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증권사 생활-289화 (289/650)

289화 갈 곳 잃은 자금이 모인 곳

금융시장이 차갑게 얼어붙자 시중 자금들은 갈 곳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쇼크 뒤에 소생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주식시장을 외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채권시장도 마찬가지였다.

환율은 볼 것도 없었다.

부동산은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은행권에 들어가기엔 처참할 정도로 금리가 낮기만 했다.

시장에 흘러 다니는 자금은 허공에 뜬 채로 앉을 곳을 찾아 헤매었다.

그때 벼락같이 나타난 시장이 있었다.

회사채와 기업어음(CP).

불황이 발목까지 잠겨있는 지금 각 회사는 암울한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회사채와 CP 발행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기업어음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회사채의 경우에는 잠겨버린 국채시장의 영향을 피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기업어음의 경우에는 높은 금리와 상대적으로 짧은 상환 기간을 무기로 시중에 떠 있는 자금을 빠르게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CP 시장에서 유독 돋보이는 기업이 나타났다.

“얼마? 12%?”

“그렇다니까. 12%를 준대.”

“아니. 잠깐.”

어이가 없었던지 피우고 있던 담배를 쓰레기통에 비벼 끈 이는 북양그룹 이야기를 가지고 온 동료를 쳐다봤다.

“그러니까 북양그룹에서 연이율 12%짜리 CP를 발행했다고?”

“그게 전부가 아니라니까.”

“전부가 아니면 뭐가 또 있는데?”

“소문으로는 일부 VIP급들에는 20%짜리 이율을 보장했다고 그래.”

“뭐? 20%?”

20%라는 말에 잠깐 놀랐던 직원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하하.”

“왜 그렇게 웃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내가 믿어주지. 20%? VIP들에게만 따로 20%를 보장한다고?”

“그렇다니까.”

“에이 이 사람아.”

한참을 웃던 직원은 소식을 가져온 사람을 향해 손을 휘두르고 얼굴을 찌푸렸다.

“농담을 하려면 사람 봐가면서 해. 내가 자네 말에 속을 줄 알아?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해야지 장단이라도 맞춰주지. 연이율 20%짜리 CP가 사라진 지 20년은 됐겠구먼 무슨 20%짜리 어음을 발행했다고 그래? 지금이 무슨 1980년대야?”

선배들 그것도 까마득히 차이가 나는 선배들이 그때는 그랬지라며 지나가듯이 말할 때 들었던 것이 20%짜리 어음 시대였다.

그때는 3부 이자 4부 이자가 판을 치던 시절이었기에 연이율 20%짜리 어음도 심심치 않게 돌아다니고는 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산업화 고금리 시대의 이야기였고 지금은 산업 안정기에 들어가 저금리 시대였다.

연이율 10%는 고사하고 5%짜리 이자에도 돈이 몰리는 시기에 20%짜리 어음이 발행된다는 이야기를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어음을 발행하는 곳이 중소기업도 아니라 대기업 집단인 북양그룹이라는 소리에 이야기를 들은 직원은 말을 하는 동료가 자기를 놀리는 거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히려 이야기를 건넨 동료가 팔짝 뛰었다.

“진짜라니까 그러네.”

놀린다고 생각했던 직원은 상대방의 반응에 눈을 찌푸렸다.

“나 놀리는 거 아니야?”

“내가 왜 자네를 놀려? 지금 당장 돌아가서 알아봐. 지금 북양그룹의 북양시멘트에서 발행한 CP의 이율이 20%까지 올라갔다니까.”

기업명까지 확실하게 말한 동료는 잠시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그리고 조금은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모든 사람에게 20%의 이율을 보장하겠다는 건 아니라고 해. 조금 전에도 말했다시피 일부 VIP 그러니까 100억 이상의 어음을 받아주는 이들에게만 20%의 이율을 보장한다고 하더라. 나머지는 그냥 12%고…….”

“그래?”

