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증권사 생활-187화 (187/650)

187화 대기업 총수도 사람이다

처음 국내 선물 시장에 큰손이 들어와 흐름을 마구 교란시켰을 때는 그 존재에 대해 많은 사람이 의문을 가졌었다.

울산에 있다는 모 인물이 첫 번째로 거론됐으며 그 뒤에는 과거 선물 시장을 주물럭댔던 사람의 이름이 입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배팅 스타일이 한번에 1,000계약을 우습게 넘기는 모습에 모두 혀를 내두르며 새로운 큰손의 탄생이 아니냐고 생각했다.

과거 유명인들조차도 이렇게 큰돈을 한 번에 집어넣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배팅 금액은 중소 증권사의 투자 규모를 가볍게 넘기는 수준이었다.

매매 집중도와 방향에 대한 뚝심 또한 홀로 증권사 한두 개쯤은 상대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이런 모습에 얼마나 돈이 많은 사람이 들어온 것인지 궁금해하며 관심을 가졌었다.

그러나 사람들 특히 기관과 외국인들은 궁금증 외에 다른 마음을 품기 시작했다.

어쨌든 새롭게 등장한 존재는 개인이었다.

매매 집중도가 강하다고 하더라도 돈에 대한 한계가 기관 투자자나 외국인에 비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언젠가는 돈이 떨어질 게 분명하고 기관과 외국인처럼 포지션을 굳게 지키는 기간 또한 많이 부족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렇다면 새롭게 시장에 참여한 투자자가 누구인지 알아보기보다 털어먹는 것이 먼저라고 암묵적으로 합의가 도출되고 말았다.

당장 눈에 통통하게 살이 오른 먹잇감이 있는데 궁금해하는 것만으로 시간을 보내기가 아까웠기 때문이다.

큰손이 투자한 반대 방향으로 기관과 외국인들이 합심하기 시작했다.

해외 시장의 움직임도 무시했으며 당일 있었던 이슈에도 모두 눈감고 귀 닫은 채로 큰손의 움직임만 바라보고 죽자고 반대로 때려댔다.

처음에는 한번에 1,000계약씩 배팅하는 돈질에 기존 시장 참여자들이 밀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예상대로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무리 큰손이더라도 기관과 외국인의 합심에는 견뎌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 나스닥이 올랐는데도 국내 선물은 하락을 하거나, 미국의 큰 폭의 하락에도 불구하고 죽자고 오르는 선물지수에 결국 큰손은 큰 손해를 보고 시장에서 튕겨져 나가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 뒤.

선강그룹의 최대일 회장이 선물투자를 통해 입은 손실을 그룹의 자금으로 보전했다는 검찰수사가 밝혀지며 세간에 큰손의 정체가 드러나고 말았다.

검찰에서는 투자 손실 규모가 1,000억이라고 발표했지만, 일각에서는 3,000억 혹은 5,000억이라는 소문이 떠돌며 선강그룹의 손실이 어마어마하다는 게 밝혀진 것이다.

이런 사실은 한진영이 지난 시절 경험하고 들었던 것들이었다.

한진영은 이것을 이용하여 선강그룹에 접근하고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 했다.

“흐흠.”

이성우는 옷을 매만지고 곁에 서 있는 한진영의 옆구리를 찔렀다.

“내가 사장되고 나서 가장 중요한 손님이 오는 자리다.”

“가장 중요한 손님이 아니라 처음 손님이 오는 자리겠지.”

“그게 그거지.”

이성우는 한진영의 옆구리를 다시 찌르고는 말했다.

“어떤 사람이냐?”

“누구?”

“그…….”

이성우는 잠시 곁에 서 있는 비서들을 살피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왜 있잖아. 무당.”

“아~ 그 무속인?”

“무당이나 무속인이나. 어쨌든…… 어떻게 생겼어? 막 무섭게 생겼냐? 나는 점 같은 것도 한 번도 보러 가본 적이 없어. 속을 샅샅이 훑을 것 같이 눈빛을 쏘아대냐? 아니면 말하지 않은 것도 맞추고 그래?”

기대에 가득 찬 얼굴의 이성우였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대화도 몇 마디 하지도 않았다는 거 알면서 그런 걸 왜 물어보냐? 어떤지 직접 봐.”

이성우는 이야기해주지 않는 한진영의 모습에 입을 샐쭉하고는 다시 앞을 바라봤다.

이성우와 한진영은 선강그룹의 회장 비서실에서 방문한다는 사실에 직접 건물 앞에까지 나와 찾아오는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사실 이런 식의 환영 행사는 과하다고 느껴질 만한 했다.

