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세 가지를 얻을 수 있다
한진영의 계획대로 주식에서 HFT 프로그램을 돌리자마자 폭발적인 반응이 나오기 시작했다.
주식에서는 어디의 누가 얼마나 어떻게 매수했는지가 모두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었다.
이런 반응은 즉각적으로 기풍증권에까지 흘러 들어갔다.
“내가 꼭 이렇게 너를 찾아와야겠냐?”
“그럼 뭐 어떻게 찾아오고 싶었는데?”
“정식으로 초대를 받아서 한번 와주십사…….”
“쓸데없는 소리 하려고 왔으면 그만 돌아가. 사람 바쁜데 와서 뭐 하는 짓이야?”
한진영은 이성우의 말을 단칼에 잘라버렸다.
이성우는 말을 다 마치지 않았는데 끊어버리는 한진영의 모습에 삐친 건지 입술을 삐죽였다.
그런 모습이 우스웠는지 한진영은 웃으며 이성우에게 물었다.
“그런데 너도 사장이면서 바쁘지도 않냐?”
“말도 마라 바쁘지 왜 안 바쁘겠냐? 아주 난리다 난리. 그래서 내가 여기까지 온 거 아니냐?”
“바빠서 여기 왔다고?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이성우는 여전히 모르겠다는 표정의 한진영을 보고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었다.
“너 정말 몰라서 그러는 거냐?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거 아니야?”
“뭔데 그래? 네가 말을 해야 알지.”
이성우는 잠시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한진영의 얼굴을 살피고 입을 열었다.
“너 그 프…….”
이성우는 말을 멈추고 잠시 주변을 살폈다.
이곳이 세이지 자산운용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연스럽게 나오는 행동이 아무래도 이번 일로 어지간히 이곳저곳에서 이야기를 많은 들은 듯한 모습이었다.
이성우는 잠시 주변을 살피고 방에 한진영과 자기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 프로그램 있잖아. 그거 때문에 아주 난리다 난리야.”
한진영은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물었다.
“뭐 얼마나 난리인데 그래?”
“그 프로그램을 돌리는 것이 세이지라는 것을 알아채고…… 야 그러니까 그걸 왜 알아채게 돌렸어? 조심 좀 하지.”
“그래서? 너한테 뭐라고 하든?”
잠시 귀찮아진 것에 대해 투정을 하고는 한진영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뭐라고 하는 건 아니고…… 네가 우리 쪽에서 있다가 나간 거 알고는 혹시 그 프로그램이 기풍증권에서 나온 게 아니냐고 물어보는 거지. 그리고…….”
“그리고?”
“내부에서도 좀 시끄러워. 아니. 조금이 아니라 많이 시끄럽다.”
“내부에서? 기풍증권을 말하는 거야?”
“어. 우리. 우리 내부에서…….”
이성우는 귀찮다는 듯이 머리를 한번 쓸어내리고는 짜증 섞인 투로 말했다.
“그 프로그램의 소유가 원래 기풍이 아니었냐고들 이야기해. 그래서 그걸 너한테서 다시 찾아와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고…… 그것 때문에 아주 죽겠다. 나를 매일 같이 번갈아 가면서 들들 볶아.”
“흐흐흐.”
“왜 웃어? 이거 웃을만한 일이 아니야. 심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소송이라도 불사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이야기하고 있어. 오히려 네가 기풍의 자산을 가지고 갔다고 그러기도 하고…… 막 신고 해서 뺏어오자는 사람도 있다는 것만 알아둬라. 이러다 뭔 이야기가 더 나올지 나도 무서울 지경이야.”
“너도 그렇게 생각해?”
이성우는 한진영의 질문에 손으로 얼굴을 한번 쓸어내렸다.
“나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 너한테 들은 것도 있는데 설마 내가 그렇게 생각하겠냐? 그런데 자꾸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나라고 뭐 별수가 있어야지. 너한테서 들은 이야기는 할 수가 없으니 그런 말들에 반응을 보여주기는 해야 하니까 그게 짜증 나는 거지.”
“그래서 이렇게 찾아온 거고? 나를 만나 이야기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잘 아네. 그러니까 좀 빨리 해결해라. 내가 볶여서 못 살겠다.”
푸념 섞인 말을 내뱉은 이성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야기했다.
“앞으로 한두 번은 더 막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런데 나도 별수는 없어. 그런 말이 계속 나오면 내가 하지 말라고 하더라도 내부에서 어떤 움직임이 있을지도 몰라. 무슨 말인지 알지?”
한진영은 이성우의 말에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이성우는 한진영의 이런 모습을 보고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혹시 무슨 생각이 있는 거야?”
“아니. 생각보다는…… 이번 일이 너한테도 큰 기회가 된 것 같아서…….”
“큰 기회?”
이성우는 한진영의 말에 귀를 쫑긋 세웠다.
한진영이 이런 류의 말을 허투루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성우의 생각대로 한진영은 이성우에게 큰 도움이 될만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이번 기회에 기풍증권에 있는 암 덩어리들도 함께 쳐낼 수 있겠다.”
