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증권사 생활-280화 (280/650)

280화 세이지라는 마법의 단어가 모든 것을 바꾼다

팀장들이 기대했던 건 한 달 혹은 빠르면 보름 내 완판 정도를 기대했다.

오늘 내 완판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펀드시장이 한파로 얼어붙었다는 평가를 받는 지금 하루 만에 완판된다는 것은 꿈과 같은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루는 물론이고 반나절만의 완판도 아니라 5분 만에 완판됐다고 했다.

팀장들은 조지훈의 말에 모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조지훈은 그런 팀장들을 향해 두리은행에서 들어온 이야기를 전했다.

“지점 문이 열리기 전부터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도 있었다고 해요. 1억, 2억은 흔하고 10억 이상의 고액 가입자들도 서른 명이나 된다고 그래요.”

“10억 이상?”

“문이 열리기 전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모두 조지훈이 건넨 소식에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이돌 콘서트 티켓을 팔 때나 나올만한 이야기를 들은 것에 다들 꿈을 꾸는 기분인 것만 같았다.

“다들 여기 계셨네요.”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익숙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한진영이 평소의 모습과 같이 다가오고 있었다.

“대표님. 들으셨어요?”

“뭘 말씀입니까?”

“우리 펀드 말입니다. 펀드. 그거 5분 만에 완판됐다고 해요.”

고제상 팀장이 기쁜 얼굴을 숨기지 못하고 한진영에게 말했다.

한진영은 얼굴 가득 웃고 있는 고제상을 보고 마주 웃으며 말했다.

“그렇군요. 잘 됐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네. 놀랍네요.”

말은 놀랍다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얼굴은 당연한 일이 일어난 것뿐이라고 이야기하는 것만 같았다.

“혹시 아셨습니까?”

이런 것까지 알았겠냐는 생각으로 대충 던진 말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대충 예상은 했습니다.”

“예상하셨다고요?”

자리에 있던 팀장들은 모두 놀란 얼굴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하나의 펀드가 목표 설정 금액을 채우는 데 걸리는 시간은 보통 3달 정도를 예상하고는 했다.

유명한 펀드매니저가 참여했거나 설계단계에서부터 화제가 된 펀드의 경우에는 며칠 내에 설정 금액을 넘기는 사례도 간혹 있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신생회사의 펀드가 그것도 하루도 아니라 몇 분 만에 설정 금액을 달성할 줄은 세이지 자산운용의 팀장들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고제상은 놀란 눈으로 한진영을 향해 물었다.

“저희 펀드가 왜 이렇게 잘 팔린 거죠?”

“타이밍이 좋았으니까요.”

“타이밍이요?”

한진영이 손가락으로 코스피 지수가 떠 있는 모니터링 화면을 가리켰다.

“정확하게 최 차장님이 방송에 나온 날이 저점이었지요. 그리고 그 방송에서 우리는 매수를 했다는 뜻을 확실하게 밝혔고요. 그러니 머릿속에 강렬히 남아 있었을 겁니다.”

“뭐가 말입니까?”

“복구하는 방법은 우리 펀드에 가입하는 것밖에 없다고 하는 것 말입니다.”

한진영은 강보합을 보이는 지수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계좌가 플러스일 때는 세상 누구도 무섭지 않겠지만 파란색이 조금이라도 보이는 순간 사람들은 자신감을 잃기 마련이니까요. 게다가 이번처럼 단기간에 무섭게 빠져 내려오는 것을 경험한 사람들은 더더욱 자신감을 잃고 말지요. 이런 때 짜잔.”

한진영이 손을 양쪽을 들어 올리고는 팀장들을 향해 활짝 웃었다.

“구원자처럼 우리가 등장했으니 얼마나 좋겠습니까? 마치 목마름 속에 찾아온 오아시스처럼 느껴지지 않았겠습니까?”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이진경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한진영에게 물었다.