기풍증권에 방문하는 것을 반기는 것이라면 마찬가지로 비서실 직원들만 내려보내는 것이 맡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성우와 한진영은 직접 내려와 찾아오는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마쳤다.

오는 것은 선강그룹 회장 비서실 직원들이라지만 그 안에 동우산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진영과 이성우가 그렇게 기풍증권 건물 앞에서 몇 분간 기다렸을 무렵 차들이 도착했다.

“뭔 차를 세 대나 끌고 왔다냐?”

이성우는 도착한 차들을 보고 어이없는 실소를 흘리고는 차 문이 열리는 곳으로 향했다.

“아이고 어서…….”

이성우는 차에서 내리는 사람을 향해 인사를 하려다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한진영을 돌아봤다.

한진영은 이성우의 당황한 눈빛을 보고 웃음을 꾹 눌러 참았다.

이성우가 왜 자기를 보고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차 세 대에서 내리는 사람 중에 인사해야 할 상대를 찾지 못한 이성우였다.

흔히 보이는 지도자급의 냄새를 풍기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일행이었다.

한진영은 대신하여 나서달라는 이성우의 눈빛을 보고 앞으로 나섰다.

지난 호텔 사우나에서 한 번 만났던 경험이 있었기에 한진영은 동우산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반갑습니다. 또 뵙는군요.”

“안녕하셨습니까? 이렇게 뵙게 될 줄은 몰랐는데…… 또 뵙게 됐습니다.”

“저는 찾아오실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요?”

이성우는 한진영과 악수하며 인사를 나누는 사람을 가만히 살폈다.

그리고 자기가 인사할 상대를 찾지 못한 것을 그 사람의 얼굴을 보고 다시 한번 이해했다.

‘뭐가 저렇게 평범해?’

자기가 알아보지 못한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이성우는 앞으로 나섰다.

“반갑습니다.”

이성우가 손을 내밀자 동우산은 이성우의 손을 잡으며 한진영을 올려다봤다.

누군지 궁금하다는 표정의 동우산을 향해 한진영은 이성우를 동우산에게 소개했다.

“여기는 저희 증권사 이성우 사장님이십니다.”

“아~ 기풍증권의 사장님. 기풍철강 이정훈 회장님의 자제분이시군요. 반갑습니다.”

“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영광이기는요. 그런데 설마 저 때문에 이렇게 나와 계신 겁니까?”

“그럼요. 동 상무님을 마중 나오는 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커다란 플래카드를 걸어놓지 못한 게 못내 아쉬울 정도지요.”

이성우는 한차례 너스레를 떤 뒤 동우산의 손을 잡고 안으로 이끌었다.

“들어가시지요.”

동우산은 너무나 살갑게 대하는 이성우의 반응에 오히려 당황한 표정으로 손이 잡힌 채로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런 둘의 뒤를 한진영이 따르며 기풍증권의 사장실로 향했다.

이성우는 사장실 앞에 서서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잠시 멈춰 섰다.

“지금부터 내가 따로 이야기할 때까지 아무도 들이지 말고 누구의 연락도 받지 마세요. 그게 회장님이더라도 말입니다.”

이성우는 비서에게 지시를 내린 뒤 그때까지도 동우산을 잡고 있는 손을 놓지 않은 채 사장실로 동우산을 안내했다.

“들어가시지요.”

동우산과 이성우가 안으로 들어간 뒤 한진영이 마지막으로 들어가기 전에 비서진에게 이성우의 지시에 더하는 말을 건넸다.

“선강그룹에서 오신 나머지 분들 모시고 회사 소개 좀 해주세요. 그리고 함께 나가서 식사도 하시고요. 저희 이야기가 끝나면 따로 연락드릴 테니 그전에는 들어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진영은 말을 마치고 준비하여 들고 들어가려던 차를 대신 받아 든 뒤 안으로 들어갔다.

이성우의 비서들은 문 앞에 서서 잠시 서로 바라봤다.

그리고 한진영의 말이 은밀한 대화를 할 예정이니 알아서 주변 정리를 하라는 뜻으로 알아듣고 각자 맡은 일을 처리하기 위해 흩어졌다.

한진영이 먼저 들어와 소파에 앉은 이성우와 동우산 앞에 차를 내려놓은 뒤 이성우의 곁에 가 앉았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동우산은 한진영이 자리에 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환대가 지나치십니다.”

“지나치긴요. 뵙기 어려운 분을 만난 것에 저희는 그저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누군지 알고 계십니까?”

“알지요. 압니다. 선강그룹의 동우산 상무님 아니십니까? 회장 비서실에 자리하고 있으시고요.”

동우산은 말을 마친 뒤 웃고 있는 이성우를 게스츠름한 눈으로 바라봤다.

