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화 돈이 권력이고, 힘이며, 정의인 곳
안혁규와 한진영은 함께 나란히 앉아 최석영이 나오는 화면을 같이 바라봤다.
-그렇다면 앞으로 시장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이대로 다시 상승세를 이어갈 수 있을까요?
화면 속의 아나운서는 걱정이 가득 묻어 나오는 목소리로 최석영을 향해 물었다.
최석영은 그런 아나운서의 질문에 깊은 고민에 빠진 모습을 보였다.
“저런 것도 모두 계산해서 나온 행동입니까?”
안혁규는 화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물었다.
한진영은 안혁규가 가리킨 화면 속의 최석영을 바라보고 대답했다.
“굳이 저런 걸 계산에 넣을 필요까지는 없지요. 자연스럽게 몸에서 나온 반응들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대단합니다. 저런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자연스럽게 나온다니 말입니다. 최석영 차장님은 방송에 타고난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시청자 입장에서 신뢰를 주는 행동을 자연스럽게 보이는 최석영은 모두가 궁금해하는 이야기를 천천히 하기 시작했다.
-지수가 1,850까지 올라온 지금 사실 저희는 물량을 모두 턴 상태입니다.
-아~
아나운서는 안타까움에 가까운 신음을 내뱉었다.
그리고 억울하다는 빛을 얼굴에 숨기지 않은 채 말했다.
-미리 알았으면 참 좋았을 텐데요. 이렇게 장이 모두 끝이 나고 나서 대답을 듣게 되니 개인투자자 입장에서는 안타깝기만 합니다. 차장님. 어떻게 먼저 알 방법은 없을까요?
-공시를 때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저도 그 점이 참 안타까운 입장입니다.
-그래서 세이지 자산운용의 펀드에 가입했어야 했나 봅니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자유로웠을 테니까요.
아나운서의 말에 안혁규가 고개를 돌려 한진영을 바라봤다.
한진영은 안혁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질문하기 전에 먼저 대답했다.
“우리 쪽에서 요청한 것은 아닙니다. 이미 판매가 완료된 상황에서 저런 이야기가 굳이 필요하진 않으니까요.”
“그럼 저것도 대경TV에서 알아서 준비한 거란 말씀인가요?”
“제 생각에는 그런 것 같네요. 왜 저런 이야기를 굳이 방송 중에 하는지도 알겠고요.”
“더 오랫동안 함께 하고 싶다는 뜻이겠지요?”
“그럴 겁니다.”
“방송사에서 잘 보이기 위해 안간힘까지 쓰는 모습이 지금 한 대표님의 업계에서의 위치를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안혁규의 말에 한진영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희같이 생긴 지 얼마 안 된 곳이나 저렇게 방송에 나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이지요. 한 명이라도 더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말입니다. 진짜 힘 있고 실력이 있는 사람은 굳이 자기를 드러내려 하지 않지요. 그러지 않아도 모두 알아서 인정해주니까요. 마치 안 의원님처럼 말입니다.”
한진영이 말을 하고는 슬쩍 안혁규를 돌아봤다.
안혁규는 한진영의 말에 빙그레 웃고는 그저 화면을 바라보기만 했다.
화면 속의 최석영은 아나운서의 질문에 계속 대답하는 중이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시장을 암울하게 보고 있어 물량을 정리한 것은 아닙니다. 그저 짧게 반등을 잡아먹기 위해 들어간 것이기에 목푯값이 나온 시점에 미련을 가지지 않고 정리를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더 오를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
-글쎄요. 그건…… 장담하지 못하겠습니다.
-그 말씀은 하락한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아나운서의 말에 이번에도 최석영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주식시장에는 이분법적인 상황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짓수가 하나 더 있지요.
-하나 더요? 그게 무엇입니까?
-횡보 말입니다. 횡보장 또한 펼쳐질 수 있는 여러 가지의 상황 중의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네. 저희는 횡보장을 예상합니다.
