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8화 나는 면허가 필요하다
“오늘 우리나라 시장은 2,032에서 마감했습니다. 전날 대비하여 -3.1% 하락한 것으로 최근 6개월 사이 가장 큰 하락 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하락 이유는 전날 있었던 버냉키 연준의장의 발언 때문이었습니다. 버냉키 연준의장은 적절한 시기에 출구전략을 시행할 수 있다는 이야기로 시장을 냉각시켰습니다. 버냉키 연준의장의 발언 이후 시장은…….”
화면에서는 오늘 있었던 시장 흐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그런 화면 바깥의 세이지는 소리와 무관한 일로 시끌벅적했다.
“안 되는 거야?”
“안 됩니다.”
단호하다고 여겨지는 직원의 대답에 경기증권의 박지훈은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는 잘 됐잖아.”
직원은 벌써 몇 번째 물어오는지 모르는 같은 질문에 어깨를 늘어뜨리고 대답했다.
“지금 상황이 전과는 달라서 그렇습니다.”
“뭐가 다른데?”
“전보다 변동성이 늘어난 바람에…… 그러니까 현재 시장에서 거래되는 횟수를 클론매매 프로그램이 따라가지를 못하는 겁니다.”
박지훈은 직원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아 고개를 돌려 담당자에게 다시 설명을 요구했다.
담당자는 최대한 알기 쉬운 말로 박지훈에게 설명했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조지훈이 조용히 한진영에게 말했다.
“다른 곳에 가서 이야기하라고 할까요? 아무래도 이곳은 트레이딩룸이라…….”
트레이딩룸에 외부인이 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같은 회사 직원들조차도 출입을 엄격히 제한하는 세이지 자산운용의 특성상 트레이딩룸에서 외부인들이 들어와 이야기를 나눈다는 모습에 한진영이 불쾌하게 느낄 것으로 생각한 조지훈이었다.
그런데 그런 조지훈의 생각과 달리 한진영의 입에서는 뜻밖의 대답이 나왔다.
“그냥 놔둬.”
조지훈은 흐뭇한 미소까지 지어 보이는 한진영에게 다시 물었다.
“그냥 놔둬도 괜찮을까요?”
“괜찮아. 괜찮아. 오늘만 특별히 예외로 둘 테니까 그냥 조용히 우리는 구경이나 하자고.”
조지훈은 더는 구경하는 데 방해하지 말라는 듯한 한진영의 모습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한진영이 바라보고 있는 곳을 함께 구경했다.
“그래서 해결책은? 어? 해결책은 뭐야?”
“그게…… 지금은 딱히 없습니다.”
“없다는 거야? 못한다는 거야?”
“둘 다입니다. 없기도 하고 못 하기도 합니다.”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어?”
박지훈이 직원을 닦달하자 곁에서 지켜보던 담당자가 박지훈을 말렸다.
“사장님. 잠시만 흥분을 가라앉히세요.”
“내가 흥분을 가라앉힐 수 있겠어? 지금 이놈이…….”
박지훈이 직원을 향해 삿대질하다 말고 주변을 살폈다.
그제야 왜 담당자가 박지훈을 향해 흥분을 가라앉히라고 했는지 이해가 됐다.
박지훈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조금 전과 달리 차분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크흠. 그러니까 정확히 이야기해봐.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닙니다. 그저 시장이 다시 전처럼 돌아가기를 바라는 것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야! 이씨~”
박지훈은 소리를 지르려다 주변에서 자기들을 구경하고 있는 세이지 직원의 따가운 시선에 화를 가라앉힐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 만약 경기증권이었다면 구경하고 있는 이들에게 나가라고 소리를 쳤어도 백 번을 쳤을 박지훈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경기증권이 아닌 세이지였기에 박지훈은 화를 삼킬 수밖에 없었다.
“사장님.”
가만히 옆에서 모니터링 화면을 살폈던 최종필이 박지훈을 불렀다.
박지훈은 최종필의 목소리에 반색하며 반응했다.
“최 부사장님. 뭐 좋은 방법이라도 있으십니까?”
“기왕 이렇게 된 거 두고 보시죠.”
“네?”
뜻밖의 제안에 박지훈이 놀란 표정으로 최종필을 바라봤다.
최종필은 그런 박지훈에게 모니터링 화면을 손으로 가리키고 말했다.
“이미 저쪽은 1/4에 해당하는 물량을 정리한 상태입니다. 우리는 그 물량을 그대로 다 들고 있고요. 이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내일 시초가에 손해를 감수하고 물량을 맞춰 던지든가 아니면 그대로 들고 세이지와 다른 길을 가야 하는 상황입니다. 저는 두 가지 방법 중에 후자를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박지훈은 냉정한 최종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방법밖에 없다는 최 부사장님의 말씀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후자를 선택해야 하는 겁니까?”
“손해가 생겨버린 순간 함께 할 수가 없게 됐으니까요. 세이지와 함께 할 때마다 손해가 생각날 텐데 그걸 그냥 참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박지훈은 최종필의 말에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최종필의 말대로 오늘 보인 손해가 떠나지 않고 계속 머릿속에 맴돌게 분명했다.
