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화 세상에 수습이 안 되는 일은 없다
그렇게 한참을 마음을 안정시킨 이성우는 한진영을 돌아보고 말했다.
“네가 무조건 조용히 있으라고 해서 가만히 하는 꼴을 지켜보기만 했는데…… 아니. 이 미친 것이 어디서 사채까지 끌어와서 돈을 집어넣었나 보더라. 제정신이 아니야. 돌았어. 아무리 그래도 사채라니. 사채를 왜 써? 그것도 1,000억이나.”
이성우는 미쳤다는 말을 연신 되뇌며 혀를 찼다.
“거기다 뭔 중개? 중개해주는 건 좋다 이 말이야. 그런데 보장을 자기가 뭐라고 해? 아니. 세상에 투자에 보장이 어디 있어? 제정신이 아니야. 완전히 돌았어.”
이성우는 어이가 없었던지 한참을 그렇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한진영의 팔목을 붙잡고 말했다.
“지금 집 분위기가 장난이 아니야. 아버지가 불같이 화내더라도 이해해.”
“괜찮아. 나한테 화내시는 게 아닌데 내가 기분 상할 일이 뭐 있겠어.”
“그렇긴 하지.”
이성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회사를 놓고 경쟁하던 사이라지만 어쨌든 동생은 동생이었다.
게다가 아무리 친하더라도 외부인인 한진영에게 가족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 같아 이성우는 마음이 좋지 못했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의 마음을 이해한 것인지 이성우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어차피 어떤 식으로든 이런 일이 벌어지기는 했을 거야. 그게 지금 터무니없는 일로 일어나기는 했지만…… 어쨌든 네가 의연하게 대처하는 게 가장 중요해. 이번 일을 잘 수습하는 모습을 네가 보이면 그만큼 너에게는 좋은 일일 테니까.”
한진영의 말에 이성우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동생과의 싸움 속에서 자기가 승리하기 위해서는 동생이 피를 많이 흘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막상 그런 일이 닥치니 불편한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진영과 이성우를 태운 차가 한진영의 본가 앞에 도착했다.
“여기냐?”
차에서 내린 한진영이 커다란 대문 앞에 서서 높은 담을 올려다봤다.
까마득하게 솟아 있는 담장은 마치 외부와 집을 단절시키는 모습처럼만 보였다.
그리고 커다란 대문은 집에 들어가기 전부터 사람을 압도하는 모습으로 서 있었다.
한진영이 집을 올려다보는 사이 문을 열고 중년의 여자가 밖에 나와 이성우에게 인사했다.
“오셨어요? 어르신께서 기다리셔요.”
이성우는 여자의 말에 크게 심호흡하고 한진영을 돌아봤다.
“들어가자.”
“그래.”
이성우가 앞장서 안으로 들어가자 한진영이 이성우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자 잘 지어진 3층짜리 저택이 눈에 들어왔다.
오래된 양식으로 지어진 집은 요즘 집과 같은 세련된 미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 나름대로의 고풍스러움을 담고 있는 모습이었다.
정원을 지나 문을 열고 안에 들어가자마자 벼락 치는 소리가 한진영의 귀에 들렸다.
“그 돈을 구해서 네가 뭐 하려고 한 거냐? 네가 정말 회사를 말아먹으려고 작정했구나! 작정했어!”
들어오자마자 이정훈 회장의 호통 소리가 들리자 이성우는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에게 괜찮다는 뜻을 전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문에서 한참을 들어가고 나서야 거실이 나왔다.
그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이유정 본부장이 한진영의 눈에 들어왔다.
“왔냐?”
소파에 반쯤 걸터앉은 이정훈 회장이 한진영을 향해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권수형 미래전략팀 팀장이 곤란한 표정을 지은 채로 찾아온 한진영을 향해 묵례를 건넸다.
한진영은 이정훈 회장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부르셨습니까?”
“어 그래. 와서 앉아라. 너한테 물어볼 것도 많으니 말이다.”
