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모아 놓으면 보이는 것들
지난 시절 한진영과 조지훈의 인연은 단순하게 시작됐다.
소개를 통해 한진영의 비서로 조지훈이 오게 됐고, 그 인연으로 한진영이 이곳에 오기 전까지 5년 동안 착실히 곁에서 자리를 지켰던 것이 조지훈이었다.
당시 한진영은 회사를 설립한 뒤 스파르타식으로 업무를 진행했다.
밤이고 새벽이고 일하는 것을 가리지 않았으며 회사에서 자기를 밥 먹듯이 했다.
이런 업무 스타일은 조지훈이 오기 전의 비서들은 받아들이지 못한 것들이었다.
저녁이 있는 삶까지는 아니더라도 퇴근 뒤에 다시 부르는 것만큼은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지훈은 달랐다.
절실했고 돈을 꼭 벌어야만 했다.
지금까지 키워준 할아버지, 할머니를 쉬게 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새벽에 부르는 한진영의 지시에도 군소리 한마디 없이 한진영의 지시를 따랐다.
근무시간 외에 부를 때는 그만큼 돈을 더 많이 줬기에 조지훈은 한진영의 과한 부름에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이었다.
시간이 흐른 뒤 자산운용사의 자리가 잡히자 부르는 것이 뜸해지며 오히려 새벽에 불렀을 때를 그리워하기도 한 조지훈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함께 시간을 보내자 두 사람은 그 누구보다 손발이 잘 맞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말하지 않아도 한진영의 마음을 꿰뚫어 봤고, 한진영이 지시하지 않아도 앞으로 어떻게 일이 진행될지 조지훈은 알 수가 있었다.
한진영의 입속의 혀처럼 조지훈은 움직였다.
조지훈도 만족할 만한 생활을 즐겼다.
마치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신용불량자라는 자기의 신분을 꺼리지도 않았으며, 또래보다 더 많은 연봉을 챙겨주며 고생하는 것에 대한 보상을 확실히 해줬기 때문이다.
게다가 조지훈의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챙기는 것에 조지훈이 더욱 열심히 일하는 이유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한진영은 그 시절 조지훈을 기억하고 있었다.
또한 그렇게 잘 맞는 조지훈과 함께 겪었던 고난도 다 기억하고 있었다.
한진영은 다시는 그런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 힘을 키우고 있는 지금, 자기 옆에서 자기를 가장 잘 도와줄 사람으로 조지훈을 생각했다.
‘그리고 내 옆에서 똑똑히 복수하는 것을 지켜볼 사람도 지훈이뿐이지.’
한진영은 속으로 웃으며 선물로 가지고 온 것을 꺼내놓았다.
조지훈은 한진영이 새롭게 꺼낸 것을 내려다보고 물었다.
“이게 무엇인가요?”
“뭐긴? 계약서지.”
“계약서요?”
화들짝 놀란 조지훈은 두려운 모습을 보였다.
계약서에 대한 안 좋은 기억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이런 조지훈의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이상한 거 아니고 채용 계약서니까 잘 보도록 해. 그리고 수정하고 싶은 거 있으면 이 자리에서 이야기해서 수정해. 나중에 가서 이런저런 이야기 해도 들어주지 않을 테니까. 뭐든지 계약서를 사인하기 전에 잘 확인하는 습관을 지금부터 키우도록 해.”
“정말…… 저를 채용하시려고요?”
“정말 이 친구를 채용하려고? 이렇게 쉽게?”
조지훈과 이성우가 동시에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한진영에게 물었다.
그러나 한진영은 흐트러지는 모습 없이 조지훈을 향해 말했다.
“내 비서로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돼. 조금 전 확인한 대로 우리는 이상한 사람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하긴 지금 네 입장에서는 찬물 더운물 가릴 상황이 아니지. 나 놓치면 아르바이트하면서 일용직을 전전할지도 몰라. 뭐 그러다 결국 나한테 오겠지만…… 시간 아깝게 그렇게 뱅뱅 돌다 오지 말고 바로 와. 나도 바로 네가 필요한 입장이니까.”
한진영은 계약서를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여기에 사인하고 다음 주 월요일부터 바로 출근하면 된다. 네 입장에서는 하루라도 일찍 출근해서 돈을 버는 게 좋잖아. 그러니까 이 자리에서 결정해.”
한진영은 조지훈에게 계약서를 확인할 것을 말하고 이성우를 돌아봤다.
“사람에 대한 내 눈도 믿지?”
“나야 너 믿지.”
“그럼 조용히 있어라. 정신 사나우니까.”
이성우는 알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지훈은 휴대폰에 떠 있는 사진과 정신 사납다는 말에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이성우를 번갈아 바라봤다.
그리고 대뜸 자기를 찾아와 채용하고 싶다는 한진영을 돌아봤다.
한진영은 자기를 바라보는 조지훈을 향해 말했다.
“쉽지 않을 거야. 한밤중이고 새벽이고 찾아대는 통에 네 생활이라는 건 없을 수가 있어. 하지만 절실한 너라면 그 시기를 잘 버틸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만큼 보상도 확실하게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조지훈은 한진영의 말에 계약서로 눈을 내려뜨렸다.
