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화 없는 틈을 만들어내다
한동안 최석영이 나온 방송을 함께 앉아 시청하던 두 사람은 최석영의 방송이 끝이 나자 이번에는 이성우의 결혼에 관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래서 언제 결혼한다고?”
“5월의 신부가 되고 싶단다.”
“5월의 신부? 나쁘지 않지. 그런데 그러려면 시간이 빠듯한 거 아니냐? 너희 같은 사람들은 준비하는 데 1년 넘게 걸리잖아.”
한진영의 말에 이성우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한바탕 했다. 나는 그러니까 좀 뒤로 미뤄서 가을쯤에 하자고 이야기했는데 그럴 수 없데. 가을에는 뭐 어디? 파리? 뭐 거기서 뭔 쇼가 있는데 거기에 가셔야겠단다.”
“잘됐네. 그럼 신혼여행으로 가면 고민 해결되는 거잖아.”
“얘가 누구 사람 잡을 일 있나. 신혼여행으로 거기 갔다가는 나 쉬지도 못해. 끌려다니느라.”
이성우가 질색하며 팔짝 뛰었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를 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어지간히도 시달렸나 보구나. 뭘 그렇게까지 싫어해?”
한진영의 말이 이성우는 쓴맛을 제대로 본 사람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시달린 정도가 아니다. 나는 살다 살다 내 동생보다 쇼핑을 더 좋아하는 사람을 처음 봤어. 집에 옷이…… 어휴~ 말도 마라. 같이 살 수 있을까 고민이다.”
“그래도 네 입에서 쇼핑 이야기만 나오는 것 보니까 잘 살 수는 있어 보인다.”
“에? 쇼핑 이야기만 나와서 잘 살게 생겼다고?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안 맞았으면 제일 먼저 성격 이야기부터 나왔겠지 쇼핑 이야기부터 나왔겠냐? 그것도 같이 갈 때 힘들어서 그렇다는 거 아냐? 내 말이 맞지?”
한진영의 말에 이성우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긴 하지. 혼자 쇼핑하는 건 내가 뭐라고 하는 건 아니지. 같이 다닐 때 피곤해서 그런 거니까.”
“그래. 사람이 싫은 건 아니잖아. 잘 됐다.”
한진영은 이성우의 등을 소리가 나게 때리고 웃었다.
“기대해. 네 결혼 선물로 내가 근사한 거 해줄 테니까.”
“근사한 거? 근사한 거 뭐?”
“선물을 미리 말하면 재미없지. 기다려. 친구가 결혼하는 데 식장에 빈손으로 올려보내지는 않을 테니까.”
한진영의 말에 이성우는 입맛을 다셨다.
“네가 이렇게까지 이야기할 정도면 정말 기대해볼 만한 것 같은데…… 나 기대해도 되냐?”
“기대해. 언제 내가 네 예상보다 못한 거 안겨준 적 있어?”
“그래그래. 너는 그런 놈이 아니었지. 나보다 항상 통이 컸어. 하하하. 이거 참…… 결혼 이야기 나온 이후 시간이 늦게 가기만을 바랐었는데 네 이야기 듣고 마음이 바뀌었다. 빨리 시간이 갔으면 좋겠어.”
생일이 눈앞에 보이는 아이처럼 이성우는 신나 했다.
한진영도 기분 좋게 웃으며 즐거워하는 이성우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이성우는 그렇게 한참을 즐거워하더니 무언가를 떠올리고 한진영에게 물었다.
“야. 안 그래도 서영 씨가 너한테 친구 소개해주고 싶다던데 어떻게 생각해?”
“친구?”
“그래. 이 정도 회사를 꾸렸으면 어디 가서 밀리지 않고…… 어쭙잖게 나처럼 아버지나 집안 사업 물려받으려는 사람보다 네가 능력이 더 좋아 보이니까. 게다가 지난 그 백화점에서 보여줬던 것도 있고…….”
한진영은 가장 중요한 말이 가장 마지막에 나온 것을 보고 웃었다.
그녀를 비롯한 그녀의 친구들은 동우 법률사무소의 김교철 대표가 한진영을 위해 나섰다는 것을 보고 생각을 바꾼 게 분명했다.
자기 아버지라면 과연 김교철을 상대로 이런 대접을 받을 수 있을까 머릿속에서 계산을 때린 뒤 한진영의 위치를 상향 조정했을 것이 한진영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성우는 웃고 있는 한진영을 향해 신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가 나한테 했던 이야기를 그대로 돌려주는 것 같은데 잘 들어. 결혼해서 여자 쪽 힘을 빌리는 것도 능력이야. 그리고 그런 보험과 같은 것을 하나 들고 있어야 사업하는 입장에서 든든하기도 하고…… 내가 몇 명 괜찮은 사람들로 추려봤어. 지저분하게 놀았거나 소문이 안 좋은 애들은 제외했으니까 나만 믿어. 어때?”
“나는 됐다.”
