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증권사 생활-326화 (326/650)

326화 듣고 싶어 하던 이야기

뒷짐을 지고 현황판을 바라보고 있는 한진영을 향해 조지훈이 다가왔다.

“대표님.”

한참을 현황판에 그려진 나스닥 차트를 바라보고 있던 한진영은 조지훈이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조지훈은 한진영을 향해 조심스럽게 전화기를 내밀며 전화 온 상대를 한진영에게 알렸다.

“경기증권 사장님이십니다.”

“경기증권?”

한진영의 오른쪽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헷갈리나 보구나.”

“어떻게 할까요? 그냥 안 계신다고 할까요?”

“아니야. 굳이 전화를 피할 이유 없어. 줘.”

한진영이 전화를 받겠다며 손을 내밀자 조지훈은 한진영의 손에 전화기를 건넸다.

한진영은 전화를 받아 들고 다시 현황판을 바라봤다.

그리고 전화를 받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셨습니까? 이렇게 전화까지 주시고 어쩐 일이십니까?”

한진영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전화기 너머에 있는 경기증권 박지훈에게 닿았다.

그러자 박지훈의 조금은 다급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표님. 뉴스 들으셨습니까?”

“무슨 뉴스 말입니까?”

“거 왜 오늘 새벽에 WSJ에서 나온 소식 말입니다.”

“아~ 출구전략 말씀입니까?”

“네. 그거 말입니다.”

잠시 말을 멈춘 박지훈은 수화기 너머로도 답답함이 느껴질 만큼 천천히 이야기를 꺼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뭘 말씀입니까?”

“대표님 이야기대로 출구전략 이야기가 나온 것 아닙니까?”

“그렇죠.”

“그러니 말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떨려오는 박지훈의 말에 한진영이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이라도 물러나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이지요.”

“대표님께서는 물러나실 생각이십니까? 그런데 정작 세이지는…… 포지션 변화가 없지 않습니까?”

“네. 맞습니다. 이건 고객님의 돈이 담겨있는 계좌니까요. 하지만 저희 자본으로 움직이는 것들의 경우에는 하락 포지션을 잡고 있습니다. 그건 박 사장님도 잘 아실 텐데요.”

“그건…….”

박지훈은 말을 얼버무렸다.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이 결코 좋은 방법을 이용하여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부분을 한진영은 탓하지 않고 그저 잘 알고 있지 않냐는 말만 건넬 뿐이었다.

박지훈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숨소리만 내쉬었다.

한진영이 그런 박지훈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박 사장님. 저희 펀드 포트폴리오를 바꾸지 않는 건 충분히 대응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장님 쪽도 대응이 가능하다고 저는 자신하지 못합니다. 바둑에서 백돌과 흑돌이 똑같이 두는 흉내바둑조차도 깨지는 경우의 수가 몇 가지나 되지 않습니까? 클론매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이쯤에서 우선 물러나세요. 그리고 출구전략이 정말로 시행이 되는지 확인하고 다시 해도 늦지 않습니다.”

한진영은 한참 동안 박지훈을 설득했다.

그러나 박지훈은 가타부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수화기만 붙잡고 숨소리만 내뱉었다.

그렇게 한동안 거친 숨소리를 내뱉던 박지훈이 천천히 전화기 속에서 이야기했다.

“저희 최 부사장 그러니까 최종필 부사장이 월가에 아는 사람들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출구전략에 관해서요?”

“네. 그런데 다들 오늘 기사는 오보이며 출구전략은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고 합니다.”

“하하.”

한진영은 허탈한 웃음을 내뱉으며 말했다.

“그래서 하고 싶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출구전략이 없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믿고 싶으시다면 그렇게 생각하십시오. 하지만 저는 분명 경고했습니다. 흉내바둑도 승패가 나기 마련이라고 말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똑같은 결과를 얻을 수는 없습니다. 클론매매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한 대표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깊이 생각해보고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한진영은 끊어진 전화기를 가만히 내려본 뒤 그때까지 곁에 서 있던 조지훈에게 건네줬다.

