인 체 조용히 말했다.
“야.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보는데.”
“그렇겠죠. 평소에 보던 사람이 아니니까요. 게다가 보시면 아시겠지만, 우리가 제일 젊으니까요. 신기하겠죠. 이렇게 젊은 사람이 여기엔 어쩐 일인가 싶어서요.”
“그러게. 네 말대로 다들 신기한 눈으로 쳐다본다. 그런데 여기에 계속 있어도 돼? 눈빛이…… 좀 그래.”
“그냥 살피는 것 같지가 않아서 그렇죠?”
“그래. 그냥 단순히 궁금해서 쳐다보는 것 같지가 않아. 속속들이 훑어보겠다는 눈빛이야. 아우~ 이런 거 난 싫어.”
최석영은 자기를 쳐다보는 시선에 기분이 나쁜 느낌을 받았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새로 등장한 인물에 관한 관심 이상의 것을 알아보려는 듯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석영은 불편한 기색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손바닥으로 막으려 했다.
하지만 손바닥은 오랫동안 최석영의 얼굴을 가릴 수가 없었다.
마침 종업원이 가지고 온 식혜를 한진영이 최석영에게 건넸기 때문이다.
“과장님. 여기요.”
“어? 어.”
한진영이 건넨 식혜를 받아 들자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자기에게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느낀 최석영이었다.
최석영은 그런 그들의 시선에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식혜를 마셨다.
빨리 마셔버리고 다시 얼굴을 가리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저기…….”
최석영은 식혜를 마시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곳에는 조금 전부터 자기를 쳐다보던 사람 중의 하나가 다가와 있었다.
“네? 무슨 일이시죠?”
최석영은 맞은 편에 앉아 빙글빙글 웃고 있는 한진영을 잠시 바라본 후, 여전히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는 노년의 신사에게 다시 물었다.
“혹시 저를 아시나요?”
“네. 알 것 같군요.”
“저를 아신다고요?”
노년의 신서는 고개를 끄덕인 후 최석영을 가만히 바라보고 말했다.
“네. 최석영 씨 아니십니까?”
최석영은 대뜸 자기의 이름을 이야기하는 노인은 자세히 쳐다봤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자기가 아는 얼굴이 아닌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저는…… 선생님께서 누구신지 모르겠습니다. 누구 신데 저를 아시는 거죠?”
“아아. 모르실 만합니다.”
노년의 신사는 최석영에게 비어 있는 의자를 가리키고 말했다.
“혹시 자리에 앉아도 되겠습니까?”
“아. 네. 그러세요.”
최석영이 허락하자 노인은 한진영에게 눈인사하고는 의자를 빼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마치 처음부터 일행인 듯한 모습에 최석영은 가만히 노인을 바라보기만 했다.
노인은 자리에 앉은 뒤 최석영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제 소개를 잊었군요. 저는 한창실업의 장교훈이라고 합니다.”
“한창실업?”
최석영은 잠시 놀란 얼굴로 한진영을 바라보더니 장교훈을 향해 급히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아이고 제가 실례했습니다. 장 회장님이셨군요. 몰라봬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모를 수 있지요. 제가 오히려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 회장님이시라면 언제 어디서든 환영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한 부문장님?”
최석영이 한진영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눈빛으로 말을 하고는 다시 장교훈에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제 이름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여기 있는 사람 중에 최석영 씨 모르는 사람이 있던가요?”
장교훈이 말을 하고 뒤를 돌아보자 하나둘 사람들이 최석영과 장교훈이 있는 곳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뒤돌아본 장교훈을 향해 물었다.
“최석영이 맞다고 하던가요?”
“어. 맞다고 하는구먼. 최석영이 맞아.”
“아~ 역시. 실물이 훨씬 낫네.”
“긴가민가했는데 역시 최석영 전문가였군요. 잘 됐습니다.”
사람들은 장교훈의 말에 최석영에게로 더욱 세차게 몰려들었다.
“방송 잘 보고 있습니다.”
“덕분에 재미 많이 봤습니다.”
“여기서 이렇게 볼 줄은 몰랐네요. 악수나 한번 합시다.”
“사인도 해줍니까?”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최석영의 주변에 몰려들어 마구 말을 걸었다.
아무래도 방송에 나온 최석영을 보고 찾아온 듯한 모습이었다.
“어이. 사진이나 한 방 찍게 사진기 좀 가지고 오라고 해봐.”
“사우나에 무슨 사진기야?”
