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증권사 생활-204화 (204/650)

204화 잊을 수 없는 날

직원들의 세팅은 이삿짐이 풀린 날로부터 약 일주일간 계속됐다.

단순하게 자리만 옮긴 것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를 옮긴 것이기에 생각보다 마무리되는 시간이 꽤 오래 걸리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세이지 자산운용의 직원들은 하나같이 빠르게 움직여 세팅을 마무리해갔다.

갑작스럽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세팅으로 시간을 오래 잡아먹을 수는 없다는 한진영의 말에 모두가 공감했기 때문이다.

시장은 미국 신용등급 사태로 2,000을 깨고 내려간 뒤 지지부진한 모습을 몇 달 동안이나 보여주고 있었다.

올라갈 만하면 위에서 내리누르는 통에 시장은 1,800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시장 참여자들은 이런 시장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횡보가 오래된 만큼 위든 아래든 방향이 잡히면 크게 갈 거라는데 공감대가 형상되고 있었다.

세이지 자산운용의 직원들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최대한 빠르게 세팅을 마무리 지으려 하고 있었다.

“어이. 김 대리. TV 소리 높여봐.”

“TV 소리요?”

한창 세팅을 이어가던 직원 중 하나가 TV 앞에 서 있는 직원에게 소리쳤다.

일하던 다른 직원 중에 가장 직급이 높았던 최석영이 소리를 친 직원을 돌아보고 이유를 물었다.

“갑자기 일하다 말고 TV 소리는 왜 키우라고 그런 거야?”

“조금 뒤에 북한에서 뭔 발표를 한다고 그래서요.”

“발표?”

“네. 정오에 긴급발표를 뭐 한다고 그랬다는데요.”

“그래?”

최석영은 TV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직원의 말대로 뉴스 화면 밑으로 조금 뒤 북한에서 긴급성명을 발표한다는 속보가 지나가고 있었다.

“또 뭐야? 소리 켜봐.”

최석영이 허락하자 벽면 가득 채우고 있던 화면이 일제히 뉴스 채널들로 변했다.

그리고 천장에 달린 시세 전광판에도 모두 뉴스 화면이 띄워졌다.

직원들은 하던 것을 멈추고 북한에서 발표한다는 긴급성명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북한에서는…… 금일 김정일 국방위원장…….”

아나운서가 긴급으로 들어온 북한발 뉴스를 속보로 전했다.

세이지 자산운용의 직원들은 모두 하던 것을 멈추고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조건 없는 6자회담이 조속히 재개되기를 바란다는 긴급성명은…….”

“미친…… 야 꺼. 저게 뭐라고 긴급성명이라는 거야. 저것들도 참 정신 나갔지. 저게 뭐라고 온갖 채널에서 속보라고 뉴스를 띄우는 거야?”

최석영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소리쳤다.

“끄고 하던 거마저 마무리하자. 조금 뒤에 창립 기념식 해야 하니까. 마무리 짓고 즐겁게 기념식 자리를 즐기자고.”

최석영은 조금 전까지 혹시 모를 이야기에 귀를 세우고 있던 직원들을 독려했다.

오늘로써 마무리 정리를 끝내고 내일부터는 제대로 된 일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어느 정도 마무리를 한 직원들이 하나둘 7층으로 모였다.

그리고 케이크를 비롯한 샴페인으로 새롭게 창립한 세이지 자산운용을 축하했다.

직원들은 한진영의 가벼운 기념사를 들은 뒤 즐거운 얼굴로 세이지 자산운용의 앞날을 축복했다.

“고생하셨어요.”

김석현 과장이 한진영을 찾아와 인사했다.

“대표님이 기풍증권을 나온다고 처음 이야기하신 지 이제 겨우 한 달이 지났는데 이렇게 어엿한 회사가 차려질 줄 상상도 못 했어요. 저는 최소한 해는 넘겨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거든요.”

“정신없었죠?”

샴페인 잔을 들고 한진영은 김석현의 말을 가볍게 받았다.

