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9화 물증은 없는데 심증만 있는 정도
한진영과 김교철은 아무런 말 없이 마주 앉아 있었다.
평소라면 꼭대기 층에 마련되어 있는 바에서 만났겠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김교철이 특별히 자기 사무실에서 이야기하자며 한진영을 사무실로 불렀고 두 사람은 평소와 달리 와인이 아닌 차를 앞에 놓고 이야기를 나누려 했다.
“어떤가?”
“네? 무엇이 말씀입니까?”
“내 방 말일세. 내 방에는 처음 오는 거지?”
“네. 처음입니다.”
“이 방에 사람을 들인 건 정말 오랜만이야. 그래서 내 방이 다른 사람이 보기에 어떤지 궁금했다네. 그러니 한번 이야기 해줘 보게.”
“알겠습니다.”
한진영은 가볍게 김교철의 말에 대답한 후 방을 살폈다.
그렇게 한참을 방을 돌아봤지만, 한진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김교철은 그런 한진영의 모습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생각보다 별로라서 말이 잘 안 나오나?”
“아닙니다. 예상했던 그대로라서 무얼 말씀드려야 하나 고민하느라 그런 겁니다.”
“예상했던 그대로라고?”
김교철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어떤 걸 예상했는데 자네 생각대로란 거지?”
“소박하지만 검소하며, 권위적이지 않은 방. 대표변호사님의 사무실은 그럴 거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와서 보니 정말 그렇게 느껴집니다.”
“맞아. 정확하게 잘 봤어.”
김교철은 감탄에 가까운 말을 내뱉은 뒤 한진영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자네 생각보다 더 세심하구먼.”
“관심이 많으니 그렇겠지요.”
“나한테 관심이 많다는 이야기인가?”
“왜 안 그러겠습니까? 저 말고도 대표변호사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대한민국 전체인구의 절반은 될 듯합니다. 나머지 절반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일 테고요.”
“하하하.”
김교철은 기분 좋게 웃고는 한진영을 향해 말했다.
“그래. 자네는 세심한 사람이야.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어떤 걸 생각하고, 어떤 부분에 관심이 있어 하는지 잘 아는 사람이지. 그래서 대화하는 상대방과 장단을 잘 맞춰 대화할 정도야.”
김교철은 말을 마치고 나서 잠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안타까운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말했다.
“경기증권에서 연락이 왔더군. 다른 걸 해보고 싶다고 말이야.”
“어제 오후 저희 회사에 왔다 갔는데 빠르게 결정이 내려졌나 봅니다. 이렇게 바로 말씀을 드린 걸 보면 어쩌면 만약의 사태를 대비했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김교철은 깊은 한숨을 내쉰 뒤 한진영을 돌아보고 말했다.
“뭐 아니다 싶으면 빠르게 결정 내리고 움직이는 게 낫기는 해. 그런데…… 내가 듣기로는 자네가 주의를 먼저 줬다고?”
김교철의 말에 한진영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네. 너무 맹신하지는 말라는 말이라면 제가 사고가 터지기 열흘 전쯤에 박 사장에게 이야기하기는 했습니다.”
“당황한 우리 직원들에게는 빨리 연락하라는 말도 이야기했고?”
“처음 보는 광경에 당황한 모습을 보여서 제가 빨리 연락을 넣으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래. 이런 것만 봐도 자네는 굉장히 세심한 사람이야.”
김교철은 한진영을 가만히 바라봤다.
한진영은 그런 김교철의 시선에도 물러나는 모습 없이 똑바로 마주하고 앉아 김교철의 시선을 맞았다.
그렇게 한동안 시선을 보내던 김교철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와 왜 말리지 않았느냐고 자네를 탓한다면 내가 모자라 보이겠지?”
“아닙니다. 어제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는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을 겁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으니까요.”
“뭐…… 그렇다고는 하는데…… 그런데 그런 상황까지 예상하지 못해서야 승부사라고 할 수 있겠나? 자네는 예상했지? 자네 같은 승부사가 놓쳤을 리가 없어.”
“아닙니다. 제가 어찌 예상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저 위험을 회피해야 한다는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지요.”
“아니야. 자네는 예상했어.”
한진영을 가만히 보던 김교철은 아쉬운 듯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왜 이렇게 돈에 조급해하는지 이유를 말 안 해도 알 거야. 8,000억이라는 돈은 나도 버거운 금액이긴 해. 안혁규 이 등신 같은 놈이 자네 말을 듣지 않고 돈을 다 날려버리는 바람에 그 돈을 메우느라 동우도 휘청일 정도니까. 그런데도 나는 안혁규가 했던 등신 같은 짓을 똑같이 따라 하려 하고 있네.”
한진영은 김교철을 향해 놀라는 마음을 숨기기 위해 노력했다.
‘이 사람은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알고 있는 건가?’
정확히는 모를 게 분명했다.