“암 덩어리?”
“그래. 월급은 기풍에서 받으면서 다른 회사를 위해 일하는 놈들. 그놈들이 자기 죽을 자리인 줄도 모르고 날뛰고 있네.”
“그게 무슨 소리야?”
한진영은 손바닥으로 탁자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너에게 여기저기서 연락이 오는 건 당연한 거야. 나하고 접점이 없으니 나에게 직접 이야기하기보다는 기풍에 연락해서 어떻게 된 상황인지 확인하는 건 뭐 특이한 일이 아니지. 그런데…….”
“그런데?”
“접근하는 방식이 이제 문제인 거지. 잘 생각해봐. 프로그램이 무엇인지 물어보고 혹시 괜찮으면 나와 자리를 한번 마련해 줄 수 있냐고 물어보는 곳이 있었지?”
이성우는 한진영의 말에 기풍 쪽으로 연락이 온 곳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렇게 정중하게 나온 곳이 있어.”
“그래. 그게 정상이야. 우선 상황을 파악하고 프로그램을 돌린 쪽과 만나려 하는 게 순서에 맞지. 소유권이 어느 곳에 있는지 확실하니 프로그램의 주인과 이야기를 하려는 게 맞는 행동인 거야.”
한진영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계속 이야기했다.
“하지만 욕심이 많은 놈은 그런 정상적인 방법을 따르지 않아. 정상적으로 돈을 지불하고 사는 것을 아깝다고 생각하는 놈들이니까.”
“그럼 어떻게 하는데?”
“지금처럼 싸움을 붙이지. 소유권을 놓고 양측이 첨예하게 대립하도록 말이야. 그리고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려고 할 거야. 나한테 찾아와 그럴 거야. 그렇게 골치 아픈 거 그냥 자기들에게 넘기라고 말이야. 헐값으로…….”
“미친…….”
한진영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려는 이성우를 바라보고 웃었다.
“너한테 찾아가서는 그럴 거야. 자기들이 찾아줄 테니 같이 좀 쓰게 해달라고…….”
“와~ 욕 나오는데. 나 욕 좀 시원하게 해도 되냐?”
이성우의 모습에 한진영은 마음대로 하라는 듯이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이성우가 회의실이 떠나갈 듯이 욕 한 무더기를 시원하게 쏟아냈다.
이제 겨우 사장이라는 직함을 단지 얼마 안 된 이성우에게는 당연히 욕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는 했다.
하지만 한진영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상황이었다.
‘아마 분란을 일으키려고 하는 놈들은 나도 같이 초짜라고 생각했을 테지.’
그러나 한진영은 그들의 예상과 달리 닳을 대로 닳은 인물이었다.
자산운용사를 10여 년 가까이 굴리며 볼꼴 못 볼 꼴 다 본 사람이었다.
한진영에게 이런 상황은 유치한 애들 장난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씩씩대던 이성우는 욕을 쏟아내자 시원해졌는지 한결 개운해진 표정으로 한진영에게 말했다.
“가장 강하게 이야기하는 놈이 범인인가?”
“그렇지. 강하게 이야기하는 놈들부터 파보면 뭐라도 나올 거다. 그리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 암 덩이를 제거할 수 있으니까 너에겐 오히려 기회가 될 거야. 태연하게 대처해라. 태연하게…… 그래야 그놈들이 더 활개 칠 테니까.”
한진영의 말에 이성우는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이성우는 한진영을 바라보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물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될까?”
“우선 너는 여기서 나가서 회사로 돌아가거든 나하고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해. 한참을 논쟁했지만 내가 고집부려 어쩌지 못하겠다고 말이야. 그렇게 하면 신나게 너를 들쑤시려 할 거다. 그렇게 고개 드는 놈들 때려잡으면 된다.”
“그래. 이번 기회에 회사 팔아먹으려고 혈안인 놈들 솎아내야겠어.”
다짐에 가까운 말을 하는 이성우를 보고 한진영은 웃으며 팁을 건넸다.
“그리고 기왕이면 솎아낼 때 회장님께 이야기해서 본사를 이용하도록 해. 이번 일을 통해 회장님께 점수를 따는 것도 좋으니까.”
“아~ 그렇구나. 그래. 아버지만큼 회사 좀 먹는 놈들 싫어하는 분이 없으니까 좋다고 하실 거다. 역시…….”
이성우는 화가 났었던 조금 전은 모두 잊은 건지 활짝 웃으며 한진영의 팔을 두드렸다.
“네가 기회라고 하길래 뭐 얼마나 기회가 될까 싶었는데 진짜 나한테 이게 기회일지도 모르겠다. 그래. 회사에 있는 놈들도 솎아내고 아버지한테 점수도 따고…… 일거양득이네.”
“하나 더 남았어.”
“하나 더? 또 남았다고?”
이성우는 깜짝 놀란 얼굴로 한진영을 바라보자 한진영이 이번에는 자기에게 도움이 더 많이 되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 너한테 예의 차리며 정식으로 자리를 마련해 달라는 곳. 그곳과 나를 연결해줘.”