“호텔에 비치되어 있는 거 있을 것 아냐.”
“아~ 그렇지.”
최석영이 만난 게 반가웠는지 사람들은 최석영의 주변에 모여 떠들썩한 모습을 보였다.
최석영은 자기를 빤히 바라보던 것이 바로 방송에 나오던 모습을 알아보고 그랬다는 것을 알고는 긴장했던 마음을 풀었다.
그리고 능숙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대했다.
“이렇게 벌거벗은 모습으로 만나니까 부끄럽네요.”
“부끄럽긴요. 얼마나 좋습니까? 저는 양복 입고 점잔 빼면서 만나는 것보다 이렇게 만나는 게 더 인간적이고 따스한 느낌입니다. 그렇지요? 회장님?”
“하하하. 최석영 씨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요. 이봐. 홍 사장. 괜찮아. 괜찮아. 어차피 자네 몸은 홀딱 벗고 있어도 볼 것 없으니까. 그건 내가 보증해. 자네 마누라보다 내가 자네 벗은 몸은 더 많이 봤을 테니까 말이야.”
“하하하.”
최석영을 가운데 두고 분위기는 화기애애하기만 했다.
특히 주인공인 최석영이 이런 분위기를 연출하는 자리에 있어 더욱 분위기는 밝게 번져 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방송에 나온 뒤로 이런 식의 만남이 최석영에게는 비일비재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찾아와 아는 척을 했으며, 몇몇은 최석영에게 어떤 주식이 좋은지 물어보기까지 하며 초면부터 최석영을 괴롭히기도 했다.
그래서 목욕 가운만 입고 있음에도 능숙하게 사람들과 친밀감 넘치게 이야기할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최석영에게는 입고 있는 것만 다를 뿐이지 이런 상황은 익숙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차라리 이렇게 다가와 말을 걸어주는 편이 났다고 최석영은 생각했다.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에 자신이 있는 그였기에 의미심장한 눈초리로 자기를 바라보는 것보다 이게 더 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최석영이 능숙하게 사람들을 대하자 다가온 사람들도 스스럼없이 최석영과 대화를 나눴다.
“여기 회원권 끊었습니까?”
“아닙니다. 여기 물이 좋다고 해서 잠시 놀러 온 것뿐입니다.”
“여기 물 좋지요. 안 그래도 얼굴이 불그스름한 게 사우나 받고 나오신 것 같습니다. 어떻습니까? 이야기 듣던 대로던가요?”
최석영은 아직 붉어진 얼굴이 가라앉지 않았다는 말에 쑥스러운 듯이 얼굴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네. 좋던데요. 여기 풍경도 좋고요. 몸을 뜨겁게 데우고 나서 마시는 이 식혜도 일품이고요.”
“마음에 든다니 잘 됐군요. 그럼 내가 회원권 하나 끊어드릴 테니 자주 놀러 오도록 하세요. 어이.”
장 회장이 종업원을 부르려 하자 최석영이 급히 장 회장을 말렸다.
“회장님.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아니에요. 최석영 씨를 만날 수 있다면 이까짓 회원권이 문제입니까? 만나게 되면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말을 하고는 은근한 미소를 짓는 장교훈이었다.
최석영은 그런 장 회장의 의도로 파악하고는 다시 한번 사양했다.
“회장님. 마음만 받겠습니다. 회원권을 주시는 것은 제가 부담됩니다.”
“그래요? 아쉽네요.”
장교훈은 입맛을 다시고는 주변에 서 있는 이들을 슬쩍 돌아봤다.
그들은 모두 장교훈과 최석영의 모습을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이렇게 하시죠.”
장교훈은 가볍게 손을 들어 종업원을 부른 뒤 주문했다.
“여기 계시는 분들에게 모두 음료수 돌리고…… 우리 최 전문가님께는 따뜻한 설렁탕 하나 내오도록 해. 최 전문가님. 이 정도는 괜찮지요?”
최석영은 한진영을 슬쩍 바라봤다.
장교훈이 이번에 내놓은 제안 또한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진영에게 받아도 되는지 묻기 위해서 바라본 것이었다.
한진영은 최석영의 눈빛에 웃으며 최석영에게 말했다.
“최 과장님. 이렇게 된 것 음식이 오기 전까지 시장 전망에 관해 이야기 좀 해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최석영은 한진영이 허락하는 것도 모자라 분위기를 끌어 올리는 것에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는 맞장구쳤다.
