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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의 증권사 생활-295화 (295/650)

295화 음흉한 늙은이

“4팀은 어떻게 할까요?”

잠시 생각하고 있던 홍대민에게 최수찬이 물어왔다.

“4팀…….”

홍대민은 한동안 최수찬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만 봤다.

그리고 가만히 웃으며 지시했다.

“4팀도 매수 들어가라고 해.”

“4팀도 바로 하는 건가요? 준비기간도 없이 바로요?”

“그래. 돈 들어왔으니 바로 움직여야지. 4팀뿐만이 아니야. 제2 펀드 운용하기로 했던 팀들 모두에게 전해. 지금 바로 움직이라고 말이야.”

최수찬은 홍대민의 지시에 빠르게 태블릿으로 각 팀에 지시를 내렸다.

홍대민의 지시사항이 화급을 다툴 정도는 아니지만, 이런 부류의 지시는 받는 입장에서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기 때문이다.

최수찬은 지시가 모두에게 전해진 것을 확인하고 홍대민에게 말했다.

“펀드 투자금이 어제 정리가 끝난 것으로 아는데 바로 움직일 줄은 몰랐습니다.”

“나도 몰랐어. 대표님께서 오늘 아침에 알려주셔서 나도 이제 안 거야.”

“1조를 시장에 바로 풀어도 괜찮을까요?”

“그뿐이 아니야. 제1 펀드 쪽도 오늘 기준으로 물량 담으라고 지시해.”

“미국 쪽 물량도 담기 시작하는 건가요?”

“그래. 우리는 지금을 기준으로 풀 포지션에 들어가는 작업을 하는 거야. 이미 파생팀은 벌써 움직이기 시작했어.”

홍대민의 눈에는 1,650마저 깨고 떨어져 내리는 지수가 보였다.

반등다운 반등 한번 없이 힘없이 빠져 내려오는 모습 속에서 더는 기대라는 것이 보이지 않는 지수였다.

이런 상황에서 새롭게 출시하여 고객을 받은 신규 펀드 자금까지 모조리 집행하라는 한진영의 말에 홍대민은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과감함을 넘어 무모함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정을 내린 이가 한진영이라고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었다.

한진영이라고 한다면 이유가 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반전의 기회가 찾아오나?’

홍대민은 힘없이 빠져 내려가는 지수 속에서 무섭게 매수하기 시작하는 각 팀의 위치를 현황판으로 바라보고는 한진영이 보고 있는 게 무엇인지 생각했다.

***

한진영은 불 꺼진 사무실에 홀로 앉아 TV를 바라봤다.

TV 속에서는 이제 막 시작한 미국 시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현재 나스닥은 1100까지 오른 뒤 더블딥에 대한 우려로 1,040선까지 빠져 내려온 상태입니다. 실업률은 바닥을 치고 있으며, 소비는 전혀 나아지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미국의 기업들은 올해 남은 기간은 물론이고 내년까지도 경기침체를 예상하여 긴축 운영을 준비하는 모습입니다. 신규 채용을 줄이고 있으며 임금을 동결하여 고정비용에 대한 부담을 줄이는 기업이 S&P500에 상장된 기업 중 절반이 넘습니다. 이렇게 악순환이 이어지는 미국은 경제침체를 걱정한 채로 잭슨홀에서 주요 인사들이 모여 회의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시장은 잭슨홀 회의에서 획기적인 어떤 해결책이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저 이 빙하기가 빨리 지나가기만을 기다릴 뿐입니다.

한진영은 암울하게 느껴지는 멘트를 들으며 보합권에서 등락을 보이는 지수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때.

벌컥.

“여기 있었냐?”

한진영 혼자 자리하고 있는 사무실 문을 이성우가 벌컥 열어젖히고 들어왔다.

“여기서 뭐 해?”

“그러는 너는? 이 시간에 여긴 웬일이야?”

“짜잔.”

이성우는 뒤에 숨겨 가지고 온 캔맥주와 안주를 꺼내 흔들었다.

