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지금부터 벌면 된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조지훈은 룸미러를 힐끔거렸다.
잠시 누워 눈을 감고 있던 한진영은 그런 조지훈의 시선을 느꼈는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할 말 있어? 있으면 눈치 보지 말고 그냥 이야기해.”
“죄송합니다. 쉬시는데 제가 방해했습니다.”
“괜찮아. 어차피 멀지 않아서 잠깐 피로를 푼 것뿐이야.”
한진영은 고개를 들고 눈을 뜬 뒤 다시 조지훈을 향해 말했다.
“뭔데? 말해봐.”
“저기 그러면…….”
조지훈은 운전대를 잡은 채로 룸미러를 통해 한진영을 바라보고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럼 몇 가지만 물어보겠습니다.”
“그래. 편하게 물어봐.”
“우선 첫 번째로…… 그 테라라는 회사 말입니다. 저도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창업자가 꽤 유명한 인터넷 결제 회사를 차려 돈을 많이 번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맞아. 그 사람이야.”
“굉장히 괴짜에 약간 이상한 정신 상태를 가지고 있는 데다…….”
“언론 플레이를 즐겨 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지?”
한진영이 웃으며 조지훈이 하려던 말을 먼저 하자 속을 뻔히 들여다보는 것 같은 조지훈은 얼굴을 살짝 붉히고 말했다.
“네. 맞습니다. 좋게 봐서 언론 플레이를 즐겨 한다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사기꾼 기질이 다분하지. 맞아. 누가 봐도 사기꾼처럼 보이는 건 맞는 말이야.”
너무나 태연하게 동의하는 한진영의 말에 조지훈은 놀란 눈으로 한진영을 돌아보고 물었다.
“그런데도 그런 사람하고 거래하는 걸 추천하신 건가요?”
“어. 오너 리스크가 분명 존재하고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게 사실이야. 하지만 어쨌든 시장의 패러다임을 바꿨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이야기야.”
한진영은 차분한 목소리로 지난 시절을 떠올리며 이야기했다.
“이런 모습이 테라에게는 득보다는 실이 많을 거야. 그러나 이런 모습에도 불구하고 테라는 시장 개척자의 위치에 있고 앞으로 성장할 가능성도 무궁무진해. 그래서 추천한 거야. 우리는 그렇게 성장하여 하늘로 날아오르는 테라의 등에 올라타 앉아 있기만 하면 돼. 그 이후의 문제는 그 이후에 생각해도 되니까.”
너무나 현실적인 말이었다.
안 좋아 보이고 꺼림칙하다고 하여 승천이 뻔히 보이는 회사를 억지로 깎아내릴 필요는 없었다.
그냥 그 위에 올라타고 승천할 때 같이 올라가 이후에 판단해도 늦지 않을 일이었다.
조지훈은 돈에서만큼은 냉철하다 못해 차가운 느낌까지 드는 한진영의 말에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다.
그리고 그런 그가 왜 대한정유에 추천하는 것으로 끝을 내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대표님. 그렇다면 우리가 직접 테라에 투자를 할 수도 있는 일 아닙니까? 그렇게 좋은 회사라면 거래처로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투자하여 지분을 확보하는 것은 어떨까요?”
비서의 자리에 앉아 하기에는 선을 넘는 발언이었다.
그러나 한진영은 그런 조지훈의 생각을 막지 않았다.
단순히 조지훈을 서류나 나르고 일정만 잡는 존재로 자기 옆에 데리고 온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의견을 나누는 것도 조지훈의 할 일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 한진영이었다.
한진영은 조지훈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래. 그게 가장 좋은 일이기는 하지. 그리고 안 그래도 지분 투자를 고려하고 있어. 하지만 그래 봤자 100억 단위를 넘기지 못해. 그 이상을 투자할 수는 없어.”
“100억 단위 이상을 투자하지 못한다고요?”
“그래. 태평양 건너의 이름도 생소한 나라의 듣지도 보지도 못한 자산운용사가 투자하겠다고 하면 테라가 받아줄까? 자기네들 지분을 넘기면서 투자를 유치해야 하는데 대한민국의 세이지 자산운용사라는 곳을 받아들이겠어? 그럴 가능성은 없어. 그러니 현실적으로 접근해야지.”
한진영은 고개를 돌려 창문 밖을 바라보며 계속 이야기했다.
“큰돈은 큰돈에 맞는 역할을 수행하면 되고 작은 돈은 또 그 작은 돈에 어울리는 일을 하면 돼. 지분 획득은 소액으로 꾸준히 하면 될 일이야. 한 번에 큰돈을 집어넣기에는 테라라는 회사가 아직은 작아.”
한진영은 앞으로 테라라는 회사가 몇 차례의 굴곡을 겪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무리하면서까지 테라의 지분을 획득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내용을 모두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그저 그럴듯한 내용으로 이유를 만들어 지분 투자를 할 수 없음을 이야기한 것이었고, 조지훈은 그런 한진영의 말에 수긍한 듯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대부분의 의문이 해소된 조지훈은 마지막 질문을 한진영에게 건넸다.
