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증권사 생활-194화 (194/650)

194화 이미 내정이 되어 있었다

소문으로만 돌던 채권단의 하이식스 매각이 발표됐다.

채권단은 반도체 업황이 살아나고 있는 지금 시점이 하이식스를 매각하기에 가장 알맞은 시간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공개입찰을 통해 하이식스의 매각을 진행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소문이 사실이 되자 인수 가능성을 놓고 사람들은 의견을 나누기에 바빴다.

그리고 이렇게 사람들의 의견이 나누는 사이에 국내외 증권사들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인수 희망 기업을 빠르게 찾아 그들과 파트너십을 맺어야 했기 때문이다.

기풍증권 내부에서도 인수 업체를 놓고 설왕설래가 이어졌다.

“아니라니까. LZ그룹이라니까.”

“아니에요. 미래중공업이에요.”

“어허. 모르는 소리. 내가 듣기로는 일본계 자금을 끌어와서 로터그룹이 인수한다는 소리도 있어.”

“그건 아니다. 로터그룹은 과자 만드는 곳인데 거기가 뭐 하러 하이식스를 인수해요?”

“그러니까 너희가 모른다는 거야. 로터그룹이 산하에는 중공업도 있고 화학도 있어. 거기에 반도체 하나 끼어든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사람들은 각자 의견이 맞지 않겠느냐면서 의견을 나누었다.

재계 서열 10위권 안에 들어가 있는 회사들은 모두 한 번씩 거론되었으며 과연 어디가 하이식스를 인수하겠다고 나설지 모두 궁금한 눈으로 지켜봤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아무도 인수에 참여하겠다고 나서는 곳이 없었다.

매년 조 단위의 투자금이 필요한 사업에 쉽사리 기업들이 참여할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었다.

채권단은 몸이 달아오르고 말았다.

올해도 하이식스를 매각하지 못한다면 이제는 더는 기업을 유지할 여력이 없기 때문이었다.

유상증자를 통해 투자금을 유치하여 생산설비를 채우는 일도 한계에 다다랐다.

정부의 보조금으로 직원들의 월급을 주는 것도 더는 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이상 그것도 채권단의 몫이 되고 말았다.

하이식스의 직원들은 상여금은 물론이고 오히려 임금을 삭감하는 고통을 지고 있는 만큼 신규인력의 충원도 이제는 기대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채권단은 어떻게든 하이식스를 매각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하이식스를 인수하려는 기업에 지원금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이고 매각 대금의 유예를 고려해볼 수 있다는 발표가 나왔다.

또한 하이식스에 투자를 하게 된다면 신규 대출을 통한 지원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이야기를 내놓았다.

채권단 대표들은 자기들이 내놓을 수 있는 최대의 지원을 약속했고, 인수하는 곳에는 정부의 지원도 함께한다는 말로 입찰에 참여하도록 기업들을 꾀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이식스의 인기는 시들시들하기만 했다.

채권단이 기대하는 4조가 넘는 매각 금액은 대한민국의 기업이 섣불리 내놓을 수 없는 금액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생각지 못한 곳에서의 하이식스 입찰 참여 발표가 나왔다.

[선강그룹은 새로운 사업에 대한 과감한 도전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하이식스의 인수가 선강그룹의 미래에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애니멀 스피릿(Animal Spirit, 야성적 충동)을 믿어주십시오.]

선강그룹의 최대일 회장이 그룹사 직원들과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하이식스의 입찰에 참여하겠다는 선언을 한 것이었다.

최대일 회장은 작년부터 업계 전문가들과 스터디 모임을 만들어 반도체 사이클과 가능성에 대해 파악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이런 바탕을 통해 과감하게 승부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으며, 자기를 믿고 그룹사 모두가 힘을 모아 하이식스 인수에 힘을 보태달라고 주장했다.

***

임재홍 리서치 센터장이 한진영이 있는 사무실을 찾았다.

“부문장님.”

