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화 모든 것이 만들어진 쇼다
한진영의 곁에 앉아있던 이성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잠시만요.”
문서영이 그런 이성우를 막아섰다.
“서영 씨. 잠시 놔보세요. 아니 저 여자가 미쳤나. 왜 갑자기 난리야?”
한진영에게 공격한 것을 마치 자기에게 한 것처럼 느낀 이성우가 한진영을 대신해서 나서려 한 것이었다.
“잠깐만 있어 봐요.”
문서영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이성우가 일어난 채로 문서영을 내려다봤다.
문서영은 그런 이성우를 올려다보고 말했다.
“저 여자 아무래도 해천 법무법인의 와이프인 것 같아요.”
“해천 법무법인이요?”
“네. 이번에 부장판사 몇 명이 같이 나와서 차렸다는 법무법인이요.”
“아~”
이성우도 들은 기억이 있었다.
부장판사들이 합심하여 로펌을 하나 세웠다는 이야기는 꽤 유명한 이야기였다.
부장판사 정도 되면 대부분 로펌이나 기업에서 모셔가기 마련이었다.
고액의 연봉을 주고 데리고 가 그들이 닦아놓은 인맥을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부장판사들도 그런 대우를 나빠하지 않았다.
판사직을 이어가며 받을 수 없는 높은 연봉이 굴러들어왔으며, 업무량도 판사 자리에 앉아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적었기 때문이다.
그저 한가롭게 자리에 앉아 시간 때우는 것으로 10억에 가까운 금액을 받았기에 대부분은 이런 스카우트에 응해 자리를 옮겼었다.
그런데 이번에 나온 사람들은 좀 특별했다.
사법연수원 13기들에 해당하는 부장판사들이 동시에 퇴직한 후 로펌을 세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을 따라 나온 후배와 기존에 변호사로 탄탄히 자리를 잡고 있던 이들까지 합류하며 단숨에 업계에 큰바람을 일으켰다.
해천 법무법인은 최근 가장 유명세를 떨치는 로펌이었던 것이었다.
“아무리 봐도 저 여자 해천의 대표 변호사의 와이프인 것 같아요.”
“그래 봤자 신규 로펌 아닙니까? 그런데 마치 자기가 뭐라도 된 것처럼 저렇게 입에 쌍욕을 물고 사니 가만히 있을 수…….”
“가만히 계세요.”
이성우는 당장에 뛰쳐나가려고 팔을 걷어붙이던 것을 멈췄다.
문서영의 눈치를 보느라 이성우는 앞으로 나서지 못한 것이었다.
“판사들이 가장 힘이 있을 때가 언제인지 몰라요? 퇴직 후 1년 동안이 가장 힘이 강할 때예요. 그런데 해천은 그런 사람들이 부장급으로 다섯이나 몰려있어요. 그뿐인 줄 아세요? 그들을 따라 나온 판사에 검사만 해도 스물이에요. 합류한 일반 변호사들도 다수이고요. 지금 해천은 무서운 게 없는 상태예요.”
“그렇다고 두고만 보고 있자고요? 저러고 있는데요?”
이성우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서는 중년 여자가 백화점 직원을 향해 손을 휘두르고 있었다.
불만을 표시하는 것은 말로 해도 충분했다.
하지만 여자는 말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손과 발을 이용하여 직원들을 구타했다.
그리고 이렇게 그녀가 날뛸 수 있었던 이유는 잠시 화장실을 다녀왔던 그녀의 남편이 어느새 그녀의 뒤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 사람 아무나 받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왜 이렇게 물이 더러워졌어? 여기 애새끼들이 오는 곳 아니잖아?”
“죄송합니다. 그런데 저분들은…… 서준일보의 따님과 기풍의 본부장님이시고 곁에 있는…….”
“서준일보에 기풍이 뭐? 서준과 기풍이 뭔데?”
여자의 남편이 마치 들으라는 식으로 허리에 손을 올리고 한진영이 있는 쪽을 바라보고 소리쳤다.
한진영은 그런 남자와 여자의 모습을 보고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그들에게 걸어가며 말했다.
