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너와 나 모두 좋은 방법
행사가 끝난 강당은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부산했다.
“어서 여기 서봐. 여기가 잘 나온다.”
사람들은 커다랗게 걸려있는 현수막을 배경으로 하여 사진을 찍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 속에서 홀로 서서 현수막만 올려다보는 사람도 있었다.
슬픈 눈을 한 채 졸업 축하 글자가 적혀 있는 현수막을 올려다보던 조지훈은 홀로 몸을 돌렸다.
그때 조지훈의 귀로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가? 사진 찍어야지?”
조지훈은 마치 자기에게 말을 건네는 듯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양복을 입은 채 서서 자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아세요?”
“알지. 자자. 사진 찍자. 이런 날 사진 안 찍으면 아무것도 남지가 않아.”
한진영은 조지훈에게 다가가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리고 뒤를 따라 다가오는 이성우를 향해 손짓했다.
“야. 여기 배경으로 찍어봐. 여기가 잘 나오는 것 같다.”
한진영의 말에 이성우는 사진기를 꺼냈다.
아까 차에서 내릴 때 한진영이 건넨 사진기였다.
이성우는 사진기를 꺼내며 조지훈의 얼굴을 살피고 물었다.
“누구야?”
이성우는 궁금한 마음에 한진영에게 물었다.
그러나 대답은 한진영이 아니라 학사모를 쓰고 있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의 입을 통해 나왔다.
“그러는 당신들은 누구세요?”
“에?”
사진을 찍으려던 이성우는 마치 한진영을 처음 보는 듯이 바라보는 조지훈의 모습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서로 모르는 사이야?”
한진영은 품에서 도망가려는 조지훈의 어깨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고 이성우에게 말했다.
“뭐 해? 사진 찍어.”
“너 모른다잖아. 모르는 사람 데리고 뭐 하는 거야?”
“모르긴 뭘 몰라. 난 아니까 찍어. 이 녀석 나중에 졸업식 날 사진 한 방 못 찍었다고 후회할 거면서 왜 이렇게 빼? 괜찮으니까 빨리 찍어.”
“너 진짜 알아?”
“아 참. 안다니까. 조지훈. 얘 이름이 조지훈이야. 맞지?”
자기 이름을 아는 한진영의 모습에 조지훈이 화들짝 놀랐다.
“저 아세요?”
“알지. 아주 잘 알아.”
조지훈은 한진영을 올려다보며 눈빛이 흔들렸다.
그의 눈빛에는 놀라움과 함께 두려움도 느껴졌다.
조지훈은 떨리는 목소리로 한진영을 향해 물었다.
“설마…… 돈 받으러 오신 거예요? 졸업식장까지요?”
한진영은 조지훈의 양 뺨을 잡고 앞을 보게 한 후 말했다.
“빚쟁이 아니야. 그러니까 사진부터 찍자. 여기서만 찍을 거 아니니까 빨리 사진기 바라봐. 나나 저기서 멀뚱멀뚱 사진기 들고 이상한 표정 짓고 있는 저 친구나 다 바쁜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시간 뺏지 말고 사진기 바라보고…… 자 하나 둘 셋.”
찰칵.
이성우는 한진영이 조지훈의 이름까지 알고 있는 것에 더는 아는 사이냐고 묻지 않았다.
그리고 한진영의 말대로 시간 아깝게 사진을 찍니 마니 실랑이를 벌일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진영의 말대로 사진기를 들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고 한진영은 조지훈을 데리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강당에서는 다 찍었고…… 친구 없냐? 친구하고도 찍어야지.”
“정말 누구세요?”
“누구인지는 이따 이야기하면 되니까 지금은 사진이나 찍어. 시간 지나면 찍고 싶어도 못 찍는다. 기회 왔을 때 많이 찍어놔. 이거 다 추억되니까.”
한진영은 억지로 조지훈의 등을 떠밀어 사진을 계속 찍어댔다.
