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우리가 먼저다
말로 설득할 수 없는 금액 차이에 오찬종은 고개를 떨구고 힘이 빠진 얼굴로 말했다.
“제가 어찌해볼 수 있는 금액이 아니군요.”
“아쉽게 생각합니다. 저도 국내 증권사에 넘기고 싶었지만 이 정도 금액 차이라면 외부에 넘길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이해합니다. 누구라도 그런 선택을 했을 테니까요.”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남부증권의 오찬종과 부회장은 몇 마디 이야기를 더 나눈 후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수아는 예상과 같은 금액을 말한 남부증권의 모습에 실망감을 느꼈다.
외국계 증권사의 천문학적인 금액에 과연 국내 증권사가 맞설 수 있느냐는 호기심에 이야기를 들은 것인데 예상 그대로의 모습에 기대감이 식어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의구심이 들었다.
“대표님.”
“네?”
떠나는 남부증권을 가만히 지켜보던 한진영은 자기를 부르는 조수아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대답했다.
조수아는 그런 한진영을 바라보고 궁금해하는 것을 묻기 시작했다.
“궁금한 게 있어서 그런데요.”
“왜 남부증권을 만난 건지 궁금해서 그러시죠?”
“아시네요. 네. 왜 남부증권을 만나려 하신 건지 궁금해서요.”
한진영은 조수아의 질문에 남부증권 사람들이 떠나간 방향을 바라보고 가만히 이야기했다.
“외국계 증권사에서 어떻게 나왔는지 알려줄 사람이 필요했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국내 증권사들에 어떻게든 프로그램을 넘겨주고 싶었다는 것도 저를 대신해서 말해줄 사람이 필요했고요.”
“그걸 남부증권을 통해 하시려고 일부러 만나신 거라고요?”
“네.”
한진영은 조수아를 향해 몸을 돌려세운 후 자기가 왜 남부증권 사람을 굳이 만나려 했는지를 자세히 설명했다.
“우리는 설립된 지 1년도 안 된 햇병아리 자산운용사입니다. 뒷배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모기업도 존재하지 않지요. 그런 우리가 뿌리가 깊게 뻗어있는 기존 제도권 회사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이번 일과 같은 큰일이 벌어졌을 때 그들이 우리를 보는 시선이 마냥 곱지만은 않을 게 분명할 테니까요.”
“기존 제도권 회사들이 우리를 해코지할지도 모른다는 말씀이세요?”
“해코지?”
한진영은 조수아의 말에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지난 시절 뼈저리게 겪었던 경험이 갑자기 떠올랐기 때문이다.
“마냥 해코지라고 볼 수는 없겠지요. 야생에서 자기의 영역을 지키려는 늑대무리가 갑자기 영역을 침범한 이방인 늑대를 물어 죽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니까요.”
‘하지만 당한 입장에서는 날벼락과 같은 일이겠지.’
한진영의 표정은 서늘하게 변했다.
지난 시절의 일이 떠오르자 자기도 모르게 표정이 변하고 만 것이었다.
“우선은 우리 입장을 대변해줄 사람들이 필요했습니다. 그것도 오랫동안 업계에 몸담아 발언권이 강한 사람들로요. 그래서 그들을 일부러 불러 우리 입장을 돌려 이야기한 겁니다. 그리고 그들 입을 통해 우리 입장이 전해진다면 그들도 이번 일에 의문을 가지지는 않을 겁니다.”
굳었던 한진영의 표정이 점차 펴졌다.
그리고 얇게 미소를 띠며 말했다.
“우리가 힘을 키울 때까지 그들이 우리에게 반감을 품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굳이 만날 이유가 없는 남부증권을 만난 겁니다. 자~ 그럼 이제 제대로 된 사람들을 만나야겠지요?”
한진영은 손뼉을 치고 한진영의 말에 흠뻑 빠져들었던 조수아의 정신을 차리게 만들었다.
“1억 달러 이상을 제시한 곳에 역제안을 거세요. 우리는 2억 달러를 원한다고요.”
