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화 결혼 이상을 원한다
최석영이 아쉬운 눈을 뒤로한 채 조지훈은 한진영의 사무실 앞에 도착했다.
똑똑.
“대표님. 저 조 비서입니다.”
“들어와.”
한진영의 허락이 떨어지자 조지훈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한진영은 그런 조지훈을 앉은 채로 올려다보며 물었다.
“왜?”
“기풍그룹의 신임 사장단 인사가 조만간 발표된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신임 사장단 인사?”
한진영은 보던 것을 덮고 의자 팔걸이에 손을 올린 채로 등을 뒤로 눕혔다.
“우리한테 익숙한 이름이 들어있나 보지?”
한진영의 말에 조지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익숙한 성함이 명단에 적혀있습니다.”
조지훈의 말에 한진영이 양 팔걸이를 손으로 내리치며 말했다.
“좋아. 그럼 주인공한테 직접 이야기 듣도록 해야지. 성우한테 연락해서 이리로 넘어오라고 해.”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마침 잘 됐어. 프라임리츠의 정 회장님도 오시라고 해. 같이 이야기할 것이 있으니까 말이야.”
“네. 그것도 바로 연락 넣도록 하겠습니다.”
조지훈은 한진영의 지시를 받은 뒤 사무실을 떠났다.
그리고 한 시간이 흐른 뒤 이성우가 오랜만에 세이지 자산운용에 찾아왔다.
“어이구. 뭐가 이렇게 사람이 많아졌어? 여기 자리가 좁겠는데?”
“네. 안 그래도 늘어난 사람으로 인해 자리가 부족하다며 밑에 층도 쓰고 싶다고 하더군요.”
마침 근처에 있던 프라임리츠의 정병선도 한진영의 콜에 부리나케 세이지 자산운용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이성우와 정병선은 나란히 안으로 들어와 주변을 살피며 이야기를 나눴다.
“정 회장님. 너무 그렇게 진영이가 해달라는 거 다 해주지 마세요. 버릇 나빠져요.”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버릇 나빠지다니요? 오히려 안정적인 임차인을 구해서 제가 얼마나 감사하는데요.”
“안정적이라니요? 언제 망할지도 모르는데 너무 믿지 마세요.”
이성우의 말에 앞서 걷던 조지훈이 고개를 돌렸다.
이성우는 자기의 말에 바로 반응하는 조지훈을 돌아보고 웃었다.
“농담이야. 농담. 농담에 뭘 그렇게 눈을 째려보고 그래?”
농담이라는 말에 조지훈이 눈에 힘을 풀고 고개를 다시 돌렸다.
이성우는 그런 조지훈의 뒤통수를 향해 손가락을 들어 찌르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하여튼 이놈도 진영이랑 같이 있으면서 귀여운 맛이 다 없어졌어. 아휴.”
정병선은 까불거리는 이성우를 옆에서 흐뭇하게 바라보며 조지훈의 뒤를 따라 한진영의 사무실로 향했다.
“어서 오세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제가 찾아봬야 하는데 이렇게 오시라고 해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근처에 지나던 길이었습니다.”
한진영은 반갑게 정병선을 맞이했다.
이성우는 그런 한진영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심통 난 표정을 지었다.
“네 눈에는 내가 보이지도 않냐? 사람 섭섭하게 말이야.”
“너는 며칠 전에도 보지 않았냐? 뭐가 섭섭해?”
“그거야 며칠 전이잖아. 안 본 지 며칠이나 됐는데 나 보고 싶지도 않았어?”
한진영은 정병선에게 앉을 자리를 권한 후 여전히 서 있는 이성우에게로 몸을 돌렸다.
“정 회장님 계시는데 너 이상한 소리 하지 말아라. 정 회장님이 오해하신다.”
“정 회장님은 정 회장님이시고…… 나는? 어? 나는 안 반가우냐고?”