한진영은 가볍게 이성우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성우는 일어나는 한진영을 따라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한진영은 그대로 주방을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처가 도움을 받기에는 내가 너무 커버렸어. 오히려 나를 통해 처가가 도움을 받으려 하겠지. 내가 좋아서 결혼한 사람이라면 모를까 조건에 맞춰서 만나고 결혼한 상대의 처가에까지 신경 쓰고 싶지는 않다.”
한진영은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꺼내곤 몸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이성우가 있는 거실로 걸어가며 조금 전에 했던 이야기를 이었다.
“너에게 나를 소개해 달라고 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그런 사람들이야. 나를 통해 조금이라도 이득을 보려고 접근하는 사람. 그러니 그런 사람들은 다 무시하고 이거나 받아.”
한진영은 이성우를 향해 캔맥주를 던졌다.
그리고 자기 것을 따서 먼저 한 모금 마신 뒤 본래 앉아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이성우는 한진영이 던진 캔맥주를 받아 들고 잠시 한진영을 바라봤다.
한진영이 캔맥주 한 모금을 마시자 이성우도 자기 것을 따 한진영과 마찬가지로 맥주를 들이켰다.
“캬~”
시원한 청량감에 탄성을 지른 이성우는 소매로 입을 훔치며 한진영을 돌아봤다.
“그래서? 너 결혼은 안 할 거야?”
“난 가족을 안 만들 생각이야.”
“왜?”
“내가 하는 일은 가족이 약점이 돼.”
“너 뭐 스파이 영화 찍냐? 가족이 왜 약점이 돼?”
이성우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든지 심리적인 안정감을 주는 존재까지는 아니더라도 남자가 가정을 꾸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이성우로서는 한진영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한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의 이성우를 향해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이성우에게 한 말이 아무 근거가 없이 아무렇게나 한 말이 아니었다.
지난 시절 실제로 그들은 한진영의 모든 것을 털어내려 작정하고 덤벼들었었다.
가족이 있었으면 사돈의 팔촌까지 털어내어 한진영의 약점을 잡으려 눈에 불을 켜고 덤벼들었던 이들을 경험했기에 한진영으로서는 약점이 될지도 모를 사람들을 더는 만들지 않으려 한 것이었다.
“어쨌든 지금은 그래. 만약 또 모르지. 내가 할 일을 모두 마친 뒤에는 너처럼 가정을 꾸리는 걸 생각해볼 수도 있고…….”
“할 일? 네가 할 일이 뭔데? 지금 뭐 해야 하는 일이 있는 거냐?”
“지금 당장 해야 하는 일은 아니야. 시간이 걸릴만한 일이지. 하지만 대충 시작은 했고 잘 모아놓기는 했어. 그러니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서 끝을 봐야지.”
한진영은 최석영이 나왔던 프로그램이 끝나고 시작된 뉴스 화면을 바라보고 말했다.
이성우는 한진영의 시선을 따라 뉴스 화면을 바라봤다.
그곳에서는 한창 뜨거워진 사회지도층을 비롯한 연예인들의 마약 사건 이야기가 뉴스의 첫 꼭지를 차지한 채 이야기되고 있었다.
***
조지훈은 사무실로 향하는 한진영을 향해 전날 저녁에 있었던 일들을 보고했다.
“밤사이 유명 연예인의 마약 사건 이야기로 떠들썩했습니다.”
“나도 봤어. 그 이야기에 성우 손위처남도 다시 끌려 나와 욕을 먹더라. 아무래도 그 양반 당분간은 재기하기 어려울 것 같아. 단단히 찍힌 모습이야.”
“서준일보에 대한 국민감정도 좋지 못한 상황이니까요. 그런 곳의 임원이자 로열패밀리가 마약 사건의 연루되었으니 대중이 곱지 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내가 그걸 노린 거야.”
당연하다는 듯이 이야기한 조지훈의 배를 손등으로 두드린 한진영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겉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치고는 그대로 의자에 앉았다.
조지훈은 그런 한진영의 뒤에서 계속 보고를 이어갔다.
“그리고 금융감독원에서 현재 선물시장에서 많은 사람이 관심이 있는 부분은 금감원 자체적으로 조사에 들어갔으니 개별적으로 조사하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시장을 혼란스럽게 만들지 모른다는 이유라고 전해왔습니다.”
“개별적인 조사를 하지 말아라?”
한진영은 실소를 내뱉고는 조지훈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계속해봐. 그래서 다른 곳들의 반응은 어때?”
“당황한 눈치였습니다. 이런 류의 지침은 흔한 일이 아니라서 내부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던 게 아니냐는 눈치로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는 모습입니다.”
“그렇겠지. 금감원에서 지침까지 내렸는데 알아보겠다고 깝죽대다가는 어떤 망치에 머리통이 작살 날지 모르니까. 코쟁이들은?”
“외국인들은 흥미로워하지만 크게 상관하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남의 나라 문제이다? 뭐 좋은 판단이야. 그들 눈에는 몇 푼 되지도 않는 일에 신경을 쓸 이유가 없을 테니까.”
한진영은 오른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는 말했다.
“김 대표가 확실하게 일 처리를 하기는 했네. 대중의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리고 실제 관계자들에게는 힘으로 찍어 눌렀으니 이제 더는 선물시장에서 있었던 일이 수면 위로 올라오는 일은 없게 생겼어. 안 의원 입장에서는 신났겠는데?”
