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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의 증권사 생활-210화 (210/650)

210화 나는 당신을 모른다

옷깃이 해진 낡은 양복을 입고 손에는 꾸깃꾸깃 펀드 계약서를 들고 있는 홍대민이었다.

머리는 잔뜩 기름져 이틀은 감지 않은 듯한 모습이 처음부터 여기에 올 생각은 없었던 듯 보였다.

한진영은 콧잔등으로 떨어져 내리는 뿔테 안경을 연신 만지고 있는 홍대민을 가만히 바라봤다.

“혹시 저 아세요?”

“홍대민 선배님 아니십니까?”

“네? 네. 제가 홍대민인데…….”

“안녕하세요. 저 32회 졸업생 한진영이라고 합니다.”

“한진영?”

홍대민은 고개를 갸웃하면서 자기가 알고 있는 사람인지 생각했다.

하지만 한진영이라는 이름을 떠올리지 못한 홍대민은 당황한 표정으로 한진영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거 펀드 가입 계약서 아닙니까?”

“네? 아! 맞는데…….”

홍대민은 계약서를 손에 움켜쥔 채 내려봤다.

회사에서 매일같이 짐짝 취급을 받던 홍대민이었다.

제대로 된 성적을 보이지 못해 언제 잘릴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태였다.

게다가 얼마 전에 있었던 북한발 사고 때문에 큰 손해를 보기도 했다.

홍대민이 잘못하여 그런 것은 아니었다.

홍대민의 팀이 단체로 점심을 먹으러 나간 바람에 대처하지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잘못의 모든 책임을 홍대민이 쓰고 말았다.

그래서 내일이라도 당장 자리를 빼라고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홍대민의 부서 팀장은 그런 홍대민에게 펀드 계약서를 쥐여주며 말했다.

‘이거라도 몇 개 가입해서 가지고 와. 그럼 그걸 실적에 올려줄 테니까. 이렇게라도 살아남아야 하지 않겠냐?’

홍대민은 그렇게 팀장이 건네준 펀드 가입 계약서를 들고 동문회에 찾아오게 됐다.

그러나 막상 동문회에 찾아왔건만 용기가 나지 않아 펀드 가입 계약서를 들고 눈치만 살피는 중이었다.

그때 한진영이 찾아온 것이었다.

“잠시 좀 볼 수 있을까요?”

“어? 네.”

아무리 자기보다 후배라고 하더라도 처음 본 사람이기에 쉽사리 반말이 나오지 않았던 홍대민은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가며 한진영에게 말했다.

“저기 이거 말이지. 꼭 가입하라고 하는 건 아니고요. 그러니까…….”

“저도 가입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냥 한번 보기만 하려고요.”

“어?”

너무 솔직하게 말한 한진영의 말에 홍대민이 당황한 사이 어느새 한진영의 손에 펀드 가입 계약서가 쥐어지고 말았다.

한진영은 펀드 가입 계약서를 훑어보며 말했다.

“이런 건 누구도 가입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뭐라고…… 요?”

“이거 보세요. 지금 시절에 브릭스(BRICs)라니요? 이거 단물 빠진 지 한참 지난 건데…… 최근 여기 수익률 많이 안 좋잖아요.”

홍대민은 한진영의 말에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한진영의 말대로 지금 시절에 브릭스 펀드에 가입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미 한차례 시장을 폭풍처럼 휘몰고 간 브릭스 펀드는 지금은 애물단지가 되어 가입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펀드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홍대민은 동문들에게 펀드 가입 계약서를 내밀지 못한 채 들고만 있었던 것이었다.

아무리 영업을 하기 위해 이 자리에 왔기로서니 염치가 없는 짓까지 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펀드 가입 계약서를 보고 있을 때 그의 귀로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그러니까. 그 종목은 아니라니까요. 그건 이미 한물갔어요. 미래는 LED입니다. LED. 지금 대통령이 강조하는 게 뭐입니까? 전국에 있는 모든 등을 LED로 바꾸겠다는 것 아닙니까? 생각해보세요. 여기만도 등이 몇 개나 있나요? 거리에는 또 얼마나 많은 가로등이 있고요? 이건 뭐 안 봐도 비디오 아닙니까?”

