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화 가볍게 구경이나 하는 자리
한진영이 조지훈에게 사채시장을 알아보라고 한데는 외부로 알려진 이유정 본부장의 투자액이 생각보다 작기 때문이었다.
절대적으로 본다면 500억이라는 자금이 결코 적은 금액은 아니었다.
그러나 세이지 자산운용이 획득한 기풍홀딩스의 지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500억 가지고는 무리가 있었다.
그리니치 펀드의 막강한 수익률이 있더라도 1,000억에 가까운 자본이 있어야 세이지 자산운용이 확보한 기풍홀딩스 자산을 온전히 넘겨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진영은 1~200억. 무리한다면 3~400억까지 사채시장을 통해 돈을 융통했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 정도까지가 이유정 본부장이 융통할 수 있는 자금의 한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유정 본부장의 배포는 한진영의 생각을 까마득히 넘어섰다.
“사채시장을 통해 1,000억을 확보했다고?”
한진영의 질문에 조지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답했다.
“네. 이미 세 군데에서 확보한 게 1,000억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두 곳과는 그리니치 펀드에 들어가기 위한 알선 명목으로 접촉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알선이라? 그리니치 펀드를 주선해주고 주선비를 받겠다 이건가?”
“비슷한데 그것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포섭한 것 같습니다.”
“어떤 방식?”
“그리니치 펀드에 들어가게 해주는 조건으로 수익 발생 시에 절반을 달라고 했답니다.”
“하하하.”
한진영은 조지훈의 말에 큰소리로 웃었다.
보지 않아도 이유정 본부장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똥줄이 탔나 보구나.”
“그런 것 같습니다. 손해가 발생한다면 모두 자기가 짊어지겠다고 약속했다고 하니 한 푼이라도 돈을 더 벌기 위해 안달이 난 것 같습니다.”
“이유정 본부장이 이렇게 안달이 난 것을 보니까 그리니치도 평범한 제안을 한 것 같지 않은데? 우리가 모르는 뭐 다른 약속을 한 거 아냐?”
“역시 대표님께서는 단숨에 눈치를 채셨군요.”
조지훈은 한진영을 새삼스럽지만 대단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단순한 조각의 정보만으로도 다음 단계의 퍼즐을 예상해내는 한진영의 능력에 조지훈은 감탄했다.
“맞습니다. 이유정 본부장에게만 특약을 걸었다고 합니다. 1년 동안 거치를 한다면 1년 뒤에 50%의 수익을 약속한다는 특약인데…… 이게 가능한가요? 1년 수익 50% 보장이라니…….”
보고하는 조지훈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연신 갸웃거렸다.
50%의 수익을 보장한다는 것이 아무리 봐도 이상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그런 조지훈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상식적으로 접근하면 당연히 말이 안 되지. 그런데 내가 그리니치 펀드가 뭐라고 했지?”
“폰지 사기요?”
“그래. 폰지 사기. 그런데 뭘 그렇게 상식적으로 생각하려고 해? 말이 안 되는 게 당연한데.”
“그리니치야 그렇다고 해도 이유정 본부장은…….”
“사기당하는 사람에게도 상식을 따지면 안 되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게 가능했다면 사기에 당했겠어?”
한진영은 가볍게 웃고는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1년 거치에 50%를 보장했다면 펀드가 생각보다 더욱 심각하다는 이야기인데…….”
한진영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
유가가 40달러대까지 빠져 내려가자 셰일 업체만 곡소리를 내뱉는 것이 아니었다.
관련 사업을 영위하고 있는 업체부터 시작해서 업계 종사자들 그리고 금융시장까지 곡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유가 시장은 금융시장의 큰 축을 담당하는 곳이었다.
오일 선물은 활발하게 거래되는 원자재 시장이었으며, 관련 상품들은 주류에 편입되어 있을 정도였다.
