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7화 내가 받은 것 이상의 고통을 주겠다
한진영은 자리에 앉아 조지훈으로부터 보고받았다.
“지난 두 달간 선물 매매를 통해 벌어들인 수익은 약 300억입니다. 그중 100억이 최근 일어난 매매를 통해 벌어들인 수익입니다.”
“300억. 나쁘지 않네.”
“네. 매번 매매한 것도 아니고 하루에 서너 번 패턴이 나올 때만 매매를 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나쁜 정도가 아니라 대단한 수익을 올렸다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승률이 무려…… 100%입니다.”
조지훈은 보고서에서 시선을 올려 이야기를 듣고 있는 한진영의 얼굴을 살폈다.
한진영은 조지훈의 이야기를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이야기 들었다.
“두 달 동안 재미있게 놀았어. 이제 가지고 온 돈하고 수익 올린 것까지 합쳐서 다시 운용팀에 반납해. 아 참. 내 몫은 빼놓고 돌려줘야 해. 매매는 기계가 했지만, 엄연히 내가 생각해낸 아이디어로 만든 성과니까 나도 성과급은 받아야지.”
한진영은 말을 하고는 즐거운 듯 웃었다.
한진영은 수익의 일정부분을 인센티브로 지급하겠다는 약속을 자신에게도 적용한 것이었다.
조지훈은 이런 한진영의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자기에게도 회사가 정한 규칙을 냉정하게 들이대는 한진영의 모습이 대단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보통의 소유주라면 이런 정도의 성과급은 그냥 넘기고는 했다.
왜냐하면 회삿돈이 곧 자기 돈이기에 이런 류의 돈에는 크게 개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진영은 달랐다.
회사에 기여한 정도를 다른 직원들과 마찬가지의 잣대로 판단했으며, 그 판단의 결과에 따라 성과급과 연봉을 계산했던 것이었다.
아무리 회사의 소유주라고 하더라도 회사에 기여를 하지 못한다면 회삿돈을 함부로 유용할 수는 없다.
한진영이 정한 규칙에 예외를 두지 않았다.
이렇게 소유주에게까지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평가했기에 다른 직원들의 평가에도 잡음이 나올 수가 없었다.
친하다고 평가를 좋게 주고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다고 평가가 나쁘게 줄 수가 없는 구조.
세이지 자산운용은 성과급도 많이 주지만 성과급에 대한 평가의 투명성이 더 뛰어나다는 이야기의 근원이 여기서 나온 것이었다.
한진영이 조지훈에게 계좌의 반납을 지시한 뒤 가만히 지난 차트들을 바라봤다.
지수는 여전히 2,000을 중심으로 등락을 반복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이런 횡보장을 하나하나 뜯어보자면 그 안에서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특히 지난 일주일간의 지수 움직임은 평소에는 보기 어려운 모습들이었다.
초반 큰 폭의 움직임이 나온 뒤 장 후반 그걸 모두 되돌리는 일이 계속된 것이었다.
그리고 한진영은 이런 상황이 모두 안혁규를 잡아먹으러 달려든 시장 참여자들에 의해 나왔음을 알고 있었다.
“안혁규 의원 측의 손실이 얼마 정도로 예상되나?”
한진영의 질문에 딴생각하고 있던 조지훈이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저희 측에서 판단하기로는 대략 2~3,000억쯤의 손실을 본 게 아니냐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2~3,000억? 레인지가 너무 큰대?”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여러 매매자 속에 섞여 있는 상황이라 정확한 금액을 산출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미안해할 필요 없어. 어차피 당한 사람이 직접 와서 얼마나 당했는지 알려줄 테니까.”
한진영은 고개 숙이는 조지훈을 향해 괜찮다며 손을 흔든 후 다시 차트를 바라봤다.
“하루에 4% 가까이 하락했다 오히려 강보합으로 마무리하는 장에서 아마 제대로 멘탈 터졌을 거야.”
“맞습니다. 보는 사람마저 놀라지 않았습니까? 심지어 미리 언질을 받은 홍 실장조차 놀라서 뛰어 올라올 정도였으니까요.”
“흐흐흐. 재미있었지. 안 그래?”
“네. 우리 입장에서는 재미있기는 했습니다.”
조지훈은 그러나 반대쪽인 안 의원 쪽에서는 생사를 오가는 경험을 했을 게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그만큼 얼마 전의 움직임은 시장 관계자들조차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안산문어. 그 양반이 한창 매매할 때는 시장참여자들도 제한적이었어. 특히 지금처럼 코쟁이들이 마음 놓고 활개치기 어려운 시장이었지. 직접 투자가 안 되니 간접적으로 투자를 해야 하는데 간접투자로 단타를 칠 수나 있었겠어? 그러니 얼마나 쉬웠겠어. 그때는 그냥 센스만 있어도 먹는 시기였어. 그런데 지금은 그런 게 안 먹히지. 지금은 좋은 먹잇감밖에 되지 못해.”