알았다면 박지훈의 따귀를 올려붙여서라도 그들이 하려는 짓을 말릴 게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다고 하더라도 본능적으로 김교철은 느끼고 있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렇지 않다면 한진영을 앞에다 두고 자기가 조급해졌다고 말할 이유가 없었다.
경기증권이 하려는 일은 위험하고 안 좋은 일이라는 것을 김교철은 이야기의 자세한 내용을 듣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김교철은 속으로 놀라고 있는 한진영을 향해 지금의 심정을 이야기했다.
“자신만만해하던 클론매매가 깨지고 말았어. 그로 인해 입은 손해는…… 뭐 아직은 별것 아니니 상관없지만 분명 피부로 느낄만한 손해로까지 번지겠지. 그렇게 시작부터 삐걱댄 채로 새롭게 하려는 일이 잘될까? 평정심을 잃은 상태에서 냉철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
“능력 있는 사람이니 잘할 겁니다.”
“능력? 누구를 말하는 건가? 자네가 영입하려는 척 쇼했던 그 친구를 이야기하는 건가?”
날카로운 눈으로 한진영을 바라보고 이야기한 김교철은 가만히 한진영의 눈을 들여다봤다.
한진영은 김교철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허공에서 시선을 마주했고 김교철이 낮은 웃음을 흘리면서 한진영을 향해 말했다.
“자네는 애초에 최종필을 영입할 의사가 없었어.”
“그런가요?”
“그래. 자네는 나와 비슷해. 어깨를 함께 나란히 할 사람을 원하지 않아. 그런데 자네가 부사장이라는 타이틀 자리에 자네보다 경력과 실적이 더 뛰어난 사람을 데리고 와 앉힌다? 데리고 온다면 회사가 흔들릴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흐흐. 그러기에는 최종필이 난 놈은 아니지. 그런 위험을 감수할 정도까지는 아니야.”
“그렇군요.”
한진영은 김교철의 말에 별다른 변명을 하지 않았다.
설득하려 하지도 않았고 자기의 생각을 이야기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이런 자리에서는 상대방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주는 것만이 최선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한진영이었다.
아무런 말 없이 그저 그렇다는 말만 건넨 후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김교철은 그런 한진영의 모습에 노려보던 것을 멈췄다.
하지만 멈췄다고 하여 시선까지 거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한진영을 바라본 채로 김교철은 등받이에 등을 기대앉아 한진영을 향해 이야기했다.
“자네가 그런 일을 왜 한 건지 궁금하네. 굳이 경기증권을 속여서까지 최종필을 경기증권에 떠넘긴다? 폭탄이라고 하기에는 그 경쟁이 치열한 월가에서 헤드매니저까지 한 사람인데 그럴 리는 없을 것 같고…… 이유가 뭘까?”
김교철은 턱을 손톱으로 긁었다.
아침에 면도하고 온 턱밑의 수염이 어느새 자라 손톱으로 긁을 정도가 되었다.
김교철은 솟아난 턱수염을 긁으며 한진영을 향해 이야기했다.
“자네의 생각이 너무 궁금해서 돈이 조급한 상황임에도 그냥 경기증권에 돈을 넣어 놓은 채 지켜볼 생각이네.”
“저에게 직접…….”
“아니.”
김교철은 손을 들어 말을 하려는 한진영을 막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인데 자네 입으로 직접 이야기할 생각일랑 추호도 하지 말게나. 내가 직접 이 두 눈으로 확인할 테니 말이야.”
김교철은 한진영을 막은 손으로 자기 눈을 가리키고는 크게 웃었다.
“하하하.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자네를 부른 거네. 주변에 등신 같은 놈들만 우글우글했는데 오랜만에 팔딱팔딱 뛰어다니는 싱싱한 놈을 봐서 내가 즐거운 마음에 자네를 불러 이야기 한 것이니 자네는 그렇게 알고만 있게.”
김교철의 말에 한진영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과분한 찬사입니다.”
“과분하지 않아. 자네는 그 정도 이야기를 들어도 될 사람이야. 오랜만에 제대로 된 친구를 만나 아주 즐거워.”
김교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할 말을 다 마쳤다는 무언의 이야기를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었다.
한진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김교철을 향해 구십도로 허리를 꺾어 인사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뒷걸음질로 김교철의 사무실을 나왔다.
한진영이 김교철의 사무실에서 나오자 조지훈이 빠르게 한진영에게 따라붙었다.
“대표님. 최근 3년 중에 김교철 대표변호사님 사무실에 방문한 사람은 대표님이 처음이라고 합니다.”
“그건 또 어디서 들었어?”
“박 비서님께 들었습니다. 정말 이례적인 일이라면서 동우에서도 깜짝 놀랐다고 하던데요? 이 장관님께서 오셔도 사무실이 아닌 꼭대기 층에서 만났었다면서요.”
한진영은 살짝 상기된 표정의 조지훈을 슬쩍 바라보고 말했다.