“그럴까요?”
장교훈은 자기 뜻대로 일이 풀린 것에 즐거워하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뒤에 서 있던 이들도 조금이라도 편하게 이야기를 듣기 위해 주변에 있는 의자들을 끌고 와 최석영 앞에 앉았다.
휴식 공간이 단숨에 임시 설명회 자리로 변하고 말았다.
최석영은 이런 분위기를 더욱 끌어 올리기 위해 가운을 여미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아서 이야기하는 것보다 서서 이야기하는 편이 사람들의 집중도를 끌어 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최석영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모두 같은 가운을 입고 있는 사람들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최석영을 바라봤다.
최석영은 그런 그들을 향해 천천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다들 미 국채 사건 이후의 과정이 궁금하신가 봅니다. 그럼 제가 간단하게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앞으로 증시는…….”
최석영이 이야기를 시작하자 멀리서 최석영 쪽을 바라보던 이가 곁에 있는 이에게 물었다.
“누구입니까?”
최석영이 있는 쪽으로 가려던 사람은 곁에서 물어보는 사람에게 그것도 모르느냐는 얼굴로 대답했다.
“신성…… 아니. 기풍증권의 최석영 과장 아닙니까? 모르세요?”
“네. 처음 봅니다. 유명합니까?”
“유명이요? 하하하.”
대답할 가치도 없다고 느꼈는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고는 고개를 흔들고 최석영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남자는 대답도 없이 최석영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는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최석영이 있는 쪽을 살폈다.
최석영이 오기 전까지는 사우나실 휴식 공간의 사람들은 각기 다른 모습을 보였었다.
그러나 최석영이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분위기가 바뀌고 말았다.
탕으로 들어가려던 사람과 모든 일을 마치고 나가려던 사람까지도 최석영 앞에 쪼르르 달려가 앉으며 최석영의 말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어디서 구했는지 목욕 가운을 입은 채 노트와 펜으로 최석영의 말을 필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남자는 한가락 한다는 사람들이 모두 최석영의 말에 주목하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며 최석영이 있는 쪽을 계속 바라봤다.
그렇게 약 10여 분간의 시간이 흐르자 장 회장이 주문했던 음식이 나왔다.
“그럼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이거 참 설렁탕 하나로 너무 많은 것을 얻어가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특별히 핵심이 담겨있는 말을 최석영이 한 것은 아니었다.
10분 동안 그런 의미를 담을 수도 없었고, 미래를 예측할 능력도 최석영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석영은 다른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 앞에서 그럴듯하게 포장할 수 있는 능력.
그 능력을 이용하여 별것 없는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만들어 사람들 앞에 풀어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에 흠뻑 취한 장교훈과 사우나실의 사람들은 최석영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기에 이르렀다.
“아닙니다. 맛있는 음식을 사주시는 것보다 더 감사한 일은 없으니까요. 잘 먹겠습니다. 그리고 회장님.”
최석영은 은밀한 미소를 지으며 장교훈에게 말했다.
“저희 기풍에 돈을 맡겨주신다면 회장님의 자산을 제 돈처럼 아끼도록 하겠습니다.”
“하하하. 알겠습니다. 조만간 찾아뵙지요. 그럼 잘 즐기도록 하세요.”
장교훈은 최석영의 말에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밥을 먹는 사람을 계속 괴롭힐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왔던 사람들은 장교훈과 함께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최석영은 그런 그들을 살피고는 땀을 닦아냈다.
“후우~ 방송에 나가니까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졌어. 그런데 여기 있는 사람들조차 날 알아볼 줄은 몰랐다. 그래서 날 그런 눈으로 바라본 거구나.”
최석영은 조금 전 그들이 보냈던 눈빛의 의미를 이제야 깨닫고 웃으며 다시 한번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어휴. 거물들만 모아놓고 이야기를 하니까 긴장되네. 그래도 다 같은 옷을 걸치고 있어서 다행이야. 이것 덕분에 좀 덜 떨 수 있었어.”
떠는 모습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던 최석영이었다.
하지만 알게 모르게 긴장을 했던지 최석영은 목욕 가운을 한 번 들추고는 앞에 놓은 설렁탕을 향해 숟가락을 들었다.
최석영은 설렁탕 국물을 맛보고는 앞에 앉아있는 한진영을 바라봤다.
한진영은 최석영과 달리 설렁탕을 앞에 놓고 숟가락도 들지 않고 있었다.
최석영은 그런 한진영을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