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2화 지루한 횡보장
한진영이 지시를 내린 후 홍대민은 바로 매매 횟수를 늘려가기 시작했다.
한 번에 주문을 넣어도 될만한 것을 쪼개어 주문을 넣었으며, 돌아가는 듯한 인상이 남는 매매 패턴을 보여주기도 했다.
동우 직원들은 이런 모습을 보며 의아함을 느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 보이건만 횡보장에서 왜 매매 횟수를 늘려가는 것인지 그들은 이해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들의 의구심도 한진영의 설명으로 해소됐다.
“지루한 횡보장이 이어진다고 하여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특히, 고객들에게 돈을 위탁받아 움직이는 입장에서 무엇이라도 해야 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것은 우리 같은 사람에게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렇게 바쁘게 움직여 1%라도 더 많은 수익을 올리는 것을 고객들이 원할 테니 말입니다.”
한진영의 설명은 동우를 비롯하여 경기증권을 이해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세이지의 움직임에 보였던 의구심을 지우고 다시 모니터링 프로그램에 눈을 돌릴 뿐이었다.
그리고 지루한 횡보장세에 그들은 점차 지쳐갔다.
“하아~”
늘어지게 하품을 보인 동우 직원은 급히 손으로 자기 입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곁에 앉아 있는 동료를 향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하품 소리가 너무 컸나?”
동료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하품을 내뱉은 직원이 슬며시 동료를 돌아봤다.
“얘는 아예 자네.”
머리가 책상에 닿을 것같이 꾸벅이던 동료는 말소리에 급히 고개를 쳐들었다.
“뭐야? 뭐야?”
“뭐긴 뭐야. 전쟁 났어.”
“어? 전쟁 났어?”
전쟁이라는 말에 화들짝 놀란 동료가 소리를 지르자 하품을 내뱉었던 동우 직원이 급히 그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왜 갑자기 소리를 질러?”
“어푸푸. 이것 좀 놔.”
졸던 직원은 짠내가 나는 직원의 손을 밀치고는 그를 빤히 바라봤다.
“전쟁 났다며?”
손에 묻은 침을 닦아내던 동우 직원은 여전히 전쟁 이야기를 하는 동료를 한심스러운 듯이 쳐다봤다.
“네 머리가 책상하고 곧 전쟁이 날 거 같다고…….”
꾸벅꾸벅 졸던 동료는 여전히 한심스러운 듯이 쳐다보는 직원의 눈빛에 그제야 그가 한 말이 무슨 말인지 깨닫고 이마를 쓰다듬었다.
“내가 깜빡 졸았나 보구나. 하아~”
졸음을 털어내려는 듯이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고는 온종일 쳐다보던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바탕 소란이 동우 직원들 자리에서 있었지만 화면 속에 보이는 시장은 여전히 그대로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여기는 여전히 똑같네. 이러니 내가 졸지 않을 수가 있겠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졸면 어떡하냐? 다른 사람이 봤으면 뭐라고 생각하겠어?”
“다른 사람 누구?”
“세이지 직원들 말이야.”
“에이 뭔 상관이야?”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한 이가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동료를 향해 말했다.
“세이지 직원들 눈 봐라. 다들 눈 풀려 있는 게 저 사람들도 지겨워 죽으려고 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아?”
“그거야 그렇긴 한데…… 그래도 여기는 남의 회사잖아.”
“뭔 상관이야? 우리가 갑 회사에 파견 나와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갑 아니냐? 세이지가 딴짓하는지 아닌지 감시하는 입장에서는 말이야.”
“뭐 그렇긴 한데…….”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 뭐 이런 거에 다 신경 써? 괜찮아.”
손까지 흔들어 보이며 괜찮다고 말하는 이가 화제를 화면 속 모니터링 프로그램으로 돌렸다.
“그건 그렇고 아주 지겨워 죽겠다. 뭐가 이렇게 움직이지 않는지 환장하겠어.”
