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세이지 자산운용
“짐 옮기는 거 조심하세요. 그거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박도하 팀장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옮겨지는 컴퓨터들을 바라봤다.
“부딪히면 안 됩니다. 절대 세게 놓지 마세요. 큰일 납니다.”
박도하 팀장은 시어머니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물건을 옮기는 사람들을 쫓아다니며 잔소리했다.
컴퓨터를 들고 있던 사람들은 그런 박도하의 모습에 짜증이 났지만, 김준하와 같이 짐을 옮기는 사람에 비하면 박도하가 낫다고 생각했다.
김준하 쪽은 진도가 아예 나가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저희 주세요.”
“아니에요. 이건 제가…… 어…….”
추르륵.
김준하의 품에 담겨있던 서류뭉치가 바닥에 쏟아져 내렸다.
“밟으시면 안 돼요. 밟지 마세요.”
종이들이 쏟아져 내리며 바닥에 흩어지자 김준하가 급히 주변에 사람들이 오지 못하게 막았다.
“보지도 마세요. 제가 주울 테니 놔두세요. 가만! 움직이지 마세요.”
김준하는 떨어져 있는 종이에 다가가려는 사람을 급히 막았다.
그리고 그 앞에 떨어져 있는 종이를 집고는 하나하나 털어 나갔다.
공식과 수식이 쓰여 있는 종이에 먼지라도 묻었을까 봐 걱정하는 얼굴의 김준하였다.
“정신없다. 정신없어. 뭐가 이렇게 정신이 없냐?”
한진영은 곁에 다가와 고개를 흔드는 이성우를 슬쩍 돌아봤다.
“주말에 굳이 이거 보려고 나온 거야?”
“너 간다니까 섭섭해서 나온 거지.”
“뭐가 섭섭해? 바로 옆인데. 누가 보면 어디 먼 데로 가는 줄 알겠어.”
“그러게 바로 옆이더라. 자주 놀러 갈게.”
뭐 하러 자주 올 생각을 하냐고 말하려던 한진영은 고개를 흔들며 말을 되삼켰다.
이번에는 이성우에게 오지 말라고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기풍증권을 나오며 기풍철강에서는 한 가지 제안을 내놓았다.
한진영에게 기풍철강의 투자금 외에도 기풍증권의 운용 파트를 일정 부분 맡긴 것이었다.
한진영은 기풍의 결정에 놀라려는 것을 겨우겨우 참았다.
사실 지금 시기에 이런 제안을 받을 거로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국과 일본 그리고 금융 선진국들에서 진행되고 있는 운용 의뢰는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굉장히 생소한 케이스였다.
증권사가 직접 운용에 대한 의뢰를 자산운용사에게 넘긴다는 개념은 한진영이 경험했던 시절에도 흔한 일이 아니었다.
미국과 같이 투자와 운용의 선을 명확히 시스템적으로 구분해놓은 곳에서나 있을 만한 개념이 바로 운용 파트의 외부 의뢰였다.
그런 개념을 기풍에서 먼저 제안한 것이었다.
그러니 한진영으로서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이런 제안이 기풍에서 먼저 나올 만도 했다.
한진영이 바로크 호텔과 하이식스 인수 건을 물고 오면서 기풍은 덩치에 맞지 않게 엄청나게 큰 부하가 걸렸기 때문이다.
이정훈 회장은 이런 기풍증권을 보고 계산기를 두드렸다.
무엇이 이득이고 무엇을 쳐내야 회사가 제대로 굴러갈지 빠르게 확인했다.
소화하지 못할 정도의 물량에 욕심을 내 끌어안고 다 같이 터져 죽기보다 가능한 것들만 들고 가는 편이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리고 나온 결과가 운용 파트를 이제 막 자산운용사를 세우고 나간 한진영에게 맡기는 것이 좋다고 나온 것이었다.
물론 기풍증권에 들어온 운용금액을 모두 의뢰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부터 모든 돈을 맡기기에는 한진영도 그릇이 아직 완전히 완성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풍으로서도 위험한 도박이 될 수 있었기에 우선 일부를 넘겨 결과가 나온 것을 보고 결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1차로 넘긴 금액만도 500억이나 되었다.