“오셨습니까? 어떻게…… 준비가 다 됐나요?”

“네. 준비되기는 했는데…….”

임재홍이 뒤에 서서 기다리고 있는 팀원들을 살피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가 파트너 자리를 따낼 수 있을까요?”

“그건 가봐야 아는 일이겠지요. 그럼 가시죠.”

임원회의 자리에서 이성우가 하이식스 인수전에 참여하기로 이야기한 뒤 기풍증권은 급히 새로운 팀을 구성했다.

한진영을 주축으로 한 팀은 기풍증권 곳곳의 인재들이 모아 하이식스 인수전에 뛰어들 준비를 마쳤다.

그렇게 만든 TF팀이 선강그룹을 향해 출발했다.

“부문장님이 지시해서 미리 준비하기는 했는데…… 걱정이 됩니다.”

“이해합니다. 우리가 끼어들기에는 경쟁자들 덩치가 너무 크지요.”

“국내외 대형 증권사들이 모두 다 참여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습니다. 중소형 증권사 중에는 아마 우리가 유일할 거 같아 보여요.”

리서치 센터장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어떻게 알았는지 하이식스 매각 발표가 있기 전부터 한진영의 지시로 인수에 필요한 것들을 차분히 정리해 나갔던 임재홍이었다.

그래서 자료를 비롯하여 계획 등은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선강그룹이 만족할만한 규모를 기풍증권이 갖추지 못했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듣기로는 파트너사 계약을 맺으면 10년 동안 함께한다고 하던데…… 자문료로만 한 해에 수백억 아닙니까? 게다가 하이식스의 내부를 들여다볼 수도 있고요. 이것 때문에 증권사들이 이번 프로젝트에 목숨을 내놓았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럴 겁니다.”

임재홍은 한진영의 옆얼굴을 살피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부문장님께서는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걱정이요? 어떤 걱정이요?”

“부문장님의 임원 승진이 이번 일에 달린 것 아닙니까?”

“아~ 그 말씀이셨군요. 별로…… 저는 크게 걱정하지 않습니다.”

“부문장님께서는 이번 일을 우리가 따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 계시군요?”

“네. 저는 이번 일은 우리 몫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진영의 자신 있는 말에 임재홍 센터장은 걱정을 덜었다.

한진영이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지난 일들을 통해 이미 경험했기 때문이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차는 선강그룹 본사에 도착하게 됐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선강그룹 본사 정문은 시장통과 다름없어 보였다.

오늘 있을 자리에 참여하기 위해 선강그룹을 찾은 증권사 직원들과 그들을 안내하는 선강그룹 직원들로 발 디딜 틈조차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저희는 기풍증권에서 왔습니다.”

하이식스팀으로 불리는 TF팀의 팀원 하나가 대표로 나서 선강그룹 직원에게 신분을 알렸다.

선강그룹 직원은 명단을 확인한 후 기풍증권 직원들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대기실까지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대기실? 대기실까지 마련되어 있는 겁니까?”

“네. 찾은 분들이 많아 대기실을 마련했습니다.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계시면 따로 연락 드리겠습니다. 그때 나오셔서 회장님을 비롯한 평가위원분들께 기풍증권의 계획을 설명해주시면 됩니다. 순서는 마지막이 될 테니 그때까지 편히 계시고요.”

기풍증권 직원들은 예상보다 큰 오늘의 자리에 놀란 모습을 보였지만 이내 안정을 되찾았다.

한진영이 이런 모습에 전혀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풍증권의 직원들은 안내하는 선강그룹 직원의 뒤를 따랐고 그렇게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안은 바깥보다 더욱 복잡했다.

증권사 한 군데서 데리고 온 직원만 적어도 10여 명에, 많은 곳은 수십 명을 끌고 온 곳도 있었다.

그렇게 선강그룹을 찾은 증권사는 국내외를 합쳐 30여 곳이 넘었다.

