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새로운 곳에서 꿈을 펼쳐라
명함을 내려다보던 강태산은 큰 소리로 웃었다.
그리고 일부러 사람들에게 보라는 식으로 한진영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거 순 사기꾼 아니야?”
“사기꾼?”
“그래. 사기꾼. 너 인마 명함을 내놓는다고 그 사람이 되는 줄 알아? 막말로 내가 삼선전자 회장 명함을 내놓으면 내가 삼선전자 회장이 되는 거냐? 이거 어디서 사기를 치려고…….”
강태산은 일부러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들으라는 식으로 더욱 크게 소리쳤다.
“아니. 동문회에 언제부터 이런 놈이 막 들어오고 그런 거야?
자리에 있던 이들은 강태산의 말에 모두 의아한 표정으로 강태산을 바라봤다.
“분명 자네가 선강그룹과 함께 하이식스 인수 건을 메이드한 사람이 우리 동문이라고 하지 않았나? 어이. 서 홍보부장. 이 친구가 32회 졸업생. 한진영 맞아?”
자리에 있던 선배 한 사람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강태산이 어물거리며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건…… 저 친구가 한진영인지도 우선 모르는 일이고…….”
“여기서 홍보부장이 진영이라고 부르던 걸 나만 들은 게 아닌데? 영재야. 이 친구 이름이 뭐냐?”
서영재는 갑자기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지 못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선배의 질문에 대답했다.
“네. 32회 졸업생. 한진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요?”
“그래?”
서영재에게 질문을 던졌던 선배는 서영재의 질문에 대답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보기엔 네가 더 이상한 것 같은데?”
강태산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이상하게 변한 걸 확인하고 급히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리려 했다.
“사기꾼은 제가 아니라 여기 있는 홍대민이입니다. 이놈이 가지고 온 펀드가 뭔지 아십니까? 설정 금액에서 벌써 -20%나 빠진 펀드입니다. 지금은 누구도 들지 않는다는 브릭스 펀드 말입니다. 이건 뭐 선배들한테 악성 매물 넘기려고 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내가 뭘?”
“가만히 있어. 네가 이러고도 발뺌하려고 그래? 줘봐.”
강태산이 사람들의 관심을 자기에서 홍대민에게 옮기려는 듯이 계속 홍대민을 몰아붙였다.
그리고 홍대민이 가지고 온 펀드 가입서를 뺏어 자기 말이 맞는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했다.
“아야!”
강태산이 홍대민의 손에 들린 펀드 가입서를 뺏으려다 홍대민의 안경을 치고 말았다.
홍대민은 부러진 안경을 한 손으로 받쳐 든 상태에서도 강태산에게 펀드 가입서를 뺏기지 않으려는 듯이 양손을 모두 움켜쥐었다.
강태산은 그런 홍대민의 모습에 짜증이 났던지 손을 들었다.
당장에라도 내려칠 듯이 올라간 강태산의 손을 한진영이 잡았다.
강태산은 자기를 막은 손의 주인인 한진영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야?”
“아직 우리 이야기가 안 끝나지 않았나요?”
“뭐?”
한진영은 강태산의 오른손을 잡은 채로 품에서 전화기를 꺼냈다.
“서봉증권이라고 하셨죠? 마침 서봉증권에 아는 분이 계시는데…… 확인 한번 해보죠. 도대체 서봉증권의 어떤 분께서 그 LED 펀드를 팔라고 하셨는지 말입니다. 제가 보기엔 그 펀드야말로 쓰레기거든요.”
“야!”
강태산이 막으려 했지만, 한진영은 휴대폰을 탁자에 올려놓고 어딘가로 전화 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스피커폰을 통해 몇 차례의 벨 소리가 들린 후 수화기 너머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서봉증권 회장실입니다. 무슨 일 때문에 전화하셨나요?
다른 곳도 아니라 바로 회장실로 전화를 걸어버리는 한진영의 모습에 강태산이 깜짝 놀라 한진영의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리고 들었던 손을 내리고 급히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왜 이래? 서로 아는 처지에…….”