“분명 제가 먼저 사겠다고 했는데요.”
“그래서 그게 뭐? 우리 와이프가 산다고 하면 사는 거야. 네까짓 게 뭐라고 여기에 들어오는데? 너 뭐야? 너 어느 집 자식이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어디 감히 어른 앞에 똑바로 서서 눈을 부라리고 있어?”
남자는 다가오는 한진영을 향해 마주 걸어갔다.
이성우는 그런 모습에 자기를 잡고 있던 문서영의 손을 뿌리쳤다.
“놔봐요.”
“가만히 있어요. 지금 한창 힘이 좋은 법무법인을 건드려서 좋을 건 없어요. 당신 아버지가 알면 뭐라고 하겠어요?”
“아 상관없어요. 내 눈앞에서 누가 진영이에게 저러는 건 못 보겠으니까요.”
조금 전까지 문서영 앞에서 잔뜩 주눅 들어있던 이성우의 눈이 뒤집혔다.
그리고 문서영이 잡은 손을 내치고는 삿대질하며 한진영과 해천의 대표가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그 손 내리지 못해?”
해천 법무법인의 대표는 한진영에게 다가가 가슴을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는 중이었다.
그러다 이성우가 다가온 곳을 보고 비웃음을 흘리며 한진영과 이성우를 번갈아 바라봤다.
“얼씨구? 엄마 젖을 먹어야 할 놈이 하나 더 왔네. 그래. 네가 기풍 이 회장의 아들이냐?”
“이게 어디서 아버지한테 말을 놔? 네가 해천 법무법인이라는 곳의 대가리냐?”
“이 새끼가 어디서…….”
“뭐? 판사 주제에 어디서 입에 걸레를 물고 있어? 그리고 지금은 판사도 아니라면서? 변호사 주제에 아직도 판사인 줄 아는 거야?”
“이 새끼 봐라. 기풍 좀 조져 줘? 한번 탈탈 털어봐?”
“미친놈 아냐? 네가 뭔데 기풍을 털고 말고 하는데? 기껏 해봐야 변호사 나부랭이 주제에…….”
한마디도 지지 않고 받아치는 이성우였다.
마치 한진영을 보호하겠다는 듯이 한진영의 앞까지 가로막은 이성우는 해천 대표를 향해 그가 아까 한진영에게 했던 식으로 손가락으로 가슴팍을 찔렀다.
“해봐. 어? 할 수 있으면 해보라고 나는 하나도 무섭지 않으니까.”
“이 새끼가 정말.”
해천 대표는 이성우의 손목을 잡고 힘으로 꺾으려 했다.
그러나 이성우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다른 손으로 해천 대표의 멱살을 잡아 몸싸움을 벌이려 했다.
“고객님들. 잠시만 진정해주십시오.”
보다 못한 백화점 직원들이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둘을 떼어 놓고 잠시 진정시키려 한 것이었다.
하지만 둘 말고도 흥분한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너희들 VIP에게 이것밖에 대접하지 못해? 내가 사려던 물건을 저놈들이 뺏어 갔잖아.”
“고객님. 명확히 이야기하자면 저기 계신 남자 고객님이 먼저 사겠다는 의사를 표현하시기는 했습니다. 그 뒤에 여사님께서 말씀하신 거고요.”
“뭐? 그럼 내가 저 사람 걸 훔쳤다는 이야기야?”
“그게 아니라…….”
“여보. 여기 백화점도 가만히 놔둬서는 안 될 것 같아. 아니 사람을 도둑년으로 모는 곳이 어디 있어? 야! 너 다시 한번 말해봐. 내가 도둑년이야?”
“그게 아니라…… 여사님. 잠시만 진정하시고…….”
“내가 진정할 수 있어? 네놈들이 나를 도둑년으로 모는데?”
여자는 직원의 머리카락을 잡아채 흔들었다.
그리고 손에 잡히는 대로 직원의 얼굴에 마구 던져댔다.
꽃을 꽂아 놓았던 꽃받침 대부터 시작해서 간식거리가 놓여있던 접시와 찻잔까지 온갖 것들이 직원의 얼굴에 틀어박혔다.
