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6화 글자 하나를 더하면 가능해진다
1,650마저 깨져 내려가자 시장은 결국 두 손을 들어버리고 말았다.
그때까지도 한 가닥 희망을 품고 시장을 보고 있던 사람들의 눈에 더는 희망이라고는 찾을 수 없게 된 것이었다.
버티던 이들도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고 손을 털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이렇게 손을 털어버린 곳 중에는 경기증권도 포함되어 있었다.
조지훈은 비서실에서 취합한 자료들을 가지고 유추한 경기증권의 손해를 한진영 앞에서 이야기했다.
“대략 경기증권이 입은 피해는 2,000억 안팎인 것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대부분 동우에서 나온 자금이겠지?”
“네.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한진영은 창가에 놓인 분재를 자그마한 손수건으로 매만지며 이야기했다.
“동우 그 양반…… 화 많이 났겠어.”
“안 그래도 경기증권의 박지훈 사장이 동우에 뻔질나게 드나든다는 첩보가 있었었습니다.”
“문턱이 닳도록 달려가야지. 그렇게 큰소리를 치고 2,000억이나 날려버렸으니 말이야.”
한진영은 나뭇잎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가만히 분재를 내려다보고 말했다.
“그 부사장 쪽에서는 움직임이 있나?”
“최종필 부사장이 최근 두리은행과 끊임없이 접촉한다는 이야기가 있기는 했습니다.”
“두리은행?”
한진영이 관심을 보인 듯이 고개를 돌리자 조지훈이 들고 있던 서류를 살피고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한진영에게 했다.
“박지훈이 동우에 갈 때마다 최종필은 두리은행으로 향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벼운 식사와 반주 정도를 나눈 뒤 박지훈이 회사로 돌아올 때쯤 최종필도 같이 회사로 복귀했다고 합니다.”
“만난 사람은?”
“상품개발부 본부장인 배영일 본부장과 두리은행의 부행장인 손재효를 만났다고 합니다.”
“그 두 사람만 계속 만난 건가?”
“네. 그 두 사람만 만났습니다.”
한진영은 조지훈의 말에 가만히 미소 지었다.
“슬슬 시작하려고 하나 보구나.”
“시작이요? 뭘 시작하려고 한다는 말씀입니까?”
평소의 조지훈이라면 한진영의 혼잣말과 같은 말에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그저 한진영이 생각하는 또 다른 게 있지 않냐고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한진영의 다음 지시를 기다릴 뿐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경기증권을 가만히 지켜만 보라고 지시한 이유가 궁금했고, 특히 최종필을 계속 주시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진영이 공을 들이는 사람은 최종필이 유일했다.
김교철은 물론이고 최종필의 상사이자 경기증권의 오너인 박지훈조차도 이렇게까지 지켜보고 있지는 않았던 한진영이었다.
조지훈은 이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고 그 이유를 알아야지만 최종필을 감시하는 데 더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하여 한진영에게 이번만큼은 이유를 물었던 것이었다.
한진영은 그런 조지훈의 마음을 알고 있었던지 조지훈의 질문에도 싫어하는 기색 하나 없이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제 얼추 윤곽이 드러나는 것 같으니 너에게도 이야기해도 될 것 같아.”
“윤곽이요?”
한진영은 사무실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화면을 돌아보고 가만히 웃었다.
1,650을 깬 시점에서 세이지는 계획대로 물량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전략실에서 제공한 데이터를 기준으로 홍대민이 각 팀에 지시를 내려 물량을 담아낸 것이 벌써 1,000억을 넘어서고 있던 것이었다.
한진영은 착실히 진행되어 가는 계획을 살피고는 이야기했다.
“우리는 저렇게 물량을 담고 있는데 경기증권은 물량을 털어내고 있어. 이게 왜 그런 것 같아?”
“그냥 청개구리 심보는 아니겠지요?”
“청개구리 심보?”
