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화 원수에게도 배울 게 있다면 배운다
안혁규와 한진영은 처음부터 악연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비록 볼품없어 보이는 존재로 보이지만, 안혁규는 차기 정부에서는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되는 사람이었다.
차기 정부의 수장을 지근거리에서 모셨다는 이유만으로 정부 실세에 이름을 오르내리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 들어가며 정부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게 바로 안혁규 의원이었다.
그렇게 안혁규가 막강한 권력을 휘두를 때 한진영을 만났다.
자기를 도와주면 국민연금을 비롯하여 사학연금, 군인공제회 등등 정부에서 영향을 미치는 기금의 운용권을 주겠다는 것으로 한진영을 자기 편으로 끌어오려 했다.
하지만 한진영은 안혁규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런 식으로 얻게 된 기금 운용권은 정부가 바뀌게 된다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내릴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정부가 바뀌기 전에 눈에 불을 켜고 빨아먹는 흔한 운용사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정상적인 상황 내에서도 충분히 돈을 벌 수 있는데 눈앞에 놓인 떡에 눈이 돌아가 미래를 버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모습이 안혁규에게는 눈엣가시처럼 들어온 듯했다.
안혁규는 한진영을 사사건건 괴롭혔으며, 나중에 가서는 거짓 증언으로 한진영을 게이트 사건에 몰아넣기도 했다.
자기의 제안을 거부했다는 이유만으로 한진영을 나락에 떨어뜨리는 시발점을 만든 놈이 바로 안혁규였다.
한진영은 이런 안혁규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개새끼.’
자기가 한 제안은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는 어떤 식으로든 보복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한진영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조지훈은 시시각각 표정이 바뀌는 한진영을 바라보고는 소름이 돋는 느낌을 받았다.
평소의 한진영이 보여주는 냉정함이라고는 지금 찾아볼 수가 없었다.
눈에서는 레이저가 나올 것 같으며 몸은 불이 붙을 것처럼 뜨거워 보였다.
한진영이 느끼는 감정이 그대로 느껴지는 것만 같은 조지훈이었다.
조지훈은 아무런 말 없이 한진영이 감정을 추스를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
주말이 지난 뒤 아침부터 팀장들이 한진영이 있는 사무실로 찾아왔다.
“합병 무효소송을 내는 건 어떨까?”
최석영은 법적으로 세올의 합병을 막는 것을 이야기했다.
“그걸론 막을 수는 없습니다. 무효소송보다 거래정지가 풀리는 게 먼저일 테니까요. 시간 순서를 따져봤을 때 소송을 거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최석영이 나간 다음에 고제상이 한진영을 찾아왔다.
“세올컴퍼니가 꼼수를 부린 것이 확실해 보입니다. 자기네들이 거래정지에 묶여 있는 동안 이루어진 이런 일들이 우연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혹시 합병 무효소송을 걸자는 말씀을 하시려고 오신 겁니까?”
“아니요. 저는 공매도 취소소송을 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거래 자체가 성립이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거라고 밀어붙이면 되지 않을까요?”
한진영은 고제상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거래 주체 사이에 속이는 행위가 있어야 법적 근거가 생기는 건데 이번 건에는 주체 사이에 속이는 행위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공매도 무효소송을 넣는다고 해도 기각될 게 뻔합니다.”
한진영의 말에 고제상은 고개를 숙이고 사무실을 나갔다.
그렇게 몇 명의 팀장들이 한진영의 사무실에 들어와 자기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대부분 법적 근거를 이용하여 무효나 취소 등을 유도하는 게 어떠냐는 의견이었다.
한진영은 그때마다 고개를 저었고 그렇게 하루가 거의 다 지나갈 때쯤 이진경 팀장이 한진영의 사무실로 찾아왔다.
“어서 오세요.”
한진영이 이진경 팀장이 사무실에 들어오자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으세요.”
이진경 팀장에게 응접용 소파에 앉을 것을 권한 후 한진영은 이진경의 맞은편에 앉았다.
“어떻습니까? 좀 적응이 되셨나요?”
“동료 직원들이 많이 도와줘서 적응하는 데는 문제가 없을 거 같아요.”
“다행이네요. 이직했을 때 가장 중요한 건 분위기니까요. 차부터 드시고 마저 이야기 나누도록 하지요.”
한진영은 조지훈이 타온 차를 먼저 이진경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천천히 차 맛을 음미했다.
“어떻습니까? 괜찮지요? 제가 다른 건 몰라도 차에는 굉장히 신경을 많이 쓰거든요. 좋은 차를 마셔야 머리가 맑아지고 명쾌한 판단과 냉철한 분석이 나온다고 생각하거든요.”
이진경은 한진영의 말을 들으며 차를 맛봤다.