같은 과 동기로 보이는 지나가는 친구를 불러 세워 조지훈 옆에 세우기도 했고 조지훈만 홀로 세워 독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렇게 사진을 찍는 곳은 강당을 벗어나 캠퍼스로까지 이어졌다.
“오늘 사진 찍기 좋은 날이다.”
“그러게 오늘 딱 좋네.”
어느새 포토그래퍼가 되어버린 이성우는 자기가 맡은 역할에 심취하기까지 했다.
“거참 표정 한결같네. 좀 웃어봐. 포즈도 이렇게 해보고.”
이성우는 조지훈에게 포즈까지 요구하며 적극적으로 사진을 찍었다.
조지훈은 다른 것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은 채 사진만 찍어대는 한진영과 이성우의 모습에 점차 마음이 풀어졌다.
“그래. 좋네. 아까보다 훨씬 좋아졌다. 자 그럼 찍는다.”
이제는 한진영이 시키지 않아도 이성우가 알아서 사진을 찍어댔다.
커다랗게 서 있는 나무를 배경으로 찍기도 했으며 건물을 뒤로하여 사진을 찍기도 했다.
이제 졸업식에 온 누구보다 더 사진을 많이 찍는 사람이 아닐까 할 정도로 많은 사진을 찍은 조지훈이었다.
한진영은 이런 모습을 웃으며 지켜봤다.
지난 시절 조지훈은 한진영과 함께 다니며 졸업식에 사진을 찍지 못한 게 가장 아쉬웠다고 말했었다.
한진영은 그걸 기억하고 있다가 조지훈의 졸업식에 찾아와 그가 후회하지 않도록 도와준 것이었다.
한결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사진을 찍은 조지훈을 향해 한진영이 다가갔다.
“이제 실컷 찍었지?”
“네? 네. 그런데 정말 누구세요? 빚을 받으러 오신 분 같지는 않고…….”
“자세한 이야기는 어디 앉아서 하자. 빨리 학사모하고 그 가운 반납하고 와. 네 인생에 가장 중요한 일이 이제부터 벌어질 테니까.”
한진영은 말을 하고 조지훈의 등을 떠밀었다.
이성우는 찍은 사진이 담긴 사진기를 확인하며 멀어지는 조지훈을 슬쩍 올려다봤다.
그리고 대수롭지 않은 듯한 표정으로 한진영을 향해 물었다.
“그런데 저 친구 진짜 누구야? 사촌 동생도 아니라면서…….”
“내 비서.”
“비서?”
이성우는 사진기를 바라보던 것을 멈추고 한진영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비서인데…… 왜 비서가 자기가 모시는 상사를 몰라봐? 아니. 그 전에…… 너 비서가 있었냐?”
“이제부터 있을 거야. 저 친구가 내 비서다.”
“에? 저 친구가 비서를 하겠다고 찾아온 것도 아니라 네가 찾아와서 저 친구를 비서로 만들려고 하는 거야? 뭔 이런 경우가 다 있어?”
“저 친구는 특별하니까.”
“특별해? 뭐가 특별한데?”
한진영은 이성우의 말에 알 것 없다는 듯이 이성우의 등을 두드리고 말했다.
“너는 그거 가지고 가서 오늘 찍은 사진이나 다 현상해서 가지고 와. 그리고 현상한 사진으로 앨범 만드는 것 잊지 말고.”
이성우는 조지훈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 말고 갑작스럽게 일을 떠맡기는 한진영의 말에 펄쩍 뛰었다.
“야! 내가 네 비서냐? 저 친구가 네 비서라며? 근데 왜 나한테 시켜?”
“오늘 중요한 이야기 들었으면 값을 해야지. 설마 입 닦으려 했던 거야?”
“중요한 이야기? 무슨…….”
이성우는 한진영의 말에 무슨 중요한 이야기냐고 말하려던 것을 멈췄다.
그리고 졸업식 행사 때 한진영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유가 폭…….”
“조용히 해.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미친놈이라는 소리를 할 테니까.”