한진영은 조지훈의 말에 크게 한번 웃어 보이고는 고개를 저었다.
“하하하하. 아무리 내가 밉고 싫어도 그러지는 않지. 2,000억이라는 돈은 원수도 친하게 지내게 할 만큼 큰돈이니까.”
한진영의 말에 조지훈은 자기가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한진영의 말대로 2,000억이 아니라 200억만 돼도 원수와 손을 잡을만했기 때문이다.
“그럼 왜 그런 건가요?”
“최종필이 어떤 사람인지 떠올려봐. 우리가 뉴욕까지 가서 만났던 최종필 말이야. 그가 뭘 제일 하고 싶어했지?”
조지훈은 한진영의 말에 가만히 최종필과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대답했다.
“CB말씀입니까?”
“그래 CB. 그는 그걸 하고 싶어 했어.”
“그게 경기증권이 물량을 털어내는 것과 상관이 있는 건가요?”
“당연히 상관이 있지.”
한진영은 조지훈의 질문에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생각해봐. 경기증권이 계속 물량을 들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아니. 그전에 경기증권의 발등에 불이 떨어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행동할까?”
한진영은 팔짱을 낀 채로 계속 이야기했다.
“우리는 지난 안혁규의 모습으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본 적이 있어. 안혁규가 그때 어떻게 행동했지?”
“무리를 했습니다.”
“그래. 바로 그거야.”
한진영은 손가락을 들어 제대로 이야기했다는 모습을 보였다.
조지훈은 한진영의 칭찬이 기분이 좋았던지 살며시 웃으며 한진영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자기가 맞춘 이야기 다음에 나올 말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조지훈을 가리켰던 손을 거두고 이야기했다.
“손해를 보면 사람은 누구나 무리를 하기 마련이야. 사실 안정된 상황에서 도전이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거든. 잘 나가고 있는 것을 바꾸고 싶지 않은 심리야 누구나 마찬가지니까. 그래서 오히려 위험에 처했을 때 도전을 하고는 해. 하나하나 손해를 메워가며 나아가기보다 일발 역전으로 한방에 상황을 뒤집어엎고 싶은 마음에서…… 편해지고 싶은 마음이야 본능에 가까운 것이니까.”
“그렇다면…… 경기증권이 지금 위험에 빠진 상황을 일발 역전을 하기 위해…….”
“최종필이 하려고 하는 일에 손을 대려 할 거야. 최종필은 그걸 알고 손절을 하게 만든 거고…….”
“그럼 경기증권이 지금 손절을 하는 이유가…….”
“그것도 최종필이 만든 거야.”
2,000억짜리 손절이었다.
지금 자리부터 세이지가 매수한다고 생각했을 때 눈에 보이지 않는 손해는 더 커질 수도 있었다.
조지훈은 그런 일을 벌인 최종필의 선택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리 새로 들어간 회사에 애사심이 없기로서니 이런 선택을 만들어냈다는 것이 이상하기만 한 것이었다.
하지만 한진영에게는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과거 최종필이 보여준 행보를 한진영은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의 조지훈을 보고 웃었다.
“이상해할 것 없어. 최종필은 자기가 하려는 일이 2,000억보다 훨씬 더 큰 이익이 된다고 믿어서 그런 거니까. 과감하게 2,000억을 날려버리고 자기 주도하에 일하려고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 거야. 그리고 2,000억의 손해가 있어야 경기증권도 자기 말을 더 잘 들을 테고…….”
“그걸 경기증권의 박지훈 사장도 동의했다는 말씀이신가요?”
“동의했으니 뻔질나게 동우에 드나드는 거 아니겠어?”
“그럼…… 동우에 드나드는 게…….”
“손해를 보게 하여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고 가는 거겠지만 본심은 다른 데 있어. 새로운 일에 함께하자고 설득하기 위해 그렇게 뻔질나게 드나드는 거지. 새로 시작하는 일은 동우의 힘이 많이 필요하거든.”
