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화 사실은 우리 돈이 아니다
한진영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안에서 먼저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한진영을 향해 인사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유명하신 세이지 자산운용의 대표님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들 중의 대표로 보인 사람이 먼저 한진영을 향해 인사했다.
한진영은 과하게 느껴지는 인사에 가볍게 웃었다.
“제가 유명하던가요?”
“그럼요. 지금 미국에서도 세이지 자산운용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렴 그리니치 펀드만 하겠습니까? 하하하. 그래도 인사로라도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네요.”
“아닙니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유명합니다.”
그리니치 펀드의 롭 코든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세이지 자산운용의 놀랄만한 실적은 이미 월가에서도 화제입니다.”
“월가에서 화제라고요? 하하하.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그렇게 띄워주시면 저는 진짜라고 믿습니다.”
“진짜입니다.”
“알겠습니다. 앉아서 이야기하시지요.”
기분 좋게 웃는 한진영의 모습에 롭 코든도 같이 웃었다.
첫인상에서 좋은 모습을 건넸다는 느낌이 들어 앞으로 이야기를 잘 진행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롭 코든이었다.
한진영은 네 사람이 자리에 앉는 것을 확인한 후 롭 코든을 향해 말을 건넸다.
“그리니치 펀드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그리니치 펀드의 경이로운 수익률 앞에 경건한 마음마저 들 정도입니다.”
“아무렴 세이지 자산운용만 하겠습니까? 저희야 세이지에 비하면 미미한 수익률일 뿐이지요.”
“아닙니다. 한두 해 반짝하고 수익률을 올린 곳은 많아도 이렇게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꾸준히 좋은 성적을 보인 곳은 드물지 않습니까? 이런 수익률은 월가에서도 매우 드문 경우라고 하던데 아닙니까?”
롭 코든이 한진영과 세이지 자산운용을 띄워주기 전에 먼저 한진영이 나서서 그리니치 펀드를 띄워줬다.
롭 코든은 선수를 빼앗겼지만 기분 나쁘지 않은 칭찬에 얼굴에 웃음이 피어오르는 것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뭐 특이한 경우기는 하지요. 그만큼 저희 펀드가 잘 설계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대표이신 버나드 헤이워드 ‘의장’님의 탁월한 능력 덕분 아니겠습니까?”
“맞습니다. 역시 한 대표님은 잘 알고 계시는군요. 그렇습니다. 저희 헤이워드 ‘의장’님께서는 수십 년 동안 업계에 몸담고 계시면서 뛰어난 혜안으로 시장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위험도 많이 회피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 서브프라임 사태와 같은 위기 상황에서도 저희 그리니치 펀드만큼은 마이너스 수익률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한진영의 띄워주는 말에 롭 코든이 신이 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특히 그리니치 펀드의 수장인 버나드 헤이워드를 ‘의장’으로 부른 것에 롭 코든의 얼굴을 빨갛게 상기되기까지 했다.
버나드 헤이워드는 1년 임기의 나스닥 증권거래소 의장을 3번이나 역임한 인물이었다.
1번만 해도 업계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자리를 3번이나 한 것에 현재 월가의 가장 뛰어난 명성을 지닌 인물이 버나드 헤이워드임을 잘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것을 헤이워드가 자랑스러워하며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서서 드러내기를 즐겨 했다.
아무도 하지 못한 것을 해낸 것에 자부심이 대단한 헤이워드였다.
그래서 헤이워드의 직원들 또한 다른 사람들을 만났을 때 이 부분을 강조하고는 했다.
실제로 이 부분을 강조하면 일 처리를 할 때 꽤 많은 도움을 받았다.
나스닥 증권거래소 의장이라는 자리가 헤이워드와 그리니치 펀드가 하려는 일에 발판을 잘 만들어 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부분을 롭 코든이 말하기 전에 먼저 한진영이 나서서 이야기함으로써 이야기를 풀어갈 수 있게 길을 닦아줬다.
롭 코든은 오늘 자리가 수월하게 진행될 거라는 예상하며 입을 열었다.
“저희 펀드는 월가의 그 어떤 펀드보다 안정적이며 높은 수익률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저희 세이지 자산운용도 그리니치 펀드를 롤 모델로 삼아 앞으로 10년 뒤에 그리니치 펀드가 받는 평가의 반만이라도 받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끝나지 않은 칭찬에 롭 코든은 환하게 웃으며 한진영을 향해 말했다.
“제가 오늘 이곳에 온 이유가 궁금하지 않습니까?”
“아 이야기를 너무 재미있게 하다 보니 그걸 잊었군요. 어쩐 일로 저희를 찾으신 겁니까?”
주인이 묻기 전에 손님이 먼저 자기가 온 이유를 이야기하려 했다.
한진영은 이제 됐다는 마음으로 당겨 앉았던 의자와 몸을 살포시 뒤로 밀었다.
그리고 멀어진 만큼 롭 코든이 한진영을 향해 다가가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희를 따라잡으려 하시기보다 저희와 함께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따라잡기보다 함께하자?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롭 코든은 조금 더 몸을 당겨 앉으며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그리니치 펀드에 재투자하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재투자요?”
