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결정에 이유가 필요한 단계에 들어섰다
한진영은 화면에서 떨어져 앞으로 걸어 나갔다.
홍대민 등은 그런 한진영을 따라 시선을 화면에서 돌렸다.
한진영은 자기를 따라 움직이는 세 쌍의 눈동자 주인을 향해 이야기했다.
“얼마 전에 실버만삭스에서 나온 보고서 하나가 크게 화제가 되었지요. 혹시 누구 보신 분 있으십니까?”
“유가 300불 예상 시나리오 말씀하시는 건가요?”
홍대민의 말에 한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유가 300불 시나리오.”
한진영은 잘 말했다는 듯이 손가락으로 홍대민을 가리키고는 계속 이야기했다.
“뭐 진짜로 300불이 될 거로 생각하고 실버만삭스가 작성하여 내놓은 것은 아닐 겁니다. 그만큼 시장 상황이 호의적이라는 것을 돌려 이야기한 것으로 생각하는 게 합리적인 추론이겠지요.”
“네. 맞습니다. 300불은 터무니없는 금액이기는 하지만 그만큼 상승 여력이 많다는 정도로 받아들이는 게 맞을 겁니다. 실제로 미국이 이란을 제재하고 있는 지금 유가의 상승에 탄력이 붙게 된다면 꽤 높은 가격까지 오를 거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중이었으니까요. 거기에 더해서 중국과 인도, 인도네시아와 같이 중량감 있는 국가들이 산업화에 진행되며 석유 소비량 또한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이 된다는 이야기도 있으니까요.”
한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바로 지금 유가를 바라보는 통상적인 시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이야기를 조금 전으로 다시 돌려보도록 하지요.”
한진영은 몸을 돌려 화면에 떠 있는 자료들을 살피며 말했다.
“미국이 원유 생산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이유는 뭘까요?”
“셰일오일 덕분이겠지요. 저기 보이는 자료가 그걸 이야기해주는 것 아닌가요?”
자료를 보고 박도하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한진영은 그런 박도하를 향해 맞췄다는 듯이 웃어 보이고는 대답했다.
“그렇죠. 셰일오일 덕분입니다. 자 그럼 생각해봅시다. 기름값은 계속 오르고 셰일오일 생산량 또한 계속 늘어난다면…… 누가 돈을 벌까요?”
“미국이겠지요. 지금 보여주고 있는 자료가 모두 미국이 엄청난 이득을 볼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으니까요.”
이번에는 김준하가 대답했다.
이건 화면 속에 떠 있는 자료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내용이었다.
가격이 오르면 최근에 생산량을 늘린 이가 가장 이득을 본다는 것은 어린아이도 알 수 있는 당연한 이야기였다.
번갈아 대답한 박도하와 김준하는 대답하면서도 한진영이 무얼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두 사람과 달리 홍대민은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진영은 홍대민이 생각하는 것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그렇게 잠시의 시간이 흐른 후 홍대민이 고개를 들어 한진영을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의문과 감탄 그리고 혼란스러움이 섞여 있었다.
한진영은 여러 가지 감정을 담고 있는 홍대민의 눈을 바라본 채 물었다.
“어떻습니까? 이제 좀 무언가가 보이지 않습니까?”
“정말 대표님께서는 산유국들이 이런 미국의 행보에 불만을 느끼고 움직일 거로 생각하시는 겁니까? 다른 곳도 아니라 상대가 미국인데요?”
한진영과 홍대민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김준하가 깜짝 놀라 물었다.
“산유국들이 가만히 있지 않는다고요?”
“미국을 상대로 말입니까?”
박도하도 놀라 물었다.
다른 나라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미국을 상대로 불만을 품은 것도 모자라 어떠한 행동을 한다는 것을 믿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놀라워하는 세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가능성을 제기했을 뿐입니다. 이제 제 생각이 진짜인지 아닌지 증거를 수집하고 시장을 모니터링 하는 것은 여러분의 몫이지요. 박 팀장님.”
“네?”
박도하가 깜짝 놀라 대답했다.
한진영은 화면 앞으로 다가가 RIG와 생산량 변화 차트를 손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이렇게 남들이 먼저 정리한 자료를 보고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남의 손으로 만들어진 자료의 경우에는 비어있는 곳이 어디인지 모르니까요. 저는 비어있지 않은 온전한 자료를 보고 싶습니다. 그러니 박 팀장님께서 정보를 모아주십시오. 그렇게 모은 정보로 모든 것이 다 맞추어진 자료를 보여주십시오. 그리고 김 팀장님.”
“네.”
한진영은 박도하에 이어 김준하에게도 지시했다.
“모은 자료를 통해 예측하고 싶습니다. 시장 예측 모델을 만들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홍 팀장님.”
“네.”
마지막으로 홍대민을 향해 한진영이 지시했다.