조지훈은 조금 전 한진영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고 궁금한 것을 물었다.
“최종필이 하고 싶은 것은 CB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그게 2,000억을 날려버릴 만큼 큰 이득을 보는 일인가요? 제가 알고 있는 CB(전환사채)로 2,000억을 벌기란 쉬운 일이 아닌데 말입니다.”
“쉽지 않지. 하지만 CB에 한 글자만 더해지면 2,000억이 아니라 2조가 넘게 돈을 벌 수도 있어. 그걸 알고 박지훈이 과감히 손절하는 것이고 함께 하자고 동우를 꼬시는 것이지.”
“2,000억이 2조가 된다고요? 한 글자만 더하면요?”
“그래.”
“그게 무엇입니까?”
한진영은 지난날을 떠올리고 입가에 가득 미소를 머금은 채 조지훈에게 이야기했다.
“사기. 사기를 더 하면 2조가 아니라 5조, 6조도 가능해.”
조지훈은 한진영의 말에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
한진영의 말을 듣고 떠올렸던 수많은 단어 중에서 한진영이 말한 단어는 그의 머릿속에 자리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
모두가 힘이 빠져 더는 견딜 수 없다고 여겼을 때 반등했다.
1,640대까지 깨졌던 지수가 단숨에 1,650을 회복한 것에 이어 1,680까지 약 2%의 반등을 한 것이었다.
당일 1,635까지 하락했던 것을 감안한다면 저점 대비 당일 50포인트 약 3%가 넘는 상승을 보여주며 오랜만에 기운찬 모습을 보여주었다.
상승의 이유는 특별한 것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과매도’ 국면이라는 이야기 한마디에 상승세가 나온 것이었다.
40거래일 중 35거래일 하락을 보여주었던 시장이었다.
2,100부터 1% 이상의 반등 한번 없이 미끄럼틀처럼 내려올 정도로 시장은 하락세 국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시장이 2%가 넘는 상승을 보이자 시장은 한숨 돌릴 수 있게 됐다.
그리고 겨우 이제 하락세가 끝이 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에 사람들은 위를 향해 고개를 들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런 기쁨도 하루를 넘기지 못했다.
바로 다음 날 다시 1,640을 깨는 하락이 나오며 상승에 대한 기대를 꺾어 버린 것이었다.
사람들은 하루 만에 다시 하락을 이야기했다.
1,600대 언더를 이야기하며 1,500대를 준비해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분위기는 또다시 하루 만에 바뀌었다.
다시 한번 2%가 넘는 상승이 나오며 재차 1,650대를 회복한 것이었다.
그리고 또다시 나온 하락.
사람들은 음봉과 양봉이 하루에 하나씩 번갈아 나오는 상황에 갈피를 잡지 못했다.
갭도 없이 장대음봉과 장대양봉을 세우는 것이 위도 아래도 자신하지 못하는 자리에 왔음을 사람들은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이었다.
멀미가 나올 것 같은 시장의 움직임에 참여자들은 모두 손을 놓은 채 빨리 방향이 나오기만을 바랐다.
그래야 뭐가 됐건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모두가 손을 놓고 있을 때 세이지만은 바쁘게 움직였다.
“어떻게 됐어?”
“목표로 했던 물량의 80%까지 채워 넣었습니다. 나머지도 내일이면 모두 완료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최수찬은 밑에서 속속 올라오는 보고를 확인하고 홍대민에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들고 있던 태블릿을 늘어뜨린 채 말했다.
“정말 하늘이 도왔습니다. 저는 과매도 국면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며 시장이 돌아나갈까 봐 굉장히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지수가 왕복하며 시간과 물량을 내놓는 바람에 우리가 목표로 했던 것을 이룰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하늘이 도왔다고 생각해?”
“네. 하늘이 도운 것 아닌가요?”
