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화 적당한 은혜로 말미암아 더욱 굳건해진 관계
이성우에 대한 평가가 바뀐 것은 이정훈만이 아니었다.
대중에게 보이는 이성우에 대한 평가도 바뀌기 시작했다.
[기풍, 인도네시아 최대 니켈 광산 인수 시도]
[인수가격 10억 달러 이상으로 예상]
[광산을 포함한 자원 분야에서 최대 규모의 인수합병이 성사될 것으로 예상]
언론에서는 이성우에 관한 이야기도 끊임없이 쏟아냈다.
[인수합병을 주도하는 기풍의 이성우 미래전략실 실장, 차기 기풍의 얼굴로 화려하게 등장]
[인수합병 성공 시 일약 재계 2세들 중 돋보이는 실적을 쌓을 것으로 보여]
[젊은 나이에 보여줄 수 있는 과감함과 나이답지 않은 빠른 계산력이 이성우 실장의 장점]
[기풍은 인수합병의 성공 시 빠르게 차기 후계 체제로 전환할 것으로 보여]
호의적인 시각의 기사들이 하루가 멀다고 나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원외교는 참사라며 해외에 나가 수십조를 써댔던 대한민국 정부를 비난했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언론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언론은 이번 일에 매우 긍정적인 스탠스로 기풍을 지지해준 것이었다.
언론에서는 지지뿐만 아니라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촉구하기도 했다.
한반도에 자리하지 않은 원자재를 확보한 기업을 측면에서 도와주기라도 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이런 주장은 효과를 보였다.
새로 들어선 정부가 특별 TF팀을 구성하여 기풍의 세계 최대 니켈 광산의 인수합병을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는 발표를 한 것이었다.
전 정부와 선을 긋기 위해 전 정부의 치적을 모두 소각하던 새 정부가 이번만은 특별한 스탠스를 취한 것이었다.
한진영은 경기증권에서 보낸 사람들을 김교철과 함께 가만히 바라봤다.
경기증권에서 나온 엔지니어들은 세이지의 매매프로그램과 연동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중이었다.
한진영은 그런 광경을 바라보던 것을 멈추고 김교철에게 예의 바르게 제안했다.
“잘 되는 듯하니, 들어가시지요.”
“신기하구먼.”
“네. 저도 처음 보는데 신기하게 느껴집니다.”
“하하.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해서 어떤 면에서는 쉬워 보이기도 해. 굉장히 어려운 작업처럼 느껴졌었는데 말이야.”
“그 말씀에 저도 동의합니다. 저희 매매프로그램과 동기화를 시키는 시스템이 이리 간단하게 설치될 줄은 몰랐습니다. 누군가가 밤에 몰래 와서 설치했어도 알지 못할 만큼 간단한 것처럼 보이네요.”
한진영은 김교철을 자기의 집무실로 안내했다.
김교철은 무엇이 그렇게 즐거운지 한진영의 말에 연신 큰 웃음을 지어 보이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숨기지 않았다.
한진영은 그런 김교철을 향해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대표님. 감사했습니다. 대표님께서 힘써주신 덕분에 일이 수월하게 풀렸습니다.”
“별거 아니야. 크게 신경 쓰지 마. 자네하고 나하고 사이에 이 정도도 못 해주겠나?”
“그래도 대표님께서 힘 써주신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정부에서 도와준다는 사실을 알고 인도네시아 정부 측도 호의적인 반응을 보여줬다는 이야기에 기풍에서 감사 인사를 몇 차례나 받았을 정도입니다.”
한진영의 말에 김교철은 미소를 짓고는 한진영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손님인데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상석에 자리해 앉으며 이야기했다.
“진행이 잘 되고 있다니 다행이네. 산업자원부 장관으로 이번에 올라간 친구가 우리 식구야. 그래서 이야기가 잘 통했어. 뭐 안혁규도 대통령실에서 힘을 써주기도 했고…….”
“제가 너무 큰 도움을 받은 것 같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한진영은 김교철 앞에서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김교철은 그런 한진영의 모습을 보고 흐뭇해했다.
그동안 한진영에게 얻는 것만 있었지, 베푸는 게 부족했다고 느꼈던 김교철이었다.
말로는 한진영에게 ‘너도 도움이 되지 않아야겠냐?’라고 말했지만 사실 주는 것이 없이 바라는 것만 원하기에는 관계의 결합도가 떨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주고받는 관계.
그래야 관계는 더욱 돈독해진다고 믿은 김교철이었다.
무조건적인 한쪽의 희생은 반발심만 불러일으키고 큰일을 하려 할 때 불안 요소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교철은 한진영과의 관계가 여간 찜찜한 게 아니었다.
여러 가지 것들을 베풀려 했지만 마땅히 한진영이 득을 보지 못하는 것에 아무래도 중간에 잘라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고민까지도 할 정도였다.
그런데 웬일인지 한진영이 어렵지 않은 부탁을 해왔고, 그 부탁을 아주 쉽게 들어줄 수 있었다.
