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화 한진영에 대한 믿음
최석영이 방송에서 나와 이야기한 것의 파급력은 놀라웠다.
여러 곳에서 한진영 말을 반박하는 리포트들이 쏟아져 나온 것이었다.
-세이지 자산운용의 말은 터무니없는 이야기입니다. 시장의 기본적인 메커니즘도 모르고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생각해보십시오. 프랑스의 대선 결과에 따라 그리스 운명이 소용돌이친다? 어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한단 말입니까?
-그뿐만이 아닙니다. 분명 QE3는 없다고 버냉키 의장이 못을 박았는데, QE3가 실시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실망감에 미국 증시가 하락한다니요? 아니 하지도 않는 것에 실망한다는 말이 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이건 그야말로 시장 참여자들을 농락한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방송에 나온 관계자들은 세이지 자산운용과 최석영을 노골적으로 비난하기 바빴다.
그들은 연일 최석영의 발언은 초보자의 허무맹랑한 기대와 같은 이야기밖에 안 된다며 깎아내렸다.
이런 모습은 하루하루 날이 갈수록 더욱 강해져 갔다.
아직 핏덩이에 불과한 자산운용사가 시장을 혼란스럽게 만든다며 비난을 넘어 조롱하는 곳도 생겨났다.
이렇듯이 주식 관련 사업을 하는 회사와 관련자들이 세이지 자산운용을 욕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주식시장이 그들의 삶의 터전이었기 때문이다.
주식시장이 좋다고 해야 새로운 투자자들이 시장에 진입할 수 있었다.
시장이 좋고 많은 사람이 돈을 번다는 이야기가 돌아야 신규 유입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새롭게 들어온 사람을 통해 돈을 벌어야 하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생존방식이었다.
그래서 항상 좋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특성이었고, 그건 주식시장이고 부동산시장이고 다르지 않았다.
돈이 도는 곳은 항상 좋다고 말해야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이 먹고살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좋지 않다고 이야기하고 있으니 관계자들 입장에서는 세이지 자산운용과 최석영이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그들은 날이 갈수록 천하의 죽일 놈처럼 세이지 자산운용과 최석영을 물어뜯어 갔다.
분위기가 점차 격해져 가자 이진경은 걱정되는 얼굴로 최석영에게 말을 걸었다.
“괜찮으세요?”
“네? 뭐가요?”
최석영은 퍼먹는 요거트를 들고 자기를 찾아온 이진경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고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미안한 듯이 말했다.
“아~ 죄송해요. 이게 냉장고에 있던 마지막이 요거트였네요. 제가 조 비서에게 말해서 내일 바로 채워 넣으라고 할게요.”
이진경은 자기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최석영을 향해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최석영은 그런 이진경의 표정을 보고 크게 무언가를 깨달은 듯이 인상을 찌푸리고 요거트를 내밀었다.
“혹시 이거…… 이 팀장님 거였어요?”
“아니요. 제거 아니에요.”
최석영은 아니라는 말에 굽혔던 몸을 펴고 큰 근심을 털어냈다는 듯이 즐거운 표정으로 다시 요거트를 퍼먹기 시작했다.
이진경은 그런 최석영의 모습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최 차장님.”
“네?”
여전히 요거트를 먹는 것을 멈추지 않은 최석영은 스푼을 부지런히 입에 넣으며 대답했다.
이진경은 그런 최석영을 향해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혹시 지금 분위기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모르세요?”
“분위기요? 무슨 분위기요?”
“밖에서 차장님을 어떻게 말하는지 모르시냐고요?”
“아~ 알죠.”
이진경의 말에 짧게 대답한 최석영은 요거트의 빈껍데기를 아쉬운 듯이 내려봤다.
최석영은 혹시라도 남아있는 것이 있지 않겠느냔 생각으로 바닥을 박박 긁으며 말했다.
“역시 하나는 아쉬워요. 그렇죠? 너무 작게 만들었어. 좀 크게 만들어야지 이걸 누구 코에 붙이라고 이렇게 작게 만드는지 모르겠어요.”
이진경은 이 상황에서도 딴소리하는 최석영을 보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했다.
최석영은 그런 이진경을 보고 손을 들어 미안함을 표했다.
“이 팀장님. 미안해요. 잠시만요.”
그러고 나서 지나가는 조지훈을 불러 세웠다.
“조 비서.”
“네?”
조지훈이 다가오자 최석영은 빈 요거트 껍데기를 내밀며 말했다.
“이것 좀 많이 사다 놔. 하나 먹으려니까 아쉽다.”
조지훈은 최석영이 내민 요거트를 요리조리 살폈다.
“이거 제거 같은데…… 혹시 제거 차장님이 드셨어요?”
“어? 뭐가?”
의심하는 듯한 조지훈의 모습에 최석영이 잠시 움찔하며 요거트 껍데기를 이진경에게 내밀었다.
이진경은 최석영이 내민 요거트 껍데기를 받아서 들었다.
최석영은 요거트 껍데기를 받아 들고 어리둥절해 하는 이진경을 향해 눈을 찡긋거린 후 말했다.