“징그럽게 얘가 왜 이래? 알았어. 반가워. 반가우니까 앉아. 어? 앉으라고.”
팔짱까지 끼려고 덤비는 이성우를 밀어낸 한진영은 몸서리를 치고는 정병선의 근처에 다가가 앉았다.
이성우는 자기에게서 멀어지는 한진영을 바라보고 발을 구른 후 입을 쭉 내밀고 한진영의 맞은편에 앉았다.
한진영은 투정을 부리는 이성우를 향해 질색하는 표정을 지은 후 정병선에게 말했다.
“정 회장님. 오해하지 마세요. 쟤가 저런 놈이 아닌데…….”
“알고 있습니다. 두 분 우정이 특별하신걸요.”
“아니요. 특별한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남들이 들으면 이상하게 오해할 수도 있는데…….”
“오해도 하지 않습니다. 이 사장님께는 좋은 소식이 곧 들려올지도 모른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좋은…… 소식이요?”
한진영이 고개를 갸웃하고는 이성우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이성우는 정병선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아는 듯했다.
인상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이성우에게는 좋은 소식이 아니라는 느낌이 전해졌다.
오늘 신임 사장단 인선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 이성우를 부른 것이었다.
그런데 이성우가 보이는 반응으로 보아 신임 사장단과는 관련이 없는 이야기인 것만 같았다.
한진영은 하루가 멀다고 만나는 이성우와 관련된 일에 자기가 모르는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하여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기만 했다.
정병선은 그런 한진영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한 대표님도 모르셨나 봅니다. 하긴 이런 일은 위에서 이루어지니 모를 만도 합니다.”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좋은 소식이라고 하신 것으로 보아 나쁜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말입니다.”
한진영이 정병선에게 묻자 이성우가 발끈하며 소리를 질렀다.
“나쁜 일이야. 나쁜 일. 관심 두지 마. 나 요즘 그것 때문에 짜증 나니까.”
“뭔데? 너 이렇게 발끈하는 것을 보니까 보통 일은 아닌 것 같다.”
이성우의 반응에 한진영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이성우를 바라보다가 무언가를 떠올렸다.
“아~ 너 혹시 장가가냐?”
“야!”
한진영의 말에 다시 한번 이성우가 발끈했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를 놔둔 채 정병선에게 물었다.
“서준일보에서 허락했던가요?”
한진영의 질문에 정병선이 크게 놀란 눈으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한 대표님도 알고 계셨습니까?”
“그걸 네가 어떻게 알고 있냐?”
정병선과 이성우가 동시에 한진영을 향해 물었다.
한진영은 두 사람의 반응을 보며 지난 시절을 떠올렸다.
지난 시절의 이성우는 변변치 못한 인물이었다.
동생에게 밀려 스스로 낸 실적이란 것이 없는 보잘것없는 인물이었다.
지난 시절의 이성우는 야심 찬 동생에게 한참 모자라는 한량에 불과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이었다.
그래도 이런 이성우에게 장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바로 다른 재벌가의 자식과 달리 평범하다는 게 장점이었다.
관리팀이 존재하여 밀착 마크하는 그룹의 로얄 라인들도 사고를 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특히 이성우와 같이 후계 구도에서 밀려난 인물들의 경우에는 사고의 강도가 입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한 일도 종종 벌어지고는 하는 것이 이 바닥의 흔한 일이었다.
그런 것에 비하면 이성우의 사고는 아이들의 장난 수준밖에 되지 못했다.
길거리에서 술에 취해 가로수를 붙잡고 잠이 들었다거나, 노상 방뇨하다가 걸렸다는 소시민들도 흔하게 걸릴만한 일 정도에 불과한 사고를 치는 게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성우의 아버지인 이정훈 회장은 아들이 결혼이라도 잘하라는 생각으로 서준일보와 혼담을 진행했었다.