게다가 500억이 잘 운용되었을 때 기다리고 있는 자금들을 생각한다면 500억은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이성우는 한진영 앞에 가슴을 펴고 배를 내민 뒤 고개를 쳐들고 말했다.
“나 엄연히 너희 회사의 갑이야.”
“누가 뭐라던? 너 갑이야. 갑. 내가 을이고.”
“그러니까 명심하고 잘 모셔.”
“내가 모시기까지 해야 하냐?”
“그럼 당연하지. 내부 실사도 분기마다 할 테니까 신경 쓰도록 해. 친구라고 내가 봐주는 일은 없을 테니까.”
이성우의 말에 한진영이 째려보듯이 쳐다보자 이성우가 찔끔하고는 손을 올렸다.
“좋아. 그럼 반기…… 아니면…… 년마다?”
그래도 날카로운 한진영의 눈이 풀리지 않자 이성우는 들어 올린 손을 마구 휘저었다.
“야야. 알았어. 우리 사이에 그렇게 심각하게 안 따질 테니까 그렇게 째려보지만 마라. 이거 뭐 무서워서 돈 맡기고 눈치까지 봐야 하겠어?”
“그럼 도로 가지고 가. 500억 누구 코에 붙이라고 넘기고 생색내는 거야?”
“와~ 한진영이 많이 컸다. 다른 사람이 그런 이야기 들으면 욕해. 500억이 적은 금액이 아니야.”
이성우는 한진영이 다시 가지고 가라고 말할까 걱정된다는 듯이 열심히 설명했다.
“우선 500억으로 시작해서 너희 쪽 실적이 괜찮으면 운용 부분을 아예 너희 쪽에 넘길 수도 있어.”
“너희는 IB 파트를 중점적으로 파고?”
“맞아. 그렇게 분업화해서 너희와 협력관계를 이어갈 생각이야. 그러니까 500억이라고 무시하지 마라. 그 뒤에 더 많은 돈이 자리하고 있다.”
“안 무시해. 내가 무시해서 그런 말 했겠냐?”
“알지. 내가 다 네 맘 알지. 나하고 떨어져서 섭섭해서 그러는 거잖아. 그치?”
이성우는 한진영의 목에 팔을 두르고 밖으로 끌어냈다.
“가자. 너 이사 가는 곳 나한테 직접 소개 좀 해줘.”
한 사람은 증권사 사장이었으며 다른 한 사람은 벌써 4,000억 가까이 자금을 모집한 자산운용사의 대표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마치 동네 친구라도 된 것처럼 투닥거리며 기풍증권을 나가 한진영의 사무실이 자리한 곳을 향해 걸어갔다.
“와~ 좋다. 이거 뭐 우리 회사보다 더 좋은 거 아니야?”
“프라임리츠의 정 회장님이 잘 꾸며놓아 주셔서 손 볼 게 많지가 않았다.”
“아니. 뭐 너 들어온다고 싹 새로 정리해준 수준이야. 원래 여기 프라임리츠 사무실이었다며? 남이 쓰던 손때가 하나도 느껴지지가 않는데?”
“먼저 이사 가시면서 이상한 부분 싹 고치고 가셨어. 그래서 덕분에 편하게 일 시작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이성우는 한진영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진영에게 새롭게 사무실을 차리면서 고생할 것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그래도 처음 두어 달간은 힘이 들겠거니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와서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보니 고생은 고사하고 오히려 사무실을 옮긴 게 더 낫게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직원들이 보면 좋아하겠다.”
“그럴 거야.”
“우와~”
한진영의 말이 끝나자마자 문 입구에서 환호성이 들려왔다.
“여기 뭐예요? 진짜 여기가 우리 사무실이에요?”
가장 먼저 도착한 조수아가 커다란 목소리로 감탄하자 뒤를 이어 들어온 직원들도 같은 목소리로 감탄했다.
