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후계자 낙점
이성우 본가에서의 한바탕 소란이 있고 난 뒤 열흘쯤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리니치 펀드 이야기가 외부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세계 최대의 펀드 중 하나인 그리니치 펀드 파산 위기]
[그리니치 펀드, 폰지 사기 혐의로 증권거래위원회에서 조사 진행 중]
[국제 금융시장 초비상체제 돌입, 그리니치 펀드 위험 노출 규모 최소 500억 달러 이상 예상]
[국내 금융사에서만 그리니치 펀드에 20억 달러 위험 노출]
[해외 유명인들 그리니치 펀드 피해 호소, 유명 영화감독부터 상원의원까지 각계각층에 피해자들 폭넓게 흩어져 있어]
그리니치 펀드라는 것이 국내에서는 생소하기만 했다.
해외 유명인들이 많이 들었다는데, 국내 개인에게 판매가 되는 상품이 아니었던 만큼 뉴스 속 이야기는 그저 해외토픽 정도로 이야기가 들릴 뿐이었다.
그러나 금융권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얼마나 물렸다고?”
“5,000만 달러.”
“그 정도면 양호하네. 두리은행은 1억 달러라고 하던데?”
“대부분 많아야 1억 달러 내외의 손해를 본 것 같더라. 그런데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는 소문이 들려.”
이야기를 나누던 직원 중 하나가 주변을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여 사람들을 자기 쪽으로 모았다.
“그 왜 있잖아.”
“뭐? 뭐가 있는데?”
분위기만 잡고 답답하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머리를 맞댔던 사람 중 하나가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소리 지른 이의 어깨를 급히 머리를 모은 이가 잡아 눌렀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우리 펀드에서 2,000억이 빠져나간 거 알아?”
“알지. 그거 이성우 기풍증권 사장 거였다면서? 대박이다. 우리 대표님하고 두 분이 친구라더니 2,000억이나 우리한테 투자한 거였어?”
“투자는 무슨…… 투자금을 그만큼 불린 거지. 하여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다시 한번 말을 멈춘 직원은 주변을 둘러본 뒤 더욱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기풍 오너 일가 중에 누군가가 그리니치 펀드에 물려서 2,000억을 급히 출금한 거라는 이야기가 있어.”
“뭐? 2,000억을 물렸다고?”
“쉿. 조용히 해.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자기도 모르게 크게 소리를 쳤던 이는 주의를 받자 급히 입을 다물고 주변을 살폈다.
그냥 가십 정도가 아니라 이번 이야기에는 세이지 자산운용의 이름도 함께 들어 있었기 때문에 이야기하는 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아니. 두리은행도 걸려든 게 1억 달러라는데 기풍은 뭔데 개인이 혼자 2,000억을 해 먹었어?”
“둘 중 하나 아니겠어?”
잠시 말을 멈추고 뜸을 들인 이는 이제는 귀를 입에 가져다 대야 할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두리은행을 비롯한 금융권이 당한 숫자를 줄였든가 아니면 물렸다는 기풍 가의 사람이 돌았든가.”
“둘 다일 수도 있고…….”
“그렇지. 둘 다일 수도 있지.”
이야기를 나누던 이들은 말없이 눈빛을 교환했다.
이렇게 그리니치 펀드에 관해 여러 가지 소문과 억측이 돌아다니다 보니 한진영의 세이지 자산운용도 이런 소문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징그럽다. 징그러워. 아니라면 아니라고 믿어야지. 그렇게 맞다는 말을 듣고 싶은 건가. 징그럽게 물고 늘어지네.”
“오셨어요?”
“어. 조 과장. 나 차 좀.”
조수아는 최석영을 향해 눈을 흘겼다.
“차장님은 손이 없으세요? 왜 차를 저에게 타 달라고 하세요?”
“조 과장의 차 맛이 유독 맛있는 걸 어떡해. 그리고 바빠서 그런 거니까 이해해줘.”
최석영은 조수아를 향해 손을 들어 보이고는 한진영이 있는 사무실로 향했다.
똑똑.
“들어오세요.”
최석영은 한진영의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다녀오셨습니까?”
“죽는 줄 알았어.”
최석영이 들어오자마자 죽는소리를 내뱉었다.
한진영은 예상하였다는 듯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응접용 소파로 걸어갔다.
그리고 맞은 편 자리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와서 앉아서 이야기하세요. 뭐라던가요?”
한진영의 말에 최석영이 손부채를 부치며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조금 전 금감원에 다녀온 이야기를 한진영에게 건넸다.
“뭐라고 하기는…… 의심하지.”
“흐흐흐. 2,000억을 왜 보냈냐고요?”
“그래. 그거지. 한참 분위기가 요상한 이 시점에서 2,000억을 보낸 게 그리니치 펀드 때문이 아니냐고 꼬치꼬치 묻더라. 마치 그것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그러는 거 같아 보였어.”
“그럴 거예요. 그래야 분위기가 기풍 쪽으로 넘어갈 테니까요.”
“금융권을 바라보고 있는 의심의 시선을 기풍으로 돌리려고?”