자기 말에 동의하는 모습을 보인 박지훈을 향해 최종필은 계속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또 벌어지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오늘 보인 손해가 계속 누적이 된다는 이야기인데…… 설마 이런 것은 처음 클론매매를 할 때 염두에 두지 않은 일이었습니까?”
“이건…… 계산 밖의 상황입니다.”
박지훈은 한진영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그리고 한진영이 열흘 전쯤 흉내바둑 이야기를 하며 손해에 관해 이야기를 했던 것을 떠올렸다.
이런 이야기까지 차마 할 수 없었던 박지훈은 최종필의 제안을 단번에 받아들였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그런데 문제는 다른 길을 갔을 때 대안이…….”
“저를 왜 데려오셨습니까?”
“어…… 그건…….”
“저를 비싼 돈을 주고 데리고 오셨으면 저를 믿으세요. 제가 더 좋은 길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최종필의 자신만만한 모습에 박지훈의 불안했던 마음이 많이 가라앉았다.
“그럼 바로 시작할 생각입니까?”
“바로 해야죠. 나머지를 묶어 놨다가 또다시 손해를 보실 생각은 아니시죠?”
“뭐…… 그럽시다.”
박지훈은 짧은 생각을 훌훌 털어버리고 경기증권의 직원들을 향해 이야기했다.
“세이지와의 클론매매는 정리하는 거로 하자.”
“네. 알겠습니다.”
경기증권 직원들이 대답하자 박지훈은 동우 로펌 사람들을 바라보고 말했다.
“제가 김 대표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동우 로펌 측에서도 이만 정리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더는 클론매매를 하지 않을 생각이니까요.”
“이대로 끝낸단 말입니까? 이건 너무…….”
동우 로펌 직원들은 아쉬운 표정으로 박지훈의 이야기에 동의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파견 나와 이곳에서 편하게 지냈던 시절이 끝이 난다는 것이 아쉬웠기 때문이다.
박지훈은 그런 동우 로펌 직원들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빨리 발견했으면 이럴 일도 없었던 것 아닙니까? 듣기로는 딜레이 발생은 그 전에 파악하셨다면서요? 그런데 보고하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는 바람에 이 사달이 난 것 아닙니까? 미리 알았으면 대처라도 했을 텐데 이게 뭡니까? 그러게, 모니터링을 우리가 한다고 할 때 놔두지. 하여튼 의심은 많아서…… 가자.”
박지훈은 더 이야기하기 싫다는 듯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동우 로펌 직원들을 향해 고개를 돌려 이야기했다.
“여기 더 있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세요. 어쨌든 우리는 세이지와의 클론매매를 그만둘 테니 말입니다.”
박지훈이 몸을 돌린 채로 멀어지자 동우 로펌 직원들은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경기증권이 손을 털어버린 상황에 그들이 선택할 것은 한 가지밖에 없음을 그들도 아는 눈빛이었다.
박지훈은 자리에서 멀어져 한진영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소란을 일으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어떻게? 결정은 내리셨습니까?”
“네. 클론매매를 그만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군요.”
한진영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박지훈은 그런 한진영의 모습에 오히려 부끄러움을 느꼈다.
한진영이 말렸는데도 억지로 밀고 나갔던 사실이 아직도 생생하기만 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얼굴이 붉어진 박지훈을 바라보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내일 시초가에만 정리해도 큰 손해는 아니니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어찌 됐든 결론적으로는 큰 손해를 본 건 아니니까요.”
“시초가에 정리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한진영의 말에 최종필이 박지훈을 대신하여 대답했다.
한진영은 그런 최종필을 향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시초가에 정리하지 않는다고요? 어째서 그렇습니까?”
“지금의 상황이 과장되어 있으니까요.”
“과장이요?”
“자세히 말씀드리기는 어렵지만 제가 보는 시각은 그렇습니다. 오히려 오늘의 하락은 개미 털기로 생각됩니다.”
“상승을 위해 억지로 하락을 만들어냈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한진영은 현황판에 보이는 투자자별 거래 동향을 바라봤다.
개인 매수 5,700억.
기관과 외국인이 각각 3,000억과 2,700억을 매도한 것과 달리 개인이 홀로 증시를 받아낸 하루였다.
그런데 이런 날 개미 털기를 이야기한다니 한진영은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그렇군요.”
“이런 날 털리면 상승할 때 먹지를 못하지요.”
“그래서 들고 상승을 노릴 생각이십니까?”
“버냉키의 쇼는 한낱 해프닝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니 들고 가야지요. 우리는 이제부터 세이지와 달리 나름대로 운용을 하도록 할 테니 더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알겠습니다.”
최종필의 목소리에는 은근히 무시하는 뉘앙스가 담겨있었다.
곁에 있던 세이지 직원에게도 그런 느낌이 전해졌다.
그런 최종필의 모습에 참지 못하고 최석영이 나서려 할 때 한진영이 최석영을 손으로 막아 세웠다.
그리고 박지훈에게 인사하고는 다음에 또 만날 것을 기대하는 말을 건네며 떠나는 그들을 배웅했다.