이런 곳이 주저앉아 버리자 여러 곳에서 신음이 들려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정유업체들 정제마진 폭락으로 비상 경영체제 돌입]
[영국의 스탠다드차타드 원유 선물로 20억 달러 손실 발생]
[카타르 정부 OPEC 회원국에 감산 제안, 사우디 측 즉각 거절]
[러시아, 원유 생산국이 적절한 결정을 하지 못할 시에 모두 파산 가능성 열려있다 발언]
원유의 폭락은 사회적인 현상으로 점점 번져 나갔다.
이성우는 마치 세이지 자산운용의 대표실이 마치 자기 사무실인 것처럼 편안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왜 퇴근도 하지 않고 회사에서 죽치고 있냐?”
“그러는 너야말로 퇴근했으면 집에 좀 가라. 왜 남의 회사에 와 있는 건데?”
“네가 퇴근 안 했으니까 온 거지. 집에 안 갈 거야?”
“난 오늘 안 간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너나 가라. 정신 사납게 왜 남의 사무실 와서 이러고 있어?”
한진영의 타박에도 이성우는 전혀 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소파에 눕듯이 앉아 문 앞에 서 있는 조지훈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조 비서 월급 좀 잘 챙겨줘라. 못 본 사이에 얼굴이 반쪽이 됐어.”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말뿐이 아니야. 너 얼굴이 영~ 아니야. 한 대표에게 보약이라도 하나 지어달라고 그래.”
조지훈을 바라보고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은 이성우를 한진영은 한심스럽게 쳐다봤다.
“야.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는 아냐?”
“어? 보자 오늘이…… 목요일. 근데? 그게 왜?”
“너하고 나하고 만나서 술 마신 게 언제야?”
“그건…….”
이성우가 앉아서 손을 꼽았다.
그러더니 고개를 들어 웃으며 말했다.
“수요일에 만났네.”
“그래. 어제 만나서 술 한잔했던 건 기억나냐? 그 자리에 쟤도 있었어. 그런데 뭐가 못 본 사이에 얼굴이 반쪽이 됐다고 그래?”
“아니야. 진짜 반쪽 됐어.”
이성우는 과자를 손에 들어 연신 입에 집어넣으며 계속 이야기했다.
“어제는 어두운 곳에 있어서 얼굴을 자세히 보지 못해서 몰랐는데 오늘은 밝은 데 있으니까 확실히 알겠다. 얼굴이 많이 갔어. 저~기로 갔어.”
한진영은 이성우의 말에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래 어제는 어두워서 못 봤다고 치고…… 월요일 우리 회사에 놀러 와서 지금 앉아 있는 거기. 그 자리에 앉아 있었던 건 기억하긴 하냐?”
“그래? 그게 월요일이었어? 나는 몇 주 된 줄 알았는데?”
이성우는 조지훈을 돌아보고는 진짜냐는 얼굴로 눈을 찡긋거렸다.
조지훈은 그런 이성우의 표정에 한 번 웃어 보인 후 한진영을 향해 말했다.
“회의실에 준비해 놨습니다.”
“그래. 수고했어.”
한진영은 이성우와 더는 쓸모없는 대화를 하기 싫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성우는 과자봉지를 든 채로 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를 슬쩍 돌아봤다.
“그래. 잘 생각했다. 이제 그만 가라.”
“아니. 안 갈 건데.”
“그러면 왜 일어났어?”
“회의실에 준비가 됐다며? 그럼 가야지. 가자 조 비서.”
이성우가 마치 자기가 세이지 자산운용의 대표라도 된 듯이 앞서 걸어 나갔다.
조지훈은 그런 이성우의 모습에 머뭇거리다 한진영의 표정을 살폈다.
한진영은 웃으며 조지훈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렸다.
“가자.”
한진영이 앞서 나가자 조지훈이 셋 중 가장 마지막으로 회의실로 향했다.
세이지 자산운용의 다른 곳들은 모두 비어 있었다.
천장에 붙어 있는 형광등만이 드문드문 켜져 어둠을 밝힐 뿐이었다.
“어이구. 최 과장님도 있었어요?”
“이 사장. 이 사장하고 같이 일할 때보다 지금 더 자주 보는 것 같아. 이 사장은 안 바빠?”
