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업무 협약
톨슨 테크놀로지를 비롯하여 계약을 마친 사람들이 회의실을 나오자 실버만삭스 사람들이 그들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세이지 자산운용에서 자기를 속이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님을 확인하고 오히려 고마운 눈빛으로 한진영을 향해 인사했다.
실버만삭스가 아닌 자기들의 손을 들어준 데 대한 고마운 마음에서였다.
톨슨 테크놀로지 등은 본계약 때 보기를 바라며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자기들이 승자의 위치에 있기는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 어찌 변할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한편 실버만삭스의 제프리 존슨 COO는 아쉬운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저희가 좀 늦은 것 같군요.”
“죄송합니다. 제가 이야기했듯이 먼저 결정을 해서 찾아오는 곳과 계약을 하기로 했는데 저 세 곳이 실버만삭스보다 아주 조금 먼저 찾아왔습니다. 저도 아쉽지만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제프리 존슨은 멀어져 간 세 곳의 사람들을 잠시 바라본 뒤 고개를 돌려 한진영에게 말했다.
“저들이 2억 달러를 약속하던가요? 사모펀드 계열이라 2억 달러를 조달하는 데 힘이 들 수도 있습니다.”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던 제프리 존슨은 무언가를 떠올리고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서 세 곳이 힘을 합쳤나 보군요. 혼자서는 도저히 돈을 마련할 길이 없어서 말입니다.”
한진영은 제프리 존슨의 말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그저 빙그레 웃기만 했다.
제프리 존슨은 한진영의 표정을 보고 더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마지막 제안을 한번 던져봤다.
“아쉽군요. 혹시 2억 3천만 달러를 제시하면 저희에게 기회가 있을까요?”
곁에서 이야기를 듣던 박도하와 김준하 그리고 조수아는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마음을 돌리기 위해 300억 이상의 돈을 단번에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진영은 이번에도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2억 3천만 달러가 아니라 20억 달러를 제시해도 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돈에 약속을 배신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으니까요.”
한진영의 말에 제프리 존슨은 감탄하는 표정으로 한진영을 바라보고 말했다.
“보통 처음 증권업계에 진출하는 사람들은 돈에 흔들리기 마련인데 한 대표님은 생각보다 굉장히 노련한 모습을 보이시는군요. 회사의 간판에 더해 금액까지 올려 불렀는데도 흔들리지 않으시는 것을 보니 말입니다.”
제프리 존슨이 가장 놀라는 부분은 바로 실버만삭스의 COO를 상대로 이렇게 당당히 대화한다는 것이었다.
아시아의 작은 나라에 있는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신생 회사의 CEO가 실버만삭스의 COO를 상대로 이렇게 대등하게 이야기할 줄은 제프리 존슨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게다가 상대는 자기가 약속을 더 중요시한다는 말로 자기의 제안도 단칼에 거절했다.
제프리 존스는 그런 한진영의 모습에 감탄하는 모습으로 말했다.
“사실 프로그램을 보고 어떻게 이렇게 잘 만들었을까 놀랐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프로그램보다 한 단계 아니 두 단계 이상 진보한 프로그램에 굉장히 놀랐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그걸 2억 달러를 주고 살 이유는 우리 입장에서는 없었습니다. 우리 기술력이라면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는 수준이니까요.”
“그럴 겁니다. 실버만삭스 입장에서는 사실 필요가 없는 프로그램일 겁니다.”
한진영은 제프리 존슨의 말에 순순히 동의했다.
이미 팔기로 한 입장에서 굳이 자기 제품의 성능을 강조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진영은 제프리 존슨이 이렇게 이야기한 것은 HFT 프로그램을 놓친 면죄부를 스스로 주기 위해서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진영과 세이지 자산운용에서 돌렸던 풀 컨디션의 프로그램은 한두 세대로 설명하기 부족할 만큼 굉장히 진보한 프로그램이었다.
비록 다운그레이드를 통해 눈을 가리기는 했지만, 이들이 그걸 놓쳤을 리가 없었다.
몇 가지만 추가하고 조정한다면 세이지가 돌렸던 프로그램으로 원상 복귀할 수 있으며 그렇게만 된다면 2억 달러가 아니라 20억 달러, 200억 달러의 가치가 있는 프로그램으로 그들 눈에 보였을 게 분명했다.
‘그랬으니까 실버만삭스의 COO께서 동양의 작은 나라에 직접 자가용 비행기를 이용해 날아왔겠지.’
공식적으로 한국을 방문한다면 기사가 나올만한 거물급 인사였다.
그런 그가 본래의 스케줄도 모두 무시한 채 한국을 향해 날아왔다는 것은 이 프로그램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매우 뛰어나다는 것을 방증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한진영은 이런 마음을 가슴 한쪽에 잘 숨겨둔 채 제프리 존슨의 말에 동의하며 그가 하는 말이 맞는다고 맞장구쳤다.