최석영은 가볍게 인사하고 떠나는 경기증권의 사람들을 보고 화를 참지 못했다.
“아니. 저것들은 트레이딩룸까지 열어 자리를 만들어줬건만 고마워하는 것도 없이…… 뭐야?”
최석영이 삿대질하며 주변에 있는 직원들을 향해 말하자 다른 이들도 동조했다.
“마치 우리가 경기증권에 빚을 진 것처럼 행동하는 게 눈꼴셔서 못 참겠어요.”
조수아까지 동조하자 여기저기서 경기증권을 욕하는 목소리들이 나왔다.
한진영은 직원들의 불만 섞인 이야기를 한참 듣고 난 뒤 목소리가 잦아질 때쯤 직원들을 향해 말했다.
“너무 그렇게 미워하지 마십시오.”
“네? 미워하지 말라니요? 대표님께서는 화도 나지 않으세요?”
“화날 게 뭐 있습니까? 나중에 다 한 식구가 될 곳인데요.”
“한…… 식구요?”
한진영의 말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한진영이 한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한 식구라니요? 경기증권과 왜 우리가 한 식구예요?”
한진영은 경기증권 직원들이 떠나간 곳을 바라보고 대답했다.
“언제까지 우리가 자산운용사로 남아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증권사로 도약해야지요.”
“그거하고 경기증권하고…… 설마?”
한진영에게 묻던 조수아는 놀란 눈으로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돌아봤다.
자기만 생각한 것이냐고 묻기 위해 돌아봤지만 모두 같은 생각을 한 것만 같았다.
다들 더는 커질 수 없게 눈을 커다랗게 뜨고 한진영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최석영이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대표해서 한진영에게 생각하고 있던 것을 물었다.
“혹시…… 경기증권을…… 인수할 생각이야?”
평소라면 다른 사람 앞에서 꼬박꼬박 공대하며 대표로서의 존중을 표했던 최석영이었다.
그런데 지금만큼은 그러지 못했다.
그만큼 놀라고, 황당한 마음이 더욱 컸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그런 최석영의 모습을 지적하지 않은 채 웃으며 최석영의 질문에 대답했다.
“네. 경기증권을 인수할 생각입니다.”
“어떻게? 아니. 왜? 하고 많은 증권사 중에서 왜 경기증권을 인수하려고? 저기는…… 평판도 좋지 못해.”
최석영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손을 들어 경기증권이 떠난 방향을 가리켰다.
그리고 자기 말이 맞지 않냐는 듯이 자리에 있던 사람들에게 동의를 구했다.
“내 말이 맞지 않아?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소문에는 경기증권의 경우에는 증권사 사장 미팅 때 참석도 못 한다고 하던데요?”
“어. 그건 저도 들었어요.”
“경기증권은 매번 다른 증권사의 단물만 빨아먹으려 하는 곳 아닙니까? 하다못해 이번에도 우리 단물을 뽑아먹겠다는 것을 직접 겪기도 했는데 경기증권을 인수하다니요? 다시 한번 생각해봐 주십시오.”
다들 반대하는 목소리를 한목소리로 냈다.
그만큼 경기증권에 대한 인상이 좋지 못했으며 평가가 나빴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한진영은 그런 그들을 향해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경기증권을 꼭 인수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뭔데?”
한진영은 제일 극렬하게 반대하는 최석영을 바라보고 말했다.
“증권업을 할 수 있는 면허가 필요하니까요. 저는 경기증권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그러니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저는 증권사 ‘면허’가 필요한 겁니다.”
한진영은 최석영에서 시선을 돌려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고 말했다.
“면허를 따기 위해 여러 가지를 준비하기에는 시간이 번거롭기만 합니다. 차라리 면허를 가지고 있는 곳을 인수하는 편이 훨씬 빠르고 간편한 방법이지요. 그래서 경기증권 인수를 생각한 겁니다. 그 외에 다른 곳은 매물로 나온 곳이 없으니까요.”
한진영의 말에 그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 것인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이제야 알게 됐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있었다.
“경기증권이 매물로 나왔나요? 그런 이야기를 전혀 듣지 못했는데요. 조금 전 왔던 경기증권 사람들을 봐도 그런 것을 느끼지 못했고요. 제가 못 들은 건가요?”
“아니야. 나도 못 들었어.”
최석영이 조수아의 말에 동의하고는 한진영에게 물었다.
“경기증권이 매물로 나왔다는 말 정말이야?”
한진영은 한쪽에 서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동우 로펌의 직원들을 바라보고 웃으며 말했다.
“아직은 아니지만, 조만간 매물로 나올 겁니다.”
“조만간 나온다고 왜?”
“경영진은 구속이 되고 회사는 산산조각이 나니까요. 그런 상황에서 더는 영업하지 못할 테니 최소한의 돈이라도 살리기 위해서 매물로 나올 겁니다. 그 일이 바로 오늘 결정이 났습니다.”
“오늘? 결정이 나?”
최석영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은 채 다른 사람들을 돌아봤다.
그러나 자리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최석영과 마찬가지의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오직 한진영만이 미래에 일어날 일을 뿌듯해하는 것인지 웃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