“혹시 그럼 금요일로 방송을 잡은 것도…….”

“계산되어 있던 거였습니다.”

“아~ 역시.”

이진경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그러면 그렇지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 더는 의문을 품지 않은 이진경은 한진영의 열렬한 지지자로 변해 자리에 서 있었다.

이런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던 조수아와 최석영은 말없이 이진경을 바라보고 웃었다.

조수아와 최석영이 웃는 사이 한진영은 홍대민을 향해 말했다.

“운용팀을 조금 더 키워야겠습니다. 사람도 뽑고 훈련도 시키고 말입니다.”

“네. 안 그래도 저도 대표님께 건의드리려고 했던 겁니다. 운용파트를 세분화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역시 홍 팀장님과 제 생각은 같네요. 제가 전권을 드릴 테니 구상부터 채용까지 홍 팀장님의 지휘 아래 진행해 주세요. 과거와는 달리 앞으로는 팀별 운용이 대세가 될 겁니다.”

한진영은 자리에 있던 팀장들 모두를 쓸어보며 말했다.

말하는 대상이 홍대민 하나만이 아니라는 모습이었다.

“과거에는 컨트롤 타워가 자리를 잡고 팀들의 움직임을 모두 조종했다면 앞으로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컨트롤 타워는 감시자의 역할만을 할 뿐, 팀의 움직임에는 관여하지 않는 방향으로 트렌드가 바뀌어 갈 겁니다.”

“파편화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파편화가 되는 것이지만 각 개개의 팀이 모두 결정권을 가지고 있게 되는 것이 다른 겁니다.”

“과거의 본부가 하나의 팀으로 작게 소형화가 됐다는 편이 맞는 표현이겠군요.”

“바로 그렇습니다.”

한진영은 홍대민의 말에 기쁜 듯이 즐거워했다.

“역시 홍 팀장님과의 대화는 저에게 즐거움을 줍니다. 대화가 잘 통하는 상대를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인데 말입니다.”

“대표님께서 저를 그렇게 칭찬해주시니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하하. 그러지 마세요.”

한진영은 홍대민의 양어깨를 잡고 가볍게 두드린 뒤 말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이번 일의 전권은 모두 홍 팀장님께 드리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맡겨주십시오. 대표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결과를 가지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기대하겠습니다.”

한진영은 홍대민의 어깨를 다시 한번 두드리고 이진경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이 팀장님 제 뜻이 무엇인지 아시겠죠?”

“알고 있어요. 컨트롤 타워는 조정자가 아닌 감시자의 역할을 한다는 게 바로 리스크관리팀이 해야 할 일이라는 거죠?”

“역시 이 팀장님과도 대화가 잘 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똑똑히 감시해서 어떠한 일도 벌어지지 않도록 할 테니까요.”

한진영은 이진경에게까지 지시를 내리자 김준하를 불렀다.

“김준하 팀장은 나하고 가면서 이야기 좀 나눕시다.”

한진영은 자리에 있던 사람들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몸을 돌려 사무실로 돌아갔다.

김준하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한진영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조지훈까지 세 사람이 무리에서 멀어지자 김준하가 한진영의 곁에 다가가 말했다.

“다들 대표님의 말씀을 한 번에 알아듣네요.”

“신기해?”

“그럼요. 신기하죠. 대표님이 가려는 방향을 한 번에 알아채는 사람이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둘이나 있다는 게 신기하죠.”

“둘뿐이 아니야.”

“둘만이 아니라고요?”

한진영은 김준하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도 한 번에 알아들을걸. 너뿐만 아니라 다른 팀장들도 다 그럴 거야.”

“다른 팀장들도 다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내가 그런 사람들만 모았으니까.”

당연하다는 듯이 김준하의 어깨에 올린 손으로 어깨를 두드렸다.

아무렇게나 모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하나하나 모두 이 바닥에서 앞으로 이름을 날릴 사람들이었다.

