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화 일시불로 사겠다
한참 친구들을 말리던 한진영의 부모님 눈에 한진영이 들어온 듯했다.
한진영의 어머니가 말리던 손을 슬며시 놓고 한진영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진영아.”
“어머니. 아버지. 무슨 일이에요?”
한진영이 주변을 둘러보고는 아버지를 향해 인사하고는 물었다.
아무래도 이런 상황에서는 어머니보다 아버지가 더 차분할 것으로 생각됐기 때문이다.
한진영의 아버지는 가볍게 한진영의 인사를 고갯짓으로 받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지금의 상황을 설명했다.
“발레파킹을 요청했는데 그러지 못하겠다고 하더구나.”
“발레파킹을 하지 못하겠다고 했다고요? 설마…….”
한진영이 의심의 눈초리로 아버지를 바라보자 아버지의 친구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돈 내겠다고 했어. 돈 내겠다는데도 이러니 내가 이렇게 화를 내는 거지. 사람 무시하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내가 달구지라도 타고 왔나 왜 이렇게 무시해?”
“이 친구야. 괜찮아. 내가 그냥 주차하면 돼.”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야.”
아버지의 친구분은 분을 삭이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정당하게 받을 서비스를 거부당한 거에 대해 화를 내는 거야. 저 봐.”
친구분은 말을 하다 말고 뒤에 쫓아 들어오는 차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차 주인이 내리자 호텔 직원이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가 차 키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차에 올라타는 것이 발레파킹을 하는 모습으로 보였다.
“우리 뒤에 온 차는 발레파킹을 해주고 우리는 왜 안 해준다는 건데? 이건 뻔히 눈에 보이는 수작 아니야? 차가 국산 소형차라서 그러는 거 아니냐고?”
“화를 내시는 이유가 정당하시네요. 이건 아저씨 말대로 정당히 받을 서비스를 받지 못한 겁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한진영은 화를 낼 만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호텔 직원을 바라봤다.
회사 직원을 대표하여 다투던 매니저는 누구인데 중간에 끼어들어 이러는 거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매니저의 표정을 보자 한진영의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한진영은 고개를 돌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함께 온 친구분에게 말했다.
“여기는 제가 정리할 테니 올라가서 식사하세요. 아버지 차 키도 저에게 주시고요.”
한진영의 아버지는 한진영과 조지훈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리고 차 키를 곁에 있는 조지훈에게 맡겼다.
“우리 아들이 해결해 준다니까 우리는 올라가세.”
“에이. 천하의 SL호텔이라고 해서 좋은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아. 아들한테 이야기해서 여기서 결혼한다는 거 취소하라고 해야겠어. 어차피 지네들 돈으로 하나? 부모가 대 준 돈으로 결혼식 올리는 건데 뭐 하러 서비스도 별로인 곳에서 결혼하겠어?”
아버지의 친구는 분이 풀리지 않는지 한바탕 소리를 치고 아버지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갔다.
매니저는 그런 아버지 친구분의 뒷모습을 보다가 곁에 있는 직원에게 지시했다.
“도대체 뭐 어디서 결혼식 올린다는지 알아봐. 뭐 하는 사람인지도 알아보고. 아무리 봐도 별것 아닌 것 같은데 혹시 모르니까.”
매니저의 지시를 받은 직원이 알겠다는 대답하고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매니저는 그때까지 가만히 대화를 듣기만 하던 한진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국내 소형차를 타고 온 아버지의 아들이었다.
그 정도면 별 볼 일 없을 것으로 생각한 매니저는 지금 이러고 있는 시간이 아깝게 느껴졌다.
매니저는 한진영을 위아래로 살피며 말했다.
“뭐? 필요한 거 있습니까?”
한진영은 당장에라도 비웃음을 흘릴 것 같은 매니저를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봤다.
그리고 조지훈에게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지시했다.
“아버지 차 주차해놓고 우리 차 좀 끌고 올라와. 어디 좀 다녀오자.”
“네. 알겠습니다.”
조지훈은 들고 있던 차 키로 한진영의 아버지 차에 올라탔다.
매니저는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한진영 아버지의 차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고 마치 한진영에게 들으라는 식으로 혼잣말을 내뱉었다.
“결국 자기 손으로 주차할 거면서 뭘 그렇게 서비스를 운운하는 건지. 하여튼 없는 사람들이 꼭 무언가 떨어지는 게 없나 바닥을 두리번거려요.”
매니저는 고개를 돌려 한진영을 바라봤다.
마치 자기 말을 잘 들었냐는 듯한 표정의 매니저였다.
한진영은 도발과 같은 매니저의 말에도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저 물끄러미 매니저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때 한진영을 알아본 직원 하나가 급히 매니저에게 다가갔다.
“매니저님.”
“어?”
“저기 저 손님…….”
“저 손님이 뭐?”
매니저와 직원 모두 한진영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이야기했다.
직원은 급히 주변을 둘러봤다.
한진영이 도착했을 때 차를 몰고 내려갔던 직원을 찾기 위해서였다.