“뭐라고 하더라? 나도 세이지 직원들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지금은 시간을 두고 매물을 소화하는 기간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어.”
“매물을 소화해?”
“그래. 매물을 모두 소화하고 나서야 이제 새로운 방향으로 움직인다고 하더라. 지금이 딱 그 시기래.”
“아휴 지겨워. 그래서 언제 움직인다는 거야?”
“보통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몇 달은 기본이라고 하더라. 그래서 세이지에서 매매 횟수를 늘린 거래. 이대로 가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되고 시간만 날린다고.”
“몇 달? 이 짓을 몇 달이나 한다고? 어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끔찍해.”
동우 로펌의 직원은 혀를 내두르며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도 선물 호가창에 고가와 저가가 모두 보이는 모습이었다.
이런 상황을 앞으로 몇 달이고 계속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에 몰려오는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가?”
“담배나 한 대 피우고 오려고.”
“너 자리 비울 시간 아니잖아.”
“뭐 어때? 봐봐.”
일어선 채로 화면을 손가락으로 가리킨 동우 직원은 동료에게 말했다.
“그나마 세이지에서 매매 횟수를 늘리는 바람에 우리가 보는 모니터링 프로그램에 변화가 있는 거지 안 그랬으면 장이 시작했을 때부터 끝날 때까지 변화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려야 찾을 수가 없었을 거다.”
“그거야 그렇지.”
“그리고 세이지가 왜 매매 횟수를 올렸겠어? 자기들도 이런 지루한 상황이 계속 이어질 것 같으니까 그런 것 아니겠냐? 그러니까…… 좀 여유롭게 가자. 그동안 너무 빡빡했어.”
“그럴까?”
“나 먼저 갈 테니까 너도 나 갔다 오거든 담배나 피우고 와. 우리 모두 자리를 비우는 것도 아니고 번갈아 가는 건데 무슨 큰일이 생기겠냐? 앞으로 몇 달을 이 짓을 더 할 텐데 우리도 유도리 있게 움직이자. 나 간다.”
자리에 아직 앉아있던 동우 직원은 담배를 피우러 가겠다는 동료의 말에 동의했다.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도 매매 횟수만 늘어났을 뿐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화면의 모습에 그들도 이제는 지쳐갔기 때문이다.
올라간 매매 횟수가 그들에게 지금의 지루한 상황을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만든 것이었다.
***
기풍의 안탐 광산 인수 협상은 생각보다 빠르게 마무리됐다.
안탐 광산을 어떻게든 정리하려는 인도네시아 정부와 너무 헐값에 매물을 손에 넣으려 하지 않았던 기풍이 서로 잘 맞물려 이루어진 결과였다.
그들은 적당한 선에서 합의를 끌어냈고 그 결과에 양쪽 모두 만족했다.
[기풍, 9억 5천만 달러에 안탐 광산 인수 확정]
생각보다 좋은 가격에 인수한 기풍이나 빠른 시간에 너무 헐값이 아닌 적절한 평가를 받고 안탐 광산을 매각할 수 있게 된 인도네시아 정부는 계약을 빠르게 체결했다.
하루라도 빨리 안탐 광산을 털어내야 한 푼이라도 손해를 덜 볼 수 있다고 인도네시아 정부가 판단했기 때문이다.
계약 체결은 인도네시아 산업장관이 직접 한국에 방문하여서 하기로 했다.
대통령이 바뀌자마자 계속 이어진 악재에서 처음 나온 호재를 외국에서 진행하고 싶지 않았던 대한민국 정부는 인도네시아를 설득하여 우리 쪽에서 계약 체결을 진행하려 한 것이었다.
기풍이 나서지 않았음에도 정부가 나서서 기자들을 불러 모았다.