“역제안이요?”
“네. 이제 옥석이 가려졌으니 제안을 듣기만 해서는 재미가 없으니까요. 2억 달러에 모든 권한을 넘길 테니 관심이 있는 곳만 말하라고 하세요. 제일 먼저 이야기한 곳에 넘기겠다고 하시고요. 기한은 사흘까지로 하면 딱 좋겠네요.”
“그들이 제안하게 할 때도 열흘을 주셨는데 우리가 역제안을 넣는 건데도 생각할 시간을 사흘만 주시는 거예요?
“그래야 쫄리지 않겠습니까? 원래 이런 일은 생각을 할 시간을 충분히 주면 안 됩니다. 홈쇼핑이 괜히 수량제한에 시간제한을 걸고 마감 임박을 수시로 띄우는 게 아니죠. 사흘 안으로 2억 달러. 아셨죠?”
한진영은 조수아의 등을 때리고 먼저 몸을 돌려 사무실로 들어갔다.
조수아는 갑작스러운 한진영의 지시에 앞에 한 말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한진영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며 조수아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
1억 달러 이상을 제시했던 회사 일곱 군데는 세이지 자산운용에서 동시에 연락을 받았다.
HFT 프로그램을 2억 달러에 판매하겠다는 역제안의 연락이 들어간 것이었다.
처음 2억 달러의 제안을 받았을 때 일곱 군데의 업체 모두 같은 반응을 보였다.
“가격이 상식 밖입니다.”
조수아는 그런 그들을 향해 충분히 생각해보고 정말로 비싸다고 느껴지면 이쯤에서 물러나도 괜찮다는 말을 전했다.
그리고 제일 먼저 제안한 곳에 판매하기로 했으니 만약 하기로 마음먹었다면 빨리 결정하는 것이 좋을 거라는 말도 더했다.
세이지 자산운용의 제안에 업체들은 코웃음을 쳤다.
2억 달러는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그들의 생각이 반나절 만에 바뀌고 말았다.
블랙샌드와 실버만삭스에서 1억 5천만 달러를 제시했고, 그들은 2억 달러의 제안에 대해 깊게 고민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블랙샌드와 실버만삭스는 이런 이야기에 급히 부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자기네들은 1억 5천만 달러에 제안을 넣은 적이 없으며, 프로그램을 살 생각을 하고 있지 않다는 뜻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업체 관계자들은 그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아태지역 본부장이 아니라 본사에서 COO들이 건너오고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CFO를 비롯하여 블랙샌드의 회장까지 자가용 비행기로 태평양을 건너고 있다는 이야기가 돌며 두 곳이 탐내고 있다는 이야기에 힘이 실렸다.
다른 다섯 군데도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업계 선두에 있는 블랙샌드와 실버만삭스가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움직이고 있는 만큼 2억 달러라는 가격이 터무니없는 가격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 쪽으로 무게추가 움직이고 만 것이었다.
“그런데 대표님 이거 너무 다 알려주는 거 아닌가요?”
박도하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한진영을 향해 물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문의가 들어오면 그냥 있는 그대로 알려주십시오. 어차피 더는 우리에게 필요 없는 기술들이니까요.”
“우리 이야기만 듣고 사지 않겠다고 나오면 어떡하죠?”
박도하는 한진영의 말을 듣고도 안심이 안 되는 표정이었다.
한진영은 그런 박도하를 향해 그럴 일은 없다는 듯이 확고한 모습으로 말했다.
“사려고 물어보는 겁니다. 그만큼 절실하기 때문에 자세히 묻는 것이죠. 김준하 팀장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어보면 상세히 대답해주세요.”
“네. 그러고 있어요. 저희 쪽이야 큰 문제 없어요. 알려준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신감이 있어서 좋네요. 바로 그런 마음으로 알려주시면 됩니다.”
박도하는 한진영과 김준하의 모습에 조금은 걱정을 덜었다.