반도체 분야의 세계 3강에 속하는 업체가 매물로 나온데다 그곳을 속속들이 살필 수 있다는 메리트가 증권사로서는 군침이 도는 일이었다.

국내에 지점을 설립하지 않은 해외 유명 투자은행조차 본사 직원들까지 찾은 것이 이번 일의 관심 정도를 증명했다.

선강그룹 직원의 안내에 따라 대기실에 들어간 기풍증권 직원들은 선강그룹 직원이 나가자 가지고 온 것들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한진영의 지시에 따라 마련된 반도체 시황과 예측 그리고 하이식스 인수 뒤에 이루어질 계획 등이 상세히 적혀있는 서류들을 살피며 혹시 이상이 없나 꼼꼼히 살폈다.

하지만 이런 모습도 2시간이 지나도록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는 선강그룹의 모습에 차츰 기운을 잃고 말았다.

“저기…… 부문장님.”

한쪽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 한진영에게로 직원 몇몇이 다가왔다.

“네? 무슨 일이시죠?”

한진영이 눈을 뜨고 다가온 팀원들을 바라보자 팀원들은 어색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나가서 담배 한 대 피우고 와도 될까 하고요. 부를 기미도 보이지 않고…… 답답해서…….”

한진영은 잠시 밖에 나가 바람을 쐬고 오겠다는 직원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세요. 우리가 제일 마지막이라니 아직 여유가 있을 테니까요.”

“감사합니다.”

바짝 긴장하고 있던 직원들은 쉬었다가 오라는 한진영의 말에 기분 좋게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나갔던 직원들이 10여 분이 흐르고 나서 황당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부문장님.”

“네?”

몸에서 담배 냄새가 아직 지워지지 않은 직원이 한진영을 향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밖에 난린데요.”

“밖에요?”

“네.”

서류를 한참 들여다보고 있던 임재홍도 팀원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떻게 난리라는 건데?”

담배를 피우고 온 직원들은 한진영과 임재홍 앞에서 밖에서 봤던 것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여기에만 있어서 다들 이런 대기실을 받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봐요. 대부분 네다섯 명만 들어가도 꽉 차는 대기실을 배정받았대요. 그런 곳에 스무 명, 서른 명이 들어가 있으려니 난감한 모양이에요. 게다가 부르는 순서도 다 제각각이라 언제 부를지 몰라 화장실도 제대로 가지 못하고 있고요.”

한진영은 바깥 사정을 듣고 온 직원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임재홍은 그런 한진영을 슬쩍 쳐다본 뒤 직원을 향해 다시 물었다.

“발표는 어떻다던가? 어떤 질문들을 한데?”

“그게…….”

“그것도 이상하다는데요.”

질문을 받은 직원이 우물쭈물하자 곁에 있던 다른 직원이 대답했다.

“이상하다고? 뭐가?”

“아니. 그게…… 일부러 우리를 놀리려고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도대체 뭔 이야기인데 그래?”

임재홍의 말에 처음 질문을 받았던 직원이 다시 이야기했다.

“질문이 10년 뒤 반도체 가격을 예상하라는 질문을 던진다고 그래요.”

“뭐?”

임재홍은 직원의 대답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다음 분기의 가격을 예측하는 것도 어려운 반도체 시장에서 1년 뒤도 아니라 10년 뒤의 가격을 예측하라는 것은 10년 뒤에 누가 대통령이 될 것 같으냐는 질문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10년 뒤면 공정이 몇 번은 바뀌었을 시기인데 그걸 예측하라고 했다고?”

“네. 그게 전부가 아니라…… 경쟁사의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느냐고 했다는데요.”

“뭐야? 대놓고 스파이 짓을 하라고 하는 거 아냐?”

임재홍은 당황한 표정으로 한진영을 돌아봤다.

“부문장님. 이거 우리한테도 그런 질문이 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요?”

“괜찮습니다. 지금 최 회장님이 심통이 나서 화를 내느라 그런 질문들이 하시나 본데 우리하고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냥 준비하는 대로 준비하세요.”