조지훈은 조심스럽게 한진영에게서 전화기를 건네받은 뒤 물었다.

“왜 박지훈을 말리신 겁니까? 계획대로 하기 위해서는 경기증권 사람들이 계속 우리 계좌와 동기화되어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

“그런데 왜 말리셨습니까? 혹시라도 경기증권에서 대표님의 말씀을 듣고 계좌를 정리한다면 우리 계획이 모두 물거품이 될 수도 있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지 않을 거란 걸 알았으니까.”

“아셨다고요?”

“그래.”

한진영은 현황판으로 시선을 돌린 채로 말했다.

“박지훈은 그렇게 쉽게 물러나는 사람이 아니야. 애초에 그런 사람이었다면 우리와 클론매매를 하지도 못했을 거야.”

“확신이 있으셨군요.”

“있었지. 그리고 최종필이 붙어 있으니까 더 믿었던 것이고…… 아무렴 월가와 밀접한 최종필의 말이 더 믿을 만하겠지, 여기 대한민국 서울 바닥에 앉아있는 나보단 말이야.”

한진영은 고개를 돌려 조지훈을 돌아보고 물었다.

“버냉키 연설이 언제 있지?”

“다음 주 수요일, 현지 시각으로 오후 3시 우리나라 시간으로 새벽 4시에 뉴욕에서 있습니다.”

“좋아. 그럼 디데이는 그때라고 알려주도록 해.”

“그럼 그날 버냉키가 출구조사를 발표한다는 건가요?”

“내 기억으로는 그랬어. 그러니까 거기에 맞춰 준비하라고 해.”

한진영은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조지훈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몸을 돌리며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내 기억?”

한진영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기에 우선 홍대민을 향해 먼저 움직인 조지훈이었다.

변동성 폭발의 순간이 다가온 것이었다.

***

오늘도 변함없는 날이었다.

잠잠한 코스피에 이어 뉴욕 3대 지수도 모두 고요한 바다처럼 잔잔히 가라앉아 옆으로 기어가고 있었다.

미국에서 발표되는 지표들은 모두 예상치보다 좋다는 초록빛을 보여 주었다.

기업의 예상 실적 또한 언제나 그렇듯이 지난 분기보다 이번 분기를 지나 다음 분기가 더 좋을 거라는 예상이 줄지어 나왔다.

미국에서는 예상외라는 상황이 다시는 나올 것 같지 않을 것처럼 모든 분위기가 좋게만 흘러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FOMC 위원들의 연설은 비슷한 이야기들로 지금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른 위원이 아닌 연준의 의장인 버냉키가 마이크 앞에 서는 날이었다.

시장은 앞으로의 통화정책과 금리정책 등의 버냉키 의장의 생각을 알 수 있는 자리로 이번 연설을 기대했다.

그리고 특별한 일 없이 앞으로 시장은 좋아질 거라는 이야기가 나올 것을 예상했다.

예상대로 버냉키 의장의 첫 마디는 시장의 기대에 부합하는 말이었다.

[우리 시장은 견고합니다. 지난 금융위기를 차분한 모습으로 극복하고 있습니다. 물가는 안정되어 있으며 고용시장 또한 개선되어 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한진영은 버냉키 의장의 연설을 가만히 눈을 감고 들었다.

새벽 4시에 하는 연설이었기에 평소라면 잠자리에 들었을 시간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중요한 날이었기에 일찍 일어나 버냉키의 연설을 직접 듣는 중이었다.

커다란 TV 옆에 세워놓은 화면에서는 나스닥과 S&P 차트가 나왔다.

반대편 화면에서는 주요 종목들의 가격이 보이며 미국의 흐름이 한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버냉키의 연설에도 지수를 비롯하여 종목들까지 움직임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저 오늘도 별일 없이 지나간 지난 수많은 날과 같은 날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경제 상황에 따라 채권매입 규모를 줄이거나 늘리는 것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고용시장이 개선세를 유지하고 개선세가 지속될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다면 앞으로 몇 차례 FOMC에서 자산매입 규모 축소를 결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결정은 앞으로 나올 경제지표에 달려 있으며 우리는 경제지표를 심도 있게 지켜본 후 신중하게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버냉키의 말을 들으며 한진영은 천천히 눈을 떴다.