한진영은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저 사람도 있었지.”

한진영은 목소리의 주인공을 쳐다봤다.

그는 열렬한 목소리로 주변에 모여 있는 선배들을 향해 말했다.

“LED 관련주에 넣으세요. 그럼 선배님들이 은퇴하실 때쯤에 평생 여행 다닐만한 자금에 계좌에 쌓여 있을 테니까요.”

“진짜야?”

“아~ 참. 저 못 믿으세요? 저 강태산이에요. 강태산.”

강태산은 자기가 한 말을 의심하는 게 기분 좋지 않았던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그러나 상대는 강태산보다 20기 가까이 차이가 나는 선배였다.

감히 그를 향해 화를 낼 수 없었던 강태산은 주변을 둘러보다 한진영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어?”

강태산은 처음 보는 한진영을 잠시 바라보다 익숙한 얼굴의 친구를 찾아 그를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저기 있네. 야. 홍대민. 이리 와 봐.”

강태산은 홍대민을 부른 뒤 앞에 모인 선배들을 향해 말했다.

“저를 못 믿으시는 것 같으니까 친구 불러서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 드릴게요. 야! 홍대민 어서 안 와?”

강태산의 말에 홍대민이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한진영 앞에 놓인 계약서를 들고 강태산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한진영은 그런 홍대민의 등을 바라보고 생각했다.

‘어지간히 일이 잘 안 풀리나 보네.’

잔뜩 주눅이 든 모습과 꾸깃꾸깃 접힌 계약서.

홍대민이 지금 겪고 있는 상황이 어떤지 겉모습을 통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한진영은 그런 홍대민을 가만히 바라봤다.

강태산은 홍대민이 다가오자 홍대민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선배들을 향해 말했다.

“이 친구가 누구냐면 퓨처에셋 아시죠? 거기 펀드매니저입니다.”

“아~ 퓨처에셋. 잘 알지. 거기 엄청나게 유명한 곳 아닌가?”

“내 친구들도 다 거기 펀드 하나씩은 들었었어. 오~ 그런데 거기 펀드매니저라고?”

“대단한데. 펀드매니저 되기 엄청나게 어려운 거 아닌가? 돈도 많이 번다고 하던데…….”

사람들은 홍대민을 향해 새삼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그러나 홍대민은 그런 시선이 부담스러운 듯이 보였다.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초라한 자기 모습에 더욱 어깨가 쪼그라들기만 했다.

강태산은 그런 홍대민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들고 있던 펀드 가입 계약서를 뺏어 들었다.

“이거 보세요.”

강태산은 홍대민이 들고 왔던 계약서를 선배들 앞에 흔들었다.

“펀드매니저면 뭐합니까? 결국, 펀드 팔이밖에 되지 못합니다.”

“줘.”

홍대민이 강태산의 손에서 계약서를 뺏으려 하자 강태산은 더욱 계약서를 빠르게 흔들며 말했다.

“지금 잘나가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리고 하는 일이 무엇인지가 중요하죠. 아무리 펀드매니저면 뭐합니까? 펀드 팔아먹으려고 겨우 동문회에 얼굴 비친 놈밖에 되지 못하는데요. 그런데 저는 달라요. 제가 선배님들에게 뭐 팔아먹으려고 하던가요? 이 자식처럼 눈탱이 치려고 하지도 않고 순수하게 선배님들께 도움이 되기 위한 말을 한 것뿐이라고요.”

홍대민은 강태산의 손에서 계약서를 다시 뺏어 들고 품에 품었다.

그리고 억울한 듯이 강태산을 올려다봤다.

아직 누구에게도 펀드 가입 권유를 한 적이 없었는데 자기를 약장수처럼 말하는 것에 화가 나기도 한 것이었다.

그러나 화가 난다고 하여 그걸 그대로 표현할 수는 없었다.

지금은 펀드매니저가 아니라 약장수와 다름없는 신분으로 동문회에 찾아온 것이 맞았기 때문이다.