바로 정부에 줄을 대어 이번 안탐 광산 인수 건에 힘을 실어달라는 부탁이었다.
김교철은 그런 한진영의 부탁을 들어주고 나서야 드디어 마음을 놓을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이렇게 한진영의 세이지에 방문하여 관계가 조금 더 진전되었음을 한진영에게 알려주었다.
이제야 진정 한진영을 멤버로 받아들인 김교철이었다.
흐뭇해하는 김교철을 바라보고 한진영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네가 베푼 게 아니라 내가 베풀도록 만들어 준 것이다.’
한진영은 김교철의 생각을 밑바닥부터 모든 것을 꿰뚫어 봤다.
그가 자기와의 관계를 부담스러워한다는 것도 미리부터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가 은혜를 베풀 기회를 주었고 김교철은 그런 것도 모른 채 한진영의 부탁을 들어주며 이제야 마음을 놓는 모습을 보였다.
적당한 은혜로 말미암아 더욱 굳건해진 관계.
김교철이 원하던 것을 한진영이 만들어 준 것이었다.
“거의 다 됐습니다.”
같은 것을 가지고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한진영과 김교철이 있는 곳으로 박지훈이 들어왔다.
그는 상기된 표정으로 들어와 자리에 앉으며 이야기했다.
“생각보다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게 다 한 대표님의 배려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어차피 하기로 한 거 최대한 도움을 드려야지요.”
“사실 이렇게까지 도움을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아무래도 클론매매라는 것 자체가…… 받아들이기 쉬운 것은 아니니까요.”
“제가 손해 보는 일도 아니고 싫다고 할 이유가 없지요. 그 덕분에 저도 많은 도움을 받았으니 도와야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만히 박지훈과 한진영의 대화를 듣고 있던 김교철이 한진영을 바라보고 감탄했다.
“자네는 참으로 보면 볼수록 요즘 친구 같지 않아.”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그저 제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그것조차 못하는 사람이 태반이니 하는 소리야.”
김교철은 한진영을 가만히 바라봤다.
시간이 갈수록 한진영을 향해 믿음의 시선을 보내는 모습이 점차 한진영에 대한 신뢰가 깊어지는 듯한 김교철이었다.
“소식 들었습니다. 기풍과 니켈 광산을 매입하신다고요.”
“제가 매입을 하는 것은 아니고 기풍의 재무적 투자자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6억 달러를 투입하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박지훈은 한진영을 향해 몸을 가까이 다가가며 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사업을 다각화하는 작업 속에서 좋은 물건이 나와 투자를 한 것입니다.”
“6억 달러라는 게 적은 돈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 정도는…….”
보통 이런 류의 투자를 할 때는 펀드를 새롭게 조성하거나 소액 투자자들을 모아 대리로 진행을 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세이지의 경우에는 이런 상식을 파괴하고 직접 세이지의 자산을 이용하여 투자를 진행했다.
성공했을 때 큰 수익을 보장할 수 있지만 실패했을 때의 피해는 심각하게 다가올 만한 일이었다.
게다가 우리나라 돈으로 7,000억이 넘는 돈을 한 곳에 집행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박지훈이 한진영을 향해 계속 질문을 던진 것이었다.
생긴 지 몇 년 되지도 않은 곳이 70억도 아니라 7,000억을 단독으로 투자하는 것이 여간 신기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운이 좋아 작년에 돈을 많이 벌어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나온 매물이 워낙에 좋기도 했고요. 그래서 과감하게 투자하기로 했습니다. 앞으로도 이렇게 좋은 매물이 나온다면 계속 투자를 멈추지 않을 생각입니다.”
한진영의 말에 자리에 있던 박지훈과 김교철이 기쁜 모습을 보였다.
그들의 귀에는 한진영이 말한 ‘작년에 돈을 많이 벌어 여유가 있었다’라는 말이 귀에 맴돌았다.
그들은 세이지가 어디에서 돈을 벌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과 똑같이 매매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제 세이지의 그 많이 벌었다는 작업에 그들도 동참할 수 있게 됐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밝게 빛나오는 미래에 벌써 가슴이 벅차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
홍대민은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현황판을 바라봤다.
생각도 못 한 일이 일어난 것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최수찬 부실장은 그런 홍대민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을까요?”
홍대민은 고개를 돌려 최수찬을 잠시 바라본 뒤 쓴웃음을 지었다.
“하라고 하니 해야지. 해보자. 어떻게 되는지 나도 궁금하니까.”
이야기로만 들었던 방법이었다.
몇몇 지점에서 일임매매하며 소수의 인원이 사용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이런 게 실제로 있는지 눈으로 보지 못했던 홍대민이었다.
그는 말로만 듣던 것이 실재하는 것에 놀라움 반 걱정 반인 눈으로 클론매매 프로그램을 지켜봤다.