조금 전까지 졸음이 가득 왔던 한진영의 눈에는 어느새 졸음 기운은 찾을 수 없게 되었다.

한진영이 그토록 듣고 싶어 하던 말을 버냉키가 수많은 카메라와 기자 앞에서 내놓았기 때문이다.

***

세이지 자산운용은 장 시작 전부터 소란스러웠다.

“긴장해. 프로그램 세팅은 끝났어?”

“네. 파라미터 입력까지 다 마쳤습니다.”

“충분히 테스트해서 확인했다지만 그래도 집중해서 확인해야 해. 컴퓨터라서 오류가 한번 터지면 걷잡을 수 없는 결과가 나올지도 몰라. 그거 바로 캐치해내지 못하면 대참사야. 알았어?”

“네. 오늘은 화장실도 번갈아 가라고 지시했습니다.”

“오늘만 참으라고 해. 이 팀장에게서 받은 건? 어때?”

“기존 프로그램에 몇 가지 조건이 더해진 겁니다. 리스크관리팀과 충분한 소통으로 이미 조건을 숙지한 상태이니 문제없이 적용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것도 긴장해야 해. 만약의 사태는 정말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일어나는 법이니까.”

홍대민은 최수찬에게 지시를 마친 후 현황판을 긴장한 상태로 바라봤다.

새벽에 있었던 뜻하지 않은 이야기로 미국은 장 막판 큰 폭의 하락을 맞은 상태였다.

그리고 그 하락은 끝이 아니었다는 듯이 장 마감 후 이어진 시간 외 거래에서도 계속된 하락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런 하락의 여파는 바로 이어서 열리는 우리나라 시장에 영향을 줄 게 분명했다.

“대표님. 말씀이 맞았어. 대표님이 정확하게 말씀하셨어.”

홍대민은 혼잣말을 내뱉으며 손바닥을 비볐다.

한진영이 밥상을 차려준 것도 모자라 숟가락에 밥을 뜨고 반찬을 얹어 입에 넣어주기까지 했다.

입에까지 들어온 밥과 반찬을 홍대민은 씹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이것도 못 하면 나가 죽어야지.”

홍대민은 바짝 긴장한 상태로 현황판을 바라본 채로 다시 소리 질렀다.

“동시호가 들어가니까 바짝 긴장해. 어차피 매매는 컴퓨터가 알아서 다 할 거야. 우리는 그 프로그램이 제대로 돌아가는지, 문제가 없는지 확인만 하면 되니까 어려운 거 없어. 오늘 바짝 달리고 집에 들어가서 푹 쉬자. 자 시작한다.”

홍대민의 말이 끝나자 장전 동시호가 시장부터 열리며 오늘 하루 시작을 알렸다.

“얼마에 잡혔습니까?”

홍대민이 고개를 돌려 급히 찾아온 한진영을 향해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한진영은 가볍게 홍대민의 인사를 받고는 현황판을 주시했다.

“우선은 -1%군요.”

“네. 아직은 긴가민가한 상황인 것 같습니다. 장이 끝나고 몇몇 경제학자들이 FRB의 요구는 부동산시장 회복과 실업률 감축이라며 부동산 경기가 최근 회복세를 보이고 소비도 늘어나는 상황에서 당장 유동성을 끊기는 쉽지 않을 거라는 말을 하면서 분위기를 잠재우려 노력한 영향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래봤자 겠지요.”

“네. 그래봤자 입니다.”

조금 전까지 -1%에 잡히던 시초가가 지금은 -1.2%까지 떨어져 내려갔다.

시간이 점차 흐를수록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버티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저쪽은 어떻습니까?”