“바쁘죠. 바쁘니까 이렇게 일 끝난 뒤에 온 거죠. 안 바빴으면 해지기 전에 왔겠죠.”
이성우는 최석영의 말을 가볍게 받아넘긴 뒤 김준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준하야. 오랜만이다.”
이성우는 김준하에게 달려가 와락 껴안았다.
“저기…… 월요일에도 봤는데…….”
“그러니까 오랜만이라는 거지. 벌써 일주일이나 못 봤잖아.”
“일주일 아닌데…… 이틀 못 보고 본 건데…….”
김준하는 이성우의 품에 안겨 얼버무렸다.
이성우는 김준하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고는 바로 홍대민에게로 다가갔다.
“잘 지내셨어요?”
“아 네. 이성우 사장님이야말로…… 자주 뵙네요.”
“네. 편하게 계세요. 편하게…… 자 다들 앉도록 합시다.”
홍대민은 이성우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다.
아무리 한진영과 이성우가 친구 사이에 바닥부터 같이 일한 사이라지만 어떻게 이렇게 가까운 것인지 이해가 안 갔기 때문이다.
물론 자기를 제외한 오늘 회의실에 있는 직원들만 해도 대부분 기풍증권 소속이었던 것을 떠올린다면 이성우가 편하게 대한다는 것이 이해되기는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업무시간이 끝난 뒤 은밀히(?) 이루어진 자리에 태연하게 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게 신기하게만 느껴진 홍대민이었다.
이성우가 한바탕 사람들과 인사를 모두 마쳤을 때 한진영과 조지훈이 회의실로 들어왔다.
한진영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향해 눈인사를 건넨 후 자리에 앉았다.
조지훈이 앞으로 가 화면을 세팅하는 사이 한진영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오늘 이렇게 여러분들과 시간을 보내자고 한 건 특별한 광경을 함께 지켜보기 위함입니다.”
“특별한 광경이요?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홍대민이 한진영을 향해 묻자 한진영이 박도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박 팀장님이 대신 말씀해주시겠습니까?”
한진영의 지시에 박도하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향해 간단하게 오늘 자리가 만들어진 이유를 이야기했다.
“약 2주 전부터 주식시장에 특이점이 발견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판매한 HFT 프로그램의 거래량이 급격하게 올라간 것입니다.”
박도하는 잠시 말을 멈추고 조지훈 쪽을 바라봤다.
조지훈이 모든 세팅이 마무리됐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박도하가 화면을 손으로 가리키고 말했다.
“조 비서님이 준비됐다고 하니 화면을 보시죠.”
박도하의 말이 끝나자 화면에서는 그래프 몇 가지가 그려졌다.
그리고 그래프 중간에 표시된 동그라미를 가리키고 말했다.
“몇몇 지점에서 흔적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보시는 그래프는 지난달 2일 우리나라 시간으로 새벽 2시에 일어난 거래입니다. 평소와 달리 그날에는 새벽 1시부터 거래량이 급격하게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전일 거래량의 6배에 달하는 것으로 이는 우리가 만들었던 HFT 프로그램의 흔적으로 보입니다.”
“우리 프로그램이라는 증거가 있나요?”
이야기 중간에 홍대민이 질문을 던졌다.
“HFT 프로그램은 우리 것 외에도 많이 있지 않습니까?”
“네. 그렇지요.”
“그런데 꼭 저게 우리 거라는 건 당사자 말고는 모르는 것 아닌가요?”
“맞습니다. 시중에 흩어져 있는 HFT 프로그램은 우리 것 말고도 많은 종류의 것들이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저런 흔적만으로 우리 거라는 증거가 되지는 못하지요. 다만…….”
박도하가 조지훈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화면 하나가 더해졌다.
홍대민은 그 화면을 보고 의아한 듯이 박도하를 돌아봤다.
박도하는 그런 홍대민을 한번 쳐다본 후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지금 화면에 떠 있는 그래프가 무엇인지 설명했다.