연봉과 성과급이 제일 눈에 먼저 들어온 조지훈이었다.
조지훈이 숫자들을 손가락으로 짚어 확인하고 있을 때 한진영이 주머니에 들어있던 펜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펜 뚜껑을 열어 조지훈에게 내밀자 조지훈이 기다렸다는 듯이 펜을 건네받았다.
모든 의문이 숫자를 보는 순간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하겠습니다. 정말 최선을 다해 일하도록 하겠습니다. 대표님을 정성껏 모시겠습니다.”
“벌써 그럴 필요는 없어. 사인한 뒤 다음 주 월요일부터 해도 충분해.”
“네. 알겠습니다.”
조지훈은 한진영에게 펜을 받아 계약서에 급히 사인했다.
다른 여러 조항이 눈에 들어왔지만 읽어본 바로는 자기에게 이득이 되면 이득이 됐지, 잘못된 내용은 하나도 없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사인한 뒤에 보이는 연봉만 뚫어지라 쳐다봤다.
‘이 돈이면 빚도 금방 갚을 수 있어.’
취직이 되지 않아 계속 악순환에 악순환이 이어지던 어두운 통로에 희망의 불빛이 들어오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은 조지훈이었다.
한진영은 희망찬 표정을 짓고 있는 조지훈의 모습에 웃으며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그럼 월요일 날 보자.”
한진영은 말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차 키를 조지훈에게 던졌다.
조지훈은 자기도 모르게 앉은 채로 차 키를 받아 들고 한진영을 올려다봤다.
“아까 오면서 봤지? 이제부터 그 차가 네가 몰 차야. 다음 주 월요일까지 익숙해지도록 운전하고 다녀. 그리고 월요일 차 몰고 우리 집 앞으로 찾아오면 돼. 그거로 시작이니까.”
조지훈은 올 때 봤던 차를 떠올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절대 흠집 하나 나지 않도록 조심하겠습니다.”
“흠집 좀 나도 돼. 괜찮아. 그거 말고도 자네가 관리할 것들이 많으니까 너무 거기에 신경 쓰지 마. 익숙해지라고 건넨 거니까. 그럼 월요일 날 보자.”
이성우는 대뜸 차 키까지 건네는 한진영의 모습에 자리에서 일어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야. 괜찮아?”
“괜찮아.”
“그래도 그 비싼 차를…….”
“비싸 봤자 얼마나 한다고…… 그리고 제발 재벌답게 통 크게 살아라. 왜 이런 말을 네가 아닌 내가 하는 거냐?”
“야 재벌은 사람 아니냐? 일반 사람에게 비싼 차는 재벌한테도 비싸.”
“알았어. 알았어. 너한테도 비싼 차야. 하지만 어쨌든 내 차 내 맘대로 하겠다는데 왜 네가 그래?”
“야 그래도…… 맞다.”
이성우는 무언가를 떠올리고 한진영의 팔을 급히 두드렸다.
“우리 어떻게 돌아가냐?”
“뭘 어떻게 돌아가? 여기서 지하철 타면 금방인데.”
“야 무슨 지하철을 타? 그리고 나…… 지갑 없어.”
“뭔 재벌이 돈도 없냐? 한 세 시간만 걸으면 대충 도착할 테니까 슬슬 걸어와.”
“야!”
조지훈은 차 키를 든 채로 투닥거리며 멀어져 간 한진영과 이성우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
사람들을 모아 놓은 채 한진영은 조지훈을 소개했다.
“오늘부터 제 비서를 맡게 된 조지훈입니다. 이제 졸업하고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친구이니 자리에 계신 분들이 모두 잘 도와주기 바랍니다.”
“환영해요.”
조수아가 제일 먼저 반가운 얼굴로 다가와 조지훈의 손을 덥석 잡았다.
조지훈은 당황한 표정으로 조수아에게 손이 잡힌 채 인사했다.
“잘 부탁드려요.”
“내가 잘 부탁해야죠. 내가 다 알려줄 테니 이리 와요. 알려줄 게 산더미예요.”
인사가 끝이 나지도 않았는데 조수아는 조지훈을 끌어당겼다.
사람들하고 인사하는 시간조차도 아깝다는 듯이 어서 인수인계를 하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조지훈과 제대로 인사도 마치지 못한 채 조지훈의 뒷모습만 멀뚱멀뚱 바라봤다.
한진영은 그런 조수아와 조지훈을 보고 고개를 흔든 뒤 김준하, 홍대민, 박도하를 불렀다.
“김 팀장님과 홍 팀장님 그리고 박 팀장님은 잠시 저 좀 보시지요.”
김준하 등은 한진영의 뒤를 따라 회의실로 향했다.
한진영은 먼저 회의실 의자에 앉은 뒤 세 사람을 자기 오른편 의자에 앉게 했다.
그리고 세 사람이 나란히 자리에 앉자 먼저 홍대민을 향해 한진영은 질문했다.
