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8화 무조건적인 양보
한진영을 비롯한 일행은 사흘 동안 뉴욕의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이성우가 미리 준비한 것에 더해 한진영의 지시로 조지훈이 마련한 여러 가지 것들을 즐기며 시간을 보낸 것이었다.
휴가차 뉴욕을 방문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휴가 때보다 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뉴욕이라고 해서 뭐 별것 없네. 서울하고 뭐 큰 차이 없어.”
“촌스럽게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왜 그래요? 그게 솔직한 제 느낌인데요?”
문서영이 창피하다는 듯이 이성우를 노려보고는 앞에 놓인 주스를 들어 마셨다.
그들은 타임스퀘어를 돌아보고 근처에 있는 카페에 앉아 잠시 쉬는 중이었다.
한진영은 투덕거리면서도 서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의 연인 앞에 앉아 시계를 내려보고 있었다.
“대표님.”
잠시 밖에 나갔던 조지훈이 안으로 들어와 한진영의 귀에 대고 은밀히 이야기했다.
한진영은 앉은 채로 고개만 돌려 조지훈을 돌아보고 물었다.
“뭐래?”
“예상대로입니다. 오히려 최종필 측에서 시간을 조금만 달라고 했습니다.”
“이유는?”
“지금 고딕브라운에서 하던 일이 있는데 그 스케줄을 확인한다는 핑계였습니다.”
한진영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경기증권 측에서 접촉했나 보군.”
“어떻게 될까요?”
“시간을 달라니 줘야지. 하지만 편하게 줘서는 안 되겠지?”
한진영은 여전히 투덕거리는 이성우와 문서영을 바라본 채 조지훈에게 지시했다.
“250만 달러. 연봉 250만 달러로 이야기해.”
“250만 달러요?”
조지훈은 깜짝 놀랐다.
인센티브 포함이 아닌 보장 연봉이 30억이 넘는 경우는 국내에서는 흔하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한진영조차 서류상에 적혀있는 기본 연봉이 30억이 안 된다는 것을 봤을 때 최종필에게 제안한 250만 달러의 연봉은 국내에서는 손에 꼽히는 수준일 게 분명했다.
“괜찮아. 질러.”
“만약…… 정말 만약에 말입니다. 최종필이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어떻게 합니까?”
한진영의 최종 목표는 가장 비싼 값에 최종필을 경기증권에 넘기는 것이었다.
그런데 250만 달러의 제안은 최종필의 마음을 흔들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처럼 느껴졌다.
조지훈은 최종필이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을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럴 일 없어.”
“그럴 일이 없다고요? 아닙니다. 대표님. 제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현재 최종필의 연봉은 100만 달러가 채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2.5배의 연봉상승은 그를 흔들어놓을 만한 숫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센티브 비율을 확 낮춘 거잖아.”
한진영은 여전히 여유로운 모습으로 주스 잔을 들고 조지훈에게 말했다.
“애초에 주식쟁이는 욕심 덩어리들이라 쉽게 만족하는 법을 몰라. 손에 쥐고 있는 것보다 앞으로 다가올 것에 더욱 군침을 흘리는 게 주식쟁이의 습성이야.”
“인센티브를 더욱 욕심낼 거라는 말씀이신가요?”
“맞아. 당장 연봉이 1억에 머무르더라도 앞으로 달성할지 말지 모르는 인센티브가 있다면 거기에 마음이 흔들리는 게 주식쟁이지. 특히 최종필처럼 자기가 유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런 생각에 빠질 테고…… 경기증권 입장에서도 나쁠 건 없어. 인센티브라는 게 달성되면 주는 것 아니겠어? 그리고 달성됐다는 뜻은 경기증권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은 결과가 나왔다는 뜻일 테고…….”
조지훈은 한진영의 말이 이해됐다.
세이지에서는 현재를 최종필에게 보여주지만, 경기증권은 미래를 이야기했다.