그러나 계속된 질문 공세에 그런 마음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일곱 군데의 업체들이 프로그램에 대한 것을 세세하게 물어왔다.
메커니즘 쪽에 관련된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종목 선택 같은 묻지 않아도 될 것까지 모든 것을 물어온 것이었다.
한진영은 그런 업체들의 문의에 모든 것을 알려주도록 지시했다.
숨기고 말고 할 것 없이 모두 알려주는 편이 오히려 그들의 선택에 도움을 준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한진영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이 바로 증명됐다.
“대표님.”
조수아가 당황한 표정으로 한진영이 있는 대표실로 들어왔다.
한진영은 조수아의 표정을 보고 무언가를 알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손님들이 찾아오셨나 보군요. 회의실로 안내하세요.”
“어떻게 아셨어요?”
“지금쯤이면 움직이는 곳이 있을 거로 생각했으니까요.”
조수아는 달력을 돌아봤다.
세이지 자산운용이 전한 사흘의 시간에서 아직 하루가 남아있는 시간이었다.
한진영과 달리 조수아는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간을 보다 제안이 들어올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아직 하루가 남았는데도 연락이 아니라 직접 찾아온 것에 조수아는 너무 빠른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서 모셔오세요. 저는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한진영의 말에 정신을 차린 조수아가 급히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뒤를 이어 한진영이 대표실을 나가 회의실에 들어가 찾아올 손님을 기다렸다.
조수아의 안내를 따라 회의실로 들어온 사람은 여덟 명이나 됐다.
오늘쯤이면 움직이는 곳이 있겠다고 생각한 한진영으로서도 찾아온 사람들의 규모에 의아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한진영은 이런 모습을 숨긴 채 자리에서 일어나 찾아온 사람들을 향해 먼저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세이지 자산운용의 한진영입니다.”
먼저 한진영이 인사하자 여덟 명의 사람 중 세 명이 동시에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서로 눈짓으로 인사할 순서를 정한 뒤 차례로 한진영을 향해 자기소개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톨슨 테크놀로지의 길버트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버먼트의 존슨입니다.”
“만나서 영광입니다.TA& TM의 서던슨 주니어 버넷입니다.”
각자 다른 회사의 이름을 이야기하는 모습에 한진영은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뒤를 이어 나머지 다섯을 먼저 이야기한 세 사람이 소개했다.
한진영은 서서 소개를 받은 뒤 조수아를 향해 박도하와 김준하를 불러올 것을 지시하고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그리고 맞은 편에 자리하고 앉은 뒤 세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이름을 들으니 모두 다른 곳인 것 같은데……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주시겠습니까?”
한진영의 말에 톨슨 테크놀로지의 닐 길버트가 세 곳이 함께 찾아온 이유를 설명했다.
“일종의 컨소시엄을 형성했습니다.”
“컨소시엄이요?”
“네. 프로그램을 저희 세 곳에서 공동 소유하려 한 겁니다.”
“공동소유라…….”
한진영은 생각도 하지 못한 발상을 한 세 곳의 대표들을 번갈아 바라보고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마침 들어온 김준하와 박도하에게 자기 옆에 앉으라고 이야기한 후 다시 세 사람을 향해 말했다.
“뭐 어떤 식으로 진행하든지 간에 제 입장에서는 팔기만 하면 되는 것이니 그 문제는 더는 묻지 않겠습니다.”
“이해해주신다니 감사합니다. 보통은 이러면 계약체결 주체가 희미하다는 말로 계약 진행을 거절하고 하는데 말입니다.”
“저는 돈만 제대로 받으면 뭐든지 괜찮습니다. 2억 달러. 맞으시죠?”
“네. 맞습니다. 2억 달러에 프로그램의 소유권과 안에 들어가 있는 모든 것을 저희가 넘겨받겠습니다.”
“깔끔하군요. 좋습니다. 그럼 계약에 대한 진행을 이야기하도록 할까요?”
한진영의 말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김준하와 박도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한진영의 옆자리만 지킬 뿐이었다.