“헤게모니 싸움이 벌어졌을 때 충격받을 종목과 오히려 이득을 볼 종목 등을 우선 선별해 주십시오. 박 팀장님과 김 팀장님을 통해 자료가 나오게 된다면 바로 움직일 수 있도록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한진영은 조지훈을 향해 손짓하여 화면을 끄게 한 후 말했다.
“변화는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게 제 판단입니다. 이제 제 판단이 맞는지 틀리는지 검증을 할 시간이지요. 그 검증이 끝이 난다면 우리는 과감하게 투자를 할 겁니다. 저는 누구보다 먼저 투자를 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으로서 이런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한진영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말이 무얼 의미하는 것인지 자리에 있는 세 사람은 알고 있었다.
모두가 상방을 바라보고 있는 이때 하방을 향해 배팅하여 이기게 된다면 배당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 분명했다.
세 사람은 한진영에게 빠르게 움직여 남들이 알아차리기 전에 결론을 내겠다는 말을 전한 후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한진영은 말을 마치고 잠시 자리에 앉아 정리하는 조지훈을 바라봤다.
조지훈은 노트북과 화면의 연결 되어 있는 것을 해제하고 세 사람이 떠난 자리를 정리하며 슬쩍 한진영을 바라보고 물었다.
“대표님?”
“어?”
“제가 보니까 대표님은 이미 방향을 정해놓으신 것 같은데…… 아닌가요?”
“역시 눈치가 빠르네. 어떻게 알았어?”
한진영의 말에 조지훈은 이미 꺼져버린 화면을 슬쩍 바라본 후 대답했다.
“자료라고 해서 가지고 온 것들이 모두 하락을 이야기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팀장님들에게 지시를 내리신 것도 대표님의 말씀에 힘을 싣기 위한 자료를 만들기 위해 지시를 내리신 것 같아서요.”
“역시 똘똘해.”
“감사합니다.”
한진영의 칭찬에 조지훈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한진영은 출근 첫날부터 자기의 마음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조지훈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아. 네 말대로 나는 마음을 굳히고 있어. 그런데도 세 사람에게 지시를 내린 게 이상하게 보여서 묻는 거지?”
“네. 굳이 그러실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요.”
“맞아. 한 석 달 전만 했어도 굳이 이런 지시를 내릴 이유가 없었지.”
“그 말씀은 지금은 아니라는 이야기인가요?”
“그래. 지금은 그럴 수 없어.”
한진영은 팔짱을 낀 채 세 사람에게 자기 말에 힘을 실어줄 만한 자료를 가지고 오라고 지시를 내린 이유를 설명했다.
“내가 아직 우리 회사 규모를 말해주지 않았나 보네. 우리 자산운용사가 얼마를 돌리고 있는 것 같아?”
한진영의 질문에 조지훈이 허리를 펴고 일어나 잠시 천장을 바라본 채 생각했다.
그리고 천천히 한진영의 질문에 대답했다.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하신 것 보니 생각보다 큰 것 같습니다.”
“하여튼 눈치도 빨라요. 그래. 맞아. 그러니 네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큰 금액을 이야기해봐.”
“제가 교수님께 듣기로는 국내 자산운용사의 규모는 생각보다 크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1,000억 정도…….”
“땡!”
한진영은 신이 난 듯이 손바닥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그리고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조지훈에게 이야기했다.
“다시 기회를 줄 테니까 맞춰봐.”
조지훈은 하던 것을 멈추고 한진영을 가만히 바라봤다.
“다시 해보라고 하신 것 보니 그것보다는 클 것 같네요. 그리고 틀렸다고 말씀하시는 말투 속에서 즐거워하시는 것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처음 이야기한 것보다 훨씬 큰돈을 운용하시는 것 같아요.”
“하여튼 눈치는…… 그래서? 이번에는 얼마를 예상해?”
조지훈은 가만히 한진영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리고 무언가 결심을 한 듯한 표정으로 큰 소리로 자기가 부를 수 있는 최고 금액을 불렀다.
“3,000억!”
“땡!”
한진영은 조지훈이 말하자마자 손바닥으로 책상을 두드리고 소리쳤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조지훈을 향해 답을 알려줬다.
“현재 우리가 굴리는 금액은 6,000억. 그리고 계약이 마무리되면 들어올 2,000억까지 더한다면 총 우리가 굴리는 돈은 총 8,000억이 될 거야.”
“그렇게나 많습니까? 분명 회사를 설립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한진영은 슬쩍 조지훈을 돌아보고 웃었다.
“맞아. 설립한 지 몇 달 안 됐어.”
“그런데도 8,000억이나 굴리신다고요?”
입이 떡 벌어진 얼굴로 놀라는 조지훈을 향해 한진영은 크게 웃었다.
“하하하. 뭘 그렇게 놀라?”
“아무리 학교에서 듣는 이야기와 현실은 다르다고 하지만 제가 생각한 것과 너무나 달라서요.”