기풍증권 때와 마찬가지로 세이지 자산운용에서도 외환 파트를 맡아 운용할 김석현 과장은 한진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솔직히 정신없기는 했어요. 뭐가 뭔지 모르게 후루룩 지나가 버린 느낌이니까요. 그리고 정신을 차리니 새로운 곳에 이렇게 직급이 올라서 서 있게 되었고요.”

한진영은 김석현 과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한진영을 따라 자리를 옮기는 것을 아무런 불만 없이 잘 따라주었다.

그들이 한진영을 따른 것이 의리 때문이 아니라 자기들에게 더욱 이득이 되어 그랬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진영은 그런 그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직급을 올려주었으며 계약 연봉도 기풍증권보다 더 챙겨주기로 약속했다.

최소한 돈에서만큼은 세이지 자산운용에 왔다는 것에 불만을 느끼지 않게 해야겠다는 것이 한진영의 생각이었다.

“대표님.”

김석현과 이야기하는 사이 조수아도 한진영의 곁으로 다가왔다.

“조수아 씨도 고생했어요. 앞으로도 잘 부탁할게요.”

한진영이 웃으며 샴페인 잔을 내밀자 조수아도 잔을 내밀어 부딪혔다.

그리고 샴페인 맛을 잠시 본 뒤 한진영을 찾아온 이유를 이야기했다.

“그런데 대표님. 돈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돈이요?”

“네. 당장 회사 사무실 운영비며…… 직원들 월급에…… 블룸버그 단말기만 해도 한 달에 2억 가까이 내야 하기도 하고…… 돈 쓸 곳이 산더미인데 걱정이 돼서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회사의 안살림을 맡게 된 조수아가 벌써 걱정되는 마음으로 한진영을 찾아온 것이었다.

“매달 1%씩 수수료를 받기로 했잖아요.”

이야기를 듣던 김석현이 조수아의 걱정이 과하다고 느꼈는지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벌써 우리 회사 펀드 가입금액이 4,000억이잖아요. 여기에 1%를 수수료로 받으면 매달 40억씩이 들어온다는 이야기인데…… 이 정도면 회사 운영하는 데 쓰고도 남을 것 같은데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계속 돈을 빼 쓸 수만은 없으니까요.”

그걸 자기가 모르고 여기 찾아왔겠냐는 눈초리의 조수아였다.

김석현은 창립일 날부터 돈돈거려야겠느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진영 앞이라서 꾹 눌러 참았다.

한진영이라면 이런 것을 모르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침 말씀 잘하셨습니다. 각 팀장들 회의실로 좀 모아주세요.”

한진영은 조수아에게 지시를 내리고 먼저 회의실로 향했다.

한진영이 자리를 잡고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샴페인 잔을 든 각 팀의 팀장들이 하나둘 회의실로 들어왔다.

아직도 즐거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팀장들을 바라보며 한진영은 잔에 들어있던 샴페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들어온 팀장들을 한차례 쓸어봤다.

즐거운 얼굴로 자리에 앉던 팀장들은 한진영의 모습에 웃던 것을 멈추고 앞에 잔을 내려놓은 뒤 한진영에게로 시선을 모았다.

한진영은 그런 팀장들의 시선을 받으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공식적으로 오늘부터가 우리 세이지 자산운용사가 출범하는 날입니다. 이런 즐거운 날 일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일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할 수밖에 없게 됐다는 말씀은…… 혹시 무슨 일이 있다는 건가요?”

술을 잘하지 못해 샴페인 몇 모금에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고제상이 한진영을 향해 물었다.

한진영은 회의실 한쪽에 걸려있는 달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잊을 수 없는 날짜를 바라본 채 입을 열었다.

“꼭 무슨 일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불편한 이야기들이 계속 들려와서 그렇습니다.”

“불편한 이야기라면…… 지금 불편한 이야기가 뭐가 있지?”

고제상이 곁에 있는 김석현을 돌아보고 물었다.

김석현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지금 한창 시장에 많이 흘러 다니는 이야기를 꺼냈다.

