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그들에게는 다를 수 있다
한진영은 앞에 놓인 설렁탕에 시선을 두고 있지 않았다.
“어디 보는 거야?”
최석영은 한진영의 눈앞에서 숟가락을 흔든 뒤 한진영이 바라보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조금 전 자리에서 보지 못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평균 키에 마른 몸의 사내는 특별할 것이 없어 보이는 외모를 하고 있었다.
그는 한진영과 최석영이 있는 자리로 다가와 가볍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조금 전 한창실업의 회장이 찾아왔을 때는 먼저 인사를 하지 않던 한진영이 이번에는 먼저 남자의 인사를 받았다.
최석영은 한진영이 인사를 받는 것을 보고 확신하게 됐다.
‘이 사람이구나.’
최석영은 직감적으로 오늘 여기 와서 만나려 한 존재가 눈앞의 사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최석영은 다시 사내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살폈다.
키부터 시작해서 외모까지 시내에 가면 어디에도 있을 만한 흔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사우나에 있는 모든 사람이 입고 있는 목욕 가운을 입고 있어서 그런 건지 특색이라고는 더 찾아보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최석영은 사내를 살피는 것을 멈추고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어쩐 일이시죠?”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네. 말씀하세요.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죠?”
“미안합니다. 제가 잠시 저 뒤에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증권사에서 일하시는 것 같은데…….”
“네. 맞습니다. 지금 기풍증권에 소속되어 일하고 있습니다.”
“아~ 기풍증권. 이번에 신성그룹에서 매각된 곳 아닙니까?”
“네. 맞습니다.”
최석영은 사내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리고 앞에 놓은 의자를 가리키고는 사내에게 앉을 것을 권했다.
“앉아서 이야기하시지요.”
“죄송합니다. 식사하시는 것 같은데…….”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저는 음식을 식혀 먹는 편이라서요.”
한진영은 자연스럽게 상대방에게 부담이 가지 않게 이야기를 끌어가는 최석영을 보며 살며시 웃었다.
언제 보더라도 최석영의 사람 대하는 능력 하나만큼은 발군이었기 때문이다.
사내는 최석영의 말에 조금은 마음의 짐을 덜어낸 것처럼 가벼운 표정을 지은 뒤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한진영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바로 최석영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노골적으로 최석영에게 볼일이 있었다는 뜻을 시선을 통해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최석영도 그런 사내의 뜻을 깨닫고 먼저 이곳에 온 이유를 물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저를 찾아오신 건지요? 저는 들어서 아시겠지만, 기풍증권의 최석영이라고 합니다.”
상대의 이름을 묻기 위해 먼저 자기 이름을 말한 최석영이었다.
사내도 그런 최석영의 의도를 간파한 건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이런 제가 제 소개하는 걸 잊었군요. 저는 선강그룹의 동우산이라고 합니다.”
“선…… 강…… 그룹이요?”
최석영은 말을 하고 한진영을 슬쩍 돌아봤다.
이 사람이 바로 찾던 그 사람이 아니냐는 뜻에서였다.
한진영은 최석영을 향해 고개를 살며시 끄덕이며 맞는다는 뜻을 전했다.
최석영은 자세를 고쳐 앉고 동우산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선강그룹의 동우산…… 직함이 어떻게 되시죠?”
“상무입니다.”
“아~ 동우산 상무님.”
직함까지 더하자 확실하게 찾던 사람이 맞음을 확인한 최석영이었다.
그는 매우 반갑다는 표정으로 동우산에게 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동우산은 과하다고 느껴질 만한 환대에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목적을 가지고 자기가 먼저 찾아온 만큼 최석영이 내민 손을 잡고 어색하게 웃으며 악수를 했다.
그렇게 잠시 악수를 하던 두 사람 중 최석영이 먼저 입을 열어 이야기의 포문을 열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저를 찾아오신 건지요? 혹시 어떤 종목이 좋은지 알고 싶으셔서 오신 건가요?”
대부분 최석영을 찾는 이유는 종목상담 혹은 투자하기 좋은 종목을 묻기 위해서 찾아오는 거였다.
그래서 최석영도 동우산이 찾아온 이유가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지 않느냐는 생각에 물은 것이었다.
하지만 동우산이 최석영을 찾은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동우산은 최석영을 향해 고개를 젓고는 대답했다.
“아닙니다. 종목상담을 하기 위해 온 것은 아니고…….”
“그럼 무엇 때문에 오신 겁니까?”
“그렇게 잘 맞추신다고요?”
“잘 맞춘다? 뭘 말입니까?”
“지수의 흐름 말입니다. 앞으로 종합주가지수가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 정확하게 보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
최석영은 동우산의 말에 한진영을 향해 눈을 찡긋하고는 웃으며 대답했다.
“뭐 다들 그런 말씀들을 하시고는 하는데…… 그냥 저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동우산은 최석영의 겸연쩍어하는 말에 맞장구를 치고는 최석영을 노려보듯이 쳐다보고 말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혹시 모르니?”