“어? 저기 있네. 빨리 이리 좀 와.”
직원이 멀리서 걸어오는 동료를 발견하고 손짓했다.
이제 막 차를 주차하고 자리로 돌아오던 직원은 급히 자기를 찾는 손짓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달려왔다.
“왜 불러? 빨리 넣어야 할 차가 있어?”
“아니. 이리 좀 와봐.”
매니저 옆에 서 있던 직원은 한진영에게 시선을 거두지 않고 금방 다가온 직원을 향해 물었다.
“저 고객님. 롤스로이스 몰고 오신 손님 아니야?”
“맞아. 내가 조금 전에 VIP 고객 자리에 잘 넣어놨는데? 왜? 자주 오시는 분이잖아. 못 알아봤어? 두 달 전에도 오셨었는데? VIP 전담 이사님이 직접 마중 나오셨던 분이잖아.”
“어?”
매니저는 금방 차를 주차하고 올라온 발레파킹 직원을 돌아보고 그게 무슨 말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SL호텔에서 VIP가 가지는 위엄은 다른 곳과 달랐다.
대한민국에서 힘깨나 쓴다는 사람조차도 VIP 대접을 받기 어려운 곳이 바로 SL호텔이었다.
세계의 여러 회의와 주요 행사를 도맡아 하는 곳이었기에 이곳에서 VIP 대접을 받는다는 것은 대한민국은 물론이고, 세계 어디를 가도 VIP 대접을 받을 정도의 인물이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SL호텔에서 관리하는 VIP는 많지가 않았다.
게다가 VIP 전담 이사가 직접 관리하는 인사는 국내에 100명이 채 되지 않는 것으로 매니저는 알고 있었다.
다른 호텔에서 이곳으로 이직해온 매니저는 지금까지 VIP 전담 이사가 관리하는 인물은 본 적도 없고 누구인지 이야기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오늘 얼굴 한번 보기 어렵다는 VIP를 난감한 상황에서 만나게 된 것이었다.
매니저는 자기 곁에 서 있는 직원을 향해 눈짓했다.
지금까지 한 말이 사실이냐는 눈짓이었다.
직원은 지금까지 무슨 이야기를 들었냐는 표정으로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매니저는 그제야 지금 상황을 깨닫고 한진영에게 말을 걸으려 했다.
“저기…….”
그러나 매니저는 한발 늦고 말았다.
조지훈이 가지고 온 차가 한진영 앞에 서고 만 것이었다.
‘진짜 롤스로이스…….’
매니저는 고가의 명품 외제 차에 올라타는 한진영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대표님. 어디로 모실까요?”
문을 열고 안에 탄 한진영을 운전대를 잡은 조지훈이 물었다.
갑작스럽게 가자는 말에 차를 끌고 나오기는 했지만 어디로 가는 것인지 알지 못한 조지훈이었다.
한진영은 그런 조지훈을 향해 갈 곳을 이야기했다.
“청담동에 위치한 폭스바겐 전시장으로 가.”
“청담동이요? 알겠습니다.”
조지훈은 운전대를 잡고 차를 청담동을 향해 몰았다.
***
외제 차가 즐비하게 늘어선 강남 그중에서도 청담동에서도 롤스로이스는 흔히 보기 어려운 차였다.
그런 차가 타사의 전시장 앞에 도착하자 전시장을 찾은 손님은 물론이고 직원들까지 창문 밖을 내다보게 됐다.
조지훈이 문을 열어주자 한진영이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전시장을 한번 둘러본 후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무게감 있는 등장에 직원은 한진영을 향해 급히 인사했다.
그리고 뒤를 이어 이 전시장을 책임지고 있는 책임자가 급히 한진영을 향해 달려왔다.
“사장님. 어서 오십시오. 무슨 일로 저희 매장을 찾으셨습니까?”
한진영이 타고 온 차를 확인한 지점장은 인사를 하면서도 몸을 반쯤 접고 있었다.
롤스로이스 그중에서도 플래그십 라인인 팬텀을 타고 온 고객이었다.
깡통 차 가격만 6억을 훌쩍 넘으며 이것저것 옵션이 들어간다면 7~8억은 우습게 나오는 차를 타고 온 고객이라면 폭스바겐 매장에서는 문을 닫아걸고 맞이해야 할 손님이었다.
한진영은 여전히 허리를 접고 있는 지점장을 향해 말했다.
“디스플레이 되어 있는 벤틀리 좀 보고 싶은데요.”
“벤틀리요?”
접혔던 허리가 펴진 지점장은 잠시 한진영을 바라봤다.
한진영이 몰고 온 롤스로이스와 그가 입고 있는 옷 그리고 그의 수행비서로 보이는 조지훈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리고 빠르게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나이는 어리지만 월척이다.’
오랜 세월 자동차 세일즈 업계에서 갈고 닦은 그의 감이 빠르게 잡아야 하는 고객이라면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지점장은 그대로 몸을 돌려 앞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네. 이리 오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이번에 쿠페 스타일이 새로 들어왔습니다. 사장님 나이대에 딱 어울릴만한 모델입니다.”
