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화 내가 너희를 이용한다
동우 법률사무소를 올려다보고 있는 한진영에게로 김교철의 비서인 박경진이 다가왔다.
“오셨습니까?”
“안녕하셨습니까?”
한진영은 올려다보던 것을 멈추고 곁에 다가온 박경진을 향해 웃으며 인사했다.
“자주 뵙습니다.”
“하하. 얼굴이야 달라진 것은 없지만 대표님의 명성은 지난번과는 달라져 있더군요. 축하드립니다.”
“축하는요. 그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운이라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루하루 드높아지는 세이지 자산운용의 명성에 어르신께서도 관심이 많으십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한진영이 박경진을 향해 고개 숙여 인사했다.
박경진은 그런 한진영을 흐뭇한 미소로 바라봤다.
이곳에 처음 온 사람 중 몇몇은 비서라는 신분 때문에 박경진을 우습게 보는 사람도 있었다.
김교철의 말을 전하는 일종의 비둘기처럼 박경진을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박경진은 그렇게 우스운 사람이 아니었다.
옛 황궁에서도 황제보다 곁에 있는 환관이 권력을 더 잘 휘두르듯이 박경진이 휘두르는 권력의 힘은 무시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가뭄에 콩 나듯이 얼굴을 보는 김교철보다 자주 만나는 박경진이 오히려 더 의미 있는 힘을 휘두를 때가 많았기에 어쩌면 김교철보다 더 잘 보여야 하는 사람일 수도 있었다.
한진영은 지난 시절의 경험으로 그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박경진 앞에서 스스로를 낮추었던 것이었다.
박경진은 젊은 사람이 빠르게 높은 자리에 올라갔으면서도 겸손할 줄 아는 모습에 한진영을 새삼스럽게 다시 봤다.
그리고 따뜻한 시선으로 한진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올라가시지요. 다른 분들께서 모두 기다리시겠습니다.”
한진영은 숙였던 허리를 다시 펴고 서서 박경진을 향해 물었다.
“혹시 어르신께서도 와계신 건가요?”
“아닙니다. 제가 어르신을 대신하여 온 겁니다. 어르신께서는 이런 자리를 불편해하셔서요.”
박경진은 말을 마치고 한진영에게 올라갈 것을 다시 권했다.
한진영은 조지훈을 돌아보고 이곳에서 기다리라는 말을 건넨 후 박경진과 함께 동우 법률사무소의 꼭대기 층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을 때 한진영은 박경진을 향해 말했다.
“다음부터는 직원을 내려보내시지요. 이렇게 직접 내려오시니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하하. 한 대표님. 너무 그렇게 자신을 낮추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뭐라고 그러십니까?”
말은 괜찮다고 이야기하지만 목소리에서 기분 좋은 느낌이 그대로 전해지는 박경진은 한참을 웃고는 말했다.
“오늘은 제가 한 대표님께 할 말이 있어서 내려온 겁니다. 그러니 너무 그렇게 부담스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에게 하실 말씀이 있다고요?”
한진영이 주의 깊게 듣겠다는 태도로 박경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박경진은 남아있는 엘리베이터 층을 확인하고 한진영에게 말했다.
“시간이 부족하니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자리에서 어떤 부탁을 듣던지 간에 들어주지 마십시오.”
“부탁을…… 들어주지 말라고요?”
“네. 그것만 명심하시면 됩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앞으로 한 대표님께는 좋은 일만 있을 겁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럼…….”
짧은 말을 건네자마자 엘리베이터가 맨 위층에 도착하고 말았다.
한진영은 박경진이 건넨 말이 무슨 뜻인지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박경진은 그저 웃으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것을 권하기만 했다.
한진영은 박경진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한 채로 엘리베이터에서 몸을 내렸다.
그러나 엘리베이터에서 먼저 내리자마자 박경진이 뒤에 위치하자 한진영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러면 그렇지. 네 놈들이 나를 그냥 부르지는 않았겠지.’
한진영은 오늘 그를 부른 이유가 박경진의 말을 통해 훤히 알게 됐다.
평소라면 이렇게 빨리 부를 리가 없는 그들이었다.
비록 한진영을 받아들이기로 결정을 했지만,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한진영을 살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특이하게도 한진영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또 그를 이곳에 부른 그들이었다.
한진영은 그런 그들의 속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박경진의 말을 듣고 알게 됐다.
돈.
그들이 한진영에게서 돈 냄새를 맡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부탁을 들어주지 말라는 박경진의 말을 통해 그들이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 단번에 파악이 됐다.
한진영은 자기가 겸손한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면 박경진이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걸 알았다.
