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화 발목만 부러뜨려 놓는다
정병선이 나간 사무실에는 한진영과 이성우가 마주 앉아 있었다.
이성우는 여전히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한진영을 향해 조금 전 나눴던 이야기를 물었다.
“안혁규 의원이 움직인다는 돈, 그 돈을 받지 않는다는 건 알겠는데 그걸 왜 CP(기업어음) 시장으로 유도한다는 거야? 난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데?”
한진영은 밑바닥이 보이는 찻잔에 찻물을 따르며 이성우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래야 털릴 테니까.”
“털려? 뭐가 털려?”
“당연히 안혁규 의원이 움직이는 돈 아니겠어?”
“어? 안혁규 의원이 움직이는 돈이 털리기를 바라서 그런 거라고?”
이성우는 여유롭게 찻물을 음미하고 있는 한진영을 가만히 바라봤다.
조금 전 정병선과 함께한 자리에서 한진영은 안혁규가 접근했냐는 말을 가장 먼저 정병선에게 물었다.
정병선은 한진영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고, 한진영이 이야기한 대로 변명을 늘어놓아 안혁규의 제안을 거절했다고 했다.
기본적으로 부동산 시장은 단기간 내에 자금회수가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안혁규는 정병선의 거절에 순순히 물러나는 모습을 보였다고 했다.
한진영은 정병선에게 잘했다는 말과 함께 안혁규 의원이 움직이는 돈을 기업어음 시장인 CP 시장으로 유도하는 것이 좋다는 말을 건넸다.
그리고 이성우에게도 찾아올지 모르니 만약 찾아오게 되면 CP 시장으로 안혁규 의원을 유도하라는 말을 건네며 앞으로 할 일을 가르쳐줬다.
이성우는 정병선이 떠나갈 때까지 참았다가 이유를 물었다.
8,000억이라는 자금이 CP 시장에 진입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고 그걸 받아줄 곳 또한 많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유가 털리기를 바란다는 마음에 그랬다는 한진영의 대답을 들은 이성우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게는 얼굴로 가만히 한진영을 바라보기만 했다.
한진영은 차 맛을 음미한 뒤 찻잔을 내려놓고는 이성우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래. 나는 그 돈이 털렸으면 좋겠어.”
이성우는 더욱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으로 한진영에게 물었다.
“설마 안혁규 의원이 모시고 있는 그 사람이 대통령이 되기를 원하지 않아서 그러는 거야?”
둘만 있다고 생각하여 꺼낸 말이었다.
그러나 말을 꺼내고 나서도 걱정이 되었던지 이성우는 혹시 듣는 사람이 없나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의 모습을 보고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렇지 않아. 그 사람이 대통령이 될 거야.”
“정말?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래. 하늘이 두 쪽이 나더라도 그 사람이 대통령이 될 테니까 그건 고민할 문제가 아니야.”
“야. 그러면 오히려 안혁규 의원에게 잘 보여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면 실권은 안혁규 의원이 쥐게 되는 걸 텐데?”
“그래. 그러겠지. 그래서 힘을 좀 빼둘 필요가 있어서 돈이 털리길 바란다는 거야.”
이성우는 한진영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던지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한참 한진영을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게 뭔 소리야? 대통령이 될 테니 힘을 빼둔다고? 돈을 날려서?”
“제대로 알아들었네. 바로 그거야.”
“내가 제대로 알아들었어? 뭘?”
“뭐긴 뭐야? 네 입으로 말했잖아. 대통령이 될 테니 힘을 빼두기 위해 돈을 날리게 한다. 그게 핵심이야.”
한진영은 찻잔의 머리 부분을 손으로 만지며 이성우에게 자기의 계획을 설명했다.
“이대로 대통령 출마 자금까지 안혁규가 마련하는 데 성공한다면 당내 입지는 물론이고 앞으로 5년 동안 무소불위의 권한을 가지게 될 게 분명해. 그리고 어쩌면 그 뒤에는 더 큰 힘을 가지게 될지도 모르고…… 그러니 그렇게 하지 못하게 만들어야지. 그래야 나중에 요리하기가 더 편해지니까.”