체결식에는 산업자원부 장관을 비롯하여 외교통상부 장관과 대통령실 비서실장인 안혁규까지 참석하는 대규모 행사로 진행됐다.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모두 모인 계약 체결식장은 하나의 자그마한 대한민국 정부를 그대로 옮긴 듯한 풍경을 보여줬다.
“야야. 나 떨려.”
“뭐가 떨려?”
잠시 대기실에 앉아 있던 이성우는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해 가슴을 두드렸다.
“뭔 사람들이 저렇게 많이 왔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다.”
“내가 많이 올 거라고 이야기했잖아.”
“그래도 이건 너무 예상 밖이라서…… 얼떨떨하다. 난 적당히 그냥 정부 인사 몇 명쯤 온다고 생각했지. 뭔 장관에 비서실장 그리고 정재계에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다 올 줄은 몰랐어.”
이성우는 다시 한번 마음을 다스리고는 한진영에게 말했다.
“카메라도 많고…… 정부 관계자들 뭐 헷갈리는 거 아니냐? 우리가 인수해서 정부에 헌납한다고 생각하는 거 아냐?”
이성우는 슬쩍 문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계속 이야기했다.
“우리는 그냥 인도네시아 광산 하나 인수하려는 것뿐인데 뭔 일이 이렇게나 커졌어? 당장 대통령이 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야.”
“안 그래도 오셔야 하는 거 아니냐면서 수선을 떨길래 내가 그러지 말라고 했다.”
“어?”
이성우는 순간 몸이 굳어져 버린 채로 한진영에게 물었다.
“뭐라고?”
“대통령을 모시려고 하더라. 언론사도 많이 모였고 관심도 높아졌으니 얼굴을 비추는 게 어떠냐고 말이야.”
“그래서?”
“내가 그러지 말라고 했지. 주인공이 대통령이 아닌 데 와서 뭐 어쩔 거냐고 말이야. 그렇다고 대통령을 가운데 앉히고 좌우로 양옆에 앉아 계약을 체결할 것도 아니고…… 제정신이 아닌 거지.”
“정말? 정말 그랬어?”
“그래.”
이성우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자기는 농담으로 건넨 말이건만 한진영을 통해 그들이 진심으로 그러려고 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모습이었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를 향해 비웃음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했다.
“호재 거리 하나 나왔다고 아주 정신을 못 차리더라. 뭐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야. 성접대 파문에 줄줄이 낙마하는 장관 후보자들…… 인사 문제가 터지면서 지지율은 곤두박질치는 상황에서 갈증을 달랠만한 호재 거리가 나왔으니 거기에 온 신경이 모이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라. 하지만 적당히 해야지. 사기업이 광산 인수 하나 했다고 저렇게 호들갑을 떨어서야…… 에휴…… 말을 말자.”
한진영은 이야기하는 것도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고는 이성우에게 말했다.
“너나 정신 바짝 차리고 잘해. 어차피 어려운 건 없으니까 계약서에 사인 잘하고 악수만 잘하면 된다. 그리고 체결식이 끝나고 도와준 사람들 하나하나 찾아가 인사하는 것 잊지 말고…….”
“그럼 너한테 제일 먼저 인사해야 하는 거냐?”
“농담할 정신이 있는 것 보니까 뭐 생각보다 덜 긴장했나 보구나.”
한진영은 웃는 얼굴로 이성우를 바라봤다.
이성우도 그런 한진영의 미소에 마주 웃어 보였다.
그리고 다시 한번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래도 네가 같이 있어 준 덕분에 마음 좀 진정할 수 있게 됐다.”
“앞으로 이런 일이 더 많아질 테니까 익숙해져. 회장님도 그러라고 너를 내보낸 걸 테니까.”
“아버지가 익숙해지라고 나를 내보냈다고?”
“그래. 아니면 너 같은 애송이를 이렇게 중요한 자리에 내보내셨겠냐?”
이성우는 한진영의 애송이라는 말에 인상을 찌푸리기는 했지만 반박할 수는 없었다.