한진영은 동우 사람들이 앉아있는 곳을 슬쩍 가리키고 물었다.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모습입니다.”

홍대민은 한진영과 마찬가지로 동우 로펌에서 파견 나온 사람들을 보고 대답했다.

한진영은 홍대민의 대답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요. 우리를 따라 하기만 하면 될 테니까요. 게다가 따라 하는 것도 컴퓨터가 알아서 해주니 아마 지금의 상황도 크게 피부로 느껴지지 않을 겁니다.”

한진영은 홍대민과 최수찬을 번갈아 바라보며 웃었다.

“잘됐습니다. 그럼 우리는 저들이 깨닫기 전에 최대한 많이 그리고 빨리 정리하도록 합시다. 저들이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고 생각할 수 있게 말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한진영은 동시에 대답하는 홍대민과 최수찬의 말을 들으며 화면을 바라봤다.

어느새 시초가는 -1.5%까지 빠져 내려와 있었다.

***

전날 S&P와 나스닥이 -2% 순식간에 빠져 내려왔음에도 코스피는 견조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비록 시초가에 -1.5%의 하락을 보였지만 장이 시작하자마자 들어온 저가 매수세에 10분 만에 하락을 모두 만회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었다.

시장은 마치 하락을 용인하지 않는 듯했다.

미국은 미국이며 대한민국은 대한민국이라는 모습으로 시장의 하락을 막아내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버냉키의 워딩은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자의적인 해석이 담긴 목소리까지 기관과 정부 관계자들 사이에서 나왔다.

시장은 아직 하락이 아니라는 듯한 모습으로 다시 2,100을 향해 올라가려 했다.

그러나 세이지는 이런 상황을 그냥 보고 넘기지 않았다.

“지수가 잡혀 있을 때 최대한 많이 던져야 해. 받아주는 곳이 있을 때 물량 넘겨.”

홍대민의 목소리가 사무실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어때?”

“매도 프로그램 속도를 기준 대비 1.5배까지 올렸습니다.”

“잘했어. 하지만 주의해야 해. 우리 프로그램 속도 때문에 시장에 어떤 영향이라도 일어났다가는 괜한 덤터기를 쓸지도 몰라.”

“알고 있습니다. 초단타매매가 규제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을요.”

“그래. 뭐 매수하지 않고 있으니 괜찮겠지만 그래도 매도만으로도 시장이 망가질 수도 있어. 알잖아. 우리 프로그램이 너무 좋은 거.”

“알고 있습니다. 뉴욕 지수가 망가질 정도였는데 우리나라라고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최대한 주의해서 코스피가 견딜 수 있는 수준으로만 돌리도록 하겠습니다.”

최수찬의 대답에 홍대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어리둥절한 표정의 동우 직원들이 있는 곳을 바라보고 물었다.

“쟤네는 어때?”

홍대민의 질문에 최수찬은 동우 쪽을 바라보고 대답했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잘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클론매매는 잘 돌아가?”

“아직은…… 아직은 돌아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아직은 이라…… 그래. 아직은 돌아가겠지.”

홍대민은 동우 로펌에서 파견 나온 사람들을 보고 웃었다.

모니터링만을 위해 나온 사람들이었다.

같은 업계의 경기증권 직원들이라면 지금 상황에 긴장하며 본사로 연락을 넣었을 게 분명했다.

지수는 반등을 보이지만 무식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물량을 정리해대는 세이지의 모습에 긴장감이 올라올 테니 말이다.

그러나 동우 로펌의 직원들은 그런 이상한 느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경기증권도 믿지 못하고 직접 확인하겠다며 보낸 동우 로펌의 직원들은 숫자만 잘 보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눈에는 지금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세이지가 물량을 정리하는구나 이상의 감정을 느끼지 못한 것이었다.

그렇게 반등하던 지수가 점심 무렵부터 꺾여 내려가자 동우 로펌 직원들은 그제야 무언가 일이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갑작스러운 급락에서 클론매매가 작동하지 않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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