“한잔하자.”

“들어와.”

한진영의 승낙에 이성우는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며 TV 화면을 바라봤다.

“너는 이 시각에도 미국 장을 보고 있냐? 좀 쉬어라 쉬어.”

“이게 쉬는 거야. 그런데 진짜 이 시간에 웬일이야?”

“말도 마라.”

이성우는 한진영 앞에 가지고 온 캔맥주를 내려놓고 자기 것을 땄다.

“어이쿠.”

가지고 오느라 흔들려서 그런 것인지 캔맥주에서는 거품이 뿜어져 올라왔고 이성우는 그걸 급히 입으로 빨아 마셨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의 모습에 얇게 웃고는 이성우와 마찬가지로 캔맥주를 뜯어 거품을 들이켰다.

이성우가 먼저 마신 캔맥주를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좋다. 업무 끝나고 한잔하는 게 이게 아주 그만이야.”

“네가 언제 일했다고 그래?”

“왜 그래? 나 본사 가서 아주 열심히 일하고 있어. 그래서 죽겠다. 죽겠어.”

이성우는 말을 마치고 목이 탔던지 캔맥주를 들어 다시 한 모금 크게 들이켰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의 모습을 바라보며 앞에 놓인 땅콩을 집어 입에 넣었다.

“그건 그렇고 왜 말 하다 말아? 그래서 왜 온 건대?”

“잠시 너 만나서 쉬려고 왔지.”

“쉬려면 집에 가야지 왜 날 찾아와?”

“어차피 나갈 텐데 집에 들어가서 어떻게 쉬어? 그냥 밖에 나와 있는 상태로 쉬는 게 낫지.”

“어차피 나간다고? 네가 어딜 가는데?”

“일하러 간다.”

“일하러? 네가 지금 시간에 일하러 간다고?”

“그래.”

한진영은 시계를 돌아봤다.

시계는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평소 이성우였다면 점심 먹고 4시쯤 어슬렁어슬렁 나와 5시가 되기 전에 퇴근하고는 했다.

남의 회사에 다닐 때나 야근한다든지 아니면 특근한다든지 했지, 기풍이라는 글자 아래 앉아서는 야근의 야자도 하지 않았던 이성우였다.

그런 이성우의 입에서 밤 11시에 일하러 간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아무리 야근하더라도 9시를 넘기는 적이 없었던 그가 11시에 일하러 간다고 하니 한진영으로써는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에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너 혹시 어디 아프냐? 그래서 지금 시간이 몇 시인지 헷갈린 거야? 지금 시간에 일을 왜 해? 그것도 네가 왜?”

“내 말이 그 말이다. 이 시간에 내가 왜 일해야 하냐?”

“기풍에서 내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프로젝트 진행하고 있는 거냐?”

“우리 회사에 네가 모르는 프로젝트가 어디 있어? 아버지가 볼펜 하나 사더라도 너하고 상의해서 진행하라고 하시는데. 아주 누가 아들인지 모르겠어.”

한진영에 대한 이정훈 회장의 믿음은 맹목적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였다.

자그마한 프로젝트더라도 한진영이 괜찮다는 말을 들어야만 진행할 정도로 한진영에 대한 의존이 상당했다.

이런 이정훈 회장의 한진영 의존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니켈 광산에 이어 기풍이 진행한 사업에서 한진영이 조언해준 사업들이 엄청난 성장세를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LZ와 대한정유 그리고 기풍으로 이루어진 삼각 연합이 만들어낸 이차전지 배터리가 테라와 대규모 공급 계약을 맺으며 새로운 성장동력에 탄력을 받은 상태였다.

기풍은 올해를 2차 도약의 해로 잡았다.

그리고 이런 도약에 한진영의 지분을 인정하며 한진영과 자그마한 것이라도 의논하여 진행하라는 지시를 모든 경영진에게 내려놓은 상태였다.