한진영의 말에 이성우가 급히 입을 막고 주변을 둘러봤다.
대학교 졸업식이 펼쳐지는 곳에서 유가 이야기를 커다랗게 떠들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혹시나 싶어 조심하는 모습을 보인 이성우였다.
한진영은 이성우의 모습을 보고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잊지 마라. 지금은 네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뭘 어쩔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걸 말이야. 다른 사람들을 설득할 수도 없고 증거라고 내밀 것도 없어. 그렇다고 네 말이 무조건 맞는다고 밀어붙일 수도 없지. 네가 아무리 사장이라고 하더라도 이사들과 여러 임원 그리고 모회사인 기풍철강까지 있는 상황에서 네 마음대로 회사를 끌고 가지 못하니까.”
“그럼 어떡해야 해? 이런 사실을 알고도 가만히 있으라고?”
한진영이 말한 이상 그리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는 이성우였다.
그리고 이렇게 남들이 모르는 일을 알게 된 이상 그것으로 무언가 이득을 얻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이성우는 이대로 정보를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한진영은 자신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 이성우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모르면 몰라도 안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겠지.”
“그치?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하냐? 네 말대로 증거로 제시할만한 것이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말이야.”
이성우의 말에 한진영이 웃으며 이성우의 어깨에 손을 둘렀다.
“너는 하지 못하지만, 그 일을 대신해 줄 사람은 있잖아. 기풍증권이 아닌 다른 곳에…….”
“기풍증권이 아닌 다른 곳에?”
이성우는 고개를 돌려 한진영을 올려다봤다.
한진영의 웃는 얼굴을 보자 이성우의 얼굴이 환하게 변했다.
고민을 단숨에 해결할만한 답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그렇네. 운용 파트 부문을 너희 쪽에 더 확대하면 되겠구나. 그래. 최근에 너희 쪽에 건넨 운용 파트가 수익이 좋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 보고에 힘을 실어서 너희 쪽에 넘기는 금액을 늘리면…….”
“그래. 그럼 누이 좋고 매부 좋고가 되는 거지.”
“맞아. 가만히 앉아서 그걸 놓치는 것보다 너한테 수수료 30% 주는 한이 있어도 빼먹는 게 중요하지. 그리고 너한테 운용 파트를 밀어준 후 좋은 성과를 올리면 내 입지도 탄탄해질 테고…… 내 입장에서는 일 타 쌍피겠다.”
“그렇지. 나는 너희에게서 받은 돈으로 매매하여 30%의 수수료를 더 챙길 수 있으니 나도 좋은 일이지.”
이성우와 한진영은 서로가 만족할만한 상황을 즐기며 조지훈이 오기를 기다렸다.
***
학교 앞에 있는 커피숍에 들어간 조지훈은 앞에 앉아있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
자기와 나이 차이도 얼마 나지 않은 것 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 얼마 차이 나지 않는 나이와는 다르게 풍기는 분위기는 하늘과 땅만큼 달랐다.
한눈에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옷과 시계 그리고 넥타이까지 모든 것이 명품으로 보였다.
그리고 이곳에 오기 전에 카메라를 두고 오겠다며 타고 온 차를 확인했을 때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인터넷에서나 보던 차의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조지훈은 당황한 표정으로 한진영과 이성우를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빚을 받으러 오신 분은 아니신 거 같은데…… 누구세요?”
한진영은 조지훈을 향해 품속에 있는 명함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명함을 앞에 내밀며 말했다.
“나는 세이지 자산운용의 한진영 대표. 여기 있는 이 친구는…… 휴대폰 가지고 있지?”
“가지고는 있는데…….”
“휴대폰 꺼내 봐.”
한진영의 말에 조지훈이 휴대폰을 꺼냈다.
“거기에 기풍증권의 이성우 이렇게 쳐보면 이 친구 얼굴이 나올 거야.”
“네?”
“어서 쳐봐.”
한진영이 어서 해보라는 식으로 턱짓했다.