“대표님. 그럼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그래. 해봐.”
“3,000억을 대한정유 배터리 사업에 투자하신다고 하셨는데…… 그 돈은 어디서 나는 건가요? 혹시 다른 곳에서 투자를 받아 들어가는 건가요?”
차가 회사 근처에 도착하자 조지훈은 잠시 속도를 늦추고 길가에 차를 댔다.
그리고 몸을 돌려 한진영을 바라봤다.
앞에 질문들은 어쩌면 어떤 대답이 나오건 크게 상관이 없는 것들이었다.
한진영이 어련히 알아서 잘하지 않았겠냐는 생각으로 넘길만한 이야기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질문은 달랐다.
한진영과 세이지가 직접 연관이 되어 있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3,000억이라는 돈이 어디서 나와서 투자를 하겠다고 한 것인지 그게 궁금하다는 말이지? 조 비서가 보기에 나는 물론이고 세이지에 도저히 3,000억이라는 돈이 있어 보이지가 않는데 말이야.”
“네. 솔직히 그렇습니다.”
한진영의 말에 솔직히 대답한 조지훈은 도저히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한진영에게 계속 이야기했다.
“3,000억이 끝이 아니라 2차, 3차 투자도 계속 이어진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첫 번째 투자금을 뛰어넘거나 최소한 그와 비슷한 금액을 투자한다는 이야기인데…… 우리에게 그만한 돈이 있나요?”
“없지. 지금 당장은.”
“그래서 떠올린 게 다른 곳에서 투자를 받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한 겁니다. 하지만…….”
“하지만 그렇다면 그건 우리의 투자라고 볼 수가 없지. 수수료를 받고 중개를 해줬다는 편이 더 어울리는 말이지.”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조지훈도 이와 같은 의문 때문에 차까지 세우고 한진영을 돌아보고 물었던 것이었다.
한진영은 커다란 눈을 끔벅이는 조지훈을 향해 말했다.
“지금은 없지만, 앞으로는 생길 거야.”
“앞으로요? 앞으로 어떻게 말입니까?”
“어떻게는 뭘 어떻게야? 빨리 가서 돈 벌어야 한다는 이야기지.”
“네?”
당황스러운 한진영의 대답에 조지훈이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계속 눈만 끔벅거리자 한진영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킨 뒤 말했다.
“그러니까 어서 가자. 3,000억 투자자금을 마련하려면 한시가 아까운 상황이니까.”
“3,000억을…… 지금 가서 버신다고요?”
“왜? 못할 것 같아서 그래?”
“아니요. 그런 건 아니지만…… 진심이십니까?”
“그럼 내가 농담하는 것 같아?”
한진영은 조지훈을 향해 크게 웃었다.
“하하하. 이거 내가 아직도 지훈이 너한테 신뢰가 부족한 것 같아.”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너무 당황스러운 말씀을 하셔서 놀란 것뿐입니다.”
“놀랄 것도 많다. 어서 가. 네가 이렇게 시간을 허비하는 사이 내가 3,000억을 벌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앞으로 3,000억 벌어서 투자한다는 말이 농담처럼 느껴졌겠지만 한진영은 달랐다.
정말로 그라면 주머니에 땡전 한 푼 없어도 어떻게든 3,000억을 만들 것만 같았다.
조지훈은 3,000억 만들기 프로젝트에 자기가 걸림돌이 되지 않으려 계속 질문하던 입도 꾹 눌러 닫은 채 운전대를 잡고 운전만 했다.
***
유가의 하락은 멈출 기세가 없는 듯했다.
100달러를 깨트린 뒤에 한 달간 계속 떨어진 유가는 결국 90달러마저 깨버리며 기어코 앞자리 8을 보고야 말았다.
산업은 저유가에 환호하던 것을 넘어 혹시라도 저유가가 산업을 망가뜨리는 것이 아니냐는 걱정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걱정은 결국 시장을 먼저 예측하여 이야기한 최석영을 다시 방송사로 부르게 만들었다.
“최 차장님. 이렇게 또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네. 저도 반갑습니다.”
지난 토론 때와 달리 이번에는 최석영만을 불러 특별 대담형식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최석영은 1인용 소파에 편하게 앉아 카메라를 보고 웃었다.
“우리 중에 저 양반이 제일 출세한 것 같아.”
이성우가 마카디아를 입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의 손에 들려 있는 마카디아를 빼서 먹으며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성공은 네가 제일 했지. 기풍증권의 사장에 돈도 엄청 벌고…… 내 말이 틀렸냐?”
“그래도 대중적으로는 최 차장님이 더 알려졌지. 저 양반 팬클럽도 생겼다며?”
이성우의 말에 한진영이 웃음을 참지 못하게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나도 정말 예상 밖이었다.”
“아니. 뭔 연예인도 아닌데 팬클럽이 생겨?”
“잘 맞추니까.”