이정훈 회장이 주는 것 없이 한진영을 뽑아먹으려 하는 것은 아니었다.

컨설팅 명목으로 한진영의 세이지 자산운용과 기풍이 정식 계약을 맺은 데다 기풍증권에서 운용하던 자산까지 모두 세이지 자산운용에 의뢰하며 세이지 자산운용의 든든한 거래처로 자리를 잡은 것이었다.

세이지 자산운용과 기풍은 둘이지만 하나같은 동무와 같은 포지션으로 함께 미래를 나아가자는 말까지 할 정도로 이정훈 회장은 한진영과의 연대에 지대한 공을 쌓고 있었다.

“왜 부러우냐?”

한진영의 말에 이성우가 몸서리를 쳤다.

“그냥 네가 아들 해라. 나는 아들 하고 싶지 않다.”

“내가 기풍 먹어도 돼?”

“네가 먹어. 그게 기풍을 위해서, 아버지를 위해서, 모두를 위해서 나은 길일 것 같으니 말이야.”

한진영이 농담을 건넸는데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이성우였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를 위아래로 살피며 말했다.

“뭐야? 왜 이래?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기풍의 아들 자리도 내놓겠다고 그러는 거야?”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쉰 이성우는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마신 뒤 말했다.

“네 형수 될 사람 때문에 그런다.”

“왜? 예비 와이프가 힘들게 하냐?”

“지금 이 시각에 쇼핑을 가잔다. 나 참. 이 시간에 술을 마셨으면 마셨지 쇼핑은 또 난생처음 한다.”

“쇼핑?”

밤 11시에 일을 하겠다고 할 때도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 말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말이었다.

그러나 쇼핑은 어떻게 생각해도 밤 11시와는 어울릴 수가 없는 말이었다.

“지금 시간에 무슨 쇼핑을 한다고 그래?”

“백화점에서 하는 프라이빗 쇼 있잖아. 그거 가자고 아주 난리다 난리야. 아니 사고 싶은 거 있으면 그냥 사면 되지 뭐가 다르다고 프라이빗 쇼에 가자고 이 난리인지 모르겠다. 안 간다고 하면 파혼하자고 하는데…… 그냥 이참에 파혼할까?”

“지랄한다.”

한진영이 타박할 때 이성우의 전화기 벨이 울렸다.

이성우는 보라는 듯이 전화기를 들어 보인 후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한진영은 통화를 하는 이성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캔에 남아있던 나머지 술을 단순에 들이켰다.

그리고 탁자에 빈 캔을 올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전화를 마친 이성우는 전화기를 내려놓으며 한진영을 올려다봤다.

“왜 일어나?”

“왜 일어나기는? 가자.”

“어? 가자고? 어딜?”

“어디긴 어디야. 그 프라이빗 쇼인가 뭔가 한다는 백화점 말이야. 거기 가자.”

“거길 네가 왜가?”

“왜 가기는? 너 파혼하는 건 두고 볼 수 없으니까 가자는 거지. 일어나. 지금 전화 빨리 오라는 전화 아니었어?”

“어? 어. 그렇긴 한데…….”

가기 싫어하던 이성우의 표정이 점차 바뀌었다.

그리고 무엇을 떠올렸는지 신난 표정으로 바뀌어 한진영을 향해 말했다.

“그래. 네가 간다고 하면 가야지. 나야 뭐 너랑 가면 좋지. 심심하지는 않으니까. 그래. 가자.”

이성우는 한진영에게 말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한진영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밖으로 나갔다.

‘한번 알아보기는 해야지.’

서준일보 문씨 성을 가진 놈 중에서 큰딸이 가장 낫다는 이야기를 들어 이성우와 짝을 이루라고 밀어붙였던 한진영이었다.

그런데 피곤하다는 말에 한진영은 한 번쯤은 이성우와 결혼할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괜히 무시하다가 엄한 곳에서 태클이 들어올지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한진영과 이성우는 사무실을 나갔고 사무실에 남겨진 TV에서는 여전히 보합권에서 움직이는 나스닥 모습이 나왔다.