한진영은 지점장을 따라 벤틀리 라인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세단 스타일로 보고 싶습니다. 혹시 세단은 전시된 게 없습니까? 없다면 쿠페도 괜찮지만…… 우선은 제가 아니라 나이대가 있는 분들이 탈 차라 세단 스타일이 나을 것 같네요.”
“아~ 그러시군요. 세단도 있습니다. 오시면 바로 타보실 수도 있습니다.”
지점장은 본인이 탈 차가 아니라 부모님이 탈 차라는 말에 환호성을 터트릴 뻔했다.
돈이 있어 보이는 고객이 자기가 탈 차가 아니라 다른 가족이 탈 차를 보러 왔다는 것은 살 마음이 가득 차 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지점장이 먼저 몇 걸음 앞서 나가 한 차 앞에 섰다.
“이게 요즘 제일 잘 나가는 차입니다. 페이스리프트로 중후한 맛이 더 살아난 모델이죠. 우리나라의 유명한 배우와…….”
“아니요. 아르나지 라인은 단종이 결정된 것 아닙니까? 플라잉 스퍼로 보여주시면 좋겠네요.”
“아~”
지점장은 급히 주변을 살폈다.
혹시 다른 사람이 한진영의 말을 듣지나 않았을까 걱정된 모습의 지점장이었다.
그는 들은 사람이 없는 것 같은 모습에 한진영에게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장님을 속일 수는 없겠네요.”
지점장은 한진영에게 한 걸음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단종될 라인을 정리하는 게 먼저라…… 이해해 주십시오. 그래도 플라잉 스퍼도 있습니다. 다만 지금 여기 없을 뿐이지요.”
“여기 없다면 어디에 있다는 거죠?”
“뒤쪽 창고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아르나지 라인을 다 정리하고 다시 배치하려고 뒤쪽 건물에 잠시 넣어놓은 상태지요.”
한진영은 지점장의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표정을 지은 채 소파로 걸어갔다.
이것저것 고르기 위해 온 자리가 아니었음에 다른 차를 볼 필요도 느끼지 못했던 한진영이었다.
한진영은 자리에 앉자마자 앞에 서 있는 지점장에게 말했다.
“우리 조 비서가 확인하고 괜찮다고 하면 바로 구매하겠습니다.”
“네?”
지점장은 잘못 들은 건가 싶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한진영은 그런 지점장을 향해 카드를 들어 올린 채 말했다.
“옵션이 뭐가 달려 있습니까? 그 옵션 달린 대로 그대로 인수하겠습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말입니다. 그리고 번호판도 받아 오십시오. 이 자리에서 바로 번호판도 달아서 가지고 갈 테니까요.”
“잠시만요.”
지점장은 한진영이 한 말에 정신을 잃을 정도로 놀랐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한진영을 향해 천천히 물었다.
“바로 지금. 저희 매장에 비치된 물건을 사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지금 바로요?”
“지금 바로 사서 가지고 나갈 겁니다.”
한진영은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고 말했다.
“번호판 다는 것까지 30분이면 됩니까? 안 된다면 그냥 가겠습니다.”
한진영이 소파에서 일어나려는 듯이 엉덩이를 들어 올리자 지점장이 한진영의 품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한진영을 다시 소파에 앉히며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장님. 아닙니다. 30분이라니요? 10분이면 됩니다. 구청이 바로 뒤에 있습니다. 위임장을 비롯한 서류들도 저희 지점에 다 구비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서류만 작성하시면 저희 직원이 가서 바로 신고하면 됩니다. 그곳 직원들도 잘 아는 사람들이라 스피디하게 진행할 수 있습니다. 어이. 김 대리하고 박 차장. 빨리 와.”
지점장 쪽을 바라보고 있던 김 대리와 박 차장은 지점장이 부르자 날아오듯이 달려왔다.
지점장은 그런 두 사람을 한진영 앞에 세운 뒤 이야기했다.
“빠릿빠릿한 친구들입니다. 서류부터 시작해서 30분 안에 바로 가지고 갈 수 있도록 준비를 마칠 수 있을 겁니다. 할 수 있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지점장은 큰소리로 대답한 두 직원을 보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한진영을 향해 다시 물었다.
“그런데 가격이 얼마인지는…….”
“얼마입니까?”
“아 네. 그래도 조금은 더 저렴한 라인인 4,000cc V8라인입니다. 이게 깡통만 2억 3천인데 옵션이 들어가서…….”
지점장이 고개를 돌려 박 차장을 돌아봤다.
박 차장은 그런 지점장의 눈빛에 큰소리로 가격을 말했다.
“총 3억 5천입니다.”
지점장은 한진영에게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3억 5천이라는 가격에 조금 전까지 당당히 사겠다는 말하던 한진영의 마음이 바뀔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점장의 걱정과 달리 한진영이 내민 카드는 다시 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3억 5천. 문제 될 것 없습니다. 확인하고 괜찮으면 일시불로 사도록 하지요.”
“아~”
지점장은 한진영의 말이 천상의 울림처럼 황홀하게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