“지금 당장 일해도 괜찮을 분위기인데요?”
“너무 좋은 거 아니에요? 책상이나 의자도…… 완전 새것인데요? 다른 사람이 쓰던 거라고 해서 다 낡아빠진 건 줄 알았는데…….”
“그뿐이 아니야. 컴퓨터도…… 최신형인데? 이것도 우리가 쓰면 되나요?”
IT 팀장답게 오자마자 전자제품부터 살핀 박도하는 복사기와 팩스 등등을 살피며 감탄했다.
어느 것 하나 새것이 아닌 게 없었다.
문까지 반질반질한 게 오히려 한진영네 식구들이 오면서 더럽혀지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성우는 감탄하는 직원들을 보고 샘이 난 듯이 입을 삐죽거리다 한진영의 옆구리를 찔렀다.
“우리는 네 사무실 가서 이야기 좀 하자.”
“그래. 가자.”
이성우와 한진영은 위층에 마련되어 있는 한진영의 사무실로 향했다.
아래층이 사무적인 일을 하는 곳이라면 위층은 실제적인 운용을 하는 파트가 사용할 곳이었다.
그래서 아래층과는 달리 여러 가지 트레이딩에 필요한 보조 기기들이 많이 설치되어 있었다.
“여기도 시세 전광판이 달려있네.”
이성우는 지난 기풍증권에서 한진영이 세팅해 놓은 것과 같은 시스템이 달린 천장을 바라보고 말했다.
“이거 보니까 정말 네가 이사 가는 게 현실로 느껴진다. 이게 여기에 걸려있는 걸 보니까 말이야.”
“뭘 그렇게 아련하게 쳐다보고 있어. 소름 끼치게.”
“아련하지 그럼 아련하지 않냐?”
“남자한테 그런 시선 받고 싶지 않다. 들어가자.”
한진영은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대표실이라고 적혀있는 사무실 안은 생각보다 조촐한 분위기였다.
응접용 소파와 책상과 의자 그리고 여러 가지 정보가 들어오는 화면들이 벽에 걸려있을 뿐.
지난 기풍증권 때의 부문장실에 비해 더 나은 것이 없는 모습이었다.
“회사에 네 사무실이 제일 볼품없어 보인다. 왜 이렇게 볼품없게 만들었어?”
“어차피 난 여기 잘 안 있을 거니까 사무실을 좋게 만들어봤자지. 그냥 없으면 허전해서 만든 거야. 앉아. 마실 것은…… 이거 마시면 되겠네.”
사무실 한쪽에 세워져 있는 냉장고 문을 연 한진영은 냉장고 안에서 주스병 두 개를 꺼내와 하나를 이성우에게 건넸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의 병뚜껑을 딴 한진영은 소파에 앉으며 이성우에게 말했다.
“내가 한 이야기 잘 기억하고 있지?”
한진영의 말에 이성우가 음료수를 마시며 대답했다.
“잘 기억하고 있어. 내가 결정하지 마라. 내가 시장을 판단하지 마라. 무조건 물어보고 진행해라. 아주 귀가 따갑게 들은 이야기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네가 시장 방향을 바라보지 마. 너는 그냥 회사만 운영해. 괜히 지수가 오르니 내리니, 주식이 오르니 내리니 판단하지 말라고.”
“알았어. 나 바보 아니야. 네가 어떤 의미에서 이야기하는지 잘 알고 있어. 회사 운영에 더 집중하라는 이야기잖아. 걱정하지 마. 네 말대로 작은 것은 직원들에게 맡기고 큰 것만 보면서 갈 테니까.”
이성우는 믿으라는 듯이 가슴을 크게 활짝 폈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의 모습에 말없이 웃어 보였다.
한진영이 이성우에게 시장을 판단하지 말라고 이야기한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바로 귀신같이 반대로 맞히는 이성우의 판단력 때문에 시장을 판단하지 말라고 한 것이었다.
한진영이 곁에 있을 땐 그래도 한진영이 브레이크를 걸어줄 수 있었다.