그러나 그녀가 느끼기에는 쓰기만 할 뿐, 차 맛이 좋은지 나쁜지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한진영은 인상을 찌푸리는 이진경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홍 팀장님과 이야기를 나눠보셨습니까?”
“네. 가장 많이 이야기를 나눴어요.”
이진경은 홍대민 팀장을 비롯하여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했던 것을 생각하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곳에 온 이유도 잊어버린 채 지금까지 회사에서 느낀 것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리스크관리에 이렇게 신경을 많이 쓰실 줄은 몰랐어요. 홍 팀장님도 리스크관리를 최우선으로 생각하시고 다른 파생팀이나 채권팀 등도 모두 리스크관리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어요. 보통은 이렇게까지 하지 않잖아요.”
“그렇죠. 보통은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죠.”
한진영이 리스크관리에 신경을 쓰는 이유는 블랙문의 성장을 그들과 유니온(연합)을 구성하여 직접 들여다보았기 때문이다.
‘원수에게도 배울 게 있다면 배워야지.’
한진영은 언젠가는 블랙문을 무너뜨리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장점까지 폄하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잘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을 받아들여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진정한 복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저는 수익을 올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위기 상황에서 얼마나 잘 대처하느냐가 수익에 더 가깝게 접근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진영은 손에 들려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계속 이야기했다.
“장이 좋을 때는 누구나 돈을 벌 수 있지요. 어린아이에게 계좌를 맡겨도 돈을 벌어 오는 장이 상승장 아닙니까? 진짜는 하락장에서 벌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상승장이 10년이고 100년이고 계속된다면 리스크관리가 상관없겠지만, 10년에 한 달만이라도 하락장이 펼쳐진다면 9년 11개월 동안 번 돈이 단, 한 달 만에 모두 날아가는 게 이 바닥 생리니까요.”
한진영의 노골적인 말에 이진경을 속으로 살짝 놀랐다.
리스크관리를 신경 쓰는 정도가 아니라 큰 비중을 담아 거래에 싣는다는 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아직은 리스크관리보다는 공격적인 매매가 주목받는 시기였다.
기회가 왔을 때 크게 질러 한 번에 많이 먹으면 몇 번의 실패쯤은 큰 타격 없이 지나갈 수 있다는 게 지금 시기의 시장 참여자들 대부분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한진영은 달랐다.
한번 크게 먹고 두어 번 깨지느니 작게 작게 세 번 먹는 쪽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차피 큰 건은 자기가 다 알고 있기에 이런 전략을 과감하게 쓸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블랙문의 성장도 함께 알고 있기에 시대보다 조금 더 앞선 선택을 할 수 있었던 한진영이었다.
“저는 리스크관리팀에 꽤 큰 권한을 줄 생각입니다.”
“권한이요?”
“네. 킬스위치를 드릴 생각입니다.”
“킬스위치리라면…….”
“강제청산 권한을 리스크관리팀에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강제청산 권한을 주신다고요?”
한진영의 말에 이진경이 깜짝 놀랐다.
“다른 팀도 동의를 한 사항인가요?”
“이건 동의받을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회사를 이끌어가는 철학과 관련된 내용이니 동의를 구하고 말고 할 사안이 아닙니다.”
“그래도 다른 팀이 정말로 받아들일까요? 이건…… 너무 큰 권한인데요?”
“시기만 차이가 날 뿐이지 나중에는 모든 곳에서 받아들일 정책입니다. 그저 우리가 조금 더 빨리 진행한 것뿐입니다.”
한진영은 별것 아니라는 것처럼 말했지만 이진경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킬스위치를 내어준다는 것은 다른 팀들 위에 서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증권사를 비롯한 자산운용사에서의 리스크관리팀의 주의는 권고 수준에 불과할 뿐이었다.
갑작스러운 이상한 거래가 발견이 되면 그걸 팀장을 비롯한 대표에게 공지하고 왜 이런 거래가 나온 것인지 확인하는 작업 정도가 리스크관리팀이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한진영은 강제청산까지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겠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진경은 한진영이 하는 말이 진심인지 알지 못해 다시 재차 한진영을 향해 물었다.
“정말이세요? 강제청산 권한을 저희 팀에게 주시는 거예요?”
“맞습니다. 리스크관리팀이 정한 규칙을 벗어난 거래가 이루어질 때는 어떤 말도 무시하고 리스크관리팀 팀장의 권한으로 모든 포지션을 정리할 수 있도록 해드리겠습니다.”
“동의 절차 없이요?”
“당연하지요. 동의 절차를 구하고 청산에 들어간다면 그 찰나의 순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는 것 아닙니까?”
한눈을 잠깐만 팔아도 시장에서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는 했다.