서준일보라고 하면 우리나라 4대 일간지 중의 하나로, 돈보다도 강한 언론권력의 핵심에 존재하는 곳이었다.
그런 서준일보의 패밀리에 합류할 수만 있다면 후계 구도에 밀려난 이성우라도 남은 인생은 편하게 살지 않겠냐는 이정훈 회장의 의도가 실린 혼담이었다.
그러나 서준일보는 이정훈 회장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도태되어 버린 재벌가의 자식을 서준일보의 패밀리에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것이 그들의 판단이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받아들였어?’
한진영은 놀란 눈으로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고는 지난 시절과는 분위기가 바뀌었음을 알게 됐다.
‘그리고 또 서준일보라고?’
지난 시절 이성우를 서준일보에 들이밀었을 때는 이성우에게 살길을 마련해주기 위한 것으로 알았던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난 시절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지금은 이성우가 기풍의 차기라는 사실을 공표된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바로 신임 사장단 발표가 그것을 잘 보여주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성우에게 살길을 열어줄 필요가 없었다.
살길을 열어줄 필요가 있는 사람은 이성우가 아니라 커다란 사고를 치고 난 후 후계 구도에서 완전히 밀려난 이성우의 동생인 이유정이어야 했다.
그런대도 서준일보에게 또다시 혼담을 넣은 이정훈 회장이었다.
한진영은 어쩌면 지난 시절에도 서준일보에 혼담을 넣은 것이 이성우의 살길을 열어주기 위함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병선은 질렸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진영에게 말했다.
“주식시장에 계시는 만큼 모르는 일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일은 매우 은밀하게 물밑에서 진행되어 아는 사람이 손가락에 꼽히는 일이었는데 말입니다.”
“그걸 정 회장님께서는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하. 그렇지요. 제가 알고 있으니 대표님도 모르라는 법이 없지만…… 사실 이번의 경우는 조금 다릅니다.”
“다르다고요?”
“네. 서준일보에서 이 사장님에 대해 알아봐 달라는 부탁을 저에게 했으니까요.”
이성우도 지금의 말은 몰랐던 것인지 고개를 돌려 정병선을 바라보고 크게 놀랐다.
“회장님에게 서준일보가 저를 알아보라고 부탁했다고요?”
“네. 서준일보에서는 제가 사장님과 친분이 깊다고 생각한 것 같았습니다.”
정병선의 말에 한진영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을 잘 보았네요. 역시 서준일보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그러셨습니까? 좋은 말씀을 하셨지요? 그러니 혼담 이야기가 좋은 쪽으로 풀리는 것일 테니까요.”
“네. 좋은 말을 한가득 건넸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 중에 한 대표님의 이야기도 들어있었습니다.”
“제 이야기가요?”
한진영은 이성우의 결혼 이야기에 왜 자기 이야기가 들어 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정병선을 바라봤다.
정병선은 그런 한진영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이성우 사장님의 가장 큰 장점 중의 하나가 바로 한 대표님이시니까요.”
“저요?”
“네. 한 대표님과 막역한 사이. 그걸 장점으로 넣어 서준일보에 전했고 서준일보도 그 이야기를 가장 관심 있게 바라봤습니다.”
정병선의 말에 이성우가 한진영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정병선에게 말했다.
“정 회장님. 그러니까 제가 결혼하게 된다면 저 자식 때문이란 거네요?”
“나 때문이 아니라 내 덕분이지.”
“덕분은 무슨 덕분? 너 때문에 지금 내가 시장통의 개처럼 목줄 채워져 새로운 주인에게 끌려가게 생겼는데…….”
서준일보와 결혼하는 것이 못마땅해 보이는 이성우였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에게서 시선을 돌려 정병선을 바라봤다.
이성우야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하는 것이니 기분이 좋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이성우는 차차 시간을 내서 지금의 결혼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 가르쳐주면 될 일이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바로 서준일보의 눈과 귀가 되어 이성우에 관한 이야기를 보고 듣는 정병선이 중요한 사람이었다.