조금 전까지 자기를 놀린다고 생각했던 직원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동료가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아 장난을 치는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믿기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12%? 왜 이렇게 높은 이율로 발행했지?”

“돈을 좀 많이 땡기려고 하나 봐.”

“혹시…… 위험한 거 아냐?”

“위험하기는? 북양제과나 북양레저라면 뭐 그럴 수도 있는데 다른 곳도 아니라 북양시멘트야. 여기 자회사로 뭐가 있는지 몰라?”

“알지. 북양파워가 있잖아.”

“그래. 그 북양파워가 북양시멘트 자회사야. 여기야말로 완전 알짜 기업 아니겠냐?”

“하긴 그렇지. 우리나라 최대 민자 석탄화력발전 사업권을 가지고 있어서 그냥 앉은 자리에서 돈 버는 곳이니까.”

“내 말이 그 말이다. 이런 알짜 회사를 가지고 있는 북양시멘트가 무너지겠냐?”

“하긴 또 그러네. 게다가 북양시멘트는 업계에서도 1, 2위를 다투는 곳이니 거기가 무너지면…….”

“건설사들도 난리가 나는 거야. 무조건 살아 있을 수밖에 없는 곳이라고.”

설득당한 직원은 다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 가만히 동료의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정리하고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물었다.

“지금도 들어갈 수 있나?”

“그렇지? 너도 이야기 들으니까 들어가고 싶지? 안 들어가면 바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라니까.”

“그러게. 연이율 12%면 그러고도 남지. 게다가 다른 곳도 아니라 북양시멘트라면…… 정말 들어가 볼 만한 거 같은데?”

같은 금융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조차 혹할 정도의 조건이었다.

이야기를 처음 꺼낸 동료는 같이 들어가자고 꼬시지 않아도 먼저 말을 꺼내오는 동료의 모습에 신난 듯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렇듯 독보적인 모습의 북양그룹의 회사채와 CP에 시중 자금이 쏠리기 시작했다.

여타 다른 기업들에 비해 더욱 큰 덩치와 안정적으로 보이는 모습에 1조가 넘는 자금이 순식간에 북양그룹에 몰려든 것이었다.

한진영은 조지훈을 통해 이렇게 몰려든 자금 중에 안혁규의 자금 이야기를 들었다.

“안혁규 의원이 차명으로 집어넣은 금액의 총합이 700억 정도 되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한진영은 예상보다 낮은 금액 숫자에 입꼬리를 비틀었다.

“잘 숨겨서 넣었나 보네.”

그럴 리가 없다는 듯한 한진영의 표정에 조지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더 있는데 저희가 못 찾은 건가요?”

“그럴 거야. 안혁규가 700억 넣었을 리가 없어.”

한진영은 단언하다시피 조지훈의 보고에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알고 있는 안혁규라면 당장에 모든 자금이라도 넣고 싶어 했을 거야. 그런데 그럴 수는 없었을 테고…… 지금까지 모인 금액이 얼마라고?”

“1조 7,000억쯤 됩니다.”

“많이도 모였네.”

“네. 이것도 중간에 마감해서 막은 금액이라고 합니다. 막판에는 대기 순번까지 나눠주며 상담을 할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시중에 돌아다니는 자금이 갈 곳이 없으니 회사채 시장에도 1조가 넘는 돈이 들어가지.”

한진영은 이 돈이 모두 조만간 휴짓조각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휴짓조각 속에 안혁규가 운용하는 비자금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한진영은 조지훈을 올려다보고는 안혁규가 집어넣었을 금액을 말했다.

“1,700억.”

“네?”

“안혁규가 집어넣었을 자금의 규모 말이야. 1조 7,000억이 모였다면 그중에 10%가 안혁규가 집어넣은 돈일 거야.”

“1,700억이나 넣었다고요?”

“왜 놀라?”

한진영의 태연한 표정과 달리 조지훈은 1,700억이라는 금액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무 많이 넣은 거 아닙니까?”

조지훈의 모습에 한진영이 웃으며 말했다.