“혹시 북한 이야기 말씀하시는 건가요?”

“북한?”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김석현의 말에 몸에 들어왔던 취기가 한 번에 날아가는 느낌을 받았다.

작년은 북한 이슈가 일 년 내내 이어졌던 해였다.

핵실험부터 시작해서 연평도 포격과 천안함 사건까지 일 년 내내 북한과 관련된 이슈로 온몸이 너덜너덜해진 주식시장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런 작년에 비하면 올해는 고요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북한이 잠잠하기만 했다.

금방이라도 전쟁을 벌일 것 같던 작년과 달리 올해가 저물어가는 연말까지 북한 쪽 이슈는 특별한 게 없었다.

그러던 시장에 최근에 한 가지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설.

북한을 지배하고 있는 인물이 뇌출혈로 쓰러진 것이 이야기의 발단이 되었다.

외국에서 의사를 들여 장시간의 수술을 받았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사경을 헤맨다는 이야기가 여러 채널을 통해 국내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퍼져 이제는 사망설까지 흘러 다니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얼마 전에 김정일 사망설 때문에 외환시장과 주식시장이 엄청나게 출렁거렸는데…….”

“그런데 그거 다 루머잖아요. 군부대 시찰 영상도 공개했던데…….”

“언제 찍은 건지 알 수 없지. 미리 찍어놓고 이제 공개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그러기에는 청와대 반응이 너무 없잖아요.”

팀장들은 각자 의견을 나눴다.

조금 전까지 세이지 자산운용사의 출범을 즐기던 모습은 이제 온데간데없어졌다.

심각한 표정으로 북한 이슈에 관해 토의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청와대에서는 오히려 6자회담이 아니라 양자 회담, 정상회담을 할 거라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던데?”

“그건 저도 들었어요. 경색됐던 남북 관계를 정상회담으로 풀어내겠다고요. 지금 대통령이 야심 차게 구상하고 있다고 하던데요.”

“그거 저도 들었어요. 그거로 청와대에서는 은근히 노벨 평화상도 노리고 있다는데…… 김정일이 이상이 있다면 그런 이야기가 흘러나올 리가 있나요?”

자리에 있던 이들은 말을 멈추고 한진영을 올려다봤다.

팀장들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가 시장을 바라보는 보통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한진영은 그러나 지난 시절 겪었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앞으로 열흘 뒤 지금까지 팀장들이 이야기했던 모든 것들을 지워버릴 만한 이야기가 북한에서 벌어진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알고 있는 사실을 모두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언제나처럼 이런 류의 이야기는 말을 하는 것보다 어떻게 알았는지 설명하는 것이 더욱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저 한진영은 팀장들의 경각심만을 일깨워주면 될 일이었다.

“얼마 전부터 계속 북한에서 긴급성명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성명은 대부분 국방위원장이 어디를 다녀왔다거나 혹은 새롭게 무슨 무슨 장군에 올라갔다 등등 다 듣고 나면 쓸데없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연평도 포격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포격이 있기 전부터 계속 북한은 우리를 상대로 불만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습니다. 평소에도 그랬지만 더욱 강도 높은 이야기를 쏟아냈죠.”

한진영의 말에 당시를 떠올리던 사람들은 공감하는 모습을 보였다.

“맞아요. 그러다 때렸죠. 규탄한다느니, 응징하겠다느니 같은 이야기를 쏟아내고요. 그럼 이번에도…….”

고제상이 한진영의 말에 기억이 떠올랐다는 듯이 추임새를 넣자 한진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팀장들에게 지시했다.

“이런 이야기가 없더라도 지금 지수 자리는 석 달간의 지루한 횡보가 이어진 자리입니다. 이런 자리에서는 당장 내일이라고 해서 방향이 튀어나오지 말란 법이 없습니다. 그러니 다들 긴장하고 대비하도록 하세요.”

한진영은 박도하를 돌아보고 물었다.

“프로그램은 당장에라도 실행할 수 있게 세팅이 끝이 났습니까?”

“네. 다 완료된 상태입니다.”