이야기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빼고 주겠다는 것 없이 모든 것을 건네겠다는 세이지 자산운용과 가격을 깎을 생각이 없다는 세 곳 업체의 태도에 서로 간에 신경전을 벌일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서로 첨예한 대립을 보일 것으로 예상한 지점조차도 부드럽게 넘어갔다.
“프로그램을 파시고 똑같은 혹은 그와 유사한 프로그램을 판매하거나 개발하여 사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넣기를 원합니다.”
세 곳 업체의 강력한 요구에 한진영은 이해한다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저희도 그럴 생각이 없었지만 아무래도 확실히 하기 위해서는 계약서에 조항을 삽입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이해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저희는 이 부분을 세이지 자산운용에서 어떻게 받아들일까 걱정했는데 이야기가 이렇게 쉽게 진행될 줄은 몰랐습니다.”
세 곳의 대표들은 안심하는 표정을 지으며 만족했다.
예상보다 순조롭게 흘러가는 것에 고양된 기분마저 느낄 정도였다.
그때 그런 그들을 긴장시킬만한 일이 벌어졌다.
똑똑.
노크를 한 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조수아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한진영에게 귓속말을 전했다.
한진영과 마주하고 앉아있던 사람들은 궁금한 표정을 한 채 한진영과 조수아를 번갈아 바라봤다.
협상 자리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이지가 신생 회사라 아직 협상 자리에서 보여줄 예의를 모르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한진영은 그런 예의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조수아에게 협상 자리에서 절대 들어오지 말라는 말을 이미 건넸었다.
다만 딱 한 가지의 이유에서는 들어와도 된다는 말을 했었다.
“이런. 실버만삭스에서 찾아오셨다고 하십니다. 실버만삭스의 제프리 존스 COO께서 직접 찾아오셨다고 하시는데…….”
“우리가 먼저입니다. 계약서에 사인하시죠.”
다급한 표정의 서던슨 버넷이 자리에서 튕기듯이 일어나 한진영에게 말했다.
한진영은 그런 서던슨 버넷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조금 더 생각해보시는 게 어떠십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충분히 생각하고 왔습니다. 계약서가 없으면 가계약이라도 하도록 하시죠.”
“가계약이라니요? 이런 경우는…… 저는 처음입니다.”
한진영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닐 길버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보좌진을 향해 눈짓했다.
그러자 그는 자리에 가지고 온 가죽 가방에서 서너 장짜리 얇은 종이를 꺼냈다.
종이를 건네받은 닐 길버트는 한진영 앞에 놓으며 말했다.
“어차피 정식 계약은 변호사가 동반되어 진행해야 하지요. 하지만 우선 그 전에 우리는 가계약이라도 맺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우선협상자이며 우리와 먼저 계약을 진행해야 한다는 가계약서입니다.”
한진영은 미리 이런 것까지 준비하여 찾아온 세 사람을 향해 웃으며 물었다.
“후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후회요? 무엇에 대한 후회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렇게 급하게 계약을 진행하는 것 말입니다. 저희는 저희 손에서 프로그램이 떠나면 더는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신경을 쓰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거야말로 우리가 원하는 바입니다. 기술 지원을 한다는 이유로 프로그램을 다시 확인하려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이것도 조항에 넣는 게 좋겠지요?”
닐 길버트의 말에 다른 두 사람이 동의했다.
닐 길버트는 고개를 돌려 다시 한진영을 바라보고 말했다.
“저희는 오늘이라도 계약을 진행하고 싶습니다. 이미 로펌 섭외까지도 들어갔습니다.”
“그러시군요. 저희도 최대한 빨리 계약을 진행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하겠습니다.”
한진영이 말을 마치고 가계약서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가계약서에 적혀있는 조항을 확인한 뒤 시원한 모습으로 사인했다.
“그럼 정식 계약 때 뵙기로 하겠습니다.”
한진영은 계약이 진행되었음을 축하하는 의미의 손을 내밀었고 그 손을 세 사람이 동시에 잡으며 지금의 자리를 축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