최석영은 시선을 아나운서에게서 카메라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카메라를 통해 시청자에게 직접 말했다.
-그리스 문제는 여전히 시장을 억누르고 있습니다. 3차 양적완화에 관한 이야기는 누구도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믿을 거라고는 저평가 되어 있는 주식을 향해 들어오는 저가 매수세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상승을 이야기하는 곳이 있다면 그건 거짓말을 일삼는 사기꾼입니다.
안혁규는 최석영의 말에 한진영을 다시 돌아봤다.
지난 자리에서 양심에 어긋난 소리를 할 수 없다며 자기는 사기를 칠 수 없다고 이야기하던 한진영과 얼굴이 겹치는 순간이었다.
한진영은 안혁규가 자기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최석영의 말을 계속 귀 기울였다.
-여러분 지금은 잠시 쉴 때입니다. 시장에서 잠시 떨어져 여행도 다니고 기분 전환도 하며 삶을 즐기십시오. 오르지도 그렇다고 더 떨어지기에도 불편한 시장에 자리하고 앉아 하루하루 애태우실 필요 없습니다. 세상은 주식 외에도 많은 재미있는 것들을 가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안혁규는 자기를 쳐다보지도 않는 한진영의 시선을 따라 최석영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최석영의 말을 다 들은 뒤 당황한 표정으로 한진영에게 물었다.
“저렇게 말해도 되는 겁니까?”
“뭘 말입니까?”
최석영의 말이 만족스러웠던지 활짝 웃고 있던 한진영은 그제야 안혁규를 돌아봤다.
이제 뒷부분에 어떤 이야기가 나오는지 관심이 없던 한진영은 몸까지 돌려 앉았다.
안혁규는 그런 한진영과 최석영이 나오는 화면을 번갈아 바라본 뒤 말했다.
“조금 전 저기 화면에 나오는 한 대표네 회사 직원의 말은 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니었습니까?”
“어떤…… 아~ 지금은 주식을 쉴 때라는 말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런 말은 금기와 같은 것 아닙니까?”
“그건 다른 사람들에게나 해당하는 말이지 저희와는 크게 상관없는 이야기입니다.”
한진영이 가볍게 받아들이자 안혁규는 고개를 돌려 화면을 바라봤다.
그곳에 있는 아나운서는 안혁규보다 더 당황한 모습으로 최석영에게 이유를 묻고 있었다.
안혁규는 화면 속의 최석영이 하는 말보다 눈앞의 한진영의 입을 통해서 이유를 듣고 싶었다.
아무래도 저 말의 근원지인 사람을 통해 이유를 듣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왜 그런지 이야기해주실 수 있습니까?”
“궁금해하시니 간단하게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한진영은 리모콘을 들어 안혁규에게 묻지도 않은 채 화면을 껐다.
어차피 이제 더는 화면을 볼 이유가 없어서였다.
안혁규는 무례하게 보일지도 모르는 한진영의 태도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지금은 그런 한진영의 태도보다 조금 전 이야기한 내용의 이유를 듣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화면을 끈 리모컨을 천천히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제가 수수료를 받아먹는 증권사 입장이었다면 쉬라는 말을 하지 못하겠지요. 그건 제 몸에 칼을 가져다 대는 말이니까요. 하지만 고객과의 접점이 펀드에 불과한 저희 입장에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아니. 오히려 펀드 출시가 성공하여 당분간 개인 투자자들과 엮일 일이 없는 상황에서는 솔직히 말하는 편이 저희에게는 도움이 되지요.”
한진영의 말에 안혁규는 가만히 한진영을 바라보며 물었다.
“업계에서 세이지 자산운용를 어떻게 볼지는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 겁니까?”
“사람이 사는 곳이기에 시기와 질투 그리고 타인에 대한 배려 등이 당연히 있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전에 증권시장이 어떤 곳인지부터 생각해보시면 제가 왜 이러는지 이해가 될 겁니다.”