“이 팀장님 잘 먹었습니다. 빈껍데기는 제가 치워도 되는데 이거 참…… 다음에는 제가 하나 사 드리도록 할게요.”
조지훈은 최석영과 이진경의 손에 들린 요거트 빈 껍데기를 번갈아 바라본 후 한숨을 내쉬었다.
“요새 자꾸 누가 제가 사다 놓은 냉장고 속의 요거트를 훔쳐먹는 느낌이 들어서요. 아~ 누구지?”
조지훈이 잠시 의심스러운 눈으로 최석영을 바라봤지만, 최석영은 투명하고 맑은 눈으로 왜 자기를 쳐다보냐는 표정을 지어 보이기만 했다.
조지훈은 그런 최석영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하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떠나기 전에 최석영을 향해 조금 전 그가 한 말에 대한 대답을 건넸다.
“요거트도 앞으로 직원 간식으로 올려놓아 볼게요. 그런데 이게 유통기한이 짧아서 많이는 사다 놓지는 못할 거예요.”
“어? 어…… 알았어. 나는 그냥 먹어보니 맛이 좋아서 사다 놓았으면 하는 바람에 제안한 거였어. 신경 쓰지 마. 안 되면 할 수 없는 거니까.”
“아니에요. 그래도 다른 사람도 아니라 최 차장님께서 드시고 싶으시다는 데 신경 써야죠. 그럼 저는 볼일이 있어 먼저 가볼게요.”
“어? 어…… 그래. 어서 가봐. 바쁠 텐데 내가 잡아서 미안하네. 가봐.”
최석영이 어서 가보라고 손짓하자 조지훈이 고개 숙여 인사를 한 후 자리를 떠났다.
최석영은 멀어져 가는 조지훈의 뒷모습을 보고 이마의 땀을 훔쳤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진경의 손에 들려있던 요거트 껍데기를 다시 돌려받으며 웃었다.
“이게 조 비서 거였나 보네요. 어쩐지 보지 못하던 게 있다 해서 이상하긴 했어요.”
“보통은 이상하면 안 먹지 않아요?”
최석영은 이진경의 말에 정말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요거트 빈껍데기를 앞에 내밀었다.
“저도 그러려고 했는데 유통기한이 이틀밖에 남지 않아서…… 그래서 제가 먹어 없앤다는 생각으로 그런 거예요. 저도 일부러 먹으려고 한 건 아니죠.”
“그래도 누가 주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 않으셨어요?”
이진경이 계속 요거트 이야기를 꺼내자 최석영은 내밀었던 요거트 껍데기를 뒤로 물린 후 조금 전 이진경이 꺼낸 말로 화제를 돌렸다.
“밖에서 제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다고요?”
최석영이 화제를 돌리자 이진경은 요거트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어쨌든 이곳에 온 이유는 요거트 때문이 아니라 외부에서 떠드는 세이지와 최석영에 관한 이야기 때문이었다.
요거트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정작 중요한 이야기를 놓칠 수 없었던 이진경은 다시 한번 최석영에게 걱정스러운 말을 건넸다.
“정말 괜찮으세요? 밖에 사람들이 최 차장님을 안 좋게 보고 있는데요?”
“어차피 오래가지 않아요.”
“뭐가요?”
“저를 안 좋게 보는 거 말이에요.”
최석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손을 휘저으며 웃었다.
“저러는 게 며칠이나 갈까요? 한 달? 두 달? 제가 봤을 땐 길어야 열흘, 짧으면 내일이라도 쏙 들어갈 말들이에요.”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세요?”
“지금까지 그랬으니까요.”
“지금까지…… 그랬다고요?”
최석영은 별일도 아닌 일에 그런다는 듯이 이진경을 슬쩍 흘겨보고는 뒤로 물렸던 요거트 껍데기를 들어 안을 살피며 말했다.
“이런 일이 이번이 처음인 것 같아서 그러세요? 우리는 이런 일이 이번이 몇 번째인지 모를 정도예요.”
“매번 그랬다고요?”
“네. 매번 그랬죠.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항상 우리의 포지션은 시장의 기대와 반대였으니까요. 그러니 포지션을 잡고 있는 이들이 우리를 곱게 보겠어요? 뭐 그래도 이번에는 유독 강렬하게 반응하는 게, 우리 포지션을 외부에 공개해서 지난번보다 조금 더 강렬하기는 하네요. 하지만 그래 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왜요?”
“우리가 맞을 테니까요.”
너무나 당연하다는 말에 이진경을 할 말을 잃어버렸다.
차라리 요거트 빈껍데기를 건네줬을 때는 이게 뭐냐는 말이라도 할 말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말조차 아무런 의미가 없는 상태였다.
마치 해가 지면 날이 어두워진다는 듯이 너무나 당연하게 말하는 최석영의 태도에 이진경이 이렇게 찾아온 일이 호들갑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최석영은 여전히 아쉬운 표정을 한 채 이진경을 향해 말했다.
“두고 보세요. 우리를 비난하고 있던 이들이 어떻게 나오는지요. 아유~ 이거 맛있었는데…… 아쉽네.”
두고 보라는 말을 남긴 채 최석영은 이진경을 지나쳐 자리로 돌아갔다.