“아는 처지요? 저하고 선배님하고 어떻게 아는 처지인가요?”
“에이. 그러지 말고…….”
강태산은 비굴해 보이기까지 한 미소를 지어 보이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이제 누가 거짓말을 하고 누가 진실을 말하는지 확실히 알 수 있게 됐다.
“야! 강태산이! 너 지금 네가 우리를 눈탱이 치려고 했어?”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야 인마!”
“너 이 새끼. 너 지금까지 동문회 나온 게 다 그 말도 안 되는 거 팔아먹으려고 그랬던 거냐? 어? 말해봐!”
선배들이 순식간에 들고 일어나자 강태산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급히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어? 뭐라고? 어머니가 아프셔?”
누가 봐도 핑계로밖에 보이지 않는 강태산의 모습에 선배들이 더욱 화가 치밀었는지 강태산을 향해 삿대질을 서슴지 않았다.
“이 새끼. 이거 웃기는 놈 아냐?”
“네 어머니 장례식에 내가 다녀왔는데 그사이 어머니가 부활이라도 하신 거냐?”
“골 때리는 놈이네. 야! 이게 어디 팔아먹을 게 없어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팔아먹어.”
강태산은 자기의 연극이 먹히지 않는 것을 알고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다 갑자기 몸을 돌려 밖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야 이 새끼야.”
“저놈 잡아!”
강태산이 도망치자 선배들이 그를 잡기 위해 뛰어갔고 순식간에 식당 입구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한진영은 그런 강태산의 모습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얼굴을 부여잡고 있는 홍대민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를 데리고 비어있는 자리로 가 앉힌 후 안정을 찾게 해줬다.
한진영에게 홍대민이 그 누구보다 중요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
소란이 잠잠해진 동문회가 열린 식당은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서영재는 동문 선배들을 모두 자리로 돌려보낸 뒤 한진영 앞에 앉았다.
“네가 회사 대표야?”
“어. 그럼 내가 뭔 줄 알았냐?”
“아니. 난…… 그냥…….”
서영재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 채 잠시 고개를 돌려 조금 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강태산에게 가입한 펀드가 몇 번 사고가 났다는 소문이 돌았었다.
그러나 강태산이 이를 적극적으로 부인했고 사고를 당했다는 당사자도 나타나지 않아 그냥 흐지부지 넘어가고는 했다.
그리고 강태산이 동문회에 자주 참여하여 활발히 활동한 덕분에 강태산에 대한 소문은 소문으로만 치부하며 넘겼었다.
하지만 강태산은 선배들에게는 좋은 후배일지 몰라도 동창과 후배들에게는 좋지 못한 친구이자 선배였다.
강태산이 펀드를 강매하고 술자리에서 후배들을 괴롭힌다는 소문이 후배들 사이에서는 자자했다.
이런 소문을 익히 알고 있었던 서영재는 한진영이 강태산에게 당하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볼일을 보고 빠르게 한진영이 있는 곳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결국 그 강태산 선배는 사기꾼이었다는 이야기네.”
“뭐 비슷하지. 내 이름을 판 걸 보니 다른 사람 이름도 팔았을 것 같은데…… 서봉증권 다니는 건 맞나 싶다.”
“서봉증권을 다닌 것도 아니야? 펀드를 팔았는데?”
“브로커일지 모르지. 한 개 팔 때마다 얼마씩 먹는…….”
“그런 것도 있어?”
“돈이 관련된 일이야. 별의별 게 다 있지 않겠냐? 저런 사람이 법 지키고 딱딱 정해진 규칙에 따라 움직였을 것 같지가 않다.”
“아니. 내가 이 사람을…….”
서영재는 팔을 걷어붙이고 당장에 쫓아낸 강태산에게 달려가려는 듯이 포즈를 취했다.
한진영은 그런 서영재에게 진정하고 앉으라고 한 뒤 지난 시절 겪었던 것들을 슬며시 돌려 이야기했다.