양측의 전략은 정반대였고 최종필이라면 두 개의 상반 된 제안 중 미래에 더 마음이 쏠릴 게 분명했다.
세이지는 경매장의 페이스메이커처럼 판돈만 계속 키우고 있었던 것이었다.
“대표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지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가서 최종필에게 제안을 넣겠습니다.”
“우리도 오래 기다리기는 힘들다는 말로 압박을 줘. 너무 편한 태도로 있으면 경기증권에서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까.”
조지훈은 한진영의 말에 알겠다는 대답을 한 후 자리를 떠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한진영과 이성우 등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가서 호텔 바에서 한잔하자.”
“좋아요.”
“아니. 저는 서영 씨에게 물어본 게 아니고…….”
“그럼 뭐예요? 저만 두고 두 분이 서만 술을 드시려고 한 거예요?”
“둘은 아니고…… 지훈이까지 셋이서…….”
이성우는 변명 아닌 변명을 하려 했지만 되려 문서영의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 일이 되고 말았다.
문서영은 자기만 빼고 셋이서 술을 마시려 했다는 사실에 도끼눈을 뜨고 이성우를 노려본 것이었다.
이성우는 그런 문서영의 눈빛에 울먹이는 표정으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자기를 도와달라는 눈빛을 한진영에게 보낸 것이었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의 표정에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오늘 너와 술을 못 마시겠다. 그러니 예비 신랑신부 둘이서 오붓하게 한잔해. 불청객은 빠져줄 테니까.”
“야. 왜~”
문서영의 도끼눈보다 한진영의 말이 더 무섭게 느껴진 이성우는 급히 한진영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둘이서 술을 마시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다는 이성우의 의지가 손과 옷깃을 통해 한진영에게 전해졌다.
그러나 그런 이성우의 애절한 울부짖음에도 한진영은 이성우의 손을 가만히 밀어냈다.
“나는 만날 사람이 있어서…….”
“뉴욕에서 누구 만날 사람이 있다고 그래?”
이성우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말했다.
그러자 한진영은 한쪽을 향해 턱짓했고 이성우는 한진영이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지난번에 만났던 사람이 서서 한진영을 향해 웃고 있었다.
“어? 저 사람…….”
“누구예요? 아는 분이에요?”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문서영은 두 사람이 바라보고 있는 쪽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물었다.
이성우는 그런 문서영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에 한 대표에게 소개받기는 했는데…… 저 사람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하지 않았냐?”
한진영은 이성우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웃으며 말했다.
“볼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그 볼일이 뭔데? 너하고 관련된 거야?”
“어. 나하고 관련된 일이야. 그러니 둘이서 오붓하게 마셔. 서영 씨. 성우 잠 좀 재우세요. 저 만날 때마다 힘들다고 투정이 너무 심해요.”
“어머! 별 이야기를 다 하나 봐.”
한진영의 말에 문서영이 화들짝 놀라며 이성우의 팔을 꼬집었다.
이성우는 팔이 뜯어져 나가는 고통에 몸부림을 칠 수밖에 없었다.
한진영은 그런 두 사람을 뒤로하고 경기증권의 박지훈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
“아직 돌아가지 않으신 겁니까?”
한진영이 먼저 반갑게 인사했다.
박지훈은 그런 한진영을 향해 잠시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우물거리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잠시 시간 되십니까?”
“시간이요? 내 괜찮습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표정이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한진영이 걱정하는 듯한 투로 말을 걸자 박지훈은 애써 태연한 척 웃어 보였다.
그러나 웃음 속에서 하는 일이 잘 진행이 되지 않고 있음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가시지요.”
박지훈은 멀리서 자기 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성우를 향해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몸을 돌렸다.
한진영은 그런 박지훈의 뒤를 따라 호텔 맨 꼭대기 층에 자리한 bar로 향했다.
“여기 풍경이 아주 좋습니다. 센트럴파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지 않습니까? 저희 집에서도 서울숲이 한눈에 내려다보여 풍광이 그만이기는 한데 여기만은 못한 것 같습니다. 이곳의 모습이 더 좋아 보입니다.”