한진영은 그들이 명성을 얻기 전에 먼저 직접 영입하여 회사에 끌고 온 것이었다.

오히려 한진영이 하는 말을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는 게 이상하게 느껴질 만큼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만 이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한진영은 김준하를 향해 어깨를 둘렀던 팔을 내리고 자기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야.”

“그러면 뭐가 중요한데요?”

“내가 이야기한 내용의 핵심. 바로 네가 앞으로 할 일이 중요하지.”

“저요? 제가 할 일이요?”

“그래. 너.”

한진영은 손가락으로 김준하의 가슴을 가리키고 말했다.

“감시자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겠어?”

“시스템이 이상이 없는지 모니터링하는 프로그램이요?”

“그래. 거기에 더해 프로그램이 알아서 판단하고 결정까지 내리면 더 좋겠지.”

한진영은 김준하를 돌아보고 있던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본 채 걸어 나갔다.

김준하는 그런 한진영과 어깨를 나란히 한 채 한진영이 하는 이야기를 가만히 귀담아들었다.

“팀을 세분화하는 데는 리스크를 줄이자는 의미가 가장 커. 얼마 전에 옵션에서 숫자 잘못 입력해서 회사 하나 날아간 거 알지?”

“네. 들었어요. 거기도 꽤 오래된 회사라던데…….”

50만 원짜리 풋옵션을 1만 주 매도한다고 해야 하는 것을 만원에 50만 주 매도로 잘못 입력한 일이 있었다.

거래는 단번에 체결이 되었으며 회사가 실수를 깨달았을 때쯤에는 지수가 폭락을 이어가며 풋옵션이 탄력적으로 상승하는 중이었다.

50만 원짜리 풋옵션이 1,800이 깨지며 100만 원을 훌쩍 넘기고 말았다.

회사는 거래가 잘못되었으며 취소해달라고 읍소를 할 때쯤에는 150만 원까지 치솟아 오른 뒤였다.

직원 한 명의 실수로 회사는 150억에 가까운 손해를 입었고, 이 일로 결국 자산운용사 한 곳이 파산하고 말았다.

“실수라고 하더라도 상대방 측에서 받아들여 주지 않으면 이 판에서는 무를 수가 없어. 봤지?”

“네. 외국계 증권사들이 죽어도 무르지 않았던 거 똑똑히 봤어요.”

“그래. 바둑에서도 그렇고 하다못해 동네 고스톱판에서도 수를 무르는 건 쉬운 일이 아닌 데 돈이 걸린 판에서 그걸 그리 쉽게 해주겠어?”

한진영은 사무실 앞에 서서 김준하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제일 좋은 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게 가장 중요한 거야. 5,000억을 움직이는 하나의 팀보다 500억씩 움직이는 열 개의 팀이 더 안전한 건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 거야. 그리고 그 열 개의 팀을 감시하는 프로그램까지 있다면 위험은 극도로 낮아지지.”

한진영은 조지훈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이야기는 마무리되어가니 문을 열어도 좋다는 뜻이었다.

조지훈이 문을 열자 한진영은 반쯤 몸을 문에 밀어 넣은 채 말했다.

“그 프로그램의 알고리즘을 네가 만드는 거야. 이진경 팀장하고 잘 상의해서 스스로 위험도를 계산하여 상황을 판단하고 위험하다 싶으면 알아서 정리까지 할 수 있는 것. 이번에 망한 곳이 가장 큰 잘못이 뭔지 알아? 혹시나라는 생각으로 정리해야 할 타이밍까지 놓친 것. 그게 가장 큰 실수였어.”

옵션에서 실수하여 망한 자산운용사가 살 방법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입력이 실수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만이라도 바로 청산했다면 이런 지경까지 몰리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피해를 인식했을 때만 해도 망할 정도까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 심리상 손해를 조금이라도 줄이고 싶은 마음에 정리하지 못한 것이 치명타로 다가온 것이었다.