굳이 그의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는 실버만삭스의 COO였으며 현재 전 세계 시장을 좌우하는 인물 중의 하나였다.
제프리 존슨은 맞장구치는 한진영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후 이야기했다.
“어떠십니까? 우리와 협력관계를 맺어보실 의향이 있으십니까?”
“협력관계요?”
“이렇게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니 프로그램보다 한 대표님과 세이지 자산운용이 어쩌면 프로그램보다 더 큰 가치를 품고 있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제안하는 겁니다. 프로그램이야 놓쳐서 어쩔 수 없지만, 세이지 자산운용을 놓치고 싶은 생각이 없으니까요.”
한진영은 갑작스럽게 진행되는 상황에 놀라고 말았다.
사실 실버만삭스에게는 프로그램을 넘길 생각이 애초에 없었던 한진영이었다.
그들의 기술력과 영향력이라면 어쩌면 한진영의 속내까지도 속속들이 들여다볼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2억 3천만을 제시한 것에도 한 치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제프리 존슨 실버만삭스 COO의 제안은 전혀 뜻밖의 것이었다.
다른 곳도 아니라 실버만삭스에서 먼저 협력을 이야기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 본부 산하에 한국지사가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비중이 작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대한민국 시장에 대해 조금 무지한 편입니다. 그래서 이번 프로그램 같은 것도 한 발짝 늦게 된 것이고요. 좀 더 빨리 알았다면 어쩌면 프로그램은 우리의 차지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인데 말입니다.”
제프리 존슨은 아태지역 본부장을 향해 노려보듯이 쳐다봤다.
네가 늦게 말해줘 놓쳤다는 뜻을 은연중에 보인 것이었다.
제프리 존슨은 아태지역 본부장이 고개를 숙이며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인 것을 확인하고 다시 한진영을 향해 이야기했다.
“대한민국은 시장이 작아 그동안 크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런 곳에서 그런 훌륭한 물건이 나오다니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대한민국 시장을 잘 아는 곳과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가 대한민국 시장에 투자할 때 조언을 해주신다면 세이지 자산운용이 아시아 시장 나아가 유럽이나 미주 시장에 투자할 때 도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뜻밖의 제안이었지만 한진영에게는 전혀 매력적이지 않았다.
실버만삭스가 무슨 꿍꿍이로 자기들과 손을 잡겠다고 나섰는지 속이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단물을 빨아 먹고 빈 껍데기만 남게 되면 헌신짝 버리듯이 버리는 너희 놈들을 내가 모르지 않지.’
지난 시절을 통해 그들이 어떤 놈들인지 잘 알고 있었던 한진영이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굳이 그런 것을 겉으로 드러낼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실버만삭스가 어떤 곳인지 아는 만큼 그들이 하려는 일을 그대로 돌려줄 수 있는 것이 지금의 한진영이었다.
한진영은 웃는 얼굴로 제프리 존슨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저희가 마다할 이유가 없지요. 좋습니다.”
“흔쾌히 받아주시니 마음이 편하군요. 프로그램을 구입한 것보다 이렇게 좋은 협력관계를 맺은 것에 저는 더 기쁩니다. 앞으로 세이지 자산운용이 동아시아의 강자가 되도록 많이 도와드릴 테니 세이지 자산운용도 저희를 많이 도와주십시오.”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한민국을 발판으로 실버만삭스가 동아시아에서 뻗어나갈 수 있도록 많이 도와드리겠습니다.”
한진영의 말에 제프리 존슨은 즐거워하며 구체적인 협력방안에 대해 실무자 간의 논의를 약속했다.
***
정신없이 밀어닥쳤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박도하는 긴장의 끈이 끊어진 듯 축 늘어지고 말았다.
김준하와 조수아 그리고 다른 팀원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일을 진행하고 대화를 나눈 것은 한진영이었지만 오히려 곁에서 대화를 지켜본 이들이 기운이 빠진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진짜 2억 달러라니…… 진짜 2억 달러라니…….”
박도하는 믿기지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돌아봤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2억 달러에 판매하는 계약이 진행된 것에 모두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1,000억도 정말 팔 수 있을까 걱정이 많이 했었는데…… 2억 달러면 얼마예요? 2,400억인가요?”
조수아는 순간 계산력이 떨어졌는지 손가락까지 동원해 계산했다.
한진영은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향해 웃으며 이야기를 꺼냈다.
“약속대로 10%는 여러분의 몫입니다. 만족스러운 가격으로 판매한 덕분에 여러분의 몫이 커져서 저도 기쁘네요.”
사람들은 2,400억의 10%인 240억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한 사람당 최소 20억씩 돌아가는 것에 그들은 행복감에 말도 꺼내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런 그들 속에서 김준하만은 돈이 아닌 다른 것에 더욱 기뻐했다.
“대표님. 그럼 우리하고 실버만삭스하고 업무적으로 함께할 수 있는 건가요?”