“그렇네. 너하고 연결해주면 그것만으로 그곳들의 부탁을 들어준 게 되겠네. 알았어. 내가 추려서 올 테니까 네가 보고 이야기할 곳과 만나봐.”
이성우는 또 하나의 이득을 얻게 되어 즐거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를 바라보고 웃었다.
비록 자신이 얻을 이득은 한 가지에 불과하지만, 이 한 가지가 이성우가 얻을 세 가지 이득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진영은 연락이 닿는 순간 마구잡이로 달려들 그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
조수아는 투덜거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오늘로 아홉 번째야. 아홉 번. 생각 같아서는 여기다 크게 ‘차는 셀프’라고 적고 싶은 심정이라니까.”
조수아는 탕비실에서 차를 준비하며 도와주는 직원을 향해 투덜거렸다.
“내가 차를 타다 보면 비서인지 아니면 채권팀 팀원인지 헷갈릴 정도야. 어떤 때는 채권 분석하는 시간보다 전화 받는 시간이 더 많다니까.”
조수아는 말을 하다 보니 짜증이 났던지 찻잔을 휘젓던 티스푼을 꺼내 들고 몸까지 돌려 열변을 토했다.
“대표님은 나한테 분명 비서를 뽑아주겠다고 하시더니 왜 감감무소식이냐고. 나한테 이야기할 때는 뭐 졸업이 어쩌니저쩌니하면서 마치 데리고 올 사람이 있는 것처럼 말해놓고선 말이야.”
조수아와 함께 차를 타던 직원이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것 같은 조수아를 돌아보고 말했다.
“그건 과장님께서 너무 잘하셔서 그런 거 아닐까요?”
조수아는 과장님이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봄눈 녹듯이 마음이 녹는 느낌을 받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불길을 토해내던 입에는 어느새 미소가 걸리기 시작했다.
“그거 듣기 좋은데? 한 번만 더해줘.”
“어떤 거요? 과장님이라고 부른 거요?”
“그래. 그거. 다시 한번.”
어서 해보라는 듯이 손을 까닥이는 조수아의 얼굴에는 더는 화난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누가 살짝만 건드리기라도 하면 금방이라도 웃음을 터트릴 것 같이 얼굴에는 가득 행복감이 흘러넘쳤다.
“과장님이야말로 대표님과 가장 가까운 몇 안 되는 분이시잖아요. 다들 과장님 부러워해요. 모르긴 몰라도 여기서 대표님 시중 들으라고 하면 그러겠다는 사람 엄청 많을걸요. 아무리 우리 회사에서 난다 긴다 하는 사람도 대표님보다는 한 수 아래니까요. 곁에 있으면 뭐라도 하나 더 얻지 않겠어요?”
“됐어. 뒤에 말은 됐고…… 앞에 말 다시 한번.”
뒤에 말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손을 휘저은 조수아는 눈까지 감은 채 다시 한번 자기를 불러주기를 기다렸다.
그 모습에 웃음을 참기 힘들었던 직원은 조수아가 원하는 말을 기꺼이 해줬다.
“과. 장. 님.”
“그래그래. 내가 직급 올려줘서 참는다.”
“직급만 올라간 거 아니잖아요. 연봉도…….”
“쉿! 아무리 같이 일하는 사람이라도 다른 사람의 연봉에는 관심을 가지는 게 아닙니다. 그럼…….”
조수아는 도와준 직원의 찻잔까지 담아 한진영이 기다리고 있는 대표실로 향했다.
똑똑.
조심스럽게 노크를 하고 들어간 대표실 안에는 한진영과 두 사람이 더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차 내왔습니다.”
조수아는 조심스럽게 차를 내려놓았다.
자리에는 한진영과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한진영이 조수아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자 조수아는 문을 닫고 조용히 대표실을 나섰다.
“그럼 차를 드시면서 이야기를 하도록 하지요.”
한진영은 앞에 놓인 차를 맞은편의 두 사람에게 권한 후 먼저 찻잔을 들어 올려 차를 마셨다.
그리고 천천히 찻잔을 받침대에 다시 내려놓으며 말했다.
“어쩐 일로 저를 보자고 하셨습니까?”
한진영의 말에 맞은 편에 앉아 있던 남부증권의 사람들은 서로 잠시 바라봤다.
그들의 생각보다 너무나 젊은 한진영의 모습에 잠시 당황한 듯한 모습이었다.
그들은 누가 먼저 말을 할지 잠시 눈빛으로 의견을 교환했다.
두 사람 중 그래도 한진영과 더 가까운 나이대에 속하는 오찬종 투자전략실 실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렇게 세이지 자산운용의 대표님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우선 저희에게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 먼저 드리겠습니다. 세이지 자산운용의 최근 성과는 눈이 부실 지경입니다. 저희 남부증권은…….”
한진영은 장황하게 늘어놓는 오찬종의 말을 가만히 마주하고 들었다.
‘남부증권은 변한 게 없네. 중요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왔으면서도 사설이 길어.’
한진영은 자기를 띄워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오찬종의 말을 들으며 차를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