포악하다는 표현으로도 모자랄 만큼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이정훈 회장은 한진영을 보자 얼굴을 풀었다.
아무래도 지금 이 문제를 해결해 줄 만한 아이디어를 내줄 사람이 한진영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권수형을 향해 살짝 고개 인사를 건넨 후 이정훈 회장의 오른편에 가 앉았다.
그리고 뒤를 이어 이성우까지 한진영의 곁에 앉자 이정훈의 사자후와 같은 목소리가 다시 터져 나왔다.
“네가 아주 간덩이가 부어서 밖에 내어놓았구나! 이제는 네 눈에는 이 아비나 네 오라비도 눈에 차지 않더냐?”
“아니에요. 아버지 아니에요.”
“아니면? 내가 네 오라비가 대출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얼마나 길길이 날뛰었는지 보고서도 이런 짓을 해?”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잘못했어? 그래. 잘못을 알면 벌을 받아야지.”
이정훈 회장이 소파 끄트머리에 놓여 있던 하얀 천을 집어 들었다.
“조용히 너 하나만 사라지면 해결될 문제다. 그럼 내가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네 과오를 덮어주도록 하마. 너는 그냥 애인과 헤어져 슬픔에 겨워 순간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 정도로 끝날 거야. 그럼 사람들이 같이 가슴 아파해주며 너를 안쓰러워할 테니 그렇게 끝을 내는 것으로 하자.”
“아버지.”
“회장님.”
기다란 하얀 천을 든 채 무릎 꿇고 있는 이유정 본부장을 향해 다가가는 이정훈 회장을 이성우와 권수형이 막아섰다.
이대로 놔두다가는 천으로 이유정 본부장의 목을 묶어버릴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아니. 이 사람이 미쳤나. 딸을 죽이려고 하는 아버지가 어디 있어요?”
“이 녀석이 해먹은 돈이 얼마인 줄 알아? 자그마치 1,500억이야. 1,500억. 게다가 보증을 서면서 갚아야 하는 돈도 500억이 넘어. 2,000억이라는 돈을 이 녀석 혼자 해 먹었어.”
이정훈 회장은 말을 하면서도 화가 치밀어 올랐는지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소리쳤다.
“우리 회사가 2,000억을 벌려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해야 하는 줄 알아? 수천 명의 직원이 밤을 새워가며 피땀을 흘려야 겨우 그 정도 돈을 벌 수 있어. 그리고 거기에 이거저거 때면 순수하게 내 손에 쥐는 돈은 100억이 채 안 돼. 그런데 이 녀석은 그런 피 같은 돈을 한 번에 날렸다고. 제 욕심 때문에 말이야.”
“알았어요. 알았어. 아무리 그래도 딸을 죽이려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이성우의 어머니로 보이는 사람이 사람들을 끌고 나타났다.
집안일을 돕는 사람으로 보이는 이들에게 이정훈 회장을 막게 하고는 이유정을 끌어안았다.
“아무리 돈이 중요하기로서니 딸을 그렇게 만들어야 해요?”
“돈이 문제가 아니야. 회사에는 자기 삶은 물론이고 가족들까지 함께하고 있는 직원이 수천 명이 있어. 그 사람들 인생을 이 녀석이 망친 거라고.”
이정훈 회장은 이유정을 향해 삿대질했다.
아무리 아끼는 딸이더라도 회사에 큰 피해를 준 것을 참지 못한 모습이었다.
한진영은 자리에 앉은 채로 가만히 이런 광경을 지켜보기만 했다.
말린다든지 아니면 이 사태를 잠재울 아이디어를 내놓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이정훈 회장이 모든 화를 내뱉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보다 못한 권수형 부사장이 나섰다.
“회장님. 잠시만 흥분을 가라앉히시고 한 대표와 이야기를 나눠보시지요. 아무래도 이번 일에 관해서는 한 대표가 가장 많이 알고 있을 테니까요.”
이정훈 회장의 팔을 잡은 권수형은 천천히 손에 들린 하얀 천을 빼 들었다.