“왜 안 그러겠어요. 가뜩이나 지금 시점에 금융권 이야기가 나오면 불편해지는 게 사실이니까요.”
아직도 서브프라임의 여파가 채 가시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런 시점에 금융권에 피해 사실이 있다는 이야기가 계속 돌아다닌다면 여러 가지로 불편해질 게 뻔했다.
그래서 피해 사실을 다른 쪽으로 돌리고 싶어 하는 것이 현재 금융권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제 말씀대로 하셨죠?”
“어. 당연하지. 우리는 모르는 일이라고 했어. 고객이 돈 빼달라는 데 이유까지 물어야 하겠냐고 말이야. 그런데도 죽어라 안 믿더라. 어떻게든 그리니치 펀드에서 손해를 봤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거 같았어. 그런데 성우는 진짜 괜찮은 거냐?”
시흥지점 때부터 함께였기에 최석영은 한진영은 물론이고 이성우도 편하게 대했다.
한진영과 이성우도 그런 최석영이 더 편했기에 다른 사람들이 없을 때는 예전처럼 지내고는 했던 셋이었다.
“이게 속인다고 속일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언젠가는 그리니치 펀드에 투자해서 실패한 사실이 밝혀질 텐데 계속 모르쇠로 입 다물고 있어도 되는 거야?”
최석영이 걱정이 담긴 이야기를 건넸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노크 뒤에 조수아가 커피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를 최석영 앞에 놓은 조수아는 최석영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맛있게 드세요.”
“조 과장. 왜 이래. 나 더워서 땀 흘리는 거 안 보여?”
“그러게 차 달라고 하실 때 시원한 차라고 말씀하셨어야죠.”
“이…….”
최석영은 보는 것만으로도 땀이 솟아날 것만 같은 커피를 내려다보며 울상을 지었다.
한진영은 그런 최석영과 조수아를 번갈아 바라보고는 웃으며 조금 전 최석영이 했던 질문에 대답했다.
“조만간 금감원에서도 의심의 눈초릴 거둘 거예요.”
“왜?”
최석영은 물론이고 조수아도 들고 온 컵 받침대를 든 채로 한진영을 내려다봤다.
“조만간 기풍에서 그것 외에 더 큰 이슈가 발생할 테니까요. 그리고 그것 때문에 의심도 거둘 거예요.”
“그래? 그게 뭔데?”
한진영은 최석영의 말에 말없이 웃기만 했다.
최석영과 조수아가 궁금증을 참지 못해 몇 차례나 더 물었지만, 한진영에게서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중요한 이야기이기에 먼저 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는 말만 한진영에게 들을 뿐이었다.
그렇게 며칠 간의 시간이 흐른 후 두 사람은 한진영에게서 듣고 싶어 했던 답을 언론을 통해 듣게 되었다.
[기풍그룹 계열사 정리에 이어 후계 구도 정리 시작]
[기풍그룹 이정훈 회장의 장남이자 기풍증권의 사장이었던 이성우 씨가 기풍홀딩스 부사장으로 전격 승진발탁]
[기풍철강의 후계구도의 추가 이유정 본부장에서 이성우 사장 쪽으로 기울어진 것으로 보여]
이정훈 회장이 기풍그룹의 비정기 인사를 발표한 것이었다.
그 안에서 몇몇 사장단의 인선이 바뀌었는데 그중에서 이성우의 본사로의 화려한 입성이 이번 인사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이성우로의 후계구도 확립이 어리둥절하기만 할 뿐이었다.
어떠한 경쟁도 없었기에 당황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대부분의 재벌가에서는 후계구도를 정하기 위해 자식 간에 경쟁시키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경쟁에서 나온 결과물을 후계 구도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했다.
그런데 기풍그룹의 경우에는 경쟁이라고 볼만한 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저 자식 둘이 서로 다른 곳에서 짧은 시간 동안 실적을 쌓은 것이 경쟁의 전부였던 것이었다.
게다가 이런 제대로 되지 못한 경쟁 속에서도 이성우는 이유정 본부장에게 밀린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이유정 본부장이 아니라 이성우 사장이 후계 구도의 승자가 된 것에 사람들은 어이가 없는 시각으로 기풍그룹을 바라볼 뿐이었다.
일각에서는 이유정 본부장도 새롭게 구성된 지주사에 들어가 그곳에서 제대로 된 경쟁을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그만큼 이런 결과를 사람들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나 이어진 발표에 그런 기대도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기풍철강의 이유정 본부장 모든 자리에서 내려와]
[이유정 본부장 외유 결정, 해외에서 학업을 쌓을 것이라 알려져]
[이유정 본부장의 측근에 따르면 오랜 기간 이어진 피로에 심적으로 큰 부담을 느낀 것으로 보여]
[이유정 본부장 한동안 기풍과는 거리를 두고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겠다고 주변 사람에게 말했다고 전해져]
자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아예 물러나고만 것에 기풍그룹의 후계는 이성우 쪽으로 확실하게 기울어졌다는 것이 밝혀지고 말았다.
사람들은 이성우가 혜성처럼 등장하여 기풍증권의 사장 자리에 앉은 뒤에 후계자로 낙점까지 받은 것을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기풍그룹과 이성우의 다음 행보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
일요일 아침.