“어떤 곳인데 그러는 겁니까?”
“돈이 권력이고 돈이 힘이며 돈이 정의인 곳입니다.”
안혁규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한진영이 대답했다.
안혁규는 한진영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한진영은 그런 안혁규를 향해 점점 열을 올리며 이야기했다.
“돈이 많고, 돈을 잘 벌면 누구도 저에게 못하는 곳이 바로 제가 있는 곳입니다. 그러기 위해 생겨난 곳이니까요. 그런데 누가 저에게 뭐라고 하겠습니까? 저보다 돈이 많고, 저보다 돈을 잘 버는 사람이나 저에게 뭐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럴 사람은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없다고 자신합니다.”
한진영은 자신 있는 표정과 말투로 안혁규를 향해 말했다.
안혁규는 그런 한진영의 모습에도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한진영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한진영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런 한진영의 모습이 평소와는 전혀 다르다고 느꼈을 게 분명했다.
냉정하다 못해 차가운 인상의 한진영과 달리 지금 안혁규에게 이야기한 한진영은 뜨거운 불과 같은 느낌을 전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것을 안혁규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알지 못하다는 생각에 한진영은 안혁규에게 이런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인 것이었다.
안혁규가 자기를 이곳에 부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한진영이었다.
그리고 그런 한진영을 앞에 두고 아직 이야기를 꺼내지 않은 이유 또한 한진영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 고민하지 말고 쉽게 이야기하라고 이런 과장된 모습을 보여준 것이었다.
안혁규의 고민을 덜어주기 위해 한진영이 일부러 과장된 말과 행동을 보여주었고, 그 행동이 효과가 있었는지 안혁규의 무표정하기만 한 얼굴에 감정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
한진영이 차에 올라타자 조지훈이 바로 운전석에 올라타 차에 시동을 걸었다.
한진영은 잠시 몸을 감아 오는 가죽시트를 느끼며 차를 움직이려는 조지훈에게 지시했다.
“멀리 가지 마.”
“네?”
조지훈은 갑작스러운 한진영의 말에 출발하려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한진영은 조지훈이 자기를 바라본다는 것을 알면서도 눈을 감고 고개를 뒤로한 채 입만 열어 말했다.
“어차피 금방 돌아올 테니 멀리 가지 말라는 거야.”
“금방 다시 돌아온다고요? 이야기 다 끝나신 거 아니셨어요? 혹시 이야기가 뜻대로 잘 풀리지 않은 건가요?”
이미 오늘 무슨 이야기가 오갈 줄 알았던 한진영은 조지훈에게 미리 대화 내용을 알려줬었다.
조지훈은 한진영에게 대화 내용을 들은 뒤 홀로 차를 지키며 마음을 졸였었다.
차기 대선주자의 비자금을 운용할 제안을 받을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조지훈의 심장이 마구 나댔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진영이 예상한 자금의 규모는 약 8,000억 수준이었다.
8,000억.
일반 개인은 물론이고 기업에서도 한 번에 선뜻 내놓기 어려운 금액이었다.
조 단위의 자금을 운용하는 자산운용사에서도 기업이 됐건 개인이 됐건 주인이 하나인 8,000억 자금은 쉽게 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돈을 다른 사람도 아니라 차기 대선 후보의 주머니에서 나온다는 것에 조지훈은 심장이 세차게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걸 거절하겠다는 한진영의 배포에 조지훈은 심장이 목구멍을 타고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조지훈은 몸까지 뒷자리를 향해 돌려 앉은 채로 한진영에게 물었다.
“혹시 그들이 자금을 받지 않으면 가만 놔두지 않겠다고 하던가요? 아니면 이 일을 발설하면…….”
“여기가 무슨 영화 속 세상인 줄 알아? ‘듣지 말아야 할 걸 들었으니 산에 묻어 버리겠다’ 뭐 이런 말을 내가 듣고 온 줄 아는 거야?”
“아닌가요?”
“아니지.”
한진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손을 휘저었다.