“진정하세요. 진정하세요.”
백화점 직원은 감히 저항하지 못하고 당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는 기풍그룹도 죽이니 살리니 하는 존재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백화점 직원은 흙바닥을 기어 다니는 개미와 다를 바가 없어 보일 게 분명했다.
괜히 그런 그들을 자극했다가는 화가 직원에게 옮겨붙을 수도 있기에 직원은 그대로 상대방이 화가 풀리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밀치기라도 했다가는 이 사람들이 앙심을 품고 자기 인생을 조지겠다고 나올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한참을 직원을 향해 손찌검하던 여자는 더욱 발광했다.
그리고 자기를 화나게 했던 원천인 한진영에게로 달려들었다.
“너 가만 안 둬.”
일반인이라면 이렇게까지 발광할 이유가 없었다.
좋게 이야기하여 소유권을 이전받든지 아니면 아쉽지만 이번은 포기하고 다른 것 혹은 다음을 기약하는 편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여자는 과하다고 느낄 정도로 흥분해 있었다.
마치 정신병이 있는 게 아니냐는 느낌이 들 정도의 모습이었다.
중년의 여인은 뚱뚱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떨며 한진영을 향해 덤벼들었다.
“죽어.”
우당탕탕!
손톱을 세우고 한진영을 향해 손을 휘두르던 여자는 중심을 잃고 그대로 땅에 나뒹굴었다.
“여보!”
이성우와 힘 싸움을 하던 남자는 여자가 땅을 구르자 이성우를 밀치고 급히 여자에게로 달려갔다.
여자가 혼자 팔을 휘두르다 넘어졌음에도 마치 한진영이 넘어뜨린 것처럼 분노에 찬 눈으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그리고 악에 받친 목소리로 한진영과 이성우를 바라보고 소리쳤다.
“이 새끼들. 내가 너희를 가만 놔두지 않을 거야. 기풍이고 나발이고…….”
“김 대표 그만해.”
해천의 대표는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기에게 그만하라고 이야기하는 존재에게도 분노를 함께 보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해천의 김 대표는 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하고 분노를 거둘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다가온 김교철이 해천의 김 대표를 한심하다는 듯이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해. 이게 뭔 추태야? 다른 손님들도 많은데 낯부끄럽지도 않아?”
“선배님. 저 녀석이…….”
“왜? 한 대표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래? 한 대표는 나하고 함께 일하는 사람이야.”
“네? 선배님과요?”
해천의 김 대표는 품 안에서 여전히 화를 참지 못하고 바둥거리는 부인을 꽉 붙잡았다.
그리고 입을 틀어막으며 김교철을 향해 최대한 순수하게 보이려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성우는 순식간에 잠잠해진 해천 법무법인의 김 대표와 김교철을 번갈아 바라보고는 곁에 있는 한진영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 아저씨는 누구야?”
“동우의 설립자.”
“뭐?”
이성우가 깜짝 놀란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김교철은 한진영과 이성우가 있는 쪽을 슬쩍 바라보고 웃은 뒤 해천의 김 대표를 향해 말했다.
“한 대표는 나뿐만이 아니야. 우리 동우와 함께하는 분들에게도 중요한 사람이야. 그러니까 그만 까불어. 한 대표를 건드리는 건 나를 건드리는 거로 여길 테니까.”
“선배님…….”
해천의 김 대표의 이마와 등에서는 식은땀이 홍수처럼 흘러내렸다.
남편의 손에 맺힌 땀이 입을 축축이 적신 여자는 그제야 무언가 일이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여보.”
짝!
해천의 김 대표는 품에 안겨있던 부인의 뺨을 사정없이 때렸다.
“이 여편네야. 나서야 할 때가 있고 나서면 안 되는 때가 있지. 어디 한 대표님의 물건에 욕심을 내.”
“여보?”
남편에게 뺨을 맞은 여자가 얼굴을 부여잡은 채로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그러나 남편은 그러고도 몇 차례나 더 부인의 뺨을 내려쳤다.
그리고 급히 한진영을 향해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이 여편네가 생긴 것만 멧돼지 같은 게 아니라 하는 짓도 멧돼지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거의 동물이나 다름없어서 저도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랍니다. 그러니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주십시오.”