“앉아. 앞으로 알아보면 될 일이잖아. 아마 모르긴 몰라도 피해자도 꽤 많을 거다. 강태산이 동문회에서 자리를 제대로 잡고 있는 바람에 말도 못 하고 속으로만 끙끙 앓았을 거야. 잘 파악해봐. 후배한테 당했다는 사실에 말도 못 하고 있는 선배들 있을 테니까. 후배들은 말할 것도 없고…… 갑자기 잘 나오다가 나오지 않는 후배들한테 물으면 10명 중 7~8명은 강태산 때문일 거라고 할 거다. 그리고…….”
한진영은 말을 마치고 잠시 시간을 끈 뒤 중요한 정보를 서영재에게 넘겼다.
“후배들 사이에서는 소문이 자자한데 선배들 사이에서는 소문이 별로 퍼지지 않았고…… 계속 동문회 모임만 하면 저렇게 펀드를 팔아먹는 게 뭔가 이상하지 않냐?”
“그게 무슨 소리야? 혹시…….”
“그래. 선배 중에도 엮여 있는 사람이 있을 거란 이야기다. 잘 알아봐. 아마 집행부가 엮여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니까.”
“집행부?”
서영재는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정리하는 동문회 집행부 선배들을 둘러봤다.
누구를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서영재를 향해 한진영은 모르는 척 도움을 건넸다.
“저기 있는 저 선배가 경찰이라고 하지 않았냐?”
“맞다. 총무 보는 선배가 경찰이었지. 그래. 저 선배에게 부탁하면 되겠다.”
서영재는 생각난 김에 얼른 볼일을 보러 가겠다는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진영은 그런 서영재를 향해 어서 다녀오라는 말로 서영재의 등을 떠밀었다.
지난 시절에는 한진영이 동문회를 다녀온 지 반년이 지난 후에 벌어진 일이었다.
당시 강태산에게 당한 동문이 강태산을 고소하며 외부에 드러난 사건이었다.
강태산에게 당한 선후배만 스무 명이 넘었으며 강태산은 서봉증권의 직원도 아니었다는 사실이 수사를 통해 밝혀지게 됐다.
그리고 집행부까지 강태산과 엮이며 동문회는 그 뒤로 산산이 조각이 나고 말았다.
한진영은 당시를 떠올리고 서영재에게 미리 힌트를 줬다.
집행부 중에 엮이지 않은 경찰 선배를 통해 먼저 알아본다면 강태산의 일을 확실히 뿌리 뽑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동문회는 그럼 이제 산산조각이 나지 않는 건가?”
먼저 동문회 내부에서 사건을 찾아내고 강태산과 엮였던 일을 끊어낼 수 있다면 산산조각이 났던 동문회도 유지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됐다.
한진영은 멀어지는 서영재에게서 시선을 돌려 앞에 앉아 있는 홍대민을 바라봤다.
홍대민은 조금 전 소란에서 뿔테 안경을 다쳤는지 손으로 뿔테 안경을 잡고 있었다.
강태산이 자기의 정체가 밝혀지며 손을 휘둘렀고 그 손에 홍대민의 뿔테 안경다리가 부러지고 만 것이었다.
“선배님.”
“어? 네? 어?”
“말씀 편하게 하세요. 여기는 동문회장이니까요.”
“그래도 될까…… 요?”
“편하게 하세요. 그래야 저도 편하니까요.”
“그래. 아까는 고마웠어.”
홍대민은 조금 전 한진영이 막아준 것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했다.
“내가 뭐 해줄 건 없고…… 기회가 되면 밥이라도…….”
“선배님.”
“어?”
한진영은 부러진 뿔테 안경을 여전히 잡고 있는 홍대민을 바라보고 말했다.
“다리가 부러진 안경을 계속 잡고 있으면 뭐 합니까? 부러진 다리는 붙일 수 없는걸요.”
“그래도 이거라도 있는 게…….”