1,800이 깨지는 것을 본 순간 더는 하락하지 않겠냐는 얄팍한 기대를 한 것이 1,720까지 그대로 두들겨 맞게 만들었고, 그 결과 회사를 망하게 만든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나는 사람이라면 실수를 모두 한다고 생각해. 그래서 실수를 막기보다 실수한 이후의 대응이 중요하다고 봐. 그런데 사람이 개입하면 대응이 어려워.”

한진영은 이번에 문을 닫은 곳을 떠올리고 고개를 저었다.

“위험이 발생하여 특별한 조치가 취해지는 순간에는 사람의 개입이 없어야 해. 기계가 강제로 커트하는 것. 나는 그런 시스템을 만들고 싶어. 그리고 그 시스템을 만드는 중심에 있는 알고리즘은 네가 만드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알고 있어요. 그냥 단순히 5% 하락, 10% 손실과 같은 것이 아닌 시장 상황과 분위기 그리고 여러 가지 요인들을 수치화하여 그때 상황에 맞게 처리할 수 있는 알고리즘. 그걸 만들라는 말씀이시죠?”

한진영은 김준하의 말에 웃으며 손등으로 김준하의 가슴을 두드렸다.

“너도 한 번에 잘 알아듣네.”

한진영의 말에 김준하는 머쓱하게 웃었다.

조금 전 이곳에 오며 물었던 말을 이제는 자기가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김준하를 바라보고 말했다.

“우리 회사 팀장님들은 모두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룰 만한 분들이야. 그건 너도 마찬가지고. 그러니 잘 부탁해.”

“네. 믿고 맡겨주세요.”

한진영은 씩씩한 김준하의 대답에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한 후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

설정 금액 5,000억.

투자처는 미국을 비롯한 해외.

수수료는 파격적이다 못해 국내에서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생소한 조건.

펀드 운용사는 이제 설립된 지 1년이 갓 넘은 신생 회사.

펀드매니저는 물론이고 사장부터 말단 직원까지 평균 연령이 서른을 넘기지 않는 햇병아리 집합체.

나열된 조건만으로는 펀드의 성공을 자신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한가지 단어가 더해진다면 모든 것이 바뀌는 마법이 펼쳐지게 된다는 것을 업계 관계자들은 이번에 느꼈다.

운용사는 세이지 자산운용.

세이지 자산운용이라는 글자가 붙기 전까지 펀드 설정 금액 5,000억은 매우 큰 금액처럼 느껴졌었다.

그러나 세이지라는 글자가 붙자 5,000억이라는 금액이 소수의 인원에게만 문을 열어준 것처럼 느껴지게 됐다.

해외를 공략한다는 말은 좁고 한정적인 국내를 벗어나 넓고 무한정의 해외를 공략한다는 말로 바뀌었다.

수수료는 고객을 위한 조건으로 느껴졌으며, 직원들이 젊은 것은 단점이 아니라 장점으로 보이는 마법이 펼쳐지고 말았다.

패기의 젊은이들.

우물 안과 같은 국내를 벗어나 바다와 같은 해외에 나가 싸운다.

그리고 수익이 나왔을 때만 수수료를 요구하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기까지 했다.

설정 금액은 한정적인 5,000억.

기회는 모두에게 열려있는 것이 아니다.

세이지라는 단어가 더해지며 보여주는 마법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너도나도 세이지가 최초로 내놓은 펀드에 가입하고 싶어 한 것이었다.

업계는 시장이 차갑게 얼어붙은 시점에 이렇게 폭발적인 성공을 일으킨 세이지 자산운용을 흥미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렇게 흥미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곳은 같은 업계만이 아니었다.

증권업계를 넘어 정치권에서도 세이지 자산운용에 큰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한진영은 정치권의 관심에 다시 한번 동우 법률사무소 건물 앞에 서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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