“심통이 나셨다고요? 최대일 회장님이요?”

임재홍 센터장은 한진영이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진영이 괜찮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여기까지 와서 돌아갈 수도 없음에 임재홍은 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를 생각하며 시간을 보냈다.

다시 1시간의 시간이 더 흐르고 나서야 기풍증권의 차례가 됐다.

선강그룹 직원의 나오라는 말을 듣고 밖으로 나온 기풍증권 직원들은 초토화가 되어 있는 바깥 상황을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할 수 있었다.

10년 뒤의 반도체 가격을 예측하기 위해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리는 사람.

경쟁사의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맞는지 틀리는지에 대해 핏대 세우며 이야기하는 사람.

유가와 반도체 가격의 상관관계에 대해 열심히 분석하는 사람 등등 복도는 물론이고 작디작은 대기실까지 초토화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어떻게든 이번 하이식스 인수 작업에 파트너사로 참여하고 싶어 애를 쓰는 모습이었다.

“들어가시지요.”

발표회장 앞에서 문을 열어준 직원은 한진영을 비롯한 기풍증권의 직원들에게 안으로 들어갈 것을 권했다.

한진영이 그런 직원의 안내에 따라 제일 먼저 발표회장에 들어갔다.

그리고 뒤를 따라 기풍증권의 직원들이 복도에서 봤던 모습을 가슴에 품고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뒤를 따랐다.

“어이. 한 부문장.”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최대일 회장이 한진영을 불렀다.

“안녕하셨습니까?”

“자네가 직접 왔어? 왔으면 바로 올라오지 뭐 하러 이제 얼굴을 보여?”

“제가 먼저 회장님을 찾아뵈면 말들이 많을 것 같아서요.”

“뭘 그런 걸 신경 쓰나? 자네와 나 사이에 말이야.”

기풍증권의 직원들은 한진영과 최대일 회장을 번갈아 바라봤다.

최대일 회장은 그런 기풍증권의 직원들을 살피고 손을 휘저었다.

“됐어. 가지고 온 서류 있으면 이리 주고…… 어이. 한 부문장. 자네는 이리 와.”

최대일 회장의 말에 선강그룹 직원들이 기풍증권 직원들에게 다가가 손에 들고 있는 자료들을 건네받았다.

기풍증권 직원들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류가 없는 맨손으로 어떻게 발표해야 하는지 당황스러워했다.

그러나 그런 그들에게 더 당황스러운 상황이 벌어졌다.

“여기 앉아. 여기. 내 옆에 앉아서 같이 보자.”

최대일 회장이 자기 옆자리를 한진영에게 내어주고는 한진영과 귓속말을 하며 즐거워하는 게 눈에 들어온 것이었다.

그리고 뒤이어 나온 최대일 회장의 말에 황당한 표정으로 발표회장을 나갈 수밖에 없었다.

“기풍증권은 이걸로 됐고…… 다른 증권사도 들어와서 아까 질문에 하나씩 대답하라고 해. 이 새끼들 뭐 준비해온 것도 없이 우리하고 뭔 파트너를 한다고…… 아, 기풍증권은 가도 돼요. 한 부문장은 나하고 좀 더 있어야 하니까 두고 돌아가요.”

최대일 회장의 말에 기풍증권 직원들이 밖에 나오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다른 증권사 직원들이 벌레 씹은 표정을 하고 발표회장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본 팀원 하나가 임재홍에게 말했다.

“우리 부문장님이 평가위원이 된 것 같지 않았어요?”

“나도 그런 것 같다.”

“우리가 될 수도 있겠는데요?”

“우리가 될 수도 있는 게 아니라. 된 것 같아. 아니. 이미 내정이 되어 있었나 봐. 그리고 한 부문장님은 그걸 알고 있었고…… 그게 아니라면 이게 설명이 안 되잖아.”

임재홍은 한진영이 들어가 있는 발표회장의 문을 바라보고 고개를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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