최수찬은 이런 미신적인 이야기를 홍대민이 싫어하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류의 이야기보다 자기의 능력이 더 뛰어나다는 사람들이 간혹 이 바닥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홍대민은 미신이 싫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저 미신의 대상이 최수찬과는 달라서 그런 반응을 보였던 것이었다.
홍대민은 최수찬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하늘이 도운 게 아니라 대표님의 철저한 계산 아래 들어간 자리야. 정말로 하늘이 만들어낸 것이라면 그것조차도 대표님이 계산 아래 있었다는 뜻이지. 대표님께서 이 모든 것을 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계셨던 거야.”
홍대민의 말에 최수찬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의 말에서 틀린 부분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1,630선까지 빠져 내려갔던 지수가 큰 폭의 반등을 보였을 때 세이지는 계좌의 1/3도 물량을 채우지 못한 상태였다.
홍대민을 비롯한 운용팀의 모든 식구는 발을 동동 구르며 올라가는 지수를 잡고 싶은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나 한진영은 그런 그들을 단순한 말로 진정시켰다.
“지수는 절대 우리를 두고 먼저 가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차분히 내려올 때를 기다리면 됩니다. 내일이라도 당장 내려올 테니 말입니다.”
한진영의 말에 운용팀 직원들은 안타까운 마음을 달랬다.
한진영이 괜찮다고 말하니 더는 안타까운 마음을 표시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어쨌든 1/3의 물량을 잡은 만큼 그것으로 아쉬움을 달랠 수는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쉬움을 달래는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지수는 한진영의 말대로 다시 내려왔고 세이지 직원들은 바쁘게 물량을 다시 담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번의 위아래로 반복되는 상황 속에 시장참여자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 세이지는 물량을 가득 담을 수 있게 됐다.
목표대로 1,650을 기준으로 하여 물량을 잔뜩 담게 된 것이었다.
홍대민은 다시 한번 한진영의 뷰에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대표님 말씀대로 지수는 한동안 1,650을 기준으로 서 있었고 그 덕분에 우리는 물량을 잔뜩 담을 수 있게 됐어. 이대로 지수가 오르면 우리는 또 한 번 큰 폭의 수익을 올릴 수 있게 된 거지.”
홍대민은 말을 마치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왜 대표님께서는 당분간 매매가 아니라 기업투자에 전념하신다고 하신 걸까? 이렇게 정확한 뷰를 가지고 계시는 데 말이야.”
홍대민의 말에 최수찬은 조심스럽게 자기 생각을 이야기했다.
“오히려 저는 그게 맞는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어? 그게 맞는다니?”
“지수를 정확하게 보신다는 뜻은 시장을 정확하게 보신다는 이야기잖습니까?”
“그렇지. 시장에 대한 통찰력이 남다르시다는 뜻이지.”
홍대민이 최수찬의 말에 동의하는 모습으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최수찬은 그런 홍대민을 가만히 바라본 뒤 계속 이야기했다.
“시장을 잘 보신다는 말씀은 앞으로 경제 상황 국내는 물론이고 세계 시장의 움직임을 잘 보신다는 뜻으로 생각해도 되지 않습니까?”
“그것도 맞아.”
“그러니 기업투자를 얼마나 잘하시겠습니까? 앞으로 시장에서 어떤 산업이 유망할지 그리고 유망한 산업에 어느 회사가 1등 기업인지 혹은 1등 기업이 될지 대표님 눈에는 모든 게 다 보이시지 않겠습니까? 테라처럼 말입니다.”
“그래. 테라처럼…….”
전기차 시장은 장난감 그 이상의 평가를 받지 못하던 곳이었다.
그런 곳에 직접 투자한 것도 모자라 관련 산업에 대대적인 투자를 감행한 한진영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결과 엄청난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테라의 지분만으로 벌써 세이지와 한진영은 3조에 가까운 수익을 올리고 있었던 것이었다.