“제안을 하는 건 그들의 몫이고 할지 말지 선택하는 건 내 몫이야. 하기 싫다는데 모가지를 끌고 자리에 앉혀 억지로 그들이 시킬 거로 생각했어?”
“그래도 그건…… 보통 돈이 아니지 않습니까? 무조건 할 거라고 생각해야지만 내놓을 돈 아닌가요? 아니. 애초에 그런 돈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세상을 왜 그렇게 순진하게 살아?”
“네?”
한진영은 창문을 열었다.
이야기가 열린 창문을 넘어 밖으로 새어 나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조차 없는 듯한 모습이었다.
한진영은 열린 창문을 통해 몇 잔의 술로 달궈진 얼굴을 식히며 말했다.
“비자금이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야. 게다가 다른 곳도 아니라 정치권은 비자금과 더욱 밀접한 곳인데 없을 거로 생각했어?”
“그래도…… 아무리 있다고 해도…….”
“8,000억이 많다고 생각해서 그래?”
“네. 너무 많은 금액 아닙니까?”
한진영은 팔을 차창에 걸치고 조지훈을 향해 웃었다.
“국회의원 되기 위해 필요한 돈이 얼마인 줄 알아? 나라에서 써도 된다고 정해진 금액이 대략 2억쯤이야. 15%만 득표하면 돌려준다는 돈이 그 정도란 거야. 그럼 실제로 쓰는 돈은 얼마일 거 같아? 20~30억쯤 써야 제대로 선거 치렀다는 말이 나오는 게 국회의원 선거야. 그렇다면 대통령은 어떻겠어?”
한진영은 몸까지 차창에 기댄 채 계속 이야기했다.
“지역구가 약 250여 개야. 대통령 선거는 그렇게 나누어진 250개의 선거구에서 모두 싸워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그렇다면 대략 5,000억에서 7,000억쯤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오지 않아? 단순하게 계산해도?”
“아~”
조지훈은 이런 계산 방법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돈만 놓고 봐서 8,000억이라는 돈이 터무니없이 크다고만 생각했을 뿐이었다.
한진영은 몇 마디 말로도 말귀를 잘 알아듣는 조지훈을 향해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팔에 턱을 괸 채로 밖을 내다보며 계속 이야기했다.
“특별한 일도 아니었고, 거절한다고 해서 내 목이 날아갈 만큼 커다란 비밀도 아니야. 이미 알게 모르게 대통령 선거를 치르기 위해서는 8,000억이라는 돈이 필요하다는 게 알려진 사실이니까. 그리고 터무니없는 금액을 주고 8,000억을 만들어 달라고 할 정도로 바보들은 아니기에 8,000억이라는 숫자가 나오는 것도 이상한 이야기가 아니야.”
사실 말은 이렇게 태연하게 하지만 지난 시절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땐 조지훈보다 더 놀랐었던 한진영이었다.
그 당시 들었던 이야기는 대통령 선거에 필요한 자금을 만들어 달랐던 것도 아니었다.
지방선거에 필요한 100억을 만들어 달란 부탁을 받고 100억을 전달 받았던 한진영이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지내며 대통령 선거에 필요한 자금의 규모를 듣고 놀라 까무러치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논리적으로 생각을 하자 그들이 보여준 자금의 규모가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아니었음을 알게 됐다.
대한민국이라는 곳의 가장 꼭대기에 5년 동안 앉아있는데 8,000억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다면 어쩌면 싸다고 느껴지기까지 한 한진영이었다.
조지훈은 한진영의 말에 이제 이해가 되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한진영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왜 다시 동우로 돌아간다고 말씀하신 건가요? 그 정도라면 저들도 거절당한 것에 화를 내거나 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다른 사람이 부를 테니까.”
“다른 사람이요?”
한진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조지훈의 전화기가 울렸다.
조지훈은 전화기 화면에 보이는 박경진 비서의 이름을 확인하고 한진영이 부른다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