한진영은 엘리베이터 밖으로 보이는 센트럴파크를 내려다보며 감탄했다.
그러나 박지훈은 그런 한진영과는 달리 밖을 내다볼 여유가 없는 듯했다.
힐끗 바깥을 바라본 뒤 어서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박지훈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bar에 들어간 박지훈은 차창 쪽 자리로 걸어갔다.
그리고 먼저 자리에 앉자마자 바로 본론부터 이야기했다.
“한 대표님. 제가 한 대표님을 여기로 모신 이유를 알고 계시죠?”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이곳에 있는 이유 말입니다. 아직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박지훈은 자기의 언성이 높아짐을 깨닫고 잠시 목소리를 낮췄다.
“죄송합니다. 제가 조금 흥분한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계속 말씀하시지요.”
한진영이 아무렇지 않은 듯이 이야기하자 박지훈은 웨이터가 가지고 온 칵테일을 벌컥벌컥 마셨다.
술을 단숨에 들이켠 박지훈은 상기된 표정으로 한진영을 향해 말했다.
“최종필 말입니다.”
“박 사장님도 최종필 헤드 매니저를 아십니까?”
“한 대표님.”
박지훈의 목소리가 다시 커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술기운 때문인지 바로 목소리를 낮추지 않고 한진영을 향해 불만 섞인 말투로 계속 이야기했다.
“아시면서 그만 모른척하십시오.”
한진영은 가만히 박지훈을 바라봤다.
그리고 얼굴에 남아있던 웃음기를 지운 채 박지훈을 향해 이야기했다.
“박 사장님. 누가 화를 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차분한 목소리 속에서 한진영의 분노가 느껴졌다.
조금 전까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던 박지훈은 한진영의 목소리를 듣고 진정하는 모습을 보일 정도였다.
“박 사장님. 제가 모른척하는 이유를 모르시겠습니까? 저는 박 사장님과 관계를 악화시키고 싶지 않아 최대한 모른 척 이야기를 나누려 한 겁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만날 사이니 말입니다.”
한진영의 말에 박지훈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그럼 모르겠습니까? 김교철 대표님께서 클론매매에 관해 얼마나 알고 계시겠습니까? 분명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고 그 도움을 줄 사람이…… 박 사장님뿐이라는 건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한진영의 말에 박지훈은 조금 전과 다른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한진영이 정곡을 찔러왔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저는 모른 척하고 있었습니다. 먼저 말씀하지 않으면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요. 이번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아셨는지는 모르지만 박 사장님을 만난 처음 그 순간 저는 느낌이 왔습니다. 박 사장님도 최종필 헤드 매니저를 탐내 하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런데도 저는 모른척했습니다. 우리는 계속 만날 사이니까요. 그런데 저를 찾아와 왜 이러시는 겁니까?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겁니까?”
차분하면서도 낮은 목소리의 한진영의 말에 박지훈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오히려 흥분한 듯한 모습을 보인 것에 창피한 마음이 가득 차올랐던 박지훈이었다.
그는 웨이터에게 생수 한 잔을 시키고 한진영을 돌아봤다.
처음과 달리 풀어진 그의 눈에는 애처로움이 담겨있었다.
“대표님. 최종필을 양보해주십시오.”
“제가 양보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결국 선택은 최종필이 하는 것이니 최종필에게 가서 말씀하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대표님께서…… 이번에 250만 달러로 연봉을 올리지 않으셨습니까?”
“네. 맞습니다. 그런데 정말 빨리 아셨습니다. 그 결정을 내린 지 얼마 안 됐는데 말입니다.”
박지훈은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한진영을 향해 부탁했다.
“혹시 더 올리실 생각이 있으십니까?”
“300만 달러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300…… 만 달러요?”
박지훈이 얼마나 놀랐는지 엉덩이가 의자에서 떨어져 몸이 반쯤 일어나고 말았다.
박지훈은 그 상태로 한진영에게 말했다.