“그런 것 같습니다. 일이 잘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하여 안 의원 측에 연락했는데 일이 다 잘 처리됐으니 더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한진영은 모든 것이 뜻대로 움직인다 생각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리모컨으로 TV를 켰다.
TV에서는 오늘 있을 마지막 경선에 관한 이야기가 한창 나오는 중이었다.
“오늘로 대선 후보가 확정되는 건가?”
“네. 이변이 없는 한 안혁규 의원 쪽이 대선 후보에 올라설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 축하한다는 화환 보내는 거 잊지 마. 메시지도 그럴듯하게 써서 보내고.”
“네. 알겠습니다.”
한진영은 뿌듯한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봤다.
경선은 끝이 났지만 대선에 쓰여야 할 자금은 모두 바닥이 난 상태였다.
경선보다 더욱 치열한 레이스를 벌여야 할 사람의 자동차에 기름이 모두 떨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운전자는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조지훈은 한진영이 바라보고 있는 화면을 같이 바라보고는 한진영을 향해 물었다.
“대선에서도 이길까요?”
“어. 당선될 거야.”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이야기하는 한진영의 모습에 조지훈이 고개를 돌려 한진영을 바라봤다.
후보자의 자동차에 기름이 떨어진 사실을 조지훈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선을 진행하려면 자금이 필요한데…… 자금이 없지 않습니까?”
“조지훈의 주머니에는 없겠지.”
“그 말씀은 다른 주머니에는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있지. 그리고 있는 곳으로 내가 조지훈이를 보냈어. 그러니 잘 굴러갈 거야. 대선 때까지는 말이지.”
한진영이 재미있다는 듯이 화면을 바라봤다.
김교철은 지난 시절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난공불락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 기득권을 쥐고 움직였던 만큼 그가 행사하는 힘의 크기는 상상하는 것 이상이었다.
그래서 한진영은 김교철을 무너뜨리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하고는 했다.
그를 무너뜨리기에 그가 지금까지 쌓아온 성은 너무나 컸으며 너무나 견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진영은 포기하지 않았다.
틈이 없으면 틈을 만들면 된다는 생각으로 오랜 시간 고민했다.
그리고 지금 틈이 생기는 것이 조금씩 한진영의 눈에 들어왔다.
한진영은 경선 내용과 함께 스쳐 지나가는 안혁규의 얼굴에서 모든 것이 뜻대로 풀려가고 있다는 모습을 확인하고 얇게 미소 지었다.
***
종합주가지수는 2,000을 기준으로 횡보를 계속 이어갔다.
매번 2,000선에만 도달하면 빠져 내려왔던 것을 경험해서 그런 것인지 시장은 2,000에 대한 지지력을 충분히 확보하겠다는 뜻으로 2,000을 기준으로 몇 달 동안 옆걸음을 걸었다.
이런 횡보는 연말을 지나 새로운 해가 밝았음에도 여전했다.
그리고 이런 횡보 속에서 세이지 자산운용의 실적은 더욱 눈에 띄었다.
우상향의 실적이 꺾이지 않고 계속 이어졌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꾸준한 실적의 상승이 결국 한해 최고의 펀드를 수상하는 자리에서 1위와 2위의 자리를 동시에 석권하는 계기를 마련해줬다.
“축하드립니다.”
한진영은 다가온 사람의 얼굴을 보고 웃으며 마주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모두 사장님께서 양보해주신 덕분입니다.”
연회 자리에서 한진영에게 인사를 건네온 사람은 뜻밖의 표정으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저를 아십니까?”
먼저 인사를 건네왔음에도 자기를 아냐고 묻는 남자였다.
그는 맞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다시 한진영을 향해 물었다.
“한 대표님이야 이곳에서 제일 젊으신 분이라 제가 모를 수가 없었는데…… 한 대표님의 인사를 들으니, 마치 저를 알고 계신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전에 만난 적이 있던가요?”
남자는 기억을 떠올리겠다는 생각으로 인상까지 찌푸렸다.
하지만 여전히 남자의 기억 속에는 한진영과의 접점이 보이지 않았다.
한진영은 기억이 나지 않아 힘들어하는 남자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제가 어떻게 경기증권의 박지훈 사장님을 몰라볼 수 있겠습니까? 같은 업계에 저보다 까마득한 선배님이니 후배인 제가 당연히 알고 있어야지요. 그게 후배 된 도리 아니겠습니까?”
박지훈 사장은 여전히 손을 잡은 채 한진영을 향해 감동한 눈빛을 보냈다.
“저를 알고 있을 것으로 전혀 생각하고 있지 못했습니다. 우리 같은 소형증권사까지 안다는 것은 기대 이상의 일이니까요.”
“아무리 소형증권사라고 하더라도 업력이 20년 가까이 되는 곳이라면 모르고 있는 것이 오히려 죄스러운 일이지요. 저는 그렇게 무지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 것 같습니다. 대단합니다. 듣던 것보다 더 대단해요.”
박지훈 사장은 한진영을 향해 고마움이 가득 담긴 말을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