조지훈은 휴대폰과 이성우를 번갈아 바라본 뒤 한진영이 하라는 식으로 포털 사이트에 이성우라는 이름과 기풍증권이라는 회사명을 적었다.
그러자 한진영의 말대로 포털 사이트 인명사전에 이성우의 사진이 떡 하니 나왔다.
이성우도 이런 것을 몰랐던지 자기 휴대폰을 통해 직접 자기 이름과 회사명을 적어봤다.
“얼라? 진짜네. 뭐야 창피하게…… 좀 괜찮은 사진 쓰지.”
이성우는 자기 프로필을 내려다보며 창피해했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의 뒷머리를 쓸어내고 조지훈에게 말했다.
“자 그럼 대충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게 됐을 테고…….”
조지훈은 놀란 눈으로 한진영과 이성우를 번갈아 바라봤다.
졸업 사진을 찍으며 두 사람이 빚을 받으러 온 사채업자가 아니라는 것은 알게 됐다.
그러나 이렇게 포털 사이트에 이름을 치면 나오는 사람일 줄은 꿈에 몰랐던 조지훈이었다.
게다가 커다란 회사의 사장과 대표라는 사실에 조지훈은 입이 점점 벌어졌다.
“내가 온 이유를 이제 이야기해야겠지?”
한진영은 자기 명함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보다시피 난 이번에 새로 설립된 자산운용사의 대표야. 뭐 쉽게 이야기해서 사장이자 오너이지. 그런데 나한테는 비서가 아직 없어. 주변에서 계속 비서를 채용하라고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 이유는…… 너 졸업할 때까지 기다리려고…….”
“저를 기다리셨다고요? 왜요?”
“널 내 비서로 채용하려고 했으니까.”
“저를 비서로요?”
조지훈은 갑자기 졸업식 날 찾아와 비서로 채용하겠다는 한진영에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이런 한진영의 말에 이성우도 놀랐는지 휴대폰으로 자기를 검색하던 것을 멈추고 한진영을 돌아봤다.
“진짜 비서 채용하려고 온 거야?”
“그럼 내가 농담하는 줄 알았냐?”
“나는…….”
“그냥 너는 조용히 있어. 쉿! 너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한진영은 이성우를 조용하게 만들고 다시 조지훈을 향해 말했다.
“지금 부모님께서 남긴 빚 때문에 힘들지?”
“어떻게 아셨어요?”
“그것만이 아닐 거야. 채무 변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지금 신용불량 상태 아니냐?”
“그걸…….”
조지훈의 치부와도 같은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한진영이었다.
한진영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유 때문에 취업도 힘든 상태잖아? 내정되어 있던 회사에서도 너를 받아줄 수 없다는 말을 들었고…… 신용불량자가 뭐라고 그렇게 벌레 보듯이 하는지 나 원 참.”
한진영은 안쓰럽다는 눈으로 조지훈을 바라보고 계속 이야기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머리에 학사모를 씌워 드리고 싶었지만, 지금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네 등록금을 마련한다고 할아버지가 새벽에 나가 폐지를 주우시다 쓰러지시는 바람에 지금 누워계시고, 할머니는 그런 할아버지 곁을 떠나지 못해 하나밖에 없는 손주 졸업식에도 오시지 못하시잖아. 참 안타까워. 평생 손주만 보고 사셨는데 손주 대학 졸업식도 보시지 못하시니 두 분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실까?”
조지훈은 이제는 놀랄 기운도 없었다.
자기 사정을 손바닥 같이 들여다보고 있는 한진영에게 더는 누구냐고 물을 수도 없었다.
속속들이 다 아는 상황에서 자기를 채용하고 싶다는 말이 조지훈의 귀에 맴돌 뿐이었다.
“돈이 필요한데 돈을 못 버는 거지 같은 상황이지? 그걸 내가 해결해줄 테니까 나한테 와.”
조지훈은 평생 듣고 싶었던 말이 한진영의 입에서 나오자 자기도 모르게 눈이 뿌옇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