“정말이십니까? 그 정도로 최종필을 원하시는 겁니까?”
“능력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아시겠지만, 저희는 한참 외형을 확장 중입니다. 그러니 욕심나는 사람이 있다면 돈에 구애받지 않으려 합니다.”
“흐음…….”
박지훈은 다시 천천히 자리에 앉으며 낮은 침음성을 내뱉었다.
한진영은 그런 박지훈을 보며 그가 확신이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됐다.
‘더욱 탐이 나지?’
한진영과의 레이스 속에서 과연 최종필이 그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걸 확인해보기 위해 한진영을 찾아온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한진영은 그에게 확신을 주려 했다.
최종필은 한진영이 어떻게든 영입하려 하는 인물이다.
그는 300만 달러의 연봉을 지불하고서라도 데리고 올 만한 인물이다.
그의 능력은 진짜다.
한진영은 바로 이런 생각을 박지훈의 머리에 주입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박지훈이 한참 동안 아무런 말 없이 생각에 잠기자 한진영이 앞에 놓은 칵테일을 마시며 먼저 입을 열었다.
“그만 포기하시지요.”
한진영의 말에 박지훈이 고개를 들어 한진영을 바라봤다.
한진영은 그런 박지훈을 향해 단호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제가 박 사장님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 줄 알면서도 왜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은 줄 아십니까? 자신이 있어서입니다. 최종필을 영입할 자신. 그게 저에게는 있습니다.”
“저도 최종필이 필요합니다.”
“하아~ 박 사장님. 이해를 잘하시지 못하시는 것 같은데…….”
“무조건적인 양보. 저에게 한 번만 양보해주십시오. 그럼 저는 대표님을 위해 무조건적인 양보를 보장하도록 하겠습니다.”
“무조건적인 양보?”
한진영은 자기 말을 끊고 내놓은 박지훈의 협상카드에 잠시 흥미가 생긴 듯한 모습을 보였다.
박지훈은 그런 한진영의 흥미가 사라지기 전에 얼른 다음 이야기로 이어갔다.
“대표님과 저는 아시다시피 앞으로 일을 함께할 사이입니다. 어떤 일로 부딪히고 어떤 충돌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그때마다 양보하도록 하겠습니다. 무조건 양보. 그걸 제가 보장하겠습니다.”
“제가 어떻게 그걸 믿습니까?”
한진영의 말에 박지훈은 앞에 놓여 있는 냅킨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품 안에 들어있던 펜을 꺼내 들어 냅킨에 각서를 쓰기 시작했다.
“저는 어떤 일이 있어도 업무적인 충돌에서 한 대표님의 말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박지훈은 단숨에 휘갈겨 쓴 각서에 사인까지 하고는 냅킨을 한진영에게 내밀었다.
한진영은 냅킨을 받아 들고 조명에 비춰봤다.
“뭐 이렇게까지 원하신다면 저도 할 말이 없기는 한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잘못하다가는 경기증권이 저희에게 종속되어 움직일지도 모르는 일인데요?”
“괜찮습니다. 절대 후회하지 않겠습니다.”
“뭐 후회하지 않으신다니 저도 더는 묻지 않겠습니다.”
한진영은 냅킨을 품속에 집어넣었다.
“알겠습니다. 여기서 저는 그만 빠지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최종필에게 제안한 걸 철회하지는 않을 겁니다. 괜히 모양새가…….”
“이해합니다. 저도 제안을 철회하는 것까지 원한 것은 아닙니다. 그저 저희 제안 뒤에 또 다른 제안이 들어가지만 않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이해한다니 감사합니다. 그럼 이 잔은 새로운 멤버를 확보하신 데 대한 축하의 의미로 마시겠습니다. 축하드립니다.”
한진영은 말을 마치고 남아있는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박지훈은 그런 한진영의 모습에 뿌듯한 표정을 지었고, 한진영 또한 얼굴 가득 환하게 웃으며 만족스러움을 표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