한진영이 아무런 대답 없이 고개를 돌리자 해천의 김 대표가 자리에 주저앉아 한진영을 향해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한진영을 대신하여 김교철이 말했다.
“그만 가봐. 자네 때문에 괜히 흥이 다 깨져버렸으니까 돌아가서 반성해. 그리고 내일 회사로 찾아와. 자네한테 내가 할 말이 좀 있으니까.”
해천의 김 대표는 김교철의 말에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진영을 향해 깊게 인사하고는 재빨리 부인을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백화점 테라스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직원이건 고객이건 할 것 없이 모두 한진영이 있는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김교철이 누구인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이곳에 있는 사람 중에 엉덩이가 가장 무거운 사람이라는 것도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를 자리에서 일으켜 세운 것도 모자라 자기와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게 만든 젊은 친구가 누구인지 모두 궁금한 얼굴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백화점의 가드는 물론이고 직원조차 조용히 맞을 수밖에 없는 존재.
그런 존재가 머리가 땅에 닿으라 사과하고 오히려 부인에게까지 손이 올라가게 만든 존재.
사람들은 한진영의 얼굴을 자세히 살피며 자기들끼리 이야기 나눴다.
“친구 결혼 선물로 사주려고 했다고?”
“네.”
“내가 결제하지. 후배가 실수한 것에 대한 사과로 말이야.”
테라스에 자리하고 있던 사람들은 또다시 놀랐다.
김교철이 해천 법무법인의 대표를 대신해서 사과까지 한 것이었다.
이런 일이 벌어질 거로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들은 한진영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됐다.
한진영은 사람들의 시선이 시시각각 변한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가만히 있었다.
이성우는 자기를 위해 김교철이 선물을 했다는 사실에 감사의 인사를 하며 한진영의 눈치를 살폈다.
김교철은 그런 한진영과 이성우를 보고 껄껄 웃은 뒤 손을 들어 흔들었다.
“그럼 이제 다시 시작해볼까? 진행자 양반. 계속하자고.”
김교철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하고는 몸을 돌렸다.
이성우는 돌아선 김교철의 뒤통수에 대고도 다시 한번 인사했다.
“가자.”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를 데리고 자리로 돌아왔다.
지금까지 모든 것을 바라본 문서영은 한진영과 이성우를 다른 시선으로 바라봤다.
문서영뿐만이 아니었다.
문서영과 함께 자리에 온 친구들 또한 한진영에 대한 시선이 달라졌다.
개천에서 난 용이 아니라 그냥 용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시선으로 한진영을 바라본 것이었다.
이성우는 달라진 여자들의 시선에 흐뭇한 표정을 짓다 한진영을 돌아봤다.
그런데 기분이 좋아야 할 한진영의 표정이 굳어 있는 것이 기분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왜 그래? 아까 일 때문에 그래? 기분 풀어. 어쨌든 동우의 김 대표님께서 정리해 주셨잖아.”
“나서지 않아도 정리할 수 있었어. 내 선에서…….”
“정리할 수 있었는데 김 대표님이 나서서 정리한 게 억울해서 그래?”
“아니. 누가 정리하건 그건 상관이 없어.”
“그러면 뭐가 문제인데?”
한진영과 이성우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멈췄던 쇼가 다시 시작됐다.
분위기는 멈췄을 때보다 더 좋아진 모습이었다.
오히려 흥분된 분위기에 쇼 또한 텐션이 올라간 것만 같았다.
한진영을 맞은편에서 높아진 분위기에 즐거워하는 김교철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쇼인 것만 같다.”
“그래 우리 지금 백화점 쇼에 와있잖아. 프리이빗쇼.”
“아니. 그것뿐만이 아니라 해천의 일까지 모두. 모두 저기 있는 양반이 만들어낸 쇼라는 생각이 든다. 아니. 분명해. 하여튼 음흉한 늙은이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데는 도가 텄어.”
한진영의 웃는 얼굴에서 바늘 한 쌈을 발견한 이성우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한진영과 김교철을 번갈아 바라보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