설마 그럴 리야 없겠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 벌어질지도 모르는 불상사를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이정훈 회장은 권수형 부사장의 손길에 화를 조금은 다스린 모습을 보였다.
그는 고개를 돌려 한진영을 돌아보고 말했다.
“혹시 이 녀석 이야기를 좀 들었나?”
이정훈 회장이 여전히 무릎 꿇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는 이유정 본부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한진영은 어머니 품에 안겨 오들오들 떨고 있는 이유정 본부장을 바라보고 말했다.
“오는 길에 이성우 사장에게 대충 이야기 들었습니다. 그리니치 펀드에 투자했다고요?”
“그래. 이 녀석이…… 그리니치 펀드에…… 허허.”
말을 하다 허탈하게 웃은 이정훈 회장은 다시 소파로 돌아왔다.
그리고 털썩 주저앉으며 힘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 녀석이 보유한 지분을 담보로 잡아 은행에서 돈을 빌렸다고 한다. 거기에 더해 사채에서 1,000억을 빌리기도 했고…… 그뿐이면 다행이지. 보증까지 섰다고 하더구나.”
“보증을 선 금액이 500억이고요?”
“그래. 그렇게 집어넣은 돈이 2,000억이야. 2,000억. 이 미친 것이…… 머리가 돈 거지. 머리가 돌았어.”
몇 번이나 말한 내용이지만 말할 때마다 이해가 가지 않던 이정훈 회장이었다.
어엿한 기업을 일군 아버지 밑에서 유복하게 자란 이정훈 회장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가르침 속에 돈이 무섭다는 것을 배우며 커왔다.
그래서 LZ그룹의 조병수 회장만큼은 아니지만, 자기도 대기업의 오너답지 않게 소박한 생활을 해왔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그런 자기의 생각을 자식들에게 잘 전달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지금까지 사고도 한번 치지 않던 자식이. 그것도 아들인 이성우가 아니라 딸인 이유정이 이런 대형 사고를 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이정훈 회장은 삶에 대한 심각한 회의까지 들 정도로 이번 사태에 크나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다른 사람이 알면 창피스러워서 집에서 이 사달을 벌이고 있는 거야. 남들이 알면 내가 얼굴을 어떻게 들고 다니겠어?”
“딸자식을 죽이면 얼굴은 들고 다닐 수 있고요?”
이성우의 어머니는 이유정을 품에 안은 채 이정훈 회장에게 소리쳤다.
천을 손에서 뺏기는 했지만 언제 마음이 바뀌어 이유정에게 달려들지 몰라 이성우의 어머니는 이유정 곁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정훈 회장은 고개를 숙인 이유정과 이성우의 어머니를 향해 삿대질하며 조금 전 이성우 어머니의 목소리보다 더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런 녀석은 죽어도 돼. 차라리 사고 친 것이 부끄러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편이 다른 사람들의 측은지심이라도 불러일으킬 만하니 차라리 그편이 나아.”
“좋아요! 제가 죽으면 되잖아요!”
지금까지 조용히 아버지가 하는 말을 듣기만 하던 이유정 본부장이 고개를 들고 악다구니를 썼다.
얼굴이 온통 눈물과 콧물 범벅인 채로 이유정 본부장은 소리를 질렀다.
“살아서 무엇 하겠어요? 죽을게요! 차라리 그편이 속 시원하시다는데 어쩌겠어요? 죽어야죠.”
“그래. 말 잘했다! 죽어라. 죽고 나면 내가 제삿밥은 잘 올려줄 테니까. 오냐! 그렇게 하자!”
이유정 본부장의 악에 받친 말에 이정훈 회장이 참지 못하고 다시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천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성우의 어머니는 그런 이정훈 회장의 모습에 깜짝 놀라 이유정 본부장을 다시 품에 안았다.
“이이가 미쳤나. 돌았어요? 하나밖에 없는 딸을 꼭 당신 손에 죽게 만들어야겠어요?”