“저에게 앞으로 한 달 뒤의 지수 흐름에 관해서 이야기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한 달 뒤의 지수 흐름을 이야기 해달라니요?”
무례하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최석영은 상대가 찾던 사람만 아니라면 당장에라도 쫓아내고 싶을 만큼 기분이 언짢아졌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상대가 앞으로 일에 가장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은 만큼 그럴 수 없었다.
최석영은 화가 나려는 마음을 최대한 가라앉히고 동우산에게 말했다.
“그렇게 갑자기 오셔서 지수 예측을 해달라니…… 제가 무슨 신도 아니고 그렇게는 힘들지요.”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습니다. 하지만 주변에 사람들이 하도 그렇게 말들을 하니 궁금해서 찾아온 건데…… 그럼 저는 이만 일어나지요. 죄송했습니다.”
동우산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와서 인사하고 곧바로 지수 예측을 하라는 말 뒤에 떠나려 하는 모습에 최석영은 황당한 표정으로 동우산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때 최석영을 대신해서 한진영이 입을 열었다.
“앞으로 한 달간 1,700과 1,800 사이의 지루한 박스권이 연출될 겁니다.”
몸을 돌려 떠나려던 동우산은 한진영의 말에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궁금하다니 말씀드린 겁니다. 1,700에서 1,800 박스권. 이게 앞으로 한 달간의 우리나라 종합주가지수의 움직임입니다.”
“그걸 어떻게 알고 이야기하신 겁니까?”
“글쎄요. 그냥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갔다고 말씀드려야 할까요?”
한진영은 동우산을 올려다보고 웃은 뒤 숟가락을 들어 올렸다.
“과장님. 드세요. 벌써 많이 식었습니다.”
음식이 나오고 나서 숟가락을 한 번도 들지 않던 한진영이 이번에는 먼저 숟가락을 들고 최석영에게 먹을 것을 권했다.
최석영은 그런 한진영의 말에 동우산과 한진영을 번갈아 바라본 뒤 천천히 숟가락을 들어 올렸다.
동우산은 한진영을 가만히 내려다본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누구신지 여쭤봐도 될까요?”
“네. 저는 한진영이라고 합니다. 기풍증권의 투자전략사업부 부문장을 맡고 있지요.”
동우산의 눈에서는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아무리 많이 봐도 이제 갓 서른을 넘은 것 같은 젊디젊은 친구가 사업부 부문장을 맡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소개만 듣고 보자면 방송에 나와 탁월한 성과를 올렸다는 최석영 과장의 상사처럼 보였다.
동우산은 한진영에게 조금 전 이야기를 자세히 물어보려 했다.
하지만 그런 동우산의 생각을 읽고 있기라도 하듯이 한진영이 먼저 동우산에게 미안하다는 뜻을 전했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식사를 해야 해서요. 벌써 많이 식어서 어서 먹어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이제 그만 가줬으면 좋겠다는 뜻을 완곡하게 표현한 한진영이었다.
동우산은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는 데 더는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렇네요. 제가 시간을 많이 뺏은 것 같습니다.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네. 감사합니다.”
동우산이 인사하고 몸을 돌리자 한진영이 그런 동우산의 뒤에 대고 다시 한번 또렷이 기억에 남을만한 말을 전했다.
“선물지수로 220을 기준으로 하여 상단부를 230 하단부를 210으로 잡으면 될 겁니다.”
동우산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한진영을 바라봤다.
한진영은 그런 동우산을 향해 웃으며 고개 숙였고 동우산도 그런 한진영을 향해 마주 고개를 숙이고는 자리를 떠났다.
***
한진영은 천장에 달린 시세 전광판을 바라보고 팔짱을 꼈다.
그런 그의 곁에 서 있는 김준하가 민망한 표정으로 한진영에게 이야기했다.
“죄송해요. 한다고 했는데…… 아직은 많이 부족하네요.”
“괜찮아. 나도 바로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차츰차츰 보완해가면 돼.”
“정보를 수치화한다는 게 생각보다 어려워요.”
“쉽지 않겠지. 그래도 해야 할 일이야. 그곳에 우리의 미래가 있으니까.”
한진영의 말에 김준하는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첫 단추부터 어려움을 겪어 어째야 하는 마음을 다시 고쳐먹은 것이었다.
한진영은 표정이 굳어 보이는 김준하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렇게 조급해하지 않아도 돼. 나는 이번 일을 몇 년에 걸친 장기 프로젝트로 생각하고 있으니까.”
“몇 년이요? 그렇게나 오래 보고 계시는 거예요?”
“당연하지. 이게 그렇게 말처럼 쉽게 되는 일인 줄 알아? 실행은 고사하고 개념을 제대로 세우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야. 그걸 우리는 남들보다 10년은 먼저 하는데 그깟 몇 년은 아무것도 아니지. 그러니까 차분히 하면 돼. 나는 너를 믿으니까.”