“네. 재투자 말입니다. 고객들에게 투자받은 돈을 저희에게 맡기면 연 10%의 수익을 보장하겠습니다.”
“흐음~”
한진영은 뒤로 물러나 앉은 채로 팔짱을 꼈다.
한진영이 기대했던 말을 롭 코든이 꺼낸 것에 한진영이 잠시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롭 코든은 한진영이 깊은 한숨과 함께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자 다른 투자사들이 그리니치 펀드에 투자했던 사례들을 열거했다.
“플라이 캐피털매니지먼트가 그리니치 펀드에 30억 달러를 투자한 이야기를 들어보셨나요?”
“플라이 캐피털매니지먼트가 그렇게나 많은 돈을 투자했습니까?”
“그뿐이 아닙니다. 페어필드 투자자문의 경우에는 80억 달러를 얼마 전에 투자했습니다.”
“80억 달러나요?”
“네. 이렇게 투자사들만 투자한 게 아닙니다. 유명한 영화감독부터 시작해서 유력 정치인은 물론이고 스페인의 최대 은행인 산탄데르도 저희 쪽에 30억 달러를 투자했습니다.”
“허허.”
한진영이 놀랍다는 표정을 짓자 롭 코든이 곁에 앉아 있는 직원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직원은 기다렸다는 듯이 롭 코든의 손에 서류를 얹어줬다.
롭 코든은 서류를 한진영 쪽으로 내밀며 말했다.
“이게 주요 고객들의 명단입니다.”
한진영은 서류를 건네받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걸 이렇게 선뜻 저희에게 보여주셔도 괜찮으십니까?”
“고객 명단을 외부에 알리는 건 금해야 할 일이지요. 하지만 좋은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서 저희는 고객 명단을 적극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분들이 모두 함께 그리니치 펀드를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저희는 그걸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진영은 롭 코든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서류에 나와 있는 명단들을 훑어봤다.
‘익숙한 이름들이네.’
그리니치 펀드가 파산하며 외부에 드러났던 명단이 그대로 서류상에 쓰여있었다.
‘역시 외부로 드러난 숫자는 축소된 금액이었구나. 아니면 그리니치가 뻥튀기했던가.’
국내 유명 생명보험사의 경우 그리니치 펀드가 파산하며 위험에 노출된 금액이 5,000만 달러라고 이야기됐었다.
그러나 서류 속에 적혀있던 금액은 1억 달러였다.
2배나 많은 금액이 그리니치에 들어가 있는 상태라는 것을 서류가 잘 보여주고 있었다.
한진영은 보던 것을 멈추고 서류를 덮으며 말했다.
“대단하군요. 우리나라의 여러 회사도 고객으로 확보하신 것 같습니다.”
“네. 그렇지요. 보셔서 아시겠지만, 대한민국의 여러 자산운용사가 저희의 고객입니다.”
“흐음~ 그런데…….”
한진영이 짧은 신음과 함께 ‘그런데’라는 말을 꺼내자 롭 코든은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이야기가 잘 이어졌다고 생각했는데 한진영의 ‘그런데’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롭 코든이었다.
“혹시 뭐 마음에 들지 않는 거라도 있습니까?”
“아니요. 뭐 그것보다는…… 혹시 수익률을 더 높일 수는 없습니까?”
롭 코든은 한진영의 말에 안심하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게 궁금하셨군요.”
“네. 연 10%가 매력적인 수익률이고…… 복리로 계산한다면 시간이 흐른 뒤 엄청난 수익을 안겨줄 거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사실 아시다시피 사람의 욕심이란 게 끝이 없으니까요. 그리고 고객 명단을 봤을 때 여기, 여기는 연수익률 10%에 만족하는 곳들이 아닌 것 같아서요.”
한진영이 덮었던 명단을 다시 펴들고 헤지펀드 몇 군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곳들은 설립 목적 자체가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을 지향하는 곳이었기에 연수익률 10%에 만족 못 할 곳이 분명한 곳이었다.
롭 코든은 한진영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을 내려다보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런 의문을 가지실 만합니다. 잠시 저희끼리 이야기를 나눠도 괜찮겠습니까?”
“네. 그러시지요.”
한진영이 허락하자 롭 코든은 감사의 인사를 건넨 후 함께 온 변호사와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나눴다.
손으로 입을 가리고 몇 마디 대화를 나눈 롭 코든은 자세를 다시 고쳐 앉고 한진영을 향해 말했다.
“방법이 있습니다.”
“10% 이상의 수익률을 보장하는 방법이 있다고요?”
“네. 있습니다. 조건은 간단합니다. 수익을 포기하신 기간만큼 더 큰 수익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롭 코든이 말을 하며 곁에 있던 직원에게 손을 내밀자 곁에 있던 직원이 서류 한 장을 롭 코든의 손 위에 얹어줬다.
롭 코든은 그 서류를 한진영 앞에 내려놓고 말했다.
“서류에 자세히 적혀 있습니다. 보시겠습니까?”
한진영이 고개를 끄덕이고 서류를 가지고 왔다.
그 속에 담겨 있는 내용은 간단했다.