“너…… 동우 패밀리에 합류한 거 아니었냐?”
한진영의 말을 가만히 듣던 이성우는 여전히 좁혀진 눈살을 풀지 않고 한진영에게 말했다.
“너 동우 패밀리에 들어갔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이 바닥에 돌았어. 그래서 너를 부러워하는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고…….”
“동우 패밀리? 무슨 마피아도 아니고 패밀리는…….”
한진영이 우습지도 않다는 듯이 말하자 이성우가 급히 손을 흔들었다.
“아니야. 농담이 아니라 진짜 형들은 그렇게 부르더라고.”
“형들? 네 그 술친구 형들?”
“어.”
“요즘 그 사람들이 잘 끼워주나 보다. 자주 만나냐?”
한진영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느껴지자 이성우가 급히 고개를 저었다.
“자주 만나기는? 너도 일주일에 몇 번 못 보는데 그 형들 자주 만날 수 있겠냐? 그냥 어쩌다 한 번씩 보는 정도야. 나한테 투자 관련해서 묻고 싶다고 최근에 많이 부르기는 하는데 한 열 번 부르면 한번 나가는 정도다.”
이성우는 말을 마치고 잔뜩 주눅 든 표정으로 한진영의 표정을 살폈다.
자기가 주의를 들었음에도 말을 듣지 않은 것에 한진영이 화라도 났을까 걱정하는 표정이었다.
한진영은 잠시 탁자를 내려다본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심해. 앞으로 네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다.”
“어 알고 있어.”
“네가 도태되어 후계 구도에서 밀려난 상태였다면 상관없어. 하지만 지금 너는 누가 뭐래도 기풍의 미래야. 이제는 네가 오히려 그 사람들에 비해 급이 높아. 게다가 좋은 사람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고…….”
“그래. 다음부터는 불러도 가지 않을게.”
한진영의 걱정에 크게 대답한 이성우는 급히 화제를 다시 안혁규 쪽으로 돌렸다.
그래야 모임 이야기를 더는 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네 생각은 안혁규가 너무 큰 힘을 가지는 것을 걱정하여 힘을 빼둔다는 거야? 지금 이대로 놔두었다가는 다음 정권에서 너무 클 거 같아서?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인데?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그냥 커질 것으로 예정된 사람에게 붙어서 도움을 주는 게 더 좋지 않아?”
한진영은 가만히 팔짱을 낀 채 탁자를 내려다봤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모습처럼 보였다.
한진영은 그 상태 그대로 손만 들어 이성우의 말에 대답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랬겠지. 하지만 그놈은 안돼.”
“뭐가 안 되는데?”
“건드릴 수 없을 정도로 커지는 거. 그거 막아야 해.”
“그러니까 왜?”
“내가 무너뜨려야 하니까.”
“뭐라고? 뭘 무너뜨려?”
한진영은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이성우를 바라보고 말했다.
“그 새끼를 내가 무너뜨려야 하거든. 그러려면 적당히 크는 편이 좋아. 이번 일에 성공해서 차기 정권의 실세 중의 실세가 된다면 건드리기가 불편할 테니까. 적당히 지금쯤 발목을 부러뜨려 놔야 나중에 부딪혔을 때 확실하게 밟아줄 수 있어.”
차기 정권의 실세가 유력한 존재를 향해 ‘그 새끼’라는 호칭으로 부르는 한진영이었다.
이성우는 평소답지 않은 한진영의 모습을 보고 놀란 얼굴로 물었다.
“안 의원이 너한테 뭔 잘못이라도 했냐? 네가 이렇게 노골적으로 누굴 미워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아.”
“나한테 잘못했지. 그것도 아주 많이.”
한진영을 늪에 빠지게 만드는데 여러 사람이 동조했다지만 그중에 으뜸은 안혁규라고 볼 수 있었다.
한진영은 그런 그에 대한 원한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안혁규에 대한 작업을 지금부터 준비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8,000억을 모두 망가뜨릴 수도 있어. 하지만 그렇게 되면 차기 대선에 영향이 미치겠지. 내가 원하는 것은 그게 아니야. 모든 것은 정상적으로 흘러가는 상황에서 내가 원한을 품은 사람만 원점 타격을 하듯이 조질 생각이야.”