“홍 팀장님. 어떠십니까? 이제 좀 적응이 되셨나요?”
“네. 직원들이 많이 도와준 덕분에 잘 적응해 나가고 있습니다.”
홍대민은 대답하고 곁에 함께 앉아있는 김준하와 박도하를 돌아본 뒤 말했다.
“적응하는 문제로 저를 보자고 하신 거는 아니실 테고…… 혹시 무슨 문제가 있나요?”
“아니요.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할 일을 설명하기 위해서 모이라고 한 겁니다.”
“앞으로 할 일이요?”
한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회의실 문을 열고 조지훈이 안으로 들어왔다.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야. 딱 알맞게 왔네. 준비한 거 시작하자.”
한진영의 지시를 받은 조지훈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그리고 노트북과 커다란 화면을 연결하여 노트북에 들어있는 것을 화면을 통해 나타나게 만들었다.
자리에 있던 세 사람은 무엇을 하는 것인지 가만히 기다렸다.
한진영이 이렇게 준비를 하는 일이라면 간단한 일은 아닐 것으로 생각했다.
한참 준비를 마친 조지훈이 이마에 솟아난 땀을 닦으며 말했다.
“다 됐습니다.”
“좋아.”
한진영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조진호가 그에 맞춰 화면에 차트 하나를 띄웠다.
홍대민 등은 화면에 나온 차트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이건 크루드 오일 차트 아닙니까?”
“네. 일반적으로 거래하고 확인하는 차트지요.”
한진영은 차트 앞에 섰다.
“지난 큰 하락 이후 이 차트는 꾸준히 우상향하여 다시 한번 100불 돌파에 성공한 상황입니다. 주변 여건도 좋고 여러 가지 분위기도 무르익어 한 단계 레벨업도 가능하지 않을까 많이들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진영이 말하고 손가락을 튕기자 조지훈이 기다렸다는 듯이 화면을 바꿨다.
한진영은 처음 호흡을 맞춰보는 것인데도 잘 따라오는 조지훈을 보고 미소 지었다.
한진영은 조지훈에게 자료와 함께 첫날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할 내용을 먼저 알려줬다.
출근 준비를 하는 동안 쉬엄쉬엄 일을 준비해보라는 뜻으로 건넨 것들이었다.
잘하지 못해도 된다는 말을 건넸던 한진영이었다.
어차피 중요한 내용은 말 속에 담겨 있고, 화면에 보이는 것들은 하는 말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것뿐이니 깊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도 함께 건넸다.
그러나 한진영은 조지훈이 가지고 온 자료에 만족했다.
‘역시 잘해.’
하나하나 설명하지 않아도 무엇이 중요 포인트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조지훈이었다.
한진영은 첫 업무에서 과거 환상적인 호흡을 보였던 조지훈을 떠올리며 즐거워했다.
이렇게 즐거워하는 한진영과 달리 자리에 앉아있던 세 사람은 혼란스럽기만 했다.
세 사람 중 홍대민이 나머지 두 사람을 대신하여 먼저 입을 열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미국 셰일오일 업체의 시추장비 추이? OPEC의 생산량 변화? 이것들을 왜 보여주시는 겁니까?”
“이것까지 보시고 이야기를 하도록 하죠.”
한진영이 말을 하고 화면을 손으로 가볍게 두드리자 조지훈이 화면을 하나 더 띄웠다.
“미국의 원유 생산량 변화?”
화면에 그림이 하나하나 뜰 때마다 의아함이 더욱 커져만 갔다.
한진영은 그런 그들을 향해 지금 자리한 이유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물자를 많이 생산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물자를 소비하는 곳입니다. 원유도 마찬가지지요. 중국이 아무리 경제가 성장했다고 하더라도 미국의 소비량을 따라가기에는 아직 먼 이야기일 정도로 엄청난 원유 소비량을 자랑합니다. 그렇게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미국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한진영은 미국의 원유 생산량 추이를 나타낸 그래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미국이 원유를 무지막지하게 뽑아내기 시작한 겁니다. 하루 100만 배럴에도 미치지 못하던 생산량이 지금은 800만 배럴까지 올라간 상황입니다. 전 세계 생산량의 8%에 해당하는 물량으로 이 덕분에 미국은 순수하게 수입국이었던 지위에서 벗어나 원유 수출국이 되어 버렸습니다.”
한진영의 말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빠르게 한진영이 준비해온 자료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따로 떨어져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모아 놓고 보자 의미가 생겼다.
지난 서브프라임 사태 때 1,000선 아래까지 순식간에 떨어졌던 RIG(유정 굴착 장비) 숫자가 단숨에 2,000선을 회복하며 원유 생산에 박차를 가한 듯한 모습이었다.
한진영의 말대로 미국은 비OPEC 회원국 중에서 가장 많은 원유를 생산하는 국가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생산량을 토대로 자국에서 원유를 소비하고도 수출을 할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자리에 있던 세 사람은 놀란 모습으로 한진영이 가지고 온 것들을 살피기 바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