“뭐 그렇긴 하지.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님들이 현직에서 활동하던 시절과 지금은 또 다르니까. 그리고 우리가 좀 유독 큰 것도 있어. 운이 좋아 시작부터 큰돈을 가지고 시작했고, 하자마자 돈을 많이 번데다 가외로 얻은 수익까지 있으니까.”
한진영은 놀라는 것이 이해가 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계속 이야기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기 시작했어. 결정에 이유가 필요한 단계에 들어갔다는 거지.”
“그래서 이유를 만들어오라고 하신 거군요.”
“그래. 그렇다고 억지로 꿰맞추는 것은 안 돼. 그런 것은 다 들통이 나기 마련이니까. 나는 투자자들의 눈을 가리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아.”
한진영은 회의실 손잡이를 잡은 채 몸을 돌렸다.
“빨리 정리하고 나갈 준비해.”
“나갈 준비요?”
“그래. 비록 8,000억이 많은 돈이기는 하지만 조금 아쉽기는 해. 그래서 돈을 더 투자받으러 갈 테니까 준비 다 되거든 이야기해.”
“어디로 갈 준비를 하면 될까요?”
“기풍증권. 거기로 가자.”
한진영은 말을 마치고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
한진영은 맞은 편에 앉은 이성우와 최준호 본부장을 바라봤다.
그리고 앞에 놓인 계약서를 내려다본 채 이야기했다.
“1,500억까지 더하여 2,000억을 맞추는 겁니까?”
한진영의 질문에 이성우는 최준호 본부장을 돌아보고 인상을 찌푸린 채 대답했다.
“제 개인적인 마음 같아서는 한 5,000억 찔러 넣고 싶은데…….”
“사장님. 안 됩니다.”
최준호 본부장이 이성우의 시선에 고개를 젓자 이성우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한진영을 향해 말했다.
“여기 계신 최 본부장님께서 극렬히 반대하시는 바람에 1,500억만 집어넣기로 한 겁니다.”
최준호는 아쉬워하는 표정의 이성우를 향해 말했다.
“사장님. 1,500억에 대한 운용권을 넘기는 것도 이사회의 설득이 필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기존에 올린 세이지 자산운용의 성과와 마침 우리 쪽에서 가용할 수 있는 금액이 있어 이사회 승인 없이 진행된다는 것만 알아주십시오.”
“어차피 이사회라고 해 봤자 다 우리 사람이잖아요. 승인이 필요하면 이사회 승인받아서 진행하면 되지 않습니까?”
이성우의 말에 최준호가 펄쩍 뛰었다.
“이사회까지 안건이 올라가면 통과가 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500억일 때야 회장님의 의중이 담겨 있어 가능했던 일이지 지금은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사람들인데도 힘들다고요?”
“우리 사람은 맞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람이라고 해서 꼭 사장님 편은 아닙니다.”
최준호는 잠시 한진영을 돌아봤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말을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였지만 한진영이라면 괜찮았다.
오히려 지금 이야기를 한진영에게 전하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최준호였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이성우에게 말했다.
“이사회 구성원들에 누가 있는지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왜 기억하지 못합니까? 사흘 전에도 이사회 사람들과 저녁을 먹었는데요. 김 이사하고 전 이사하고…….”
이성우는 잠시 말을 하려던 것을 멈췄다.
최준호는 그런 이성우를 바라보고 다시 한번 깊은 한숨을 내쉬고 이야기했다.
“맞습니다. 김 이사하고 전 이사하고 사장님께서 식사하셨지요. 하지만 식사 자리에 오지 않은 이사진들은 어떻습니까? 그 사람들이 과연 사장님의 결정에 손을 들어 줄까요?”
이성우는 최준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요. 유정이 쪽 사람들이었군요.”
“맞습니다. 이 본부장님 쪽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사장님이 하려는 일을 지지해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들의 동의를 구할 수 없는 선에서 운용권을 넘기도록 한 겁니다.”
최준호가 이해하느냐는 듯이 이성우를 바라봤다.
이성우는 그제야 이해하는 것으로 보였다.
한진영은 축 늘어진 어깨를 하는 이성우를 가만히 바라보고 말했다.
“내부에서 하려는 일에 저항이 심하냐?”
사적으로 마주하고 있는 것이 아니어서 지금까지 경어를 썼던 한진영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성우의 모습을 보고 경어로 물을 수가 없었다.
한진영은 친구의 입장에서 이성우에게 물었고, 이성우도 그런 한진영의 마음을 아는 듯이 편한 말투로 한진영의 질문에 대답했다.
“최근에 좀 그러네. 지난 일로 임원진 목을 치고 나니까 갑자기 유정이 사람이 빈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오기 시작하더라.”
“막을 수는 없었고?”
“그러기에는 너무 늦었어. 알았을 때는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버린 뒤라서…….”
한진영은 곤란하다는 듯이 표정을 짓고 이성우를 가만히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