박경진에게는 선택권이 있었고, 그 선택권을 자기가 원할 때만 쓰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입꼬리를 말아 올린 표정을 급히 지우고 다시 박경진 앞에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박경진은 그런 한진영의 표정에 즐거운 듯이 웃으며 한진영을 안으로 안내했다.
한진영은 박경진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생각했다.
‘너희들이 나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들을 이용하는 거다.’
한진영은 얼굴 가득 가면을 쓰고 박경진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
지난 시절을 빼고도 세 번째 찾아와서 그런 것인지 이제는 바 안의 룸이 익숙한 한진영이었다.
그리고 한진영에게 이런 익숙함을 전해주는 이유는 안에 자리하고 있는 사람 또한 익숙해서일 수도 있었다.
“어서 와요.”
한진영과 가장 많이 만났던 안혁규 의원이 가장 먼저 한진영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셨습니까?”
한진영은 안혁규에게 먼저 인사한 뒤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찾아가 인사를 건넸다.
서주한 변호사와 이의경 변호사 그리고 채영석과 현봉국까지 지난번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 그대로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번에 못 보던 사람 또한 자리에 있었다.
“한 대표님. 인사하시지요. 여기는 주기문 전 장관님이십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주기문 장관님.”
법무부 장관을 지낸 주기문은 한진영의 인사에 기분 좋게 반응했다.
“전 장관이라네. 그리고 지금은 그냥 일개 변호사일 뿐이야. 왜들 자꾸 장관이라고 부르나?”
왜 장관이라고 부르냐면서도 그의 말에는 싫지 않은 투가 묻어 나오고 있었다.
주기문의 말에 안혁규가 웃으며 말했다.
“장관님. 권토중래하셔야죠. 저희 대표님께서도 항상 주 장관님 이야기를 많이 하십니다.”
“대표님께서? 정말인가?”
안혁규의 말에 주기문은 진지한 표정으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다른 사람이 아닌 안혁규가 모시는 대표님이라는 분이 누구인지 주기문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항상 대표님께서는 주 전 장관님께서는 법무부 장관으로 끝나실 분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법무부 장관만으로도 난 과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죠. 더 많은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까? 예를 들면 총리라든지…….”
“총리?”
주기문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 모습에 자리에 있던 채영석 등은 주기문을 향해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주 총리님. 축하드립니다.”
“역시 제 생각과 대표님의 생각은 같군요. 주 총리님은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분이라고 저도 오래전부터 생각했습니다.”
“다들 왜 이러나? 총리라니?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오해한다네.”
채영석과 현봉국의 말에 주기문이 연신 손사래를 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서 즐거운 표정이 뚝뚝 떨어지는 것이 지금의 자리를 즐기는 것만 같았다.
한진영은 슬쩍 눈을 돌려 이의경 고문의 표정을 살폈다.
주기문과는 사시 출신 선후배 사이로 지난 정권에서 함께 정부에서 일했던 경험이 있었던 이의경이었다.
하지만 한진영은 이의경이 주기문에게 일종의 경쟁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마치 총리가 된 것 같은 축하를 듣는 주기문을 보는 이의경의 얼굴이 궁금해 살핀 것이었다.
‘역시 똥 씹은 표정을 하고 있네.’
한진영은 자기의 생각대로 이의경이 똥 씹은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확신했다.
‘이의경을 이용한다.’
한진영은 지금 자리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박살 내기 위해 이의경을 이용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됐다.
그라면 경쟁심이 밑바탕에 깔린 시샘으로 인해 주기문을 비롯한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박살 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기 위한 한 가지 확인 작업이 필요한 것을 마침 안혁규가 이의경에게 이야기했다.
“이 고문님께서는 법무부 장관 어떻습니까?”
“법무부 장관이요?”
“네. 저희 대표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고 계십니다.”
“법무부 장관…….”
안혁규의 말에 이의경이 고개를 숙이며 혼잣말했다.
그런 이의경을 향해 채영석과 현봉국이 번갈아 축하 인사를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이 고문님께서 주 고문님에 이어 법무부 장관을 하게 되다니 축하드립니다.”
채영석과 현봉국이 축하를 건네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이의경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축하 인사를 받았다.
안혁규는 점점 뜨거워진 분위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손을 들고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아아. 다들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그저 이건 어디까진 대표님과 제가 나누는 사담에서 나온 이야기일 뿐이니까요.”
그러나 분위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대표님과 안 의원님의 대화라면 뭐 거의 확정된 것 아닙니까?”
“그렇지요. 이거 우리 클럽에서 두 사람이나 내각에 참여하게 된다니 제가 다 기분이 좋습니다.”