“그게 그렇게 신날 일이야?”
“신나죠. 그만큼 대표님께서 중요한 분이라는 뜻이니까요.”
“그럴 것 없어. 나는 아주 소름 돋는 시간이었으니까.”
“소름이…… 돋으셨다고요?”
조지훈은 한진영의 반응에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다 이곳이 세이지가 아닌 동우라는 사실에 급히 다시 목소리를 낮추고 주변을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사람들은 한진영에게 관심이 없는 눈치였다.
조지훈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동우를 나올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와 밖에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라타고 나서야 조지훈은 한진영을 향해 입을 열었다.
“혹시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무슨 일? 있었지. 그러니 3년 동안 아무도 부르지 않은 사무실로 나를 부르지 않았겠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조지훈이 깜짝 놀란 얼굴로 운전석에서 몸까지 돌려 한진영을 바라봤다.
한진영은 그런 조지훈을 향해 턱짓하며 말했다.
“우선 가자. 여기서 빨리 벗어나고 싶으니까 나가서 이야기해.”
“네. 알겠습니다.”
조지훈이 급히 차를 몰아 동우 건물에서 벗어나자 한진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의심 많은 노인네가 나를 의심하기 시작했어.”
“의심한다고요? 설마 더미 데이터를 넣은 것을 알아챈 건가요?”
“아니. 그렇게 확실한 증거가 있다면 의심으로 끝이 나지 않았겠지. 물증은 없는데 심증만 있는 정도쯤일 거야.”
“그럼 어떻게 합니까? 의심이 깊어지면 분명 대표님께 해코지하려 할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아직은 아니야. 아직은 재미있게 놀고 싶은 마음이 더 큰 것 같아. 나를 불러 앉힌 자리에서도 그런 뉘앙스로 이야기했고…… 그런데 우리도 대비해야겠지? 늙은이가 언제 마음이 바뀔지 모르는 일이니까.”
한진영은 팔걸이에 손을 올리고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두드렸다.
“하여튼 짜증 나는 노인네야. 쉽게 가는 법이 없어.”
한진영은 기분이 나빴던지 인상을 쓰고 있었다.
조지훈은 그런 한진영을 보고 조심스럽게 궁금했던 이야기를 물었다.
“대표님. 왜 대표님께서는 동우의 김교철 대표변호사님과 사이좋게 지내려 하지 않으십니까?”
조지훈은 슬쩍 룸미러로 한진영을 바라보고 그동안 묻고 싶었던 것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동우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 안달하는데 대표님만은 오히려 싸우려 하시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아서요. 동우도 딱히 대표님을 적대시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오히려 대표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노력한다는 인상까지 보이는데 어째서 대표님께서는 동우를…… 아니, 동우를 비롯하여 관련된 사람들을 모두 싫어하시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요. 그들이 딱히 대표님께 잘못한 일은 없지 않습니까?”
한진영은 가만히 조지훈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조 비서 말대로 그들은 나와 잘 지내고 싶어 해. 나를 통해서 얻을 게 많으니까. 그런데 지금 보면 내가 먼저 그들을 절벽으로 밀어내려 하는 것처럼 보일 거야. 그렇지?”
“네. 솔직히 말씀드려서 그들이 대표님에게 보이는 호의를 이용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뒤통수를 치려 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대표님.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는 건가요?”
조지훈은 말하면서 한진영의 안색을 살폈다.
한진영이 혹시 기분 나빠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진영은 그런 조지훈의 말에도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그 말이 이해가 간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채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조지훈은 그런 한진영의 모습에 용기를 얻어 이야기했다.
“대표님. 이제라도 잘 지내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지금이라도 잘 지내겠다고 하면 더 많은 기회가 열리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상대는 집권당의 실세들입니다. 그것도 이제 막 당선이 된 집권 초기의 집권당입니다.”
조지훈이 답답한 마음을 담아 한진영에게 토로하듯이 이야기했다.
동우 측 인사들은 한진영과 잘해보겠다는 느낌이 확실히 전해지고 있건만 한진영은 오히려 상대방에게 날을 세우기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지훈은 그들과 잘 지내는 것이 더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지 않겠냐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한진영은 조지훈의 말을 가만히 다 들은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 비서. 혹시 개구리와 전갈 이야기 알아?”
“개구리와 전갈 이야기요? 아니요. 그게 무슨 이야기입니까?”
“강을 건너고 싶은 전갈이 개구리에게 찾아가 부탁을 해. 자기를 태우고 강을 건너게 해준다면 개구리에게 감사의 인사와 함께 선물을 주겠다고 말이야. 개구리는 싫다고 말하지. 전갈의 독침을 조심하라고 부모님과 친구들이 이야기해줬으니 할 수 없다고…….”
조지훈은 운전대를 잡은 채 한진영의 말을 가만히 들었다.
아무래도 개구리와 전갈이 한진영과 동우를 이야기하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