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우리 둘에게 기회이다
블랙문 캐피탈 매니지먼트.
외국계 자산운용사로 작년 말 기준 발표된 운용자금의 규모(Asset Under Management : AUM)가 3 Trillion USD(3조 달러)를 넘긴 곳이었다.
우리나라 돈으로 3,600조를 굴리는 곳으로 미국 GDP의 약 10%에 해당하는 자본금을 보유한 거대한 기업이 바로 블랙문 캐피탈 매니지먼트. 통칭 블랙문으로 부르는 곳이었다.
이런 블랙문의 역사는 월가를 주름잡는 기업들에 비해 짧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대부분 100년에 가까운 역사를 가지고 있는 월가의 대표 기업에 비한다면 20년이라는 역사는 달빛과 반딧불의 차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블랙문에 천문학적인 자금을 운용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높은 수익과 안정적인 자금 운용.
특히 리스크 관리에 엄격하다는 말조차 모자랄 정도로 위험 회피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지난 서브프라임 사태의 원흉이었던 CDO에 투자하지 않은 것이 블랙문의 유명한 일화 중의 하나였을 만큼 그들의 리스크관리는 20년의 역사를 가진 기업을 100년의 월가 지배자들과 같은 위치에 놓이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모르는 곳에는 투자하지 않는다.
이 원칙을 지킨 그들은 고객들에게 신뢰를 얻었고, 그 덕분에 단기간 만에 월가의 중심에 설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여기까지가 외부에 알려진 블랙문에 대한 이야기였다.
‘더러운 놈들.’
한진영은 블랙문이라는 이름이 안혁규의 입을 통해 나오자 토악질이 나오려 했다.
“괜찮으십니까?”
급격히 나빠진 한진영의 안색에 정병선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괜찮습니다. 점심때 먹은 게 잘못됐는지 속이 좀 안 좋아 그런 겁니다.”
“요새 날이 더워지니 음식 조심하셔야 합니다.”
“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진영이 웃으며 잠시 입가를 만졌다.
정병선에게 음식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다시 한번 보여준 한진영은 마음을 다스리고 안혁규에게 다시 물었다.
“블랙문이 세올컴퍼니의 정보를 제공하고 의원님께 공매도를 추천했다는 말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다시 한번 확인을 마친 한진영은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숙여 정병선과 안혁규의 시선을 피했다.
한진영의 이런 모습에 정병선이 조급한 마음으로 한진영을 향해 물었다.
“많이 안 좋습니까?”
“많이 안 좋습니다.”
정병선의 말에 고민도 하지 않은 채 바로 대답한 한진영이었다.
정병선은 당황한 표정으로 안혁규를 돌아봤다.
안혁규는 모든 것을 체념한 것인지 허탈한 표정 그대로 자리에 앉아 공허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볼 뿐이었다.
한진영은 그런 그들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이야기했다.
“세올컴퍼니는 현재 거래정지인 상태입니다. 청산은 물론이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상태입니다. 그야말로 건드릴 수도 없는 상태란 거지요.”
“맞습니다. 그래서 지금 답답하다는 겁니다. 거래정지가 풀려야 청산하든 말든 할 텐데 거래정지가 된 상태로…… 합병하겠다고 하고 있으니…….”
정병선은 안타깝다는 듯이 자기 무릎을 치고 안혁규와 마찬가지로 천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현재 세올컴퍼니는 특이한 상황에 들어간 상태였다.
석 달 전 세올컴퍼티는 회계법인 감사보고서 의견거절을 받았다.
항암치료제에 관련 무형자산에 대한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면서 ‘계속기업 존속 능력 불확실성’에 따른 의견거절을 받은 것이었다.
세올컴퍼니는 애초에 항암치료와는 거리가 먼 회사였다.
기계공작 회사로 바이오산업과는 무관한 사업을 영위하는 곳이었다.
그런 세올컴퍼니가 캐나다의 오레오라는 회사로부터 난소암 치료제에 대한 무형자산을 인수하며 항암치료제 개발사업에 뛰어든 것이었다.
인수가격 3,500억.
자산규모가 700억에 불과한 세올컴퍼니 입장에서는 사활을 건 승부수를 던졌다고 보는 게 맞을 정도로 대규모 인수계약이 체결되었다.
문제는 자기의 자산규모보다 큰 인수를 진행하면서 일어났다.
인수가격에 해당하는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세올컴퍼니는 전환사채(CB)발행, 주식 상계, 현물 출자 등등 회사 역량을 총동원하여 자금을 마련했고, 이런 일이 감사보고서 의견거절을 받게 된 계기를 만들었다.
바로 법원이 난소암 치료제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신주발행도 기각이 되어 취소되었으며, 회사채와 CB 등등 모든 것이 멈추어 결국 감사보고서 의견거절이라는 사태를 맞아버린 것이었다.
세올컴퍼니로서는 최악의 상황에 빠져버린 것이었다.
안혁규가 바로 이런 정보를 먼저 알게 되어 공매도에 들어간 것으로 생각됐다.