“김 팀장님은 실버만삭스하고 일을 함께할 수 있다는 것에 더 기뻐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럼요. 다른 곳도 아니라 실버만삭스인데요. 혹시 기회가 된다면 우리가 실버만삭스에 가서 일을 배울 수도 있는 건가요?”
꿈에 부푼 김준하의 모습에 한진영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그럴 거 같지는 않습니다.”
확신하는 듯한 한진영의 모습에 김준하는 고개를 갸웃했다.
한진영의 대답은 마치 무언가를 아는 듯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준하는 한진영에게 더 묻지 못했다.
한진영이 바로 조수아를 비롯하여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리며 김준하의 의문을 뒤로 미뤄버렸다.
“실버만삭스는 나중에 생각하고. 프로그램 매각부터 생각하시죠. 저쪽은 계약체결에 준비가 다 되어 있는 것 같으니 우리도 서두르도록 하세요. 빨리 계약체결하고 프로그램을 넘기고 우리는 손 털어 버릴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박 팀장님은 이제 퀀트 프로그램에 집중해주세요. HFT보다 복잡하고 어렵다는 것은 알지만 우리가 나아가려는 궁극적인 방향이 정보의 수치화니까요.”
“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정도로 확실하게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HFT 프로그램을 통해 엄청나게 큰돈을 번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한 순간 박도하와 팀원들의 눈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정보의 수치화라는 막연한 개념에 좌절하기보다 이걸 완성한다면 HFT 프로그램과는 비교도 안 되는 돈을 벌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마음속에 싹텄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김준하를 돌아보고 박도하에게 한 지시와 연결되는 말을 건넸다.
“김 팀장님 쪽이 프로젝트의 앞단에 해당합니다. 먼저 김 팀장님 쪽에서 이론을 확립시켜 주어야 그걸 박 팀장님이 구현할 수 있다는 것 명심해주세요.”
한진영의 말에 남아있던 의문마저 모두 날아가 버린 김준하였다.
김준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큰 소리로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오래전부터 대표님이 강조했던 일이라 계속 뼈대를 세워나가는 중이었어요. 대략적인 큰 틀은 완성이 됐고 이제 살을 붙이면 프로토타입이지만 구현 가능한 수준은 만들어 낼 수 있을 거예요.”
“좋습니다. HFT 때처럼 처음부터 완벽한 것을 만들어낼 필요는 없습니다. 로봇 장난감에 무기를 하나하나 추가하듯이 해나가면 됩니다.”
한진영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김준하를 바라봤고 김준하는 자기를 믿으라는 식으로 한진영을 향해 눈빛으로 대답했다.
***
세이지 자산운용에 폭풍이 휘몰아쳤던 다음 날부터 업계에서는 강력한 소문이 퍼져나갔다.
세이지 자산운용이 만든 프로그램이 톨슨 테크놀로지를 포함한 외국계 회사 세 곳에 2억 달러에 팔렸다는 것이었다.
업계에서는 이와 같은 소문을 쉽게 믿지 못했다.
자동매매와 관련된 프로그램을 세상 어느 누가 2천억이 넘는 돈을 주고 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소문에 힘을 실어주는 일이 다른 곳에서 일어났다.
국내 로펌 네 곳이 급히 세이지 자산운용과 톨슨 테크놀로지 등과의 계약을 진행하기 위해 모였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계약은 프로그램과 관련된 것으로 계약 규모는 2억 달러라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소문이 사실이었음을 알렸다.
업계는 의문이 현실이 된 순간 자동매매 프로그램에 대한 시각을 바꿨다.
그동안 자동매매는 단순히 사람이 매매하는 것을 도와주는 보조역할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번 일로 컴퓨터가 사람을 대체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업계에서는 이번 일에 대한 세이지 자산운용이 섣부른 행동을 한 것이 아니냐는 목소리도 함께 나왔다.
이런 좋은 프로그램을 해외에 판 것은 국부유출과도 같은 일이다.
세이지 자산운용이 이런 프로그램을 팔 생각이었으면 조금 손해를 보는 한이 있어도 국내 업체에 팔아야 하는 것이 아니었느냐는 말을 하는 곳이 생겨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말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협상 대상자에 가장 접근했다는 남부증권의 입을 통해 자기들이 제시한 가격과 해외 업체에서 제시한 가격의 차이가 20배가 넘게 차이가 난다는 사실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국부유출이건 뭐건 간에 20배가 넘게 차이 나는 시점에서 애국심만으로 상대를 설득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안 업계 관계자들은 더는 세이지 자산운용을 비난하지 못했다.
그리고 프로그램 판매 뒤에 나온 이야기에 세이지 자산운용은 일약 스타덤에 오르고 말았다.
실버만삭스와의 업무협약 체결.
설립된 지 얼마 안 된 회사와 실버만삭스의 협약 체결에 업계는 술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