“프로그램을 연동하여 그대로 따라 한다? 이야기만 들었을 때는 그럴듯해 보이기는 하는데…….”
홍대민은 과연 그럴듯한 이야기만으로 끝이 날지 아니면 이론대로 강력한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해하는 얼굴로 프로그램을 가동했다.
클론매매는 생각보다 잘 움직였다.
약 한 달여 간의 테스트 기간을 거쳐서 그런 것인지 정식으로 가동시킨 이후에 커다란 문제 없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 나갔다.
“수익률은 어떻습니까?”
한진영의 질문에 조수아가 가지고 온 비교표를 확인하며 대답했다.
“흡사하다 못해 똑같습니다.”
“그래요?”
“솔직히 이 정도로 잘 움직일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조수아는 고개를 들어 한진영을 바라보고 말했다.
한진영은 조수아의 말에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박도하 IT팀장을 향해 물었다.
“프로그램에는 문제가 없습니까?”
“네. 테스트 기간 때 보였던 문제점들도 지금은 모두 사라진 상태입니다. 문제없습니다.”
“딜레이는 어느 정도죠?”
“우리가 주문하고 나서 10ms 후에 바로 경기증권 측에서도 주문이 나가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속도를 더 올리는 방법은 있고요?”
“우리 쪽 서버와 경기증권 쪽 서버를 다이렉트로 연결하거나 아니면…… 한쪽 서버에 통합한다면 속도를 한 자리 숫자까지도 줄일 수는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한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박도하는 그런 한진영의 눈치를 살짝 보며 이야기했다.
“서버가 자리하고 있는 공간을 같이 활용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같은 공간에 서버가 자리하게 된다면 연결하기도 쉽고 라인의 거리도 가까워 딜레이를 크게 줄일 것이 예상됩니다.”
한진영은 가만히 박도하의 말을 듣기만 했다.
박도하는 또 다른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고 있을 때 이야기를 듣기만 하던 한진영이 입을 열었다.
“혹시 미세하게 늘리는 법은 없습니까?”
“미세하게요? 얼마나…….”
“10ms에서 약 50ms? 0.1초까지는 티가 너무 날 것 같고…… 어떻습니까? 50ms라면 차이가 좀 있을까요?”
박도하는 한진영의 말에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가 대답했다.
“그렇게 된다면 사람이 느끼기에는 차이가 없을지 모르지만 실제 주문은 차이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원하는 게 바로 그겁니다. 동시에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약간 차이가 나는 것. 그런 모습이 미세하게만 보이면 됩니다. 마치 옆에서 보고 클릭하는 것처럼 확연하게 차이가 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숫자로 놓고 보아야만 차이가 있고, 실제 눈으로 확인했을 때는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면 됩니다.”
박도하는 한진영의 말을 가만히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한진영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 것 같은 박도하였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잠시 머릿속으로 생각한 박도하였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박도하는 고개를 들어 한진영을 바라보고 말했다.
“가능은 합니다. 우리 쪽에서 아무런 내용이 담기지 않은 더미 데이터를 섞어서 보내주면 됩니다.”
“더미 데이터…….”
한진영은 박도하의 말이 무얼 의미하는지 한 번에 알아들었다.
바로 지난 시절 이런 이유로 잠시 유행처럼 번져나갔던 클론매매가 삽시간에 사장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이 치명적인 이유가 되어 클론매매를 사장된 것은 아니었다.
평소라면 이 정도의 딜레이는 차이를 못 느낄만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시너지를 일으킬만한 사건이 벌어졌을 때 효과를 보일 만한 방법이었다.
‘얼마 남지 않았지.’
한진영은 달력을 잠시 바라본 후 박도하를 향해 지시했다.
“조금씩 늘려주세요. 그리고 홍 팀장님.”
“네. 대표님.”
“박 팀장님을 도와 계속 테스트해서 가장 이상적인 지점인 스윗스팟을 잡아주세요.”
“네.”
홍대민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한진영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하지는 못한 홍대민이었다.
회의가 끝이 나자 홍대민은 박도하를 은밀히 잡아끌었다.
“대표님께서 말씀하시는 게 뭡니까? 스윗스팟이라니요?”
홍대민의 질문에 박도하는 노트를 든 채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나름대로 해석을 한 한진영의 뜻을 이야기했다.
“상대방이 느끼기 어려운 최적의 자리까지 딜레이 지점을 늘리라는 말씀 아닐까요?”
“그게 차이가 있습니까? ms라면 영점 몇 초를 이야기하는 건데…… 이게 의미가 있습니까?”
“그건 저보다 홍 실장님께서 더 잘 아실 것 같은데요? 하루 거래량을 생각했을 때 영점 몇 초 차이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요.”
박도하의 말에 홍대민의 머릿속에서는 하나의 상황이 스쳐 지나갔다.
변동성이 터져 위아래로 미친 듯이 움직이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는 ms라는 사람이 느끼기 어려운 차이에도 크나큰 차이를 보일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