조지훈은 한진영의 말을 들으며 슬쩍 차트를 돌아봤다.
한진영의 말대로 안산문어는 좋은 먹잇감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시장 참여자들 대부분이 그 안산문어를 잡아먹겠다고 달려들었으니, 먹잇감 정도가 아니라 어쩌면 장난감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차트를 보는 것만으로 만신창이가 된 모습이 눈으로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안 의원에게 연락이 오면 안 그래도 내가 보고 싶어 한다고 말하고 사무실로 오라고 해.”
“안 의원이 연락할까요?”
“연락하지. 나 말고는 구명줄이 없어 보일 테니까.”
조지훈은 한진영의 말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구해주실 생각이십니까?”
“누가? 내가?”
한진영은 조지훈의 질문에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내가 왜?”
“연락이 오면 모시라고 하셔서요.”
“아~ 그건 안혁규의 그 썩은 표정을 보고 싶어서 오라고 한 거지. 내가 안혁규를 왜 도와줘? 오히려 그를 시궁창에 빠트리고 싶은 게 나인데 말이야.”
조지훈은 안혁규의 썩은 얼굴을 보고 싶어 오라고 했다는 한진영의 말에 어떤 표정을 지을지 몰라 했다.
자기가 한진영을 모시기 전에 안혁규와의 어떤 악연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악연은 작지만은 않다는 느낌이 물씬 든 조지훈이었다.
한진영은 그런 조지훈의 생각을 읽고 있는 것인지 조지훈을 향해 더욱 짙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
조지훈이 한진영과 이야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 날 오후 바로 안혁규에게서 연락이 왔다.
안혁규는 얼마나 급했는지 비서를 통해서 연락한 것이 아니라 직접 전화기를 들고 한진영을 만나보고 싶다는 뜻을 전해올 정도였다.
조지훈은 다급해 보이는 안혁규를 차분히 진정시키고는 바로 세이지로 올 것을 권했다.
안혁규는 전화를 끊고 바로 오겠다는 말을 전한 후 30분 만에 세이지에 모습을 드러냈다.
“대표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조지훈은 안혁규를 안으로 안내했다.
안혁규는 조지훈의 뒤를 따르며 발걸음 소리로 마음이 조급하다는 것을 표현했다.
이곳이 세이지 자산운용이 아니고 앞에 조지훈이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쩌면 안혁규는 한진영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을지도 모른다는 뜻이 발걸음 소리를 통해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안혁규는 자신의 체면을 생각하여 최대한 인내하며 조지훈의 뒤를 따랐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조지훈은 노크도 없이 바로 문을 열어 안혁규에게 들어갈 것을 권했다.
한진영이 이미 모든 것을 뒤로하고 안혁규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준 것이었다.
안혁규는 고맙다는 뜻으로 조지훈의 어깨를 한 번 두드리고 한진영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동안 참아왔던 체면을 모두 내팽개치고는 큰소리로 한진영을 찾았다.
“한 대표.”
얼굴이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부터 한진영을 부른 안혁규는 소파에서 일어나는 한진영을 향해 달려들었다.
“한 대표. 나 좀 살려줘요. 어? 나 좀 살려줘.”
악수하기 위해 오른손을 내민 한진영을 와락 끌어안은 안혁규는 한진영을 끌어안은 채 애원했다.
“나 정말 큰일 났어요. 이러다 나 죽어요.”
“의원님. 진정하시고 잠시만 흥분을 가라앉히시지요. 조 비서. 차가운 물 좀 한 컵 내와.”
그때까지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조지훈을 향해 한진영이 지시했다.
안혁규는 뒤에 조지훈이 아직 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헛기침하며 끌어안았던 한진영을 손에서 놓았다.
한진영은 머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안혁규를 향해 웃으며 앉을 것을 권했다.
“자 앉아서 자세히 말씀하시지요. 도대체 죽게 생겼다는 말씀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한진영이 왼편에 자리한 소파를 안혁규에게 내어주고 먼저 자리에 앉았다.
안혁규도 한진영이 자리에 앉는 모습에 천천히 뒤를 이어 자리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이번에 크게 사고가 났어요.”
“사고요? 무슨 사고를 말씀하십니까?”
“그게…… 내가…… 선물에 손을 댔습니다.”
“선물이요? 설마 주식시장의 파생상품인 선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이런…….”
한진영은 전혀 몰랐다는 듯이 손으로 눈을 가리고 소파에 머리를 기댔다.
조지훈이 자리에 있었다면 웃음을 참기 어려울 정도의 모습을 보인 한진영은 그대로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안혁규에게 말했다.
“그럼 설마 이번에 수천 계약씩 마구 물량을 쏟아내던 게 의원님 쪽 자금이었습니까?”
“한 대표도 알고 있었습니까?”
“그걸 어떻게 모르겠습니까”
한진영은 눈을 가렸던 손을 내리고 고개를 다시 제자리로 했다.