***

한진영이 차에 올라타자마자 먼저 타고 있던 이성우가 한진영의 곁으로 바짝 붙어왔다.

그리고 조금 전 말하려 했지만 말하지 못한 것들을 이야기했다.

“문동우 본부장 있잖아. 수사 들어간 거 같더라. 지금 서준일보가 발칵 뒤집혔다고 해. 어떻게 한 거냐?”

“그거 내가 알아서 한다고 했잖아. 네가 신경 쓸 건 없어. 내가 말한 대로 미리 이야기했지?”

“어. 네가 수사 들어가기 전에 이야기해야 한다고 해서 먼저 말하기는 했다. 처음에는 믿지 않는 눈치던데 내가 이야기하자마자 바로 수사가 들어가니까 이제 안 믿으려야 안 믿을 수가 없는 눈치야.”

“문 본부장은 끝까지 아니라고 발뺌하고 있고?”

“그런가 봐. 하긴 여기서 맞는다고 시인하기도 어렵겠지. 수사가 그냥 마약 투약이 아니라 마약 공급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소리가 있더라고. 이건 심각하게 엮일 수 있는 것 아니냐?”

한진영은 이성우의 말에 나직이 웃고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잠시 바라봤다.

동우 법률사무소에서 나가려던 한진영을 김교철은 마지막에 남겼다.

그리고 김교철은 한진영에게 짧은 말을 남겼다.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

대신 더는 욕심내지 말아라.

욕심을 내는 순간 너와 내가 충돌할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한진영은 김교철의 말에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당시 상황에서 한진영의 입을 통해 나오는 말은 모두 변명처럼 비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그런 말을 김교철에게 하느니 침묵하기로 선택했고 김교철은 침묵한 한진영의 입을 통해 자기의 뜻을 받아들이겠다고 여기며 자리를 떠났다.

한진영에게 안혁규는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를 몰락시키는 것은 이제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김교철은 달랐다.

자리하고 있는 위치부터 안혁규와는 달랐으며 가진 힘의 크기 또한 안혁규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미 수십 년 동안 차분히 밑을 다져 쌓아 올린 그의 거대한 성은 지금의 한진영이 공략하기에는 너무나 견고했으며 커다랗기만 했다.

“음흉한 늙은이.”

“어? 뭐가?”

한진영의 혼잣말에 이성우가 반응했다.

한진영은 밖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을 이성우 쪽으로 돌렸다.

“아냐. 그것보다 넌 그냥 최선을 다했다면서 이제는 그냥 지켜보기만 해. 이미 문동우는 수렁에 빠졌기 때문에 가만히 놔둬도 될 테니까.”

한진영의 말에 이성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런데 너무 쉬운 거 아니냐? 언론사의 본부장급에 그래도 명색이 서준일보를 물려받을 후계자인데 너무 쉽게 잡혀 들어가는 거 아닌가 싶어서 말이야.”

“평소라면 뭉개고 앉아서 사건을 은폐하거나 축소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지금은 왜 아닌데?”

“문동우를 노리고 있는 놈들이 그냥 평범한 상대측 언론사 혹은 서준일보와 불편한 관계의 사람들이 아니거든.”

한진영의 말에 이성우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너…… 누구한테 문동우를 찍어내라고 부탁한 거냐?”

이성우의 말에 한진영이 웃으며 이성우의 가슴을 두드렸다.

“네가 신경 쓸 건 없다. 너는 그냥 내가 만들어 놓은 탄탄대로를 따라 서준일보를 손에 넣으면 돼.”

한진영은 말을 마치고 다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이성우는 그런 한진영의 모습을 보고 더는 물을 수가 없었다.

한진영의 말을 들으니 자기가 굳이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이유가 없을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한진영과 이성우를 태운 차는 그렇게 밤거리를 밝게 비추는 가로등 아래를 지나 여전히 화려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백화점으로 미끄러지듯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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