한진영의 말대로 지금 자리에서 자기보다 애송이는 없었기 때문이다.
“너를 전면에 내세워 기풍의 차기는 너라는 것을 각인시키는 너의 데뷔전이나 마찬가지야. 그리고 여러 중요한 사람들 앞에 너를 내세워서 너에 대한 인지도도 쌓고…… 대중과 정부 그리고 해외에까지 너를 알리려는 회장님의 뜻이니까 돌아가거든 감사하다고 말씀드려.”
한진영의 말에 이정훈 회장의 뜻을 알게 된 이성우는 감동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에게 다가가 어깨를 주물렀다.
“그리고 이런 자리는 계속될 거야.”
“계속된다고?”
이성우가 놀란 듯이 고개를 돌려 한진영을 올려다봤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의 머리를 가지런히 앞을 바라보게 만들고 이야기했다.
“그래. 돈은 내가 대줄 테니까 마구 사들여.”
“광산을 말하는 거야?”
“그래. 마구마구 보이는 족족, 시장에 물건이 나오는 족족 사들여. 니켈뿐만이 아니라 구리나 철광석과 같은 것들도 마구 사들여. 지금은 가격이 싸니까 주워 담으면 주워 담는 대로 나중에 큰 이득을 보게 될 거다.”
“너 뭐 아는 게 있구나.”
“아는 게 있지. 우리가 진행하는 배터리로 나중에 한몫 단단히 잡을 수 있다는 거. 그걸 알고 있지. 그러니 원재료라 할 수 있는 것들은 다 끌어안아. 결국 누가 얼마만큼의 물량을 확보했느냐에 따라서 가지게 될 힘의 차이가 달라질 테니까. 알았지?”
이성우는 한진영의 말에 이해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진영은 이성우의 어깨를 양손으로 내리치고는 문 앞으로 걸어갔다.
“그럼 잘 쉬고 나와. 나는 먼저 갈 테니까.”
“그래. 먼저 나가 있어.”
한진영은 손을 들어 이성우에게 인사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밖에서는 조금 뒤 펼쳐질 계약 체결식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나오셨습니까?”
“성우가 놀랄 만도 해. 뭐가 이렇게 많이 모였어? 모르는 사람이 보면 광산을 인수하는 게 아니라 인도네시아를 인수한 줄 알겠어.”
한진영이 다가온 조지훈을 향해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조지훈도 그런 한진영의 말에 동의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아무리 시선을 이곳으로 쏠리게 하려고 했다지만 조금 아니 많이 무리한 모습입니다.”
내외신 기자만 200명이 모여 있었다.
장관급이 3명이 자리하고 있는 데다 각 부처의 고위급 임원들까지 더한다면 세종시에서 벌이는 웬만한 회의도 이보다 더 사람이 많이 모일 것 같지 않았다.
대통령이 주재하는 회의 정도나 지금의 자리와 비슷할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한진영은 어이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고 있을 때 그런 그를 향해 안혁규가 찾아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한진영은 안혁규가 찾아온 것에 금세 표정을 바꾸고 찾아온 안혁규를 향해 반갑게 인사했다.
“잘 지내셨지요?”
“잘 지내기는요? 대표님께서도 언론을 통해 보셔서 아시겠지만 별로 잘 지내지는 못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한진영이 이해한다는 듯이 표정을 짓자 안혁규가 그런 한진영의 손을 잡아끌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저기서 죄어오는 통에 숨도 못 쉴 정도였습니다.”
“그 사람 원래 문제가 많던 사람이던가요? 저는 그 방면으로는 전혀 아는 게 없어서 말입니다.”
한진영이 순수한 표정을 짓자 안혁규는 기다렸다는 듯이 설명했다.
마치 한진영처럼 모르는 채 다가와 물어보는 사람을 원했다는 듯한 모습의 안혁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