홍대민은 박살 난 자존심으로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강태산은 축 늘어진 홍대민의 머리에 여전히 손을 얹어놓고 이야기했다.

“선배님들 혹시 들으셨나요? 이번에 하이식스를 인수한 선강그룹 이야기 말입니다.”

“어. 들어봤어.”

강태산은 들어봤다는 선배의 말에 씩 하고 웃으며 말했다.

“거기에 가장 깊게 관여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누군데?”

“우리 동문이 가장 깊게 일에 관여되어 있습니다. 선강그룹의 최 회장에게 조언하고 모든 일을 메이드한 게 바로 우리 서령중학교 동문입니다.”

“그래? 그게 누군데.”

“세이지 자산운용의 한진영 대표. 우리 32회 졸업생입니다.”

강태산의 말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홍대민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한진영을 바라봤다.

한진영은 흥미 있는 표정으로 강태산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강태산은 한진영이 자리에 있는지 알지도 못한 채 계속 이야기했다.

“그 친구가 저를 아주 깍듯이 모십니다. 제가 그 친구가 있는 회사의 고문과 마찬가지거든요.”

“아 그래?”

“네. 하이식스 건도 제가 조언해서 그 친구가 메이드한 겁니다. 뭐 그 외에도 많이 있습니다. 야 홍대민.”

한진영을 멍하게 쳐다보던 홍대민은 자기 머리를 두드리는 강태산의 손에 고개를 다시 돌렸다.

강태산은 멍한 눈의 홍대민의 머리를 계속 두드리며 말했다.

“뭔 생각해?”

“아니야.”

“정신 차리고 선배님들에게 이야기 좀 해봐. 너도 이번에 북한에서 김정일 죽었을 때 주식판에 돌던 이야기 들었지? 세이지 자산운용 이야기.”

“어? 어. 들었어.”

“그것 좀 네 입으로 이야기해봐라. 내가 말하면 좀 창피해서…….”

홍대민은 강태산이 왜 창피해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한번 쳐다보고 이야기했다.

“이번에 세이지 자산운용이 북한 김정일 사망 소식이 터졌을 때 주식시장과 채권 그리고 외환시장에서 꽤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해요.”

“됐어.”

강태산은 홍대민의 머리를 다시 내려치고 앞에 앉아있는 선배들을 향해 말했다.

“들으셨죠?”

“그걸 왜 이야기하는 건가? 설마 그것도…….”

“다 제가 조언한 겁니다. 하아~ 귀찮아요. 그 친구가 아주 선배라면 끔찍이 여기는데 제가 어쩔 수가 있어야지요. 그래서 조언을 좀 해줬는데…… 쓰읍~ 그렇게 됐습니다. 우리끼리만 아는 이야기로 하죠. 아무래도 저도 묶여 있는 곳이 있다 보니까요.”

강태산은 눈을 찡긋거리며 알지 않느냐는 듯한 표정을 짓고 슬슬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려 했다.

“제가 좀 그래요. 그 친구가 자꾸 세이지로 오라고 간곡히 부탁하는데…… 저도 의리가 있는 놈이라 지금 있는 곳을 떠날 수가 있어야지요. 그리고 세이지는 새로 생긴 회사고 제가 있는 서봉증권은 그래도 증권사로서는 탄탄한 업력을 가지고 있는 곳이니까요. 그래서…….”

강태산은 종이를 여러 장 꺼냈다.

한눈에 보기에도 홍대민이 가지고 왔던 것과 다르지 않아 보이는 계약서 종이들로 보였다.

강태산은 펀드 가입 계약서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이야기했다.

“원래 이거 이런 곳에서 이렇게 판매하면 안 돼요. 차분히 설명하고 가입 의사를 몇 번이나 물은 뒤에 가입하는 게 원칙인데…… 그렇게 하다가는 다 팔려버리니 어쩔 수가 없지요. 이렇게라도 선배님들께 도움을 드리려 하는 저를 이해해주세요.”

“도움이라고?”