“그거야 다 네 덕분이잖아.”
한진영은 이성우의 말에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얼굴로 이성우 손에 들려 있는 마카디아를 한 움큼 집었다.
이성우는 몇 번 집어 먹지도 않았는데 벌써 바닥을 드러내는 마카디아를 내려다보고는 울상을 지었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를 못 본 척 최석영이 나오는 화면을 바라보며 마카디아를 입에 넣었다.
“누구 덕분이건 최 차장님은 최 차장님의 역할을 잘 수행하기만 하면 돼. 지금은 나와 세이지를 대신해서 화면에 나오는 게 저 양반의 일이니까.”
한진영은 말을 마치고 옆에 놓여있는 뜯지 않은 마카디아 봉지를 이성우에게 건넸다.
그러자 이성우는 환한 얼굴로 마카디아 봉지를 들고 다시 시선을 화면으로 돌렸다.
화면에서는 진행자와 최석영이 짧게 지난 시간을 리뷰했다.
리뷰 끝자락에 슬며시 진행자가 최석영을 향해 사과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무시하는 것을 막지 못한 것을 사과한 것이었다.
지난 방송과 최근의 유가 움직임으로 인해 최석영의 위치는 눈에 띄게 올라갔다.
모든 사람이 절대 일어나지 않으리라 예상한 것을 유일하게 예상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최 차장님께서 지난 방송에서 말씀하신 것이 모두 이루어졌습니다. 우선 OPEC 정례회의에서의 추가증산. 100만 배럴의 추가 증산이 결국 이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건 정말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지요. 그리고 이런 영향으로 인해 유가는 결국 100달러를 무너뜨린 것도 모자라 90달러까지도 무너뜨리고 말았습니다. 최 차장님.”
진행자는 몸을 돌려 최석영 쪽을 바라보고 물었다.
“결국 8이라는 숫자를 보고 말았는데…… 앞으로 시장은 어떻게 흘러갈 것으로 보십니까?”
진행자의 질문에 최석영은 편안한 자세로 앉아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하고 말했다.
“제가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듯이 이건 헤게모니 싸움입니다. 중동과 미국의 오일을 놓고 벌이는 싸움. 이게 바로 지금 싸움을 벌이는 이유입니다.”
잠시 말을 멈춘 최석영은 카메라를 노려봤다.
이성우는 그런 최석영의 모습에 감탄사를 내뱉었다.
“캬~ 저 양반 저거 연습하고 나간 거냐?”
“그건 왜 물어?”
한진영이 마카디아를 집어 입에 넣으며 물었다.
이성우는 한진영이 마카디아를 먹든지 말든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최석영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거울 보고 연습한 게 아니면 저런 표정이 나올 수가 없으니까. 배우 뺨치겠는데? 완전 메소드급 연기야. 저 양반 이제는 완전히 즐기는 것 같아.”
이성우의 감탄이 끝날 때쯤 마치 듣기라도 한 듯이 최석영이 입을 열어 계속 이야기했다.
“하지만 기존의 헤게모니 싸움과 지금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 있습니다. 과거 반도체 싸움과 같이 한쪽을 완전히 말려 죽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라 간의 대결이라서 그런 것인가요?”
“그것도 맞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중동은 미국의 좋은 무기 수입국이며 미국은 중동의 든든한 버팀목이라는 사실이 그들을 끝까지 몰아넣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이성우가 한진영을 돌아보고 진행자와 같은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되는 거야?”
한진영은 이성우의 질문에 이성우의 손에 들려 있는 마카디아 봉지를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뒤에 서 있는 조지훈을 향해 지시했다.
“30분 뒤에 각 팀장들 회의실로 모이라고 해.”
한진영은 말을 마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여전히 앉은 채로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이성우의 등을 두드렸다.
“너도 이제 그만 일어나서 집에 가. 이 시간까지 남의 회사에서 뭐 하는 거냐?”
이성우는 한진영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대답을 듣지 못해서 그런 것인지 이성우의 표정에는 개운하지 못한 찝찝함이 남아있었다.
한진영은 이성우의 등을 다시 두드리며 말했다.
“어떻게 되는지 나한테 듣지 말고 화면에서 최 차장님에게 들어. 그게 곧 내 생각이니까.”
한진영의 말에 이성우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서는 최석영이 한창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그런 이유로 이 싸움은 지루하게 계속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루하게 계속된다면…….”
“네. 생각하시는 그대로입니다. 유가는 앞으로도 한동안 계속 하향세를 타고 내려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싸움은 계속되지만 서로 확실하게 죽일 수 없으니 추세만 유지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어디까지 빠질 거로 예상하시는 건가요?”
진행자의 질문에 최석영이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정확히 어디에서 멈출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그저 제가 예상하기에는…… 생각보다 깊은 하락까지 염두에 둬야 한다는 것 정도만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성우가 최석영의 말에 한진영을 돌아봤다.
한진영이라면 답을 알고 있을 것으로 생각됐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