“외환 팀은 원화 환율 모니터링에 각별히 신경을 써주세요.”

“네. 바로 외환 시스템 가동하겠습니다.”

“고 팀장님께서는 우선 원자재보다 국내 채권 파트를 서포트 해주세요. 채권 팀이 아직은 힘에 부치는 상황이니까요.”

“네. 알겠습니다.”

한진영은 조수아를 향해 마지막 지시를 내렸다.

“우리 계좌에 쌓여있는 자금. 모두 풀어주세요. 저 위에 있는 사람에게 진짜로 뭔 일이라도 생기면 바로 풀배팅 들어갈 테니 말입니다.”

“풀배팅이요? 4,000억을 다요?”

“네. 풀로 다 들어갈 겁니다. 계좌 풀어놓아 주세요.”

한진영은 말을 하고 다시 달력을 바라봤다.

12월 19일.

한진영의 잊을 수 없는 날이 다시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주말을 보낸 직원들은 월요일 점심으로 뭘 먹을지 다들 고민에 빠져 있었다.

“뜨끈한 국물 어때? 날도 추운데 국물이 딱 좋을 것 같은데…….”

“국물보다 요 앞에 스파게티집이 새로 생겼는데 그거 먹어요.”

“스파게티? 왜 이래. 그건 가서 남자친구한테 사달라고 해. 회사 점심으로 누가 스파게티를 먹어?”

“아저씨들이나 동태탕 이런 거 좋아하지 저는 스파게티, 리조또 뭐 이런 게 좋단 말이에요.”

“리 뭐? 그건 뭐야? 아유. 몰라. 우리는 오늘…….”

점심으로 뭐를 먹을지 의견이 분분하자 최석영 차장이 자기가 먹고 싶은 것으로 점심을 정하려 할 때였다.

“오늘 세이지 자산운용의 모든 직원은 점심을 거르라는 대표님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뭐라고? 점심을 거르라고? 왜?”

“저는 잘 모르겠어요. 대표님께서 지시를 내리셨어요. 그리고 절대 점심때 자리를 떠나서는 안 된다는 지시도 같이 있으셨으니까 자리 비우실 생각하지 마세요. 그럼 저는 다른 팀에게도 이야기를 알려야 하니까 먼저 가볼게요.”

최석영은 한진영의 말을 전하고 급히 자리를 떠난 직원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점심을 왜 먹지 말라는 건지는 알려주고 가야지.”

“팀장님.”

“어?”

기풍증권에서 같이 넘어오기는 했지만, 한진영과 같이 일한 지 얼마 안 된 직원이 최석영을 향해 물었다.

“최 팀장님은 대표님하고 오랫동안 일하셨다면서요?”

“그렇지. 3년 됐나? 4년 차인가? 그건 왜?”

“그럼 이런 일 자주 있었는지 잘 아시겠네요. 저는 점심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 갑자기 대표님이 이러시면 곤란해서…….”

“야. 여기 돈놀이하는 곳에 들어왔으면 점심 못 먹을 각오 정도는 하고 들어왔어야지. 이 정도에 왜 울상이야? 그리고 이런 적은 거의 없었어. 예~전에 한번 점심 먹지 말고 대기하자는 말을 한 적이 있기는 했는데…….”

최석영이 잊었던 과거를 떠올리고 있었다.

팀원들은 그런 최석영을 향해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그때 왜 점심 거르자고 하셨어요? 이유가 있어서 그러신 거예요?”

“어…… 그때…… 왜 그랬지? 뭔지는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는데…… 큰 사고가 터졌던 건 기억이 나는 것 같다.”

“큰 사고요? 그럼 오늘 뭔 사고가 터진다는 거예요? 오늘이 무슨 날인데요?”

최석영은 팀원의 말에 벽에 걸려있는 달력을 보고 말했다.

“오늘? 오늘이 무슨 날 이긴 무슨 날이야? 12월 19일이지. 12월 19일. 그런데 오늘이 무슨 날이지?”

최석영도 모르겠는지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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