“왜 두 사람으로 끝이 난다고 생각하십니까? 현 차관님도 장관 자리에 슬슬 올라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그게 어디 제 맘대로 되는 일이던가요?”
“현 차관님의 마음대로 되지는 않겠지만 안 의원님이라면 또 다르지 않겠습니까? 안 의원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채영석이 은근한 눈으로 안혁규를 바라보고 묻자 안혁규는 한진영과 박경진을 살피고는 대답했다.
“여기 계시는 박 비서님과 한 대표님께서 웃겠습니다. 아직 대선이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총리니 장관이니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안혁규는 고개를 돌려 채영석과 현봉국에게 이제 그만하라는 눈짓을 하고는 한진영을 향해 말했다.
“오늘 이곳에 모인 주인공께서 오셨으니 이제 한 대표님과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시지요.”
“제가 주인공인가요?”
한진영이 모르는 척 안혁규의 말을 받았다.
안혁규는 그런 한진영을 향해 은근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이야기 들었습니다. 펀드의 흥행이 굉장했다고요?”
“아~ 뭐 많은 분이 도와주신 덕분이었습니다.”
안혁규는 한진영의 말에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한 대표님께 돈을 맡길 걸 그랬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한 대표님께 맡겼다면 진작에 고민을 덜었을 텐데 말입니다.”
안혁규의 말에 채영석이 맞장구를 쳤다.
한진영은 슬쩍 김교철의 비서인 박경진을 돌아봤다.
박경진은 한진영의 눈빛을 느끼고는 슬며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눈빛으로 조금 전에 자기가 건넨 말을 잇지 말라는 뜻을 전했다.
한진영은 잊지 않았다는 뜻으로 박경진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박경진은 다시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실 한진영은 안혁규를 비롯하여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한진영에게 맡겼으면 더 좋았을 텐데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르는 척해야 할 때였다.
한진영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안혁규의 다음 말을 가만히 기다렸다.
“사실 오늘 이렇게 한 대표님을 자리에 부른 이유는 친목을 도모하자는 이유만 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럼 다른 이유가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있습니다.”
안혁규는 한진영을 향해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한 대표님도 알고 계시죠? 제가 세올에서 좀…… 골치 썩었던 것 말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거 잘 해결되지 않았나요?”
“잘 해결됐습니다. 모두 한 대표님 덕분이지요.”
여론과 금감원을 비롯한 정부 기관들이 모두 세올컴퍼니를 들여다보자 세올은 꼼수와 같은 인수합병에서 슬며시 한 걸음 물러났다.
그 덕분에 안혁규는 오히려 돈을 번 채로 빠져나올 수 있게 됐다.
1조가 넘는 손해를 볼 뻔했던 안혁규가 오히려 돈까지 벌었으니 안혁규에게 한진영은 은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한진영을 마치 은인처럼 안혁규가 여기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도움을 준 고마운 존재쯤으로만 여길 뿐이었다.
한진영은 만날 때마다 옅어지는 안혁규의 고마움을 직접 느끼면서도 아무렇지 않았다.
한진영 입장에서도 이 자리에 안혁규가 자기를 데리고 와 준 것만으로도 그가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성의 없는 고마움 표시 뒤에 안혁규는 본격적으로 이곳에 한진영을 부른 이유를 이야기했다.
“그때의 일로 인해 크게 깨달은 게 있습니다. 전문가에게 투자를 맡기더라도 큰 손해를 볼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돈을 맡길 때는 보통 전문가가 아니라 아주 뛰어난 전문가에게 돈을 맡겨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 말씀은…….”
“네. 한 대표님 같은 뛰어난 전문가에게 돈을 맡겨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저만 알고 있는 게 아니더군요. 많은 사람이 알고 있었습니다. 하하. 왜 저는 이제야 알게 된 걸까요?”
안혁규는 아쉬운 듯이 고개를 잠시 저은 뒤 한진영을 향해 부탁했다.
“그래서 부탁하고 싶습니다. 저희의 돈도 맡아 운용해주십시오.”
한진영이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안혁규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손으로 쓸어내며 말했다.
“여기 계신 분들의 자산을 모두 한 대표에게 맡기려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정확히는 모르지만 여기 계신 분들의 재산만 합쳐도 수백억은 넘을 겁니다. 어쩌면 천억? 그쯤이 될지도 모르고요. 안 그렇습니까?”
“우리끼리 있는데 숨길 게 뭐 있겠습니까? 저만해도 저와 아내의 재산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처가까지 해서…….”
채영석은 잠시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눈치를 살핀 후 입을 열었다.
“한 200억쯤 됩니다.”
채영석의 말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흠칫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