이진경은 지난 회의실에서 이야기 나눴던 조수아나 지금 최석영이나 반응이 모두 한결같음을 알게 됐다.
한진영에 대한 믿음.
신을 믿더라도 이렇게까지 믿을 수 있을까에 대해 의문이 들 정도로 맹목적인 믿음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진경은 도대체 어디서 저렇게 저들을 휘어잡을 수 있는 믿음이 생기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이진경의 궁금증을 해소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최석영의 믿음 대로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비난과 조롱 섞인 말들을 던져내던 이들이 하나둘 입을 다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
2,000을 탈환한 이후 횡보를 이어가던 코스피가 2,000을 살짝 깨며 고개를 수그렸다.
스페인의 국채 발행이 성공하며 유럽에 대한 불신을 지워갔음에도 미국의 신규실업수당 청구 건수가 예상치를 상회한다는 소식에 뉴욕증시가 고개를 수그린 여파 때문이었다.
지수가 2,000을 깨고 이동평균선마저 하강 곡선을 그리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그동안 외면했던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리스.
작년 지긋지긋하게 증시의 발목을 잡았던 그리스 이야기에 사람들 사이에서 다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는 듯이 기관과 외국인이 동반 매도세를 보이며 지수를 1,970대까지 끌어 내렸다.
유로존 재정위기에 2,000이 하향 이탈하자 최석영과 세이지 자산운용을 비난하던 목소리가 점차 힘을 잃어갔다.
그리고 혹시 모른다는 생각이 점차 시장 관계자들 사이에서 폭넓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지금 몇 거래일째 외국인들이 팔고 있는 거지?”
홍대민이 곁에 앉아있는 팀원을 향해 질문했다.
“6거래일째입니다.”
“6거래일째라…….”
“매도 금액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오늘 644억의 매도를 보였고, 6거래일 동안 평균 500억 정도의 매도를 유지했을 뿐입니다.”
“토탈 3~4천억 정도란 거지?”
“네. 맞습니다.”
“많지는 않은데…….”
홍대민은 찜찜하게만 보이는 지수를 바라봤다.
1,970대까지 내려왔던 지수는 야금야금 떨어져 1,960대까지 내려온 상태였다.
등락 폭이 눈에 띄게 심하게 움직이지는 않았다.
종목별 움직임도 크지 않았다.
시가총액 상위 주들 중심으로 혼조세를 보이는 것이 전형적인 횡보장세의 모습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런데 계속 고개를 수그리고 있다 이거지.”
홍대민은 차트에서 보이는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열심히 모니터링하는 팀원들을 향해 지시했다.
“앞으로 일주일이야. 일주일 동안 나머지 다 정리하고 손 털어야 해. 알았어?”
“네. 알겠습니다.”
홍대민은 지시를 내리고 다시 차트를 바라보고 혼잣말을 내뱉었다.
“다이빙대에 올라서면 이제 뛰어내릴 일만 남은 거지. 거의 다 왔네. 이제 살짝 올랐다가 다이빙대에서 점프를 하겠어.”
전형적인 약 반등 뒤 급락의 모습을 보이는 차트였다.
홍대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여기까지 오고 나서야 차트의 흐름이 보였는데, 한진영은 이런 모습이 보이기 전부터 이런 상황을 예상했다는 것에 감탄사가 저절로 나오고 있었다.
감탄사를 내뱉는 것은 홍대민만이 아니었다.
이진경 또한 자기 자리에서 시장의 흐름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몇 달 동안 이야기 나오지 않던 유럽 이야기에 갑작스러운 미국 시장 침체 이야기에…… 도대체 몇 수를 내다본 거야?”
이진경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쌓여가는 뉴스들을 바라봤다.
뉴스 속의 이야기는 모두 한진영이 이야기한 대로였다.
이진경은 굳게 닫혀 있는 대표실의 문을 한번 돌아보고 모니터로 시선을 다시 돌렸다.
“그럼 이제 정말 시장의 충격이 오는 건가?”
이진경은 놀랍다는 표정으로 시장에 쏟아져 나오는 뉴스들을 살폈다.
다이빙대에서 점프하기 위해서는 다이빙대에 올라가는 모습이 필요했다.
그래서 코스피는 다이빙대에 올라가기 위해 1,960대까지 떨어져 내렸던 지수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국제 신용평가사인 스탠다드앤푸어스(S&P)가 스페인의 국제 신용등급을 A에서 BBB+로 두 단계 강등시키는 뉴스가 나왔지만, 시장은 스페인의 신용등급 강등보다 벤 버냉키 연준의장이 추가 경기부양 발언에 더 관심을 가지는 모습을 보였다.
우선은 유럽의 위기보다 미국의 경기부양이 시장에 끼치는 영향이 더 컸기 때문이다.
지수는 벤 버냉키의 발언에 힘을 얻어 1,970대를 넘어 1,980대까지 꾸준히 오르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추가 반등이 예상되는 자세를 취하며 이제 조정은 끝이 났으며 2,100자리를 가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시장은 뻔히 보이는 악재에도 눈과 귀를 닫는 모습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