“우리 프로그램의 경우에는 한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초당 거래량이 천 단위를 넘어가게 되면 10초에 한 번꼴로 거래가 1초간 멈추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건 갑작스럽게 과열되는 것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로 일부러 삽입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특징은 억지로 죽이거나 해제할 수 없도록 조치해 놓았습니다. 억지로 막을 수 있게 된다면 쿨다운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 의미가 없으니까요.”
박도하의 설명을 듣고 나자 왜 거래량이 급격하게 는 것이 박도하 등이 만든 HFT 프로그램 때문이라고 확신한 것인지 알게 됐다.
박도하의 설명대로 급격히 거래량이 늘어났을 때 10초마다 한 번씩 거래가 멈추는 현상이 그래프를 통해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도하는 사람들이 화면을 자세히 살피는 것을 바라보며 계속 이야기했다.
“이렇게 저희 프로그램을 사간 3사가 프로그램을 급격하게 돌리는 것이 2주 전부터 확인이 됐습니다. 그리고 그 거래량은 점점 빠르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현재 프로그램을 통해 초당 거래하는 횟수는 만 단위를 넘어가고 있습니다.”
“초당 만 단위요?”
가만히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과자를 뜯어 먹던 이성우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이성우는 시선이 자기에게 모여든 것을 확인하고 손을 들어 미안하다는 뜻을 보였다.
세이지 자산운용의 직원들이 이야기하는 자리에 자기가 끼어들어 미안하다는 제스처였다.
“괜찮아. 뭐 회의하는 자리가 아니라 가볍게 구경이나 하자가 만든 자리니까. 그렇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한진영이 나서서 이성우에게 괜찮다는 말을 건넨 후 박도하의 말을 이었다.
“뭐 초당 만 단위의 계약을 하더라도 한군데만 하게 된다면 문제가 될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프로그램을 사간 곳이 세 군데라는 것이죠. 그리고 점점 거래량이 늘어가는 것이 아무래도 우리 프로그램을 개조하여 거래 속도를 더욱 끌어 올린 것 같습니다.”
“저것만으로도 엄청난 수익을 벌어들이고 있을 텐데…… 거기서 돈을 더 벌겠다고 속도를 더 올린 거라는 말씀인가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 보이는 모습이 그렇네요. 그래서 그걸 다 같이 보고 확인하자는 뜻에서 자리를 마련한 겁니다. 실제로 거래량이 급격히 늘어나는 모습을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있을 테니까요.”
한진영은 잠시 회의실 밖에 불 꺼진 사무실을 바라보고 말했다.
“다른 직원들까지 모두 있으면 무슨 큰일이라도 난 게 아니냐는 생각을 할지 몰라 다른 직원들은 퇴근시킨 겁니다. 그러니 편안한 마음으로 프리미어 축구를 보듯이 즐기도록 하죠. 조 비서.”
한진영이 조지훈을 향해 눈짓을 보내자 조지훈이 기다렸다는 듯이 회의실에서 나가서 차가운 맥주를 가지고 들어왔다.
“오~ 맥주~ 안주는? 오~ 오징어땅콩~ 센스 있네. 그런데 족발하고 보쌈이 부족하다. 지훈아 안주 좀 더 시켜봐.”
이성우는 딱딱했던 분위기가 풀리자 조지훈에게 맥주를 직접 받아 들고는 신난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맥주를 직접 건네주기까지 했다.
“자자. 받으시고…… 준하야. 뭐하냐? 세팅 좀 해봐. 지훈이 혼자 힘들겠다.”
수선을 떨며 마치 동네 친구들을 만난 것처럼 행동하는 이성우를 한진영은 가만히 지켜봤다.
사람의 본성은 권력을 쥐었을 때 나타난다고들 했다.
그런 면에서 이성우는 기풍증권 사장이라는 자리에 올라가서도 시흥지점의 말단 직원이었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한결같은 모습으로 수선을 떨며 한진영의 곁에 있었다.
한진영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짓다가 시선을 돌려 이제 막 시작이 된 미국 시장을 바라봤다.
그리고 오늘 펼쳐질 ‘월가 공포의 20분’이라고 불리는 장면을 기다리며 조지훈이 건넨 캔맥주를 집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