‘감사보고서 의견거절에 들어갈 거라는 것을 알았든지 아니면 그 전에 법원에서 자산을 인정해주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았든지 어느 단락에서건 먼저 이야기를 들었겠지.’
게다가 이야기를 해준 곳이 블랙문이라면 안혁규가 아닌 다른 사람이더라도 공매도를 쳤을 게 분명했다.
정보의 출처가 확실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식의 의견거절이 나온다면 상장폐지 결정에서 살아남더라도 주가의 폭락은 불 보듯 뻔했기 때문에 해볼 만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졌지.’
너무나 확실해 보이는 일에 뜻밖의 사건이 끼어들었다.
“아무리 봐도 세올컴퍼니가 꼼수를 쓴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듭니다. 한 대표님이 전문가이니 한번 말씀해주십시오. 꼼수 아닙니까?”
마치 자기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정병선은 흥분한 표정으로 한진영에게 말했다.
한진영은 그런 정병선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꼼수이기는 하죠. 하지만 그렇다고 법의 테두리를 벗어났다거나, 아니면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한 것은 아닙니다. 여러 가지 방법 중에서 생각하지 못한 방법을 찾아낸 것이지요.”
“거래정지 상태에서 인적 분할을 하는 게 여러 가지 방법의 하나라고요?”
“법이 인정해주니 방법의 하나가 맞지요. 이미 확인해보고 오신 것 아닙니까?”
한진영의 말에 정병선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미 여러 로펌을 통해 법적 근거를 먼저 따져본 뒤에 이곳에 온 게 맞았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말이 없어진 정병선에게서 안혁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의원님.”
“네.”
안혁규는 한진영의 부름에 힘이 빠진 목소리로 대답하고 한진영을 바라봤다.
한진영은 그런 안혁규를 잠시 바라보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저에게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방법이 있는 겁니까?”
안혁규에게 말했건만 정병선이 놀란 목소리로 한진영에게 물었다.
한진영은 정병선을 슬쩍 돌아본 후 고개를 저었다.
“지금 당장은 없습니다.”
“그럼 어째서 시간을 달라고 하신 겁니까?”
“당장은 없다는 거지 앞으로도 없다는 건 아니니까요.”
한진영의 말에 희망을 본 정병선은 기쁜 얼굴로 안혁규를 돌아봤다.
안혁규는 그런 한진영의 말에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한진영에게 물었다.
“정말 방법이 있다는 말입니까?”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지금 당장은 없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수도 있고요. 하지만 한번 알아는 보겠다는 뜻입니다.”
한진영의 말에 정병선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안혁규의 손을 잡았다.
“한 대표님이 저렇게 이야기했다면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정병선은 기쁨에 찬 얼굴로 말하고 있었지만, 안혁규는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어렵다며 알아보겠다는 말에 정병선이 이렇게까지 기대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었다.
한진영도 정병선과 마찬가지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여전히 불안해하는 안혁규를 향해 말했다.
“원하시는 대로 다른 곳에 가서 알아보십시오. 저는 그사이 제 나름대로 생각한 뒤에 대답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정 회장님 편에 연락을 하는 게 낫겠지요?”
“뭐…… 그렇게 하시지요.”
연락처를 달라고 해도 주지 않았을 안혁규였다.
그런데 알아서 정병선을 통해 연락하겠다고 하니 안혁규는 처음보다 한진영에 대한 마음이 한결 풀어져 내렸다
다른 사람처럼 허풍을 떠는 것이 아닌 신중한 그의 모습에서 오히려 더 믿음직스럽다는 느낌이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한진영과 정병선 그리고 안혁규가 회의실에서 나오자 그때까지 앞을 지키고 있던 김영철이 급히 차를 가지러 먼저 내려갔다.
일행이 김영철이 차를 가지고 올라올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정병선은 조심스럽게 한진영 쪽으로 다가와 귓속말을 건넸다.
“꼭 해주셨으면 합니다. 이건 저에게도 그리고 한 대표님에게도 기회입니다.”
정병선은 왜 기회인지 말하지 않았다.
지금 자리는 그렇게 깊은 대화까지 나눌 자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신 눈으로 알겠냐는 뜻을 한진영에게 건넸고, 한진영은 최선을 다하겠다는 뜻을 눈빛으로 건네는 것으로 지금 자리에서의 마지막을 마무리했다.
정병선 등이 찬 타가 건물을 나가자 한진영이 곁에 있던 조지훈에게 지시했다.
“세올컴퍼니와 관련된 것 모조리 찾아와.”
한진영은 시계를 내려다보고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시계를 두드리며 말했다.
“세 시간. 세 시간 뒤에 팀장 회의를 열 테니까 그때 그 자리에서 네가 브리핑하도록 해.”
“세 시간이요? 너무 짧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해. 그 이상 해서 나오는 정보들까지 필요한 건 아니니까.”
한진영은 열심히 하라는 의미에서 조지훈의 등을 두드린 후 안으로 들어갔다.
***
세이지 자산운용에는 한 가지 불문율이 회사 내에 자리하고 있었다.
퇴근 한 시간 전에는 회의하지 말아라.