“거기가 사고가 터질 줄 아는 우리니까 너무 큰 금액처럼 보이지. 반대로 안혁규의 입장이 되어봐. 여기보다 더 안전한 곳이 어디 있을까? 없어. 8,000억을 다 넣고 싶은데 10%가 넘는 자금이 들어갔다가는 금감원을 비롯해서 금융당국의 레이더에 걸릴지도 몰라 10%만 들어갔을 거야. 그 정도는 쪼개서 들어갈 만했으니까.”

한진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들고 온 서류를 조지훈은 내려봤다.

그곳에는 안혁규의 차명 계좌로 의심되는 것들이 적혀 있었다.

한진영의 지시에 의해 비서실 규모가 많이 커진 상태였다.

그리고 하는 일도 다양해졌으며 지금처럼 은밀한 일도 수시로 진행했다.

하지만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는 결과만 가져온 것에 조지훈은 한진영 앞에서 부끄러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한진영도 그런 조지훈의 마음을 읽은 것인지 조지훈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줘봐. 내가 한번 봐볼 테니까.”

“대표님. 이건…….”

“어디까지 살피고 왔는지 내가 직접 봐야 알 것 아닌가? 그러니까 줘봐.”

한진영의 말에 조지훈은 부끄러운 얼굴을 숨기지 못한 채로 가지고 온 것을 내밀었다.

한진영은 조지훈에게서 건네받은 서류를 잠시 내려다본 뒤 손가락으로 서류를 튕겼다.

그리고 서류를 책상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VIP급의 특별대우를 받은 계좌들만 정리해서 가지고 왔네?”

“네. 분명 안혁규라면 이율을 더 쳐주는 VIP급 라인으로 들어갔을 거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러지.”

한진영은 이유를 알겠다는 표정으로 의자에 기대며 말했다.

“안혁규가 그렇게 바보가 아니야. VIP 기준이 얼마야? 100억이야. 우리나라에 투자를 위해 현금 100억을 집어넣을 수 있는 사람 숫자가 그렇게 많지가 않아. 그래서 각 금융사는 그런 고객들을 명단으로 만들어서 따로 관리할 정도야. 그런데 생전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갑자기 100억을 들고 툭툭 나타나면 어떻게 하겠어?”

“의심받겠군요.”

“그래. 당연히 의심받지. 지금처럼 일곱도 안혁규 입장에서는 정체가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감수하고 만들어낸 숫자일 거야. 그런데 더 들어갈 수 있겠어?”

“그럼 나머지는 일반인으로 위장하여 들어갔을까요?”

“당연하지.”

한진영은 초조한 마음으로 가입서와 입금 확인 내역서를 내려다보고 있을 안혁규를 떠올리고 웃었다.

“지금 마음이 복잡할 거다. 더 들어가고 싶었는데 못 들어가서 아쉬운 마음과 잘못되면 어떡하지라는 마음이 공존할 거야. 나나 정 회장님에게 돈을 맡겼다면 차라리 마음이 편했을 텐데 자기 손으로 직접 들어갔으니 이제 잘못할 때 모든 책임을 자기가 져야 하거든. 흐흐. 재미있겠어. 아주 재미있겠어.”

한진영은 북양그룹이 무너진 뒤 안혁규의 모습이 벌써 보고 싶어졌다.

***

북양그룹이 발행한 회사채와 기업어음은 업계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동안 대중적이지 못하여 아는 사람만 알았던 투자시장이 이제는 메이저 반열로 올라오는 계기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마감되어 더는 들어가지 못하는 북양그룹의 회사채와 기업어음을 아쉬운 마음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북양그룹에 이어 나올 다음 타자를 목놓아 기다렸다.

연이율 10% 이상의 고금리 상품을 사람들은 애타게 기다린 것이었다.

그러나 다음과 또 다음 이어진 상품들의 출시에 사람들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3%대의 회사채.

1% 혹은 2%대의 단기 기업어음.