펀드를 팔면서 마치 돕는다는 듯이 말하는 강태산의 말에 선배 하나가 의문을 표했다.

강태산은 소리가 나온 쪽을 향해 다시 한번 얼굴을 찌푸렸다.

또 누가 내 이야기에 꼬투리를 잡느냐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강태산은 얼른 그 표정을 지우고 이야기했다.

“도움이죠. 이 좋은 펀드에 가입할 기회를 드리는 거니까요. 이거 내일 되면 가입하고 싶어도 자리 꽉 차서 가입 못 할지도 모릅니다. 제가 이렇게 딱 10장 가지고 온 게 저희 회사에 남아있는 마지막 가입 계약서였어요.”

강태산은 펀드 가입 계약서를 허공에 흔들며 계속 이야기했다.

“동문회에 우리 동문을 위해 특별하게 가입할 기회를 드리는 겁니다. 그냥 무엇이 좋다고 의견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끝내는 게 아니라 거기에 맞는 펀드를 가지고 와 제안하는 것. 이게 도움이 아니면 뭐겠습니까?”

강태산은 의문을 표한 선배를 노려보며 말했다.

“제가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죠? 요즘 하이식스 매각 건하고 북쪽에서 일어난 일 때문에 이런 거 가지고 다닐 정신이 없다고요. 우리 동문인 세이지의 한진영 후배와 앞으로 계획을 이야기하느라 하루가 48시간이더라도 모자랄 지경입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동문 선배님들을 위해 특별히 10장만 가지고 왔습니다. 제가 여기 있는 홍대민이처럼 펀드를 팔아먹을 생각이었으면 더 가지고 왔겠죠. 하지만 그게 아니라서 10장만 가지고 온 겁니다.”

스스로를 포장한 강태산의 말에 선배들의 마음이 기운 듯 보였다.

그들은 강태산이 들고 있는 종이에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

“어떤 펀드인가?”

강태산은 드디어 펀드에 관심을 보이는 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웃으며 말했다.

“제가 조금 전에 말씀드렸죠? 이제는 LED의 시대라고요. 국내 LED 업체에 투자하는 펀드입니다. 이거 그냥 노다지에요. 가입만 하면 오래 걸리지도 않습니다. 딱 1년. 1년 이내에 30%의 수익을 보장할 수 있어요.”

강태산이 손가락 세 개를 펴서 관심을 보인 선배에게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그러면 간접투자자산운용법 시행령을 위반하는 행위입니다. 보장이라니요? 펀드는 수익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뭐야?”

강태산은 짜증이 확 일어난 얼굴로 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봤다.

그곳에는 지금까지 가만히 이야기를 듣기만 하던 한진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강태산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넌 뭐야? 딱 봐도 나보다 후배인 거 같은데…… 너 몇 기야?”

“저기…… 태산아.”

홍대민이 강태산을 말리려 하자 강태산이 붙잡고 있는 홍대민을 밀었다.

한진영은 휘청이는 홍대민을 붙잡고 강태산을 바라보고 웃었다.

“저를 잘 아신다고 하시는데 저는 선배님이 누구인지 잘 모르겠네요.”

“뭐?”

“아까 그러지 않으셨습니까? 저를 잘 알고 저와 통화도 자주 하신다고요. 하이식스 건까지 조언해주셨다는 선배님을 저는 왜 모를까요?”

“너 뭐야?”

강태산은 한진영의 말에 점점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참 이상하죠? 동문이라면 이런 곳에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야 하는 게 당연한데…… 저는 이곳에 올 줄 모르셨나 보네요. 처음 뵙겠습니다. 서령중학교 32회 졸업생 한진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조금 전에 말씀하신 세이지 자산운용의 대표이기도 하고요.”

“진영아~”

한진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치 짠 것처럼 서영재가 한진영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모습에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한진영을 의심할 수가 없었다.

한진영은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탁자에 내려놓은 뒤 할 말이 있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강태산은 생각도 하지 못한 한진영의 등장에 가만히 서서 한진영이 내려놓은 명함을 뚫어지게 바라보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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