조금 전 롭 코든의 말처럼 수익을 포기하는 기간이 길면 길수록 더 큰 수익을 보장한다는 내용이었다.
1년을 포기한다면 다음 해에 그 전해의 포기 분에 가중치를 더 해 30%가 넘는 수익을 2년 차에 주겠다는 것이었다.
2년을 포기하면 60%, 3년을 포기하면 100%의 수익을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파격적이다 못해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의 수익률에 한진영은 웃고 말았다.
“혹시나 해서 여쭤본 건데, 정말 있었군요.”
“이 계약의 경우에는 계약이 조금 복잡합니다. 아무래도 받지 않겠다고 해놓고 나중에 다른 이야기를 할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계약서를 써야 할 게 조금 많아집니다. 하지만 많은 고객이 가입한 방법의 하나입니다. 당장 돈이 필요하지 않다면 이 방법만큼 수익을 올려주는 확실한 방법은 없으니까요.”
“그렇군요.”
한진영은 롭 코든의 말에 살며시 웃었다.
‘폰지 사기가 다 그렇지. 지금 당장 한 푼이라도 덜 줄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을 못 하겠어. 30%가 아니라 300%를 나중에 주겠다고 하고도 남을 거다.’
어차피 안 줄 돈이니 30%나 300%나 3,000%나 그리니치 펀드 입장에서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이런 조건을 만든 것이었고, 이야기가 나온 참에 한진영에게 이것의 장점을 장황하게 이야기하며 이쪽으로 가입하기를 유도했다.
“명단에 보셨던 헐리우드의 유명 영화배우나 감독분들은 다 이런 방식으로 가입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프랑스의 은행과 미국의 은행 몇 군데도 이 방식을 채택했습니다. 1년만 건너뛰어도 얻는 수익이 엄청나니까요.”
한진영은 롭 코든의 의도가 뻔히 눈에 보이는데도 모르는 척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롭 코든은 그런 한진영을 향해 살짝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기왕에 먼저 물어보셨으니 말씀드리지만, 이 방법을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이 방법을 쓰신다면…….”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
한창 분위기를 타고 말을 하고 있던 롭 코든의 말을 중간에 끊은 한진영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제가 그리니치 펀드를 흠모하고 있다는 건 대화하며 아셨을 겁니다.”
롭 코든은 갑자기 말을 끊은 뒤에 흠모한다는 이야기하는 한진영의 모습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마치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는 듯한 그의 모습에 롭 코든은 우선 한진영의 말을 듣기로 결정했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도 꼭 그리니치 펀드와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잘 됐군요. 그러면…….”
“그런데 아쉽게도 지금은 저희가 그럴 여력이 없습니다.”
“여력이 없다니요? 실버만삭스 계좌가 세이지 거라는 게 이미 밝혀졌지 않았습니까? 6억 달러가 되는 돈이…….”
롭 코든은 돈이 없다는 말에 흥분한 말투로 한진영을 향해 말하다 급히 입을 다물었다.
자칫 6억 달러라는 돈 때문에 세이지 자산운용에 득달같이 달려든 것처럼 비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이 그랬다.
지금 전세계에서 가장 현금을 가장 많이 들고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곳이 바로 세이지 자산운용이었다.
그리고 그런 세이지 자산운용에 영업을 펼쳐 이번에 번 6억 달러의 전부 혹은 일부라도 그리니치 펀드 쪽으로 흡수하기 위해 이렇게 득달같이 달려온 것이었다.
한진영은 말을 멈추고 속마음을 숨기려는 롭 코든을 보고 속으로 비웃음을 흘렸다.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이곳에 그리니치 펀드 사람이 찾아온다는 것부터 시작하여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이곳에 왔는지 한진영은 모두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시절 이맘때 그들이 대한민국을 어떻게 쓸고 갔고,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조차 다 경험한 한진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채 아쉽다는 말투로 롭 코든을 향해 말했다.
“외부에 알려지긴 그렇게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저희 돈이 아닙니다.”
“세이지 돈이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그 오일 인버스에 투자한 자금이요?”
“네. 고객이 따로 있습니다.”
“그 고객이 누굽니까?”
한진영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 계속 이야기했다.
“알려드릴 수는 있는데 알려드린다고 해도 그리니치 펀드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으실 겁니다.”
“그건 모르는 일 아닙니까? 혹 무슨 다른 이유라도 있는 겁니까?”
“네. 아시겠지만 이번에 꽤 큰 이득을 봄으로써 저희 고객은 목표한 자금을 다 맞추었거든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꼭 돈이 필요한 곳의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무리를 하는 한이 있어도 돈을 벌고 싶어 하셨죠.”
롭 코든의 눈이 빛이 났다.
돈이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말이 그의 마음에 쏙 들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그런 롭 코든이 제일 듣고 싶어 하던 말을 하기 시작했다.
“기풍철강. 지금 기풍철강의 분들이 돈이 제일 급한 분들이시죠. 그래서…… 한 분이 저희에게 부탁했고, 운 좋게 성공하게 됐습니다.”
한진영은 말을 마치고 웃으며 롭 코든을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