10%를 훌쩍 넘겼으며 일부 VIP급들에게는 20%의 수익을 보장했던 북양그룹의 회사채와 기업어음과는 완전히 다른 수준의 상품들이 출시되어 사람들의 선택을 기다린 것이었다.

사람들은 보통 자기가 생각할 수 있는 범위를 넘는 현실을 마주했을 때 현실을 부정하고는 했다.

자기들의 생각이 맞는 것이며 눈에 보이는 것들은 모두 잘못된 것으로 생각했다.

회사채 시장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랬다.

“뭐야? 정신전자 회사채는 뭔데 3.2%밖에 안 돼?”

“자기네들이 북양그룹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 건가? 뭘 이렇게 싸게 내놨어?”

“그러니까 말이야. 다음 거 보자. 다음에는…… 얼라? CST바이오는 3%도 안 되는데?”

“그게 정말이야?”

증권사 객장에 삼삼오오 모여 주식 현황판을 바라보던 사람들이 지금은 회사채 발행 스케줄을 확인하고 있었다.

연 10% 이상의 수익은 주식쟁이의 마음을 돌리기에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양그룹 이후에 나온 회사채들은 보잘것없는 수준의 것들뿐이었다.

“이거 배들이 불렀구먼.”

“자기들 급이 높다고 생각한 거지. 이렇게 내놓아도 사람들이 사줄 거라고 말이야.”

“그러니까. 어디 우리가 바보 등신인 줄로만 아나. 돈이 좀 몰린다니까 벌써 이런 식으로 배짱 장사하는 게 텄다 텄어.”

사람들은 회사채와 기업어음 시장이 북양그룹으로 인해 몰린 사람들로 인해 배짱 장사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북양그룹에 비해 한참 모자란 회사들이 북양그룹이 제시한 이율의 반의반 토막밖에 되지 않는 가격을 제시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북양그룹의 이율을 본 순간 북양그룹이 기준이 되었고 북양그룹이 제시한 조건이 시장의 중심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사람들은 1조 7,000억에 마감이 된 상품을 아쉬워했다.

기업의 투자를 받지 않고 개인의 투자만 받았기에 많은 사람이 신청할 수 있어서 더욱 아쉬워할 수밖에 없었다.

옆에 친구는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듣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의 선택이 늦은 것을 후회했으며, 들어간 사람 또한 더 많이 들어가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그만큼 북양그룹의 회사채와 기업어음은 사람들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런 북양그룹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은 주가에 바로 나타났다.

하락세를 면치 못하던 주가는 상승반전 하여 일주일 만에 50%가 넘는 상승을 보여줬다.

북양시멘트를 비롯하여 기업의 모태인 북양제과 그리고 북양건설과 북양제지까지 관련주들은 모두 상승하는 기염을 토해낸 것이었다.

한진영은 이렇게 올라오는 북양그룹주들을 바라보며 아쉬워했다.

“우리나라는 개별주식 선물시장이 활성화가 되어 있지 않아서 많이 아쉬워요.”

“대형주 몇 개를 빼놓고는 유명무실한 게 사실이죠.”

“그러니까요. 마음 같아서는 여기서 북양그룹 관련주들 죄다 선물 매도 때리고 풋옵션 박박 긁어모으고 싶은데 말입니다.”

홍대민은 한진영의 곁에서 아쉬움을 토로하는 한진영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그래도 대신에 공매도를 치고 있지 않습니까?”

“아쉬운 대로 그거라도 하는 거죠.”

한진영은 홍대민을 슬쩍 돌아보고 웃었다.

“끽해봐야 100% 버는 게 다니까 그게 아쉬워서 그런 거죠.”

지난주에만 50% 상승했으며 이번 주에도 상승세가 유지되어 저점 대비 2배가 넘게 오른 북양시멘트의 주가를 보고 하방 세팅을 마음껏 하지 못하여 아쉽다고 이야기하는 한진영의 모습에 홍대민은 기가 차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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