처음에는 8,000억이라는 자금을 모두 망가뜨리며 안혁규를 나락으로 몰아갈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한진영이 알고 있는 역사가 망가질 위험이 있었다.
한진영은 바보가 아니었다.
원한이 아무리 깊다고 해도 원한을 풀기 위해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를 수는 없었다.
적당한 타격을 주어 휘청이게만 하는 것.
지금은 그 정도가 딱 좋다는 것이 한진영의 판단이었다.
그래서 안혁규만을 타격할 방법을 생각해낸 것이었다.
“CP 시장을 알려주기만 하면 돼. 그렇게만 하면 그다음은 알아서 안혁규가 제 발로 불구덩이에 뛰어들 거야.”
“네 이야기를 들으니까 CP 시장에 뭔가 터질만한 사건이 있나 봐? 그러니까 안혁규가 그곳으로 들어가 타격을 입을 거라고 말하는 거 같은데…… 그게 뭐냐?”
“안 그래도 그 말을 해주려 했다. 북양그룹. 북양그룹 조심해라.”
“북양그룹? 북양그룹이 왜?”
북양그룹은 제과로 시작하여 시멘트와 건설 그리고 금융산업까지 전방위적인 사업을 영위하는 곳이었다.
한때 재계 순위 10위권에 들기도 했으며 50년대부터 사업을 시작한 1세대 기업의 대표주자였다.
이성우는 북양그룹에 관한 이야기를 떠올리며 말했다.
“최근에 힘들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어. 해외자원개발과 같은 신사업이 금융위기에 직격탄을 맞는 바람에 큰 손해를 봤다고 말이야. 그런데 오너일가가 몇몇 사업 부문 매각하고 자체 구조조정 안 마련해서 추진한 덕분에 지금은 위기가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고 하지 않았나? 난 그렇게 이야기 들었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겠지. 그런데 위기는 전혀 가라앉지 않았어. 그리고 앞으로 본격적으로 기업어음하고 회사채 발행하면서 돈을 시장에서 마구마구 긁어모으려고 할 거야. 설마 북양그룹이 망하겠냐는 슬로건과 함께 말이지.”
“그렇지. 북양그룹이라면 50년이 넘는 기업인데…… 거기가 망하는 건…….”
이성우가 맞장구를 치다가 깜짝 놀랐다.
“설마 북양그룹 망하냐?”
한진영은 이성우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진짜 망해?”
“그러니까 호들갑 떨지 말고 조용히 있어.”
이성우는 한진영의 말에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북양그룹이 망한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미칠 파급이 엄청나다는 것을 이성우는 알고 있었다.
당장 기풍조차도 북양건설에 물려있는 대금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이성우가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네가 이번 사장단 인사에서 새로 미래전략팀 팀장으로 자리한 것에 대한 선물이다. 돌아가서 북양그룹과 관련된 자금 빨리 정리해.”
“그래. 그래야겠다.”
이성우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어디서부터 정리해야 하는지 바쁘게 생각했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천천히 해도 돼. 당장은 아니니까. 대신 CP 발행에 관해 기풍증권에 도움을 요청하게 되면 타이머 돌아갔다는 뜻이니까 그 전에 정리하는 쪽으로 진행하면 된다.”
“그래. 고맙다. 역시 내 친구다. 너밖에 없다.”
“돌아가서 권수형 부회장님께도 축하드린다고 말 전해주고.”
“그래. 나한테 전략팀 넘겨주시고 바로 손때고 물러나는 건 아니시니까 권 부회장님하고 이야기 잘해서 정리하도록 할게.”
이성우는 몇 차례나 고맙다는 말을 다시 전한 후 낮은 목소리로 안혁규에 관한 이야기를 물었다.
“그럼 안 의원이 움직이는 비자금이 북양그룹에 흘러 들어갈 거라는 이야기야? 거기에 흘러 들어가서 같이 이렇게…….”