규칙으로 적어놓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웬만하면 하지 말라는 것이 한진영의 뜻이었고, 그런 뜻에 따라 직원들은 편안한 퇴근 시간을 즐기고는 했다.
그런데 오늘만은 특별했다.
퇴근을 30분여 정도 남겨놓고 모든 팀장급이 소집되어 회의실에 자리하게 된 것이었다.
특히 이번에 새로 들어온 리스크관리팀의 이진경 팀장은 듣던 것과 다른 모습에 곁에 있는 조수아에게 무슨 일인지 조용히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뭐예요? 제가 듣기로는 세이지는 퇴근 한 시간 전에는 회의가 금지되어 있다면서요? 그런데 오늘은 왜 회의하는 거예요?”
조수아는 사람이 가득 모인 회의실이 더웠는지 리모컨으로 에어컨 온도를 내리며 대답했다.
“금지된 건 아니에요. 그저 불문율처럼 하지 않는 게 좋다. 이 정도쯤으로 도는 이야기였죠. 아니 근데 여기는 왜 이렇게 더워?”
조수아는 충분히 내렸는데도 온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파워로 설정을 바꾸고 연신 손부채를 부쳤다.
큰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에어컨에 이제야 시원해지는 느낌을 받은 조수아는 여전히 자기를 보고 있는 이진경을 돌아보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가끔. 아주 가~끔 이렇게 모일 때가 있어요. 지난번에는 한밤중까지 모여 모두 나스닥을 구경하기도 했고요.”
“한밤중에 나스닥을 구경해요? 나스닥을 왜요? 해외팀 외에는 확인할 필요가 없는 일이잖아요.”
이진경은 자기가 세이지에 잘 온 것인지 알고 싶은 마음에 필사적으로 조수아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회사를 나간다면 지금밖에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조수아는 이진경의 표정에서 그녀의 생각을 읽었는지 웃으며 이진경을 안심시켰다.
“그렇게 긴장하실 필요까지는 없어요. 이렇게 모이는 건 대부분 대표님께서 부르신 거거든요. 그렇다는 건 굉장히 중요한 일이지만 오히려 그걸 통해 이득을 보자. 뭐 이런 의미로 대부분 소집되는 거라서요. 보세요. 다른 팀장들도 다들 태연하잖아요.”
조수아의 말에 이진경은 다른 팀장들을 훑어봤다.
조수아의 말대로 그들은 마치 놀러 온 것처럼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자리에 앉아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이진경은 계속 마음에 걸리는 말이 있었다.
“굉장히 중요한 일 때문이라면서요? 그게 무엇 때문인데요?”
“모르죠. 그런데 지난번에는 나스닥 폭락사태 때 같이 맥주를 마시며 구경하기는 했었는데…… 이번에도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건가?”
조수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지난날을 떠올렸다.
그러나 이진경의 귀에는 나스닥 폭락이라는 말만 귀에 맴돌았다.
“나스닥 폭락이요?”
“아~ 왜 그거 기억하세요? HFT 프로그램이 오류를 뿜어내서 나스닥 종목들이 죄다 -60% 넘게 빠져 내려갔던 거요.”
“기억나죠. 그거…… 여기서 만든 프로그램이었다면서요?”
“에이. 남들이 들으면 우리가 만든 게 잘못돼서 그런 줄 알겠어요.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요? 여기서 만든 거 아니에요?”
“여기서 만들기는 했죠. 그런데 사간 놈들이 자기들이 멋대로 개조해서 그렇게 된 거예요.”
조수아는 대충 이진경의 말을 얼버무리고 열리는 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어? 이제 오시나 봐요. 크게 걱정하지 마세요. 별일 없을 거예요. 오히려 재미있는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하시는 게 편해요.”
조수아는 대충 이진경의 관심을 돌리고 흐트러졌던 의자에 똑바로 자세를 잡고 앉았다.
뭐가 어쨌든 지금 자리는 한진영이 소집한 긴급회의였기 때문이다.
조지훈이 먼저 들어와 세팅된 자리로 향하자 뒤를 이어 한진영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자리에 앉으며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팀장들을 향해 양해의 말을 건네는 것으로 회의의 시작을 알렸다.
“우선 퇴근이 얼마 안 남은 시점에 이렇게 긴급회의를 소집하게 되어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하겠습니다.”
한진영은 잠시 조지훈을 바라봤다.
조지훈은 한진영의 시선에 준비가 됐다는 뜻을 전했고, 한진영은 그런 모습을 확인하고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오늘 이곳에 모인 이유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오늘 이렇게 긴급회의를 소집하게 된 이유는 세올컴퍼니 때문입니다.”
“세올컴퍼니?”
한진영의 말에 자리에 있던 팀장들은 서로서로 얼굴을 쳐다봤다.
그들에게도 세올컴퍼니라는 이름이 매우 생소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잠시 소란스럽던 분위기가 잦아지기를 기다렸다 조지훈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의자를 조지훈 쪽으로 돌려 앉으며 조지훈에게 지시했다.
“그럼 시작하도록 해.”
한진영의 지시에 조지훈은 화면을 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