“미련 두지 마세요. 벗고 새로운 안경을 구해 쓰세요. 어떻게든 해보려고 하기에는 이미 고칠 수 있는 단계를 넘어섰으니까요.”
한진영의 말에 홍대민은 뿔테 안경을 벗어 탁자 위에 올려놨다.
한진영은 그런 홍대민을 향해 본격적으로 자기가 이곳에 온 이유를 이야기했다.
“지금 선배님 앞에 있는 안경처럼 지금 계시는 퓨처에셋에서는 선배님의 자리는 없어요.”
돌리지 않고 이야기하는 한진영의 말에 홍대민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알아. 그런데 어떻게 하나? 이렇게라도…….”
이렇게라도 견뎌야 한다고 말하려던 홍대민의 눈에 다리가 부러진 안경이 들어왔다.
홍대민은 안경이 자기와 같다는 것을 느끼고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다 된 건가?”
“소명을 마쳤으면 그만 보내줘야죠. 그리고 새로운 안경을 쓰듯이 새로운 곳에서 선배님의 꿈을 펼치시면 됩니다.”
“내 꿈을 펼쳐라?”
홍대민은 안경을 내려다보던 시선을 한진영에게로 옮겼다.
한진영은 홍대민의 시선을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선배님이 지금 계시는 곳에서 일이 잘 풀리지 않았던 것은 생각하는 게 팀과 맞지가 않아서 그런 것 아닙니까?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관이 틀리니 선배님의 실적이 바닥을 길 수밖에 없지요.”
“그걸…… 어떻게 알고 있지? 나는 그런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한 적이 없는데.”
홍대민은 놀란 눈으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한진영은 당황한 홍대민을 보고 살며시 웃었다.
지난 시절 홍대민의 기사를 보고 알게 된 사실이었다.
리스크를 중요시하는 홍대민과 시장 주도주에 대한 빠른 선매매를 중요시했던 퓨처에셋.
두 관점의 차이가 결국 홍대민을 무능한 펀드매니저로 만들고 말았다는 사실을 홍대민이 직접 인터뷰로 밝힌 내용이었다.
한진영은 이런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다가 직접 주인공을 향해 이야기한 것이었다.
홍대민은 자기 마음속을 들여다본 것만 같은 한진영에게 놀라 입을 벌리고 바라보기만 했다.
“선배님. 누가 틀린 게 아닙니다. 그저 관점의 차이가 있었던 것뿐이죠. 하지만 그렇다고 그 관점을 선배님의 시각으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한쪽은 회사니까요.”
“그래. 맞아.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거지. 그리고 나와 다른 곳이 회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어. 그래서 물러나야 하는 것도 나라는 사실을…….”
잠시 슬픈 표정을 짓던 홍대민은 한진영이 한 말을 떠올리고 놀란 표정으로 얼굴이 바뀌었다.
“그런 내 꿈을 펼쳐라? 그 얘기는…….”
“네. 선배님을 우리 회사로 모시고 싶습니다. 우리 회사에 오셔서 선배님이 추구하는 방향으로 펀드를 끌고 나가 주세요.”
“내가? 정말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해도 된다는 이야기야?”
“그럼요. 전권을 드리겠습니다.”
“전권이라니?”
한진영의 말에 홍대민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팀장님도 계실 테고 부서장님이라던지 본부장님 같은 분도 계실 텐데…… 일개 팀원인 내 마음대로 어떻게 끌고 갈 수 있겠어. 내 의견을 들어주시는 것만으로도 고마울 지경이라서 그런 것까지 기대하지 않아.”
“선배님. 지금 계시는 곳에서 많이 힘드셨나 보네요.”
“어?”
“그렇게까지 자신감이 떨어져 계실 줄 몰랐습니다. 하긴 그러니 두각을 나타내는 데 시간이 걸리셨겠지요.”
홍대민은 한진영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힘든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것으로 인해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한 것이었다.
한진영은 그런 홍대민의 모습을 보며 지난 시절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