이성우는 말 대신 손으로 무너지는 모습을 보였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한진영은 다리를 꼬고 앉아 앞으로 있을 일을 상상하며 이야기했다.
“당장 돈이 급한 놈들이야. 그런 상황에서 돈을 불려줄 근사한 곳이 보이면 어떻게 하겠어?”
“들어가겠지.”
이성우의 대답에 한진영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들어갈 거야. 게다가 겉으로 보기에 북양그룹은 그럴 듯해 보이거든. 그렇게 그럴듯한 곳이 높은 이자로 꼬시는데 안 들어가고 배길 수가 없겠지?”
“그런데 너 아까 분명 안 의원이 모두 무너지는 건 원하지 않는다고 했잖아.”
한진영은 이성우의 질문을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답했다.
“그래. 안혁규가 움직이는 비자금은 이번 일로 무너지지 않아. 돈을 모두 집어넣지 못할 테니까.”
“모두 못 집어넣는다고?”
“북양그룹의 그릇이 8,000억을 모두 담지 못해. 그리고 안혁규도 8,000억을 모두 담을 정도의 배짱도 없고…… 결정적으로 8,000억을 모두 집어넣게 된다면 비자금이 사람들 앞에 드러날 수밖에 없어. 그걸 걱정해야 하니 모두 집어넣는 일은 없을 거야. 끽해야 1,000억에서 2,000억 사이? 그쯤만 집어넣을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안혁규가 가지고 있는 비자금이 받는 타격은 딱 안혁규에게만 영향을 미칠 정도만 된다는 이야기지. 이제 알았지? 그러니까 여기까지만 알고 이만 가봐. 마무리해야 할 게 있으니까.”
궁금한 이야기를 모두 들었다고 생각한 이성우는 이만 가보라는 한진영의 말에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문 앞으로 걸어간 뒤 한진영을 향해 말했다.
“아무리 바빠도 시간 좀 내서 같이 술이라도 한잔하자. 내가 본사로 돌아가는 걸 축하는 해야지.”
“돌아가긴 뭘 돌아가. 처음 가는 거면서…… 알았어. 한잔하자.”
한진영이 가볍게 수락하자 이성우는 손잡이를 잡고 나가기 전 인사를 건네려 했다.
그때 이성우보다 먼저 한진영이 말을 꺼냈다.
“아 참. 가기 전에…….”
“어? 왜? 할 말 있어? 그냥 이참에 오늘 한잔할까?”
이성우는 기다렸다는 듯이 웃으며 문을 닫으려 하자 한진영이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그런 이야기 아니야.”
“아니야? 그럼 뭐?”
이성우가 실망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한진영은 개의치 않은 채 조금 전 생각했던 것을 이성우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 모임 있잖아.”
“아~ 형님들하고 모이는 거? 그거 안 가겠다고 너하고 약속했잖아.”
“아니. 가.”
“가? 가라고?”
이성우가 뜻밖의 말에 놀란 표정을 짓자 한진영은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가서 서준일보 아들하고 친해져.”
“서준일보…… 아들? 왜?”
“너하고는 나중에 가족이 될 테니까. 친해지도록 해. 대신 아들을 만나게 되거든 살갑게 굴어. 어쨌든 너한테는 형님이 되는 거니까.”
“야! 나 결혼…….”
“내 이야기 명심해. 결혼은 무조건 너한테 도움이 되는 일이야. 그러니 잔말 말고 받아들여. 네가 할 일은 결혼이 좋다 싫다를 말하는 게 아니라 그 서준일보의 아들과 얼마만큼 친해지냐이니까 그것만 명심하고 모임에 나가서 그 아들에게만 집중하도록 해.”
조금 전까지 투덜대던 것을 멈추고 한진영의 말을 가만히 듣기만 하던 이성우는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 있구나?”
한진영이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아 그냥 단순하게 가족이 될 사이니 친해지라는 뜻이 아닌 것처럼 느낀 이성우였다.
분명 친해진 다음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 이성우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의 모습에 가만히 웃기만 했고, 이성우는 한진영의 미소에서 확신을 가지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