그런 상황에 포지션을 잡고 있는 이 혹은 그의 상관과 포지션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가는 시장의 흐름을 따라잡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한진영의 판단이 옳은 것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이진경은 마음 한편이 불편했다.
“제가 잘못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 아닌가요?”
“당연하죠. 당연히 이진경 팀장님도 실수하실 때가 있으시겠죠.”
“그런데도 킬스위치를 저에게 맡기시겠다고요?”
“네. 그럴 생각입니다.”
“제가 잘못된 판단을 내린다면요? 그로 인해 큰 손해를 보게 된다면요?”
“그럴 일은 없습니다.”
한진영의 단호한 말에 이진경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조금 전에 대표님도 제 의견에 동의하셨잖아요. 저도 실수한다고요. 맞죠?”
한진영은 여전히 큰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이진경을 바라보고 웃으며 말했다.
“제 말뜻을 오해하셨군요.”
“오해요?”
“네. 팀장님께서는 당연히 실수하실 겁니다. 하지만 그로 인한 피해는 없을 겁니다. 이게 제 말의 뜻이었습니다.”
“어째서요? 제가 실수하는데 그게 왜 피해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이세요?”
“강제청산의 판단은 팀장님이 내리는 게 아니니까요.”
이진경은 한진영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던지 미간을 찌푸리고 한진영에게로 고개를 쭉 뺐다.
이진경 입장에서는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판단을 자기보고 내리라면서 강제청산의 판단은 또 자기가 내리는 게 아니라는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던 이진경이었다.
한진영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이진경을 앞에 놓고 잠시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찻잔에 담긴 찻물의 맛을 본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강제청산의 기준만 팀장님께서 만드시는 겁니다. 그리고 그 기준에 따라 청산할지 말지는 컴퓨터가 정하여 청산하게 될 겁니다.”
한진영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계속 설명했다.
“예를 들어 변동성 수치가 20인 종목의 경우에는 하루에 5%, 일주일에 20% 이상의 변동이 일어난다면 즉시 매매를 중지해야 한다는 기준을 정한다면 컴퓨터가 그 기준을 가지고 모니터링을 쭉 하는 것이지요. 그러다 그 기준을 넘어서는 일이 발생한다면…….”
한진영은 손으로 허공을 가르며 말했다.
“즉시 청산. 이게 제가 원하는 방법입니다.”
한진영은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만 있는 이진경을 바라보고 웃었다.
“간단하게 이야기했지만, 기준은 아마 더 복잡해지겠지요. 수식도 더 많이 들어갈 테고요. 그리고 그 만들어진 수식을 품고 있는 모니터링 프로그램을 만들기도 해야 할 테고요. 어려운 일일 겁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회사에는 그 두 가지를 아주 잘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한진영의 설명을 차분히 듣고 있던 이진경이 차분한 표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얼굴에는 살짝 기대하는 표정도 담기게 됐다.
이진경은 조금은 붉어진 얼굴로 한진영에게 말했다.
“월가에서 돌아간다는 관리 프로그램을 말씀하시는 거 같네요.”
“맞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한진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진경의 얼굴은 더욱 붉어졌다.
“저도 말로만 들었는데…… 제가 만들 수 있을까요?”
“만드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렵게 우리 회사로 모시지 않았습니까?”
전에 회사에서 마침 운용팀과의 트러블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이진경에게 한진영이 먼저 연락을 해왔다.
그리고 첫 만남에서부터 파격적인 연봉을 제안하며 자기 회사로 와주기를 제안했다.
이진경은 처음에는 한진영이 사기꾼인 줄로만 알았다.
너무 젊은 나이에 제안한 연봉이 터무니없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바로 세이지 자산운용의 대표인 한진영이라는 사실에 모든 것이 이해됐다.
그리고 그가 건넨 ‘우리 회사에서는 누구도 리스크관리팀에 불만을 가지지 못하게 하겠습니다’란 말에 한진영의 손을 잡았다.
“저는 그저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그거로는 부족하지요. 제가 드리기로 한 연봉에 맞는 일을 하시려면 열심히 노력하셔야 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분명 마음에 드시는 리스크관리 시스템을 만들어 낼게요.”
“저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이 팀장님의 능력을 믿으니까요.”
5년 뒤 월가 IB은행에 스카우트되어 탁월한 시스템을 구축하며 명성을 드높였던 이진경이었다.
한진영은 그걸 미리 알고 그녀를 세이지 자산운용으로 스카우트해온 것이었다.
그녀는 한진영이 그리는 그림의 커다란 퍼즐 조각이었다.
한진영은 가만히 그녀가 마음을 다스리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한진영의 찻잔에 담긴 찻물이 반쯤 사라졌을 때 이진경은 깊은 심호흡과 함께 이곳에 찾아온 이유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