“죽는 편이 나아. 그편이 우리 가족은 물론이고 회사에 도움이 돼.”
“회장님.”
“아버지. 참으세요. 아버지.”
권수형 부사장과 이성우가 급히 이정훈 회장을 양옆에서 붙들었다.
이성우는 손에서 놓치면 금방이라도 아버지가 동생에게 달려들까 걱정되어 이정훈 회장을 꼭 끌어안았다.
기풍을 놓고 동생과 싸우고 있지만 그래도 동생은 동생이었다.
이성우는 동생이 걱정되는 마음에 급히 한진영을 돌아보고 말했다.
“진영아. 뭐라고 좀 해봐. 아버지 말리려고 온 거잖아.”
이성우는 지금까지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한 한진영에게 도와달라는 뜻을 전했다.
한진영은 이 자리에 이정훈 회장을 말리기 위해 온 것은 아니었다.
이유정 본부장과 아무런 친분도 없고 관계도 없었기에 한진영은 이런 소란스러운 광경이 TV 예능 프로그램과 다를 바가 없게 느껴졌다.
그러나 이쯤에서 소란은 그만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선은 상황이 진정돼야 이야기가 진전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이성우의 애처로운 눈빛에 천천히 이정훈 회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리니치 펀드가 잘못된 겁니까?”
한진영의 질문에 천을 찾아 이유정의 목에 걸려던 이정훈 회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그리니치 펀드가…… 그리니치 펀드가…….”
이정훈 회장은 말을 하면서도 심장이 뛰었는지 이성우에게 대신 말하라며 손짓했다.
이성우는 그런 이정훈 회장의 모습에 여전히 이정훈 회장의 팔을 붙잡은 채로 대신 대답했다.
“파산했다고 한다.”
“파산?”
“어. 그게…… 사실은 펀드에 남아있는 돈이 없었대.”
“펀드에 돈이 없었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펀드에 왜 돈이 없어?”
명확한 답을 요구하는 한진영의 말에 이성우가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그게…… 폰지 사기였단다.”
“폰지 사기?”
“그래. 펀드가 제대로 투자한 돈은 없었고 죄다 신규 가입자들의 돈으로 돌려막기를 하는 중이었대.”
이성우는 이정훈 회장이 이리 길길이 날뛰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그냥 일반적인 투자 실패라면 이렇게 화를 낼 이유가 없었다.
사업을 하다 보면 성공도 많지만, 실패도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유정이 당한 것은 사기였다.
기업체의 오너 일가가 그것도 한 번에 수천억의 사기를 당했다는 사실은 기풍을 믿고 투자를 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기풍에서 일하는 직원들에게까지 입이 열 개라도 변명할 거리가 되지 못하는 일이었다.
이성우는 이런 일이 벌어진 것에 자기도 모르게 창피함마저 느끼게 됐다.
한진영은 눈을 질끈 감고 있는 이정훈 회장과 이성우 그리고 이유정 본부장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회장님. 화는 나중에 내시고 이제는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할지를 생각해야 하시지 않겠습니까?”
“수습?”
“네. 저를 부른 이유가 수습 때문 아니었습니까? 설마 이대로 우리가 사기를 당했다 하고 온 세상에 공표하실 생각은 아니셨지요?”
한진영의 말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한진영을 바라봤다.
특히 이정훈 회장이 마치 한 줄기 빛을 발견한 것처럼 한진영에게로 몸을 돌렸다.
“수습되겠나?”
“세상에 수습이 안 되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다만 어떤 식으로 수습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요.”
한진영의 느긋한 말투에 보기 힘들게만 느껴지던 이정훈 회장의 표정이 서서히 풀려나가기 시작했다.
한진영은 그런 이정훈 회장을 향해 밝게 웃어 보이며 소파를 손으로 두드렸다.
“회장님. 이제 앉아서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보시지요. 지금은 그게 우선인 것 같습니다.”
한진영의 말에 이정훈 회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진영 앞으로 다가가 자리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