김준하는 한진영의 말에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채로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뒤를 이어 다가온 박도하에게도 같은 말을 하며 그들의 조급함을 풀어줬다.
김준하와 박도하 둘 다 한진영이 건넨 숙제가 지지부진 하자 모두 의기소침해져 있었다.
한진영은 그런 그들에게 길게 볼 것을 주문했고 앞으로 계속해나갈 문제이기 때문에 차분히 하나하나 나아갈 것을 이야기했다.
그렇게 한진영이 투자전략사업부의 두뇌들을 다독였을 무렵, 이성우가 투자전략사업부로 득달같이 찾아왔다.
“한 부문장!”
한진영은 팔짱 끼고 시세 전광판을 올려보다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이성우가 다급한 모습으로 한진영이 있는 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이성우는 한진영 앞에 도착해 큰 숨을 내쉰 뒤 한진영을 끌고 한진영의 사무실로 향했다.
“왜 그래?”
“들어가서 이야기해. 어서.”
이성우는 한진영을 끌고 투자전략사업부 부문장실로 들어갔다.
마치 자기 사무실이라도 되는 것처럼 문을 닫고 소파에 한진영을 앉힌 이성우는 자리에 앉자마자 한진영을 향해 말했다.
“야! 연락 왔어.”
“연락? 아~ 동 상무에게 연락 왔어?”
“그래. 연락 왔어.”
한진영은 그제야 이성우가 호들갑을 떤 이유를 알겠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그게 뭐 큰일이라고 이렇게 호들갑을 떨어?”
한진영은 별것 아니라는 듯이 말하고는 엉덩이를 떼 이성우에게서 멀어지려 했다.
하지만 이성우는 그런 한진영을 놓아주지 않으려는 듯이 한진영에게 바짝 붙으며 이야기했다.
“큰일이지. 큰일이고 말고…… 연락 온 통로가 선강그룹 회장 비서실을 통해 왔으니까.”
“그래?”
한진영은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달이 났나 보구나.”
“야. 네가 나한테 연락이 올 수도 있다고 이야기했을 때 나는 그냥 개인적으로 연락이 오지 않을까 생각했거든. 그런데…… 회장 비서실을 통하다니. 이건 공식적으로 너를 만나고 싶다는 뜻 아니냐?”
“호들갑 떨지 말고…… 차분히 생각해. 아직 일은 시작도 하지 않았으니까.”
한진영은 이성우를 진정시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책상으로 다가가 엉덩이를 걸치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뭐라고 연락이 왔는데?”
“선강그룹 투자 건으로 우리 회사에 방문하고 싶다는 거야.”
“동 상무가?”
한진영의 말에 이성우가 고개를 저었다.
“정확하게 동 상무라고 이야기하지는 않았어. 그저 회장이 개인적으로 투자하는 거라 회장 비서실에서 나온다는 정도만 연락이 왔어. 그게 동 상무가 나온다는 거 아니냐?”
“그렇게 이야기했다면…… 동 상무가 나오는 거겠지.”
이성우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호텔에서 별다른 이야기하지 않고 헤어졌다는 말에 크게 기대하지 않았거든. 이름을 알아낸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어. 이제 이름을 알았으니까 그 사람 동선을 알아내기 더 편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성우는 한진영 쪽으로 엉덩이를 밀어 다가가며 물었다.
“근데 어떻게 온다고 한 거냐? 내가 최 과장님에게 듣기로는 지수 포인트만 알려줬다면서?”
“정확히는 선물 포인트를 알려준 거지.”
“두 개가 별 차이가 있나? 선물 포인트라고 콕 집어 말을 하는 것 보니까 차이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 차이가 있어.”
한진영의 말에 이성우가 궁금하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종합주가지수와 선물지수가 다른 거야 당연하기는 한데…… 결국 같은 움직임을 보이니까 분석하는 입장에서는 둘 차이가 크게 다르지 않잖아.”
“그래. 분석하는 입장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지. 다른 것은 투자하는 입장에서 다른 거지. 그게 저들에게 선물지수를 알려준 이유야. 저들에게는 종합주가지수보다 선물지수가 필요하니까.”
“투자하는 입장에서는 다르다? 저들에게는 다르다? 설마…….”
이성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선강그룹에게는 달라. 선물을 배팅하는 입장에서는 종합주가지수와 선물지수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으니까. 그런 그들이 연락이 왔다는 것은 내가 건넨 지수의 움직임에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었다는 뜻이겠지?”
한진영은 황당하다는 표정의 이성우를 바라보고 웃었다.
“지금 선강그룹 회장은 파생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어. 그런 그의 곁에 조언자로 동우산이 붙어있고…… 우리는 그런 동우산을 이용해서 원하는 것을 얻으면 돼. 그게 내가 동우산에게 선물의 움직임을 알려준 이유야.”
한진영의 말에 이성우 황당하여 말도 하지 못한 채 헛웃음만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