하지만 한진영이 나온 지금 그런 브레이크를 걸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언젠가는 한번 사고를 치는 게 아니냐는 걱정이 들기도 했다.
‘그래도 기풍의 운용 파트를 내가 가지고 나온다면 큰 문제는 없겠지.’
한진영은 그때까지 사고를 치지 않기를 바라면서 이성우를 향해 믿는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성우는 가슴을 펴 보이는 것을 멈추고 사무실을 둘러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나 아직도 네 회사 이름도 듣지도 못했다. 회사 이름이 뭐냐?”
“Sage. 세이지 자산운용.”
“세이지 자산운용? 현명한 뭐 이런 뜻으로 만든 거냐?”
“현자라는 뜻도 있고…….”
“좋네. 너한테 딱 어울린다. 잘 키워서 오마하의 현인처럼 여의도의 현인 돼라. 여의도의 현인을 친구로 둔 덕 좀 보자.”
“그래. 내가 잘되면 너도 잘되는 거니까 기도해라.”
“기도하고 말 것도 없지. 넌 잘할 거야. 난 믿어.”
마치 당연히 그렇게 될 거라는 믿음을 보인 이성우였다.
“그런데 언제부터 일할 거야? 이사도 했고 바쁜 것도 마무리 지었으면 나하고 골프나 치러 가자. 날도 추워지는 데 따뜻한 곳 가서 한 게임 치고 와야지.”
이성우가 앉은 채로 골프스윙을 하는 자세를 잡았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를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바빠.”
“바쁘다고? 뭐가 바빠?”
“바로 일할 거야. 그런 의미에서 너도 놀러 가지 마.”
“나도? 왜?”
한창 스윙 자세를 취하던 이성우는 그 자세 그대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를 향해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한동안 조심하고 몸 사려. 특히 국내 주식하고 환율 그리고 채권 쪽은…… 조심하는 게 좋아.”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그건 조만간 알게 될 테니까. 그 정도만 알아둬. 내 말 명심해라. 당분간은 점심에는 어디 나가지 마. 회사 지켜. 너라서 그리고 내가 다녔던 회사라서 알려주는 거니까 잊어버리지 마.”
이성우는 한진영의 말에 눈만 끔벅거릴 뿐이었다.
***
이사를 마친 세이지 자산운용의 직원들은 이사를 마친 다음 날인 일요일부터 출근하여 사무실 세팅에 돌입했다.
언제라도 바로 일을 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야 한다는 한진영의 지시 때문이었다.
직원들의 입에서 불평불만이 나올 수도 있었지만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한진영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김정일이 진짜 죽었을까?”
“진짜 죽기는 뭐가 진짜 죽어? 그거 지난달에도 나왔던 루머 아냐? 그것 때문에 지수 한번 출렁거렸는데 장 끝나고 나니까 귀신같이 아니라고 기사 나오더라. 어떤 놈들인지 정말 할 일 없는 놈들인가 봐. 그런 거로 시장 교란하고 있으니 말이야.”
“그래도 그것 때문에 시장이 계속 출렁거리면서 오르지 못하니까 조심해야지. 지금 몇 달째 1,800대에 머물러 있는 거야? 올라갈 만하면 북한 어쩌고저쩌고 소리가 나오니 오르지를 못하지.”
직원들은 자리 셋팅을 이어가며 최근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근데 들리는 이야기로는 김정일하고 우리나라 대통령하고 만난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그거 나도 들었다. 만나서 담판 짓고 그동안의 긴장 관계를 완화하겠다고 청와대 쪽에서 이야기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다던데?”
“이번 대통령도 그거로 뭐 노벨 평화상 같은 거 받고 싶나 보네요.”
“뭐가 됐건 긴장 관계 좀 풀어졌으면 좋겠다. 언제까지 북한 리스크를 시장이 떠안아야 하는 거냐? 어휴…… 징그럽다.”
직원들 모두 지난달에 있었던 김정일 사망설 때문에 출렁였던 시장을 생각하며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