“회장님. 서준일보와 친하신가 보네요.”
“두 분처럼 막역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친분을 유지하는 수준쯤은 됩니다.”
“그렇다면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부탁이요? 무슨 부탁 말씀이십니까?”
“성우에 관해 좋은 이야기를 더 많이 해주십시오.”
한진영이 나서서 부탁하는 모습에 정병선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미 좋은 이야기를 많이 건넸습니다.”
“아니요. 앞으로도 계속 부탁드리겠습니다.”
정병선이 한진영의 말에 비스듬히 한진영을 바라보고 물었다.
“결혼이 이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그 이상을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 정도입니까?”
“네. 그 정도입니다. 이 녀석과 서준일보는 혼인 관계를 넘어 이 녀석이 서준일보에 기대받는 존재가 되었으면 하는 게 제 바람입니다.”
“야! 네 결혼 아니라고 너무 막말하는 거 아니야? 나는 생각도 없는데 뭔 기대 받는 존재를 이야기하는 거야?”
한진영은 발끈하는 모습의 이성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너 아직 기풍의 가장 꼭대기 자리에 앉은 거 아니다.”
“어?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은 후계자로 낙점을 받은 것뿐이지 완전히 네가 기풍을 손에 넣은 게 아니란 말이야. 내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너 그 말은…… 아직도 내 자리가 완벽하지 못하다는 이야기야?”
한진영의 말에 조금 전까지 발끈하던 이성우의 얼굴에 걱정이 한가득 고이기 시작했다.
이유정이 도태된 상황에서 차기의 낙점을 받았다고 생각했던 이성우는 큰 충격을 받은 듯한 모습이었다.
한진영은 어두운 표정의 이성우를 향해 웃었다.
“네 자리를 더욱 공고히 하자는 이야기야. 그리고 기풍을 얻은 다음을 생각하고…….”
“서준일보가 그 정도란 말이야?”
“신문사 우습게 보지 말아라. 지금보다 미래에 더 큰 힘을 발휘하는 곳이 언론이 될 테니까.”
“그래? 요즘은 다 인터넷으로 뉴스 보지 않아? 신문 보는 사람이 요새 누가 있다고?”
“그 인터넷에 뉴스를 올리는 게 언론사들이야. 그리고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언론이 더욱 돈을 탐하고 왜곡된 뉴스를 보내게 될 텐데 거기에 앞장서는 게 지금 언론들이 될 거야. 시간이 지나면서 언론이 투명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들만의 세상으로 변하게 된다는 이야기지.”
한진영은 가만히 지난 시절을 떠올리며 계속 이야기했다.
“그럴 때 내 편으로 언론사 하나 자리 잡고 있는 것만큼 든든한 게 없어.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어? 이 결혼의 결정권은 너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저 쪽에게 있다는 뜻이야. 그리고 지금 그 뜻을 가장 잘 전달할 분이 우리 앞에 계시는 거고…….”
한진영이 말을 하며 정병선을 은근한 눈으로 바라봤다.
정병선은 한진영의 눈빛을 통해 한진영이 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언론을 이 사장님을 통해 한 대표님께서 이용하려 하시나 보군요.”
“저도 ‘함께’ 이용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용하는 것은 저뿐만이 아니지요. 정 회장님도 함께 이용하실 테니까요.”
한진영의 말에 정병선은 짧게 웃으며 말했다.
“서준일보가 이야기 들으면 섭섭해하겠습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들도 기풍을 통해 얻는 게 있으니 혼인을 진행하기로 한 것일 테니까요. 그러니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도록 확실하게 도장을 찍도록 도와주십시오.”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한진영은 최선을 다하겠다는 정병선의 말에 더는 이번 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정병선에게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을 듣는 것은 무조건 이번 일을 성사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됐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한쪽 편에 앉아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성우를 보고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