언제나 그렇듯이 거리는 한산하기만 했다.
그런 한산한 거리를 뚫고 고급 차 몇 대가 대한정유로 들어갔다.
차들은 차례대로 대한정유 앞에 섰고, 가장 먼저 도착한 차에서 내린 사람은 뒤차로 서슴없이 다가갔다.
직접 뒷차 문까지 열어준 이는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을 향해 크게 인사했다.
“오랜만이다.”
“오랜만은 무슨…… 어제 만난 건 기억도 나지 않냐?”
생뚱맞은 인사를 건넨 이성우를 올려다보며 한진영이 차에서 내렸다.
이성우는 그런 한진영을 향해 다가가 반가운 표정으로 다시 인사했다.
“그러니까 오랜만이라는 거지. 어제 만나고 오늘 봤으니까. 나는 너를 매일 매 순간 보고 싶은 사람이거든.”
“어휴. 징그러.”
한진영은 자기에게 들러붙는 이성우를 떼어냈다.
그러나 이성우는 그런 한진영을 향해 재차 달려들었다.
“어젯밤에 뭐했냐?”
“뭐하긴? 너하고 저녁 먹지 않았냐?”
“아니. 그거 말고…… 밤에 말이야. 나 만난 이후에…… 너 집에 들어가서 뭐 했나 궁금해서…….”
한진영은 이성우를 밀쳐내고는 이성우를 위아래로 훑었다.
“야. 다른 사람이 보면 오해해. 너 이러는 거 나 아주 불편하다.”
“오해하면 좀 어떠냐?”
“좀 어떠냐고? 이게 돌았나?”
한진영이 이성우를 향해 험악한 표정을 하고 달려들자 이성우가 웃으며 손을 들어 한진영을 막았다.
그런 모습을 뒤에 도착한 차에서 내린 사람이 보고 웃으며 한진영과 이성우에게 말을 건넸다.
“두 사람은 언제 보더라도 사이가 좋아 보여.”
“오셨어요?”
이성우가 말을 건 상대를 향해 웃으며 인사했다.
한진영도 이성우의 뒤를 이어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래. 오랜만이다. 너는 얼굴 많이 좋아졌다. 네 이야기는 신문을 통해서 많이 봤는데 어때? 기분 좋지?”
LZ의 조용재 상무가 한진영의 인사를 가볍게 받아넘긴 후 이성우에게 말을 건넸다.
아무래도 최근에 가장 이슈가 되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눈앞에 있었기 때문에 그 이야기부터 하는 것이었다.
“이제 시작인데요 뭐.”
“시작이 중요하지. 그래도 우리는 많이 놀랐어. 다른 사람도 아니라 네가 회사를 먹을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거든.”
조용재는 이성우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르고 이성우의 배를 가볍게 쳤다.
“이제 클럽에 와서 형들하고 사업 이야기도 해야지?”
“저야 언제나 가고 싶죠. 그런데 저는 가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갈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걱정하지 마. 그래서 내가 이야기해놨어. 카드 하나 열어달라고 말이야.”
“정말요?”
이성우는 놀란 표정으로 조용재를 올려다봤다.
여전히 조용재 손에 잡혀 있는 이성우였지만, 이런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라면 바닥에 뒹굴어도 괜찮을 것만 같았던 이성우였다.
조용재는 잔뜩 기대에 찬 표정을 하는 이성우의 머리를 주먹으로 가볍게 쥐어박았다.
“뭘 그런 눈으로 쳐다봐. 진짜야. 그러니까 언제 한번 시간 내서 클럽으로 와.”
“정말 저 가도 괜찮아요?”
“아 정말이라니까.”
조용재는 자꾸 귀찮게 묻는 것이 짜증이 난 것인지 이성우를 감싸고 있던 손을 풀었다.
“오기 싫으면 오지 마.”
“아니요. 갈게요.”
이성우는 조용재의 팔을 붙잡고 애원하듯이 말했다.
“오늘 볼일 보고 오후에라도 갈게요. 그럼 바로 열어주시는 건가요?”
“오늘 바로 온다고?”
“그럼요. 미룰 필요 뭐 있어요? 바로 가야죠. 괜찮죠?”
“뭐 괜찮기는 한데…….”
조용재는 한진영을 돌아봤다.
“미안. 네가 있었다는 것을 잊어버렸다. 괜히 우리만 이야기를 나눴네.”
“괜찮습니다. 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진영은 조용재와 이성우가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알고 있었다.
재벌 자제들 그중에서도 후계와 가까운 이들끼리는 자기들만의 네트워크를 형성해놓고 있었다.
바로 이곳 이야기를 조용재와 이성우가 나누는 중이었다.
한진영도 언젠가는 들어가야 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게 바로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대한정유 본사 건물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런데 이야기는 조금 뒤에 나누는 게 어떠시겠습니까? 손님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서요.”
한진영은 본사 건물에 유독 불이 환하게 켜진 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곳에는 테라의 임원이 애달픈 자세로 앉아 한진영 등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눈에 선하게 보이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