이성우는 진작에 동우산이 어떤 존재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리에 오기 전에 한진영에게 주의를 받아 겉으로 동우산의 존재에 대해 아는 척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게 앞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데 도움이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동우산은 이성우를 살피는 것을 멈추고 한진영을 돌아보고 말했다.

“한 부문장님 이야기 들었습니다. 대단하신 분이시더군요. 한 달 전에 처음 뵀을 때 알아보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자리에 온 건 어떤 이유 때문이신지…… 듣기로는 선강그룹 최 회장님의 개인적인 투자를 논의하기 위해 방문하신다고 이야기 들었는데 말입니다.”

동우산은 모르는 척하는 한진영과 너스레를 떤 뒤 연신 웃고 있는 이성우를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저를 이리 대하시는 것을 보면 다 아시는 것 같은데…… 아닌가요?”

“뭘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성우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말을 건넸지만, 표정이 웃는 것이 진심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동우산은 그런 이성우의 모습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밖에 비서들을 다 내보낸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와 동행했던 비서진들도 따로 자리를 마련하셨더군요. 의도적으로 저와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든 것으로 보아 아무리 아니라고 하셔도 저는 두 분이 제가 선강그룹에서 맡은 일이 무엇인지 아는 것 같습니다. 맞지요?”

동우산의 말에 한진영은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동우산은 그런 한진영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그리고 천천히 한진영을 향해 말했다.

“제가 어떤 사람인지도 아시죠?”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

“조금이 아닌 것 같습니다.”

동우산은 고개를 끄덕이고 무릎에 양팔을 걸친 채 몸을 앞으로 숙였다.

“좋습니다. 그러니 솔직하게 이야기하겠습니다.”

동우산은 한진영을 똑바로 바라봤다.

한진영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바로 이 사람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은 동우산이었다.

그래서 여기서는 모든 것을 오픈하는 편이 좋다고 판단했다.

“도와주십시오.”

“도와달라고요?”

“네. 도와주십시오.”

다짜고짜 도와달라는 동우산의 말에 이성우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한진영을 돌아봤다.

한진영은 이성우와 달리 동우산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는지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가고 있었다.

***

이성우는 멀리 떠나가는 동우산이 탄 차를 가만히 바라보다 한진영을 향해 물었다.

“어떻게 할 거야?”

“도와 달라는데 도와줘야지.”

“정말 포지션을 공유할 생각이야?”

“공유 정도가 아니라 타겟 지점까지도 알려줄 생각이야.”

“그렇게까지 하려고?”

동우산이 찾아와 그들에게 부탁한 것은 기풍증권 그중에서도 투자전략사업부의 국내 선물 포지션을 자기들에게 공유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렇게만 해준다면 자문료로 원하는 액수의 금액을 지불할 용의가 있다고 이야기했다.

이성우와 한진영은 동우산에게 생각해보겠다는 말로 여지를 준 후 자리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떠나는 동우산을 배웅하며 회사 앞에서 둘은 멀어지는 동우산의 차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생각 이상으로 최 회장이 파생에 흠뻑 빠졌나 봐.”

“너도 해봐서 알겠지만, 주식 얼마나 재미있냐? 거기다 맞추면 그 재미는 말로 표현 못 할 정도지. 그런데 파생은 그것보다 더 재미있어. 결과가 빨리빨리 나오니까.”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대기업 총수까지 돼서…….”

“대기업 총수는 사람 아니야? 다 마찬가지야. 너하고 내가 재미있어하는 건 대기업 총수가 아니라 대기업 총수 할아버지가 와도 재미있어할 거다.”

한진영은 이제는 보이지 않는 차에서 시선을 거두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이성우와 함께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동우산이 부탁을 한 것 이상을 해줄 거야.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게 우리에게 좋아.”

“우리에게 어떻게 좋은데?”

“최 회장이 동 상무의 말을 전적으로 믿게 될 테니까. 동 상무의 위치를 높여주고 우리는 동 상무를 통해 원하는 것을 빼 오면 돼.”

이성우는 한진영의 팔을 잡아끌었다.

“나 전부터 궁금했는데…….”

이성우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한진영을 자기 쪽으로 더욱 잡아당겼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한진영에게 물었다.

“동 상무를 통해 얻으려는 게 도대체 뭐야? IB 파트를 강화하는데 필요한 일이라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IB 파트를 어떻게 강화하는 건데?”

한진영은 이성우를 잠시 가만히 바라봤다.

엄청 궁금했는데도 잘 참았던 이성우에게 이제는 알려줄 때도 됐다고 생각한 한진영은 이성우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올라가자. 올라가서 이야기해줄게.”

한진영의 말에 이성우가 기다렸다는 듯이 한진영의 팔을 잡아당겨 사장실로 끌고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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