그리고 안혁규를 똑바로 바라본 채 물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선물에 손을 대신 겁니까? 그것도 한두 계약도 아니라 수천 계약을 때려 박으면서 말입니다.”
호통과 질책에 가까운 말이었다.
그러나 안혁규는 그런 한진영을 향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자기도 그 부분에서는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안혁규는 잔뜩 주눅 든 모습으로 대답했다.
“손해가 좀 커서…….”
“제가 매수 포인트를 알려주신 건 왜 말을 듣지 않으신 겁니까?”
“내 생각에는…… 아니. 김 사장 생각에 그 자리가 좋지 못하다고 그래서…….”
본능적으로 안산문어에게 핑계를 돌리는 안혁규였다.
한진영은 안혁규의 말에 알면서도 모르는 척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김 사장이요? 김 사장이 누굽니까?”
“제이슨 컨설팅의 김 사장이라고 혹시 아십니까?”
“안산문어 말씀하시는 겁니까?”
“알고 있었군요?”
“하아. 지금 그러니까 안산문어의 말을 듣고 제가 포인트를 짚어준 곳은 다 무시하셨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리고 안산문어의 말을 듣고 선물에 손을 대신 거고요.”
“그게…… 그렇게 됐습니다.”
한진영은 이제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모든 게 이해가 되는군요. 제가 드린 정보도 무시한 이유도 알겠고, 선물에 손을 댄 이유도 이제 알겠습니다.”
한진영은 말을 마치고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래서 잃어버린 손해가 얼마인 겁니까?”
안혁규는 쭈뼛쭈뼛거리다 힘겹게 입을 열었다.
“대략…… 2,000억쯤…….”
“2,000억쯤이요? 정확하게 말씀해주셔야 저도 의원님의 상황을 알 수 있습니다.”
한진영의 말에 안혁규는 눈을 질끈 감고 대답했다.
“2,500억. 2,500억을 손실 봤습니다.”
“2,500억이요?”
한진영은 놀란 듯이 안혁규의 말에 반응했다.
하지만 실상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 중이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괴로운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안혁규를 바라보고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괴로워해라. 내가 괴로워한 것 이상의 고통을 안겨줄 테니까 더욱 괴로워해.’
한진영은 안혁규에게서 지난날에 그에게 당했던 것을 다시 떠올렸다.
기억을 끄집어내 안혁규가 불쌍하게 느껴질 만한 감정들을 모두 몰아낸 것이었다.
한진영은 가만히 안혁규의 모습을 즐긴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2,500억…… 그럼 지금 남은 자금이 얼마라는 이야기입니까?”
“4,000억입니다.”
“반 토막이 났네요.”
무심한 듯이 툭 내뱉은 한진영의 말에 안혁규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한진영은 그런 안혁규의 모습에 얇게 미소 지은 뒤 다시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의원님. 그런데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눈을 감고 괴로워하던 안혁규가 고개를 급히 들어 올렸다.
8,000억이라는 돈이 반 토막이 나버린 상황보다 무엇이 더 급한 거냐는 듯한 표정으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한진영은 그런 안혁규를 향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리를 하시는 바람에 지금 모든 사람이 알게 됐습니다.”
“뭘 알게 됐다는 말입니까?”
“누군가가 거액의 자금으로 선물시장에 들어왔다는 것 말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한 달 동안 수천억의 자금을 날려버리고 말았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걸 어떻게…….”
“의원님. 왜 의원님께서 매매에서 그렇게 당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운이 없어서? 아니면 실력이 모자라서? 돈이 없어서라고 생각하기에는 가진 자금이 넉넉했으니 그런 생각은 안 하셨겠지만…… 계속 무너져 내려가는 상황에서는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이런 생각들을 해보지 않았습니까?”
한진영의 말에 안혁규가 부끄러운 듯이 대답했다.
“모두 생각했던 것들입니다.”
“그러실 겁니다. 하지만 모두 정답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호구 잡히신 겁니다.”
“호구 잡혔다고요?”
“매매패턴이 읽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시장 참여자들이 패턴이 공개된 자의 자금을 털어먹기 위해 모두 덤벼든 것이지요. 솔직히 저도 들어가 약 300억의 수익을 올렸습니다.”
안혁규는 한진영의 말에 허탈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도박판에 패를 다 드러내놓고 말았다는 이야기군요.”
“그렇지요. 그러니 그렇게 두들겨 맞은 것이지요. 그리고 사람들은 궁금해한 겁니다. 누가 수천억의 돈을 그렇게 허무하게 날려버렸는지 말입니다.”
“사람들이 궁금해한다? 그러면…….”
“어쩌면 안 의원님에게 거의 근접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금의 출처까지도 궁금해하겠지요. 의원님 재산은 공개되어 있는데 그 재산과 수천억은 상당한 괴리를 